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모습
미셸 투르니에 지음, 에두아르 부바 사진,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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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쪽이 진실이다!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칩니다. 거울을 보며 옷 매무새를 다듬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앞모습을 훨씬 더 신경 씁니다. 물론 누군가를 만나고, 이야기 할 때 상대의 앞모습을 보기 때문이겠죠. 늘 신경쓰며 치장하고 다듬는 앞모습에 비해, 그런 의미에서 뒷모습은 무방비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뒷모습을 제대로 볼 수도 없습니다. 물론 거울 앞에서 몸을 비틀면 뒷모습을 살짝 볼 수도 있습니다. 거울 2개를 활용하면 뒷머리가 어떤지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뒷모습은 앞모습에 비해 보다 솔직하고, 어쩌면 좀 더 날 것의 비주얼인지도 모릅니다.

  

   여기 평생 전세계를 돌며 사람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작가가 한 명 있습니다. 프랑스 사진작가 에두아르 부바는 사람들의 '뒷모습'에 주목하며 '뒷모습'만 찍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어떤 표정인지는 앞모습을 봐야 알 수 있습니다. '뒷모습'만 보고서는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에두아르 부바의 '뒷모습' 사진에 글을 썼습니다. 책을 읽을 때 도움이 되라고 적혀있는 일종의 '주석'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 사람들의 '뒷모습'만 보고서는 도저히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미셸 투르니에가 사진에 주석을 단 것입니다. 그렇다고 미셸 투르니에의 글이 모두 정확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어쨌든 그도 그 사람의 '뒷모습'만 보고 추측을 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우리도 에두아르 부바의 사진을 보면서 우리만의 '주석'을 달 수도 있습니다.


   이 책에는 모두 쉰석 장의 '뒷모습' 사진들이 등장합니다. 책 표지에는 글을 쓴 미셸 투르니에의 이름이 먼저 등장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뒷모습'에 주목한 쉰석 장의 사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사람은 자신의 얼굴로 표정을 짓고 손짓을 하고 몸짓과 발걸음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모든 것이 다 정면에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그 이면은? 뒤쪽은? 등 뒤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너그럽고 솔직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 내게 왔다가 돌아서서 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것이 겉모습에 불과했었음을 얼마나 여러 번 깨달았던가. 돌아선 그의 등이 그의 인색함, 이중성, 비열함을 역력히 말해주고 있었으니! (『뒷모습』 중)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누군가에게 내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나 스스로도 잘 모르는 내 뒷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싫었습니다. 누군가를 만나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찾아온다면 동시에 등을 돌리는 방법을 택하거나 그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곤 합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오래전부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니, 그래서 『뒷모습』이 더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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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 - 장석주의 서재
장석주 지음 / 현암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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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의 최종 목적은 스스로 사유하는 것!

   '수졸재'에는 해마다 장서가 1천 권씩 늘어난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한 창백한 독서광이 사계절 내내 책을 읽고 있습니다. 시인이지만 다독가로 더 유명한 장석주는 사계절 동안 책을 읽으면서 써내려간 문장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냅니다.


   어떤 책을 읽었을 경우, 우리는 그 책을 읽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 존재의 생물학적, 인지적 형질이 미묘하게 바뀌어버려 우리는 더 이상 예전의 우리가 아니다. 책과 그것을 읽는 사람은 역동적 상호작용을 한다. (p.257~258)


   그는 왜 이렇게 열심히 책을 읽는 것일까요? 그는 "책 읽기가 주는 청정한 즐거움 때문"(p.113)이라고 말합니다. "책을 읽으면 앎의 즐거움과 사유의 즐거움으로 가슴이 터질 듯 벅차오른다"(p.113)고 합니다. 그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과 단순히 책만 읽는 사람들을 향해 당부의 말까지 전합니다.


   독서인은 단순히 책을 읽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책 읽기의 최종 목적은 지식의 습득이 아니다. 스스로 사유를 하는 것! 책 읽기를 통해 지식의 전체상에 접근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식을 '통섭'할 수 있는 사유 능력의 총량을 키워야 한다. 읽는 행위의 능동성은 뇌 회로를 새롭게 여는 수단이 되고 궁극적으로 사유의 복잡성을 견뎌낼 수 있게 한다.

