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 전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였고 그로부터 천 년 후 스페인 내전(1936~1939) 당시 프랑코 총통의 본거지이기도 했던 부르고스 시내를 지나다 길가의 서점에 진열된 책들에 눈길이 갔다. 거기엔 내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다름 아닌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행인』의 스페인판(El caminante)이 비중 있게 진열돼 있는 것이 아닌가.

 

뭔가에 이끌리듯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서점 안 진열대를 보니 비단 나쓰메 소세키만이 아니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행인』외에도 ‘일본문학의 마스터들’이란 타이틀 아래 일본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는 에도시대의 극작가 치카마츠 몬자에몬의 『소네자키 동반자살 외』, 일본 환상문학의 대가 이즈미 교카의 『고야산 스님 외』, 일본의 자연주의 작가 시마자키 도손의『파계』, 그리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모음집 등이 함께 진열되어 있었다.

 

책들을 한 권 한 권 들추며 서지사항들을 눈여겨보았다. 내가 그 책들을 열심히 뒤적이자 서점 주인이 내게 ‘자폰’이냐고 물어왔다. 나는 ‘코리안’이라고 응수한 후 한참을 그 책들 앞에 서 있었다. 솔직히 부러웠다. 그것은 단지 일본이 경제력을 앞세워 그들의 문학작품을 스페인에서 번역, 출간하도록 지원하고 독려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 이상이었다. 그들의 문학작품은 단지 번역되었다는 사실에 방점이 찍힌 박제된 기념물이 아니라 실제로 스페인 독자들에게 읽히는 살아 있는 작품이었다. 그 대목에서 정말이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의 문화적 저력을!

 

부르고스 시내 시점에서 나쓰메 소세키를 만나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천착!

백 년이 지나도록 그의 소설이 여전히 생명력을 갖는 이유다.

 

더구나 그 일본의 문화적 저력을 대변할 만한 인물이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이 스페인어로 번역돼 서점 맨 앞자리에, 그것도 스티브 잡스의 자서전과 어깨를 나란히 해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면서 솔직히 나는 묘한 질투심 같은 것을 느꼈다.

 

물론 우리도 이문열 같은 작가의 작품이 스페인어뿐만 아니라 서구의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실제로 작가 이문열의『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스페인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으로도 번역된 바 있다. 하지만 꼭 백 년 전인 1912년에 아사히신문에 연재되었던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행인』이 스페인어로 번역돼 서점 진열대의 전면에 오롯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이문열의 스페인어 번역서도 애써 찾아보았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어쩌면 우리는 그 책이 번역되었다는 것에 강조의 방점을 찍고 그만이었던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나쓰메 소세키의 백 년 전 작품은 놀랍게도 여전히 초베스트셀러의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스티브 잡스의 자서전과 대등하게 서점 전면에 나와 앉아 있었다. 한마디로 살아 있었던 것이다.

 

*출처: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정진홍 지음, 문학동네, 160~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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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쓰메 소세키는 메이지유신(1868) 직전에 태어나 메이지시대가 끝난 후 얼마 안 있어 생을 마친, 말 그대로 '온전한' 메이지인(明治人)이다.

 

우리에겐 흔히 일본을 대표하는 국민작가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끼친 영향의 문화적 심층은 실은 그 이상이다. 메이지시대를 지나 다이쇼(大正)와 쇼와(昭和) 그리고 헤이세이(平成) 시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작가들은 물론 지식인과 대중을 막론하고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적·정신적 세례를 받지 않은 이가 드물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메이지시대 이후 150여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근대와 현대를 통틀이 일본의 정신적 모태와도 같은 존재다. 그런 점이 인정되어서인지 몰라도 최근까지도 일본 지폐 천 엔 권에는 20여 년(1984~2004) 동안이나 그의 초상화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만큼 나쓰메 소세키는 그 자체가 일본의 정서와 정신의 저류를 대변하는 문화력의 화신이라고 말해야 할 정도의 인물인 것이다. 아울러 현재도 일본인들의 심층 깊숙이 자리잡고 살아서 숨 쉬는 활화산의 작가다.

