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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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라는 소설의 제목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연작시 「천국과 지옥의 결혼(The Marriage of Heaven and hell)」(1790~1793) 중에서 「지옥의 격언」(1793)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한 언론 인터뷰에서 토카르추크는 이 제목을 놓고, 편집자와 논쟁을 벌인 일화를 밝힌 적이 있다. 길고, 발음하기 힘든 데다 기괴한 제목이라 판매에 지장을 초래할 게 뻔하다며 출판사 측에서 완강히 반대한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제목을 고수한 이유에 대해 토카르추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너무 아름다운 시구(詩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한 줄의 문장이 바로 작품의 모토(motto)이자 메시지이고, 상징이자 메타포이기 때문이다. 「옮긴이의 말」 379~380쪽

편집자의 우려와는 달리, 오히려 이 기괴한 제목이 나를 끌어 당겼다. 도대체 어떤 내용의 소설이면 이렇게 고딕한 제목을 붙일 수 있는지 궁금했다.

두셰이코는 체코의 통신 주파수가 더 잘 잡히는 폴란드의 어느 산간 마을에서, 혹독한 겨울을 피해 마을을 떠난 사람들을 대신해 집을 관리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오직 이웃인 '괴짜'와 다른 집들보다 조금 높은 곳의 오두막에 사는 '왕발'과 두셰이코만이 겨울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곳에서 지냈다. 그런데 한밤중에 '괴짜'가 찾아와서 '왕발'이 죽었다고 한다. 체코의 통신 주파수가 잡히는 바람에 경찰에 빨리 신고할 수 없었던 그들은, 처참하게 죽은 '왕발'의 몸을 정돈하면서 '왕발'이 자신이 사냥한 사슴의 고기를 먹다가 뼈가 목에 걸려 죽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이 이 오두막에 도착했을 때도 여기저기 사슴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그런데 늦게 도착한 경찰은 눈 때문에 사라진 사슴의 발자국을 보지 못했다.)

"그자는 자기가 밀렵해서 잡아먹은 사슴의 뼈에 질식당한 거예요. 무덤 너머의 복수인 거죠." 63쪽 두셰이코는 '괴짜'의 아들이자 '검정 코트'를 입은 지방 검사에게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검정 코트'는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를 이상한 소리나 늘어놓는 노인으로 여길 뿐이다. 그녀가 '동물의 복수'를 주장하면서 점성학까지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점성학이라니. 심지어 그녀는 점성학을 통해 자신이 죽는 날짜까지 알고 있다고 한다.) 그녀는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를 읊조리며 불길한 미래를 예감한다.

"나이 든 여성분들은 왜 그렇게 동물에 대해 신경을 쓰는지 말이죠. 혹시 자식들이 이미 다 장성했기 때문에 보살피고 돌볼 대상이 없기 때문은 아닌가요? 본능적으로 자꾸만 대체할 대상을 찾는 거죠." 159쪽

겨울을 피해 떠났던 사람들이 마을로 돌아온 이후에도 죽음은 계속되었다. 사냥꾼이 죽었고, 그들의 사냥을 합법적으로 눈감아 준 경찰서장이 죽었다. 그들의 죽음 근처에서는 늘 동물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그녀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동물이 인간에게 복수를 하는 거야. 이건 그렇게 괴상한 이야기가 아니야. 동물들은 강하고 지혜로워."(113쪽)

평소 그녀는 사람들이 동물 사냥을 하는 것에 대해 행정기관에 민원을 넣거나 그런 행위들을 고발하곤 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고, 오히려 합법적으로 동물 사냥을 한다며 그녀를 미친 늙은이 취급했다. 게다가 그즈음 그녀가 딸처럼 키우던 개 두 마리가 사라졌다. 그녀는 사냥꾼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거라고 생각했다.

소설은 살인 사건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면서 긴장감 있게 전개된다. 마치 범죄 스릴러처럼. 하지만 이 소설의 핵심은 범인을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따로 있다. 바로 작가가 주구장창 강조하고 있는 그녀의 신념과 가치관에 대한 것이다. 작가는 동물 학대, 사냥, 동물을 먹는 것 등에 한결같이 목소리를 내왔고, 두셰이코는 작가의 신념과 가치관을 그대로 반영하는 인물이다.

두셰이코는 자신이 사냥한 사슴을 먹다가 죽은 '왕발'을 보면서 생각했다. '왕발'의 집 밖에서 마주친 사슴들이 그녀가 "사슴의 이름으로 계속해서 심판해 주기를 원했다"(348쪽)고. 그들에게는 다른 발언권이 없으므로, 고기를 먹지 않는 자신이 그들로부터 선택 받았으며 그들의 복수를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고 말이다. 그녀는 그렇게 믿었다. "내가 당신들에게 이 모든 게 동물의 복수라고 계속 주장했던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게 바로 진실이었다. 난 그들의 도구였다." (357쪽) 그렇게 두셰이코의 살인은 시작되었다.

동물들이 아니라 동물들의 계시를 받은 두셰이코가 직접 살인을 했다는 사실, 게다가 죄를 받는 대신 유일한 친구 '왕발'과 '기쁜 소식'의 도움으로 두셰이코가 무사히 체코에 도착하는 결말은 동물을 먹는 것조차 꺼려하는 작가의 행보와 다소 상충하는 장면이라 불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소설 곳곳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사실적인 묘사와 문체들은, 스웨덴 한림원이 왜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그녀를 선택했는지 보여준다.

왕발의 죽음이 어쩌면 좋은 일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를 혼란스러운 삶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었으니까. 그리고 다른 생명체들을 그의 해코지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으니까. 그렇다, 갑자기 나는 죽음이 살균제나 진공청소기와 마찬가지로 정의롭고 유익한 것임을 깨달았다. 고백하건대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을 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18쪽

"동물을 보면 그 나라가 어떤지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동물을 대하는 태도 말입니다. 사람들이 동물에게 잔인하게 군다면 민주주의나 그 어떤 시스템도 소용이 없습니다." 148쪽

"사실 인간은 동물이 그들의 고유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할 책무를 갖고 있습니다. 가축들은 그들이 우리에게서 받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주기 때문에 그들에게 애정을 돌려주는 건 인간의 의무입니다. (…) 인간이 동물을 지옥으로 내모는 순간, 온 세상이 지옥으로 변합니다. 왜 다들 그 사실을 모르는 걸까요? 어째서 인간의 이성은 사소하고 이기적인 쾌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요?" 156쪽

세상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절실히 깨닫는다. 인간의 편안함이나 쾌락을 위해서 창조된 건 더더욱 아니다. 168쪽

나는 모든 억울한 죽음은 만천하에 공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곤충의 죽음일지라도 말이다. 222쪽

"모든 면에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었어요. 더 다정하고 현명하고 쾌활했죠 ……. 사람들은 동물들에게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생명체가 아닌 물건인 양 취급하죠." 282쪽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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