   책 속의 지식과 지식들이 충돌하며 일으키는 사유의 불꽃들과 함께 타오르며, 즉 책 읽기의 열락(悅樂)을 사유의 향연으로 바꿀 때, 그리하여 독서의 총량을 지렛대 삼아 지식 생산자로 나설 때 비로소 진정한 독서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 진정한 독서인만이 자기를 넘어서서 초인류가 될 수 있다. (p.113~114)


   『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는 시인 장석주가 사계절 동안 읽으면서 사유한 것들의 결정체 입니다. 그는 130여 권에 달하는 책들을 읽고, 300권에 이르는 책들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는 날마다 책만 읽는게 아닙니다. "날마다 밥을 먹듯"(p.332) 쓰기도 합니다. 혹자들에게는 한 권의 책을 읽고 한 편의 서평을 쓰는 것이 매우 힘든 작업이기도 합니다. 그가 책을 읽고 이토록 깊이있는 사유를 글로 보여줄 수 있는 것 또한 날마다 책 읽는 것과 함께 밥 먹듯 쉬지 않고, 미친 듯 몰입해서 글을 쓰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는 정말 다양한 책들이 등장합니다. 작가는 책을 읽을 때 절대 편식하지 않습니다. 문학, 철학, 미술, 경제, 여행 등은 물론이고 야구나 축구에 대한 책들도 읽습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 입니다. 작가가 책 읽기의 최종 목적으로 꼽은, 스스로 사유하기에 가장 적합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장석주와 발터 벤야민은 닮은 부분이 많습니다. 다양한 스펙트럼은 물론이고 방대한 독서력에, 사유를 중시하는 글쓰기까지 닮아 있습니다.

   작가는 자신이 몇 번이나 읽은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를 이렇게 말합니다.


   표제와 씌어진 단상 사이의 접합점은 모호하고 아득하다. 그 모호함과 아득함은 벤야민이 제 글에서 자주 구사하는 시적 상징성과 비의성에서 비롯된다. 표제와 씌어진 단상 사이의 텅 빈 곳을 물론 벤야민 특유의 사유의 비약이 가로지른다. 우리는 그 비약 앞에서 얼어붙는 대신에 그것을 상상과 추론의 질료로 삼을 수 있다. 그래야만 이 책을 '사유의 유격적을 위한 현대의 교본'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p.16~17)


   책 읽기의 방향성을 잃어버린 분들, 혹은 진정한 독서가의 면면을 들여다보고 싶은 분들께 『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를 추천합니다. 이 책을 읽고나면 한동안은 위축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내 분발하게 될 것입니다. 일반인들은 사계절 내내 읽어도 넘치는 독서 리스트를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책 속의 책 소개 http://heeya1980s.blog.me/220275601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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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옷의 세계 - 조금 다른 시선, 조금 다른 생활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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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시옷들을 시인의 상상력으로 시어로 직조해내다!

   글자에도 취향 같은게 있을 수 있다면, 나는 '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ㅇ'이나 'ㅎ'처럼 둥근 면이 없는 'ㅅ'은 시릴 정도로 날카롭고 차가워 보입니다. 게다가 두 개의 선이 서로 맞대고 있는 모습이 상당히 불안해 보입니다. 쓰는 사람의 필체에 따라 정대칭을 이루기도 하고, 한 선이 더 꼿꼿하게 서면 나머지 한 선은 훨씬 더 불안정하게 기대는 꼴이 되기도 합니다. 서로에게 등을 기대고 있는 사람의 형상(人)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무튼 마음에 들지 않는 'ㅅ' 입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이름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닉네임에 들어가 있는 'ㅅ'을 치환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애쓴 적도 있습니다.


   시인 장석주가 『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에서 "시와 산문을 두루 잘 쓰는 시인"(p.377)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김소연은 산문집 『시옷의 세계』를 통해 'ㅅ'으로 시작하는 사소한 낱맡들을 시인 특유의 상상력과 감정들을 담아 또 하나의 '시어'로 직조해 냅니다. 「사라짐」, 「사소한 신비」, 「산책」, 「상상력」, 「새하얀 사람」, 「생일」, 「세 번째 상하이」, 「세월의 선의들」처럼 독자들에게는 사소하고 무의미한 낱맡들이 시인의 감성을 덧입고 적당한 "밀도와 온도와 습도"(p.214)를 머금은 시어들로 탄생합니다.