 

비단 일본만이 아니다. 식민지시대 우리 근대문학의 선두였던 이광수와 염상섭 등 수많은 작가들이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에 심취했었다. 중국의 경우에도 본래 의학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던 루쉰(魯迅)이 나쓰메 소세키의 영향을 받아 문학으로 진로를 바꿨다고 할 만큼 나쓰메 소세키가 펼친 정신적 우산은 크고도 넓다.

 

사실 일본의 근대와 현대를 통틀어 나쓰메 소세키만큼 일본인들의 내면 풍경을 정밀하게 그려낸 이도 드물 것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봇물처럼 밀려든 서구문명의 홍수 속에서 일본적 정체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몸부림의 한 정점에 그가 서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쓰메 소세키는『나는 고양이로소이다』『도련님』같은 유머감각 넘치는 작품에서 시작해 점차 인간의 심층심리를 예리하게 관찰하고 한 서점 진열대의 중앙을 장식한『행인』역시 그러하다.

 

이 소설은 소설 속의 화자인 지로와 그의 형 이치로 그리고 형수 오나오 사이에 오가는 미묘한 인간 심리와 감정선의 추이를 예리하고 섬세하게 묘사하며 전개된다. 특히 형 이치로가 동생 지로와 자신의 아내 오나오의 관계를 의심하며 아내의 정절을 시험하기 위해 동생에게 형수와의 여행을 종용하는 데서 정점으로 치닫는다. 그 대목을 옮겨보면 이렇다.

 

"형수의 정조를 시험하다니…… 관두는 게 좋겠습니다."
(…)
"그렇다면 부탁하지 않겠다. 대신 난 평생 널 의심하겠다."

 

건조해 메마르게 느껴질 만큼 툭톡 내던지는 대화 속에는 왠지 모를 날 선 칼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마음의 칼'이었다. 나쓰메 소세키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되묻는다. "과연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이 물음에 회의적이다. 아니 회의적이다못해 절망한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답한다. "자신이 '그 사람'이 아니며, '그 사람'이 될 수 없는 한 아무도 '그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 아무리 가깝고 사랑하는 관계라 하더라도 단지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 데 불과할 뿐이다"라고! 이렇게 보면 나쓰메 소세키는 그 누구도 그 사람이 아닌 한 그 사람이 될 수 없고, 그 사람을 알 수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 사람인들 그 자신을 알까?

 

과연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고 있을까? 아마도 모를 것이다. 아니 모른다.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걸으면서 나는 나를 들여다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여간해서 보이지 않았다. 가장 알 수 없는 게 바로 나였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어찌 남을 알겠는가. 또 남이 어찌 나를 알겠는가? 옛말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기 어렵다고 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 곧 인심(人心)은 깊은 것이다. 인심이 가장 깊다.

 

나는 여전히 길 위에 있다
빈센트 반 고흐가 37세의 아까운 나이에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전 10년 동안만 화가로 살았던 것처럼 나쓰메 소세키 역시 작가로서 산 것은 생의 마지막 10여 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생의 마지막 10년 동안 빈센트 반 고흐가 미술사를 넘어선 문화사를 고쳐 쓰게 만든 것처럼 나쓰메 소세키 또한 그 마지막 10여 년 동안 일본 근대문학사를 넘어 일본의 문화사와 정신사를 새로 쓰게 만든 장본인이다.

 

나쓰메 소세키가 소설을 통해 추구한 것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로 압축된다. 그것에 대한 집요한 천착 덕분에 그의 소설은 백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생생한 생명력을 지니고 사람들의 깊은 속내를 건드린다. 그것도 아주 섬세하고 미묘하게! 나쓰메 소세키가 49세의 나이로 죽기 두 해 전인 1914년에 쓴 작품『마음』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지금보다 더 외로울 미래의 나를 견디기보다 외로운 현재의 나를 견뎌내고 싶은 겁니다. 자유와 자립과 자아로 가득한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모두 그 대가로서 이 고독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될 겁니다.(박유하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02, 84쪽)

 