   밀도와 온도와 습도. 책을 읽을 때면 으레 이 세 가지를 기준으로 문장을 측정하는 버릇이 있었다. 밀도 높은 문장을 가장 좋아했고, 습도가 낮은 건조한 문장을 신뢰했고, 온도가 지나치게 높거나 지나치게 낮은 문장에서 풍기는 과잉을 부러워했다. 하고 싶은 말이 차고 넘칠 때, 그것을 집약하려는 집중력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문장의 높은 밀도는 글쓴이의 경지를 실감할 수 있어 좋았다.

   따뜻한 문장을 가장 꺼려했다. 따뜻한 문장은 삶을 달관한 듯한 깨달음과 위로로 포장되어 있기가 십상이다. 위선에 가깝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삶과 손쉽게 화해해버렸다는 의미에서 패배자의 모습과 비슷한 뒷맛이 남는다. (p.214)


   또한, 김소연은 『시옷의 세계』를 통해 「시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소회를 풀어놓기도 합니다.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시인은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자신의 재주에 더 의지해서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경험과 취재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내는 소설가들과는 달리 시인이 시어를 선택하고 그것을 풀어내는 것은 좀 더 직관적이고 천부적인 영역의 일이 아닐까요? 마찬가지로 소설가는 타고난 재능이 부족하더라도 노력한다면 될 수는 있지만, 시인은 그렇게 되기에 어려운게 아닐까요?

   하지만 『시옷의 세계』는 시인도 타고나는 것이 아닌 노력의 결과로 이뤄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김소연은 문장 하나를 써내기 위해 단어를 골라내는 일부터 신중하게 고민합니다.


   단어를 고르는 일에 능력이 있다면 나는 하루에 시를 열 편쯤은 쓸 수 있을 것만 같다. 문장은 도착해 있는데 내가 아는 단어들은 낡아, 나는 늘 새로운 단어에 갈급하다. 새롭되 전혀 새롭다는 느낌은 없이, 낡고 익숙한 느낌은 결코 아닌 채로, 문장 속에 슬그머니 스밀 수 있는 단어 하나를 찾는 데에 매일매일을 다 써버린다. 온 동네를 거닐고 커다란 사전을 꺼내고 인터넷을 뒤지고 낯선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그 밖의 일들엔 아무 관심도 없다. 내게 단어를 선물해준 것이 기뻐 꽃씨를 심었고, 값진 단어 하나를 주워듣기 위해서 친구를 만났다. (p.252)


   시인을 두고 타고나야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는 나같은 사람이 있는 것처럼, 시인을 엉뚱한 몽상가나 언어의 연금술사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를 포함해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김소연은 말합니다. 시인의 상상력이란, 정확하고 과학적인 증표와 징표를 통해 징후를 밝혀내는 논리적 과정을 거치는 것이므로 '풍부하다'가 아닌 '정확하다'는 표현이 더 옳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김소연이 말한 '과학적인 증표와 징표'는 사소한 것도 지나치지 않는 '관찰력'의 다른 말이 아닐까요?


   시인의 상상력이란, 정확하고 과학적인 증표와 징표를 통해 징후를 밝혀내는 논리적 과정이다. 그러니까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표현은 틀린 표현이다. 상상력이 정확하다라는 표현이 오히려 더 옳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에 숨겨진 공간들, 그 경계의 영역들, 그 이상한 미지의 세계에 대해 느끼는 우리의 모호함을 시인은 상상력의 힘으로 정확하게 호명해낸다. (p.45~46) 


   우연찮게도 최근에 시인들이 쓴 산문집들을 연이어 읽었습니다. 자기 이야기에만 빠져있어 공감은 커녕 흥미를 잃게 만드는 대부분의 산문집들과는 달리, 그들의 문장 속에서는 그저 술술 읽어 내려갈 수만은 없는 밀도감이 느껴집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시인 특유의 상상력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무심코 지나친 사소한 것들을 관찰하고 정확하게 문장으로 표현해 주니 어찌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비록 우리가 놓치긴 했지만, 그것들 또한 우리 주변의 이야기들이니까요.


   시인이 가난한 것은 한 사회 안에 시인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시인이 너무 많은 것은 세상이 너무 병들었고 제도가 너무 지긋지긋하게 갑갑하기 때문이다. 병든 세상과 낡고 딱딱한 제도에 대한 불만은 창작 행위로 이어질 때에 창조적인 에너지가 된다. 가장 저비용으로, 게다가 아무 기술을 배우지 않고 모국어만 구사할 줄 알면 가능한 높은 접근성으로 인해, 게다가 혼자서 가능한 작당이라는 창작 방식으로 인해, 세상엔 시인이 이토록 많다. 그러나 시인이 가난한 것은 가난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잘 살고자 하는 욕망이지만, 다른 방식의 잘 살고자 하는 욕망이라서 시인은 가난할 수밖에 없다. 시의 욕망이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시인일수록 좋은 시를 쓸 확률이 높다. 윤택한 아파트에서 쓰인 시, 그림 같은 전원주택에서 쓰인 시에는 생명이 깃들어 있지 않다. 옥탑방 아니면 반지하, 도시의 변두리, 시골의 허름하고 불편한, 좁고 누추한 공간에서 쓰인 시에 오히려 생명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시인은 명성을 쌓을수록, 나이가 들어 안정될수록 점점 나태해진다. (p.208~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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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마르셀 에메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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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시간은 결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합니다. 시간은 돈으로도 살 수 없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요?

   마르셀 에메의 소설집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에 수록되어 있는 「생존 시간 카드 : 쥘 플레그몽의 일기에서 발췌」라는 단편을 통해 그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정부는 식량과 생필품 부족에 대처하고 노동계급의 수익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p.39) 유용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의 생존 시간을 제한하는 법령을 발표합니다. 유용성이 떨어지는, 다시 말해 쓸모없는 사람들은 한 달을 다 사는 게 아니라 그 무용성의 정도에 따라 일수를 정해놓고 다달이 그 일수만큼만 살도록(p.40) 제한하는 법령으로 당장 다음달인 3월부터 시행한다고 합니다. 그 쓸모없는 사람들의 범주에는 노인, 퇴직자, 실업자, 창녀, 부녀자 등이 포함되는데 쥘 플레그몽은 예술가와 함께 작가까지 포함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경악합니다.


   쓸모없는 사람들, 곧 '부양을 받고 있을 뿐 그것의 실질적인 대가를 전혀 치르지 않는 소비자들'의 무리에 놀랍게도 예술가와 작가가 포함된다고 하지 않는가!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화가나 조각가나 음악가에게 그 조치가 적용되는 것은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작가에게마저 그것이 적용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것은 분명 자가당착과 양식에서 벗어난 판단 착오가 빚어낸 일이었다. 이는 우리 시대의 다시없는 수치로 남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작가의 유용성이란 증명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특히 나 같은 작가의 유용성은 아주 겸손하게 말해서 증명하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나에게는 한 달에 겨우 보름간의 생존만 허용되리라고 한다. (p.41~42)


   한 달에 겨우 15일만 살게 된 쥘 플레그몽은 예전보다 훨씬 더 열심히 삽니다. 일기 쓸 시간을 못 낼 정도로 삶은 분주해지고, 이토록 짧은 삶에서 무엇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밤잠도 잊을 지경입니다. 작가인 그는 글을 쓰는 것도 더 열심히 합니다. 예전에는 석 주나 걸려서 쓴 것을 최근에는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원고를 나흘만에 쓰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문체나 사유의 깊이가 가벼워진 것도 아닙니다.

   이런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난 그와는 달리, 일상이 엉망이 되어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젊은 부인과 사는 노인 로캉통은 걱정이 많습니다. 자신은 겨우 6일만 살 수 있는데 젊은 아내는 15일이나 살게 된 것입니다. 이제 겨우 24살인 젊은 아내를 혼자 두고 잠든다는게 영 개운치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생존 시간의 마지막 날 사람들을 초대해 함께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함께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면 못 볼 꼴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잠자리에 같이 누워 있었다. 자정 일 분 전에 로캉통은 아내의 손을 잡고 마지막으로 일러둘 말을 하고 있었다.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그녀는 남편의 손이 자기 손에서 녹아 없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 곁에 남아 있는 것이라곤 텅 빈 파자마와 긴 베개 위에 놓인 틀니뿐이었다. (p.48)


   간밤에 다시 삶으로 돌아왔을 때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난달 16일에 나는 서 있는 상태에서 상대적인 죽음(요즘에는 일시적인 죽음 대신에 이 말이 유행하고 있다)을 맞았고 융단 위에 뭉그러졌다. 그랬다가 다시 깨어나 보니 나는 완전히 벌거숭이가 되어 있었다. 화가 롱도는 상대적인 죽음을 맞을 남녀 열 사람을 자기 집에 불러모았는데, 그 집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졋다. 그 꼴이 정말 가관이었을 것이다. (p.57)


   법령이 시행되고 한달쯤 지난 4월에 한 남자가 쥘 플레그몽을 찾아옵니다. 자신은 아내와 세 자녀를 거느린 병약한 노동자인데 자기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자기의 생존 시간 배급표 중 일부를 팔고 싶다고 합니다. 몸이 허약해져서 힘든 노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사람이기는 해도 양심은 있었던 쥘 플레그몽은 그 남자에게 배급표를 사는 대신 약간의 돈을 주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자존심이 있었던 그 남자는 대가 없이는 돈을 안 받겠다며 배급표 한 장을 쥘에게 쥐어주고 떠납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부유한 사람들이 생존 제한에 많이 걸린 탓에 이런 식으로 생존 시간 배급표를 사고 파는 암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됩니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존 시간 배급표를 팔아 가족의 부족한 생계 수단을 보충하고, 부유한 사람들은 그 덕분에 더 많은 시간들을 살게 됩니다. 배급표를 많이 얻게 된 사람들은, 급기야 한 달 30일을 사는 것이 아닌 35일, 45일, 60일까지 살게 됩니다. 엄청난 부자 한 명은 6월 30일에서 7월 1일 사이에 무려 1967일을 더 살기도 합니다.


   완전 생존 자격 보유자들은 시간의 흐름에 이상이 생겼음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6월이 길어진 것에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드은 나처럼 불법적으로 이 연장된 시간을 살고 있는 자들뿐이다. (p.68)


   처음에는 이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정부 관계자들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증언이 기사로 보도되자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법령을 시행한지 4개월만인 7월에 생존 시간 카드를 폐지하는 법령을 다시 공포합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일방적인 정책들은 시대를 초월하고 늘 이런 모양입니다. 그 법령이 시행됐을 때 초래될 부작용들은 생각하지 못하고 우선 법령만 통과시키면 그만인거죠.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이 법령을 만든 사람들도 돈이 엄청나게 많아서 부유한 사람들처럼 생존 시간 배급표를 무한정 살 수 있었다면, 그래서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은 날들을 살 수 있었더라면 이렇게 쉽게 법령이 폐지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셀 에메의 소설보다 더 나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당신에게!

   아주 오래 전에 이 단편소설을 처음 읽었는데, 표제작인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보다 훨씬 강한 인상을 줬습니다. 시간은 돈으로 살 수도 없고,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시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요? 하루 24시간이라는 절대적인 시간을 돈만 있으면 상대적으로 더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KTX 비용도 비싸다고 느린 무궁화 기차를 타고 5시간 40분동안 꾸역꾸역 갈 수도 있고, 부유한 사람들은 전용 헬기를 타고 단숨에 날아갈 수도 있습니다. 절대적인 시간은 결코 늘어나지 않지만, 부유한 사람들은 시간을 절약해 줄 수 있는 도구들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유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가 김영하는 산문집 『보다』를 통해 스마트폰에 집착하는 현대인들은 마르셀 에메의 소설보다 더 나쁜 방향으로 시간을 부유한 자들에게 헌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는 온전히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당신은 오늘 어떤 하루를 보내셨나요?


   스티브 잡스는 마르셀 에메의 소설을 더 나쁜 방향으로 실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가난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자기 시간을 헌납하면서 돈까지 낸다. 비싼 스마트폰 값과 사용료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부자들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제공한 시간과 돈을 거둬들인다. 어떻게? 애플과 삼성 같은 글로벌 IT기업의 주식을 사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의 부자가 한국의 가난한 젊은이에게 직접 시간 쿠폰을 살 필요는 없다. 그들은 클릭 한 번으로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시간을 헐값으로 사들일 수 있다. (『보다』,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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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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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피로,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피로!

   우리는 피곤합니다. 오랜만에 맞이한 달콤한 연휴에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피곤한 걸까요? 재독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Müdigkeitsgesellschaft)』를 통해 우리가 이토록 피곤한 이유는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토록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Leistungsgesellschaft)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푸코가 주장한 규율사회에서의 주민은 "복종적 주체"이지만, 성과사회에서의 주민은 "성과주체"입니다. 게다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기도 합니다. 규율사회에서는 그저 해서는 안된다고 금지된 것을 잘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반면에 성과사회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경험하고 있듯이 이 사회는 무조건적인 "예스 위 캔"이 미덕으로 꼽히는 곳입니다.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믿는 사회, 즉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p.28)에서 더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발견하게 될 때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p.28)를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지면 우울증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p.28)합니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속 사람들은 항상 행복합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신체와 지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생기는 피로와 우울증에 시달릴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스 위 캔"이라는 구호 아래 더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발견하기 전까지 끊임없이 스스로를 착취하며 오버 페이스 합니다. 결국 성과사회에서의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는 이 착취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덜 피곤하게 하고, 덜 우울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일까요? 한병철은 발터 벤야민과 니체의 주장을 빌려 사색적 삶의 부활(p.48)을 그 해결책으로 제시합니다.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p.48) 합니다. 그는 또한, 니체가 말한 "중단하는 본능"이 없다면 행동은 안절부절못하는 과잉활동적 반응과 해소 작용으로 흩어져버릴 것(p.49)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우리는 이런 활동과잉의 흐름 속에서 분노하는 법까지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노와 짜증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확산되어 가고 있습니다. 분노는 현재 속에서 중단하며 잠시 멈춰 서서 현재에 대해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저 짜증만 낼 뿐입니다. 예를들면 이런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이토록 바쁜 이유가 불합리한 업무 프로세스 때문이라며 불만을 터트리면서도 그 프로세스를 바꿀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바쁘니까 당장 눈앞에 닥친 일을 처리하기에 급급할 뿐이죠.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듯이, 여기서 우리는 일손을 잠시 멈추고 이 불합리한 프로세스를 어떻게하면 바로잡을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분노는 현재에 대해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분노의 전제는 현재 속에서 중단하며 잠시 멈춰 선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분노는 짜증Ärger과 구별된다. 오늘의 사회를 특징짓는 전반적인 산만함은 강렬하고 정력적인 분노가 일어날 여지를 없애버렸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 사람들은 불가피한 일에 대해서도 짜증을 내곤 한다. 짜증과 분노의 관계는 공포와 불안의 관계와 유사하다. 공포가 특정한 대상에 관한 것이라면 불안은 존재 자체의 문제이다. 불안은 현존재 전체를 붙들고 흔들어댄다. 분노 역시 하나하나의 사태에 관한 것이 아니다. 분노는 전체를 부정한다. (p.50~51)

   "피로"는 자기 착취의 결과로 나타나는 산물인 동시에 스스로 잠시 멈출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독일 작가 한트케는 피로가 새로운 정신이 태어날 수 있도록 영감을 준다고 합니다. 피로하기 때문에 모든 감각이 지쳐 빠져 있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피로 속에서 특별한 시각이 깨어난다(p.69)고 합니다. 그래서 한트케는 이를 두고 "눈 밝은 피로"라고 말합니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Zwischenzeit이다.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막간의 시간은 일이 없는 시간, 놀이의 시간으로서 본질적으로 염려와 노동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데거의 시간과도 구별된다. 한트케는 이러한 막간의 시간을 평화의 시간으로 묘사한다. 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피로한 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준다. (p.72)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정리해 보면,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성과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긍정의 과잉 때문에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는데, 이럴 땐 현재적 삶을 잠시 중단하고 사색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저자의 결론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소설가 장정일은 한 칼럼을 통해 『피로사회』를 경멸하는 이유를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피로사회』가 다른 철학자들의 개념과 논의를 날렵하게 짜깁기한 것으로, "성과 주체의 내면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착취 구조를 외면하는 개개인의  무장해제는 요즘 유행하는 '힐링'에 그칠 공산이 크다. 무위 속에서 심신의 피로를 푼 개인 혹은 공동체는 심기일전해 자기를 착취하는 사회 속에 다시 뛰어든다"며, "대중이 불안과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전히 개인적 처방에만 의존할 뿐 정치 행동이 개인의 복리를 향상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역설합니다.

   개인적으로 긍정성의 과잉 시대에서 스스로 착취하기 때문에 피곤하다는 저자의 주장은 긍정하지만, 근본적인 처방이 아닌 자기 힐링적인 개인적 처방이라는 소설가 장정일의 의견 또한 공감합니다. 결국 『피로사회』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피로사회』를 선택한 독자의 몫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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