그렇다. 우리는 모두 고독한 존재다. 그 누구도 나를 알 수 없고 나 역시 그 누구를 안다고 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이들 가운데 둘러싸여 있어도, 아니 그렇게 둘러싸여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더 고독한지 모른다. 그들은 결코 나를 알 수 없을 테고 나 또한 그들을 알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사실 홀로 걷는다는 행위는 그 고독의 심부(深部)로 들어가는 일이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자신을 더듬기라도 하려고! 나쓰메 소세키는 결과적으로 자서전이 되어버린 소설『한눈팔기(道草)』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는 결국 무엇을 하러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그러고는 다시 이렇게 자문자답하듯 말한다. "모르겠어. (…) 모르는 게 아니지. 알아도 그곳에 도달할 수 없는 거겠지. 도중에 멈춰 있는 거겠지."(조영석 옮김, 문학동네, 2011, 262쪽)

 

그렇다. 우리는 그 알 수 없는 도중, 즉 미지의 길 위에 있는 것이다. 다만 나는 걷는다. 도중에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와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 알 수 없는 도중에 있다. 미지의 길 위에 있다. 아마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길은 끝나지 않고 도(道)는 영원할 터이니.

 

*출처: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정진홍 지음, 문학동네, 163~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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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 - 어느 은둔자의 고백
리즈 무어 지음, 이순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정말 내가 같이 가주었으면 좋겠어?”
린지는 아서 오프의 집에 가려고 원피스를 입는다. 린지가 원피스를 입은 모습은 처음 본다. 학교에 갈 때는 청바지나 운동복을 입는다.

나는 이 대목에서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왜 그랬을까? 나는 그 이야기를 여기서 하려고 한다.

이 소설은 리즈 무어가 썼다. 그녀는 작가이자, 음악가이며 교수다. 만만치 않은 이 모든 일들을 해내다니 놀랍기 그지없다.

출판사 소개를 보니 “뉴욕 특유의 세련된 절제미를 보여주며 마치 한 편의 악보처럼 유려하게 써내려간 작품”이라고 했다. 그녀의 이력과 결부시킨 셈인데, 실제로도 그랬다.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다. 게다가 개운하기까지.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느낌, 오랜만이다.

난 이럴 때면 항상 생각한다. 왜 우리 작가들은 이런 작품을 쓰지 못하는 걸까? 아직 덜 익어서? 어떤 면에서는 그렇다. 나는 우리 소설에서는 항상 작가의 불안감이 배인 냄새를 맡는다. 어딘가 쫓길 때 흩어지는 땀 냄새같은. 이해도 된다, 하긴, 이 세상의 온갖 좋은 소설들과 경쟁해야 하는 우리 작가들은 얼마나 힘들소냐 이 말이다.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모두 셋이다. 아서 오프, 샬럿 터너 그리고 켈 켈러. 우선 아서 오프를 보자. 이 남자는 교수였다가 샬럿과의 데이트가 이슈가 된다.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과 애정 관계에 휘말렸다고 판단한 대학측은 윤리위원회를 소집하여 그를 회부한다. 하지만 아서는 출석 통지서를 받고 아예 출근하지 않는다. 샬럿 터너는 말없이 아서를 떠났다. 마지막으로 둘이 만난 지 근 20년 만에 전화가 연결된다. 한편 켈은 샬럿의 아들. 과연 이 세 사람은 어떻게 풀려질까. 여기에 소설의 묘미가 있다.

이들은 한결 같이 무언가에 중독되어 있다. 샬럿 터너는 거의 매일 잠시도 쉬지 않고 술을 마시는 알콜 중독이다. 아서 오프는 음식 중독으로 고도 비만이다. 켈 켈러는 야구에 인생의 승부를 거는 야구 중독이다.

왜 이들은 중독이 되었을까? 내가 보기에 저자는 그 원인을 본질적인 ‘외로움’에서 찾는 것 같다. 그들에게는 교감을 나눌 대화 상대도 없고, 그렇다고 지친 심신을 의지할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사회가 이들을 돌보는 것도 아니니, 결국 그들이 의지하는 것은 타인이 아닌 물화된 대상이다. 타인과 소통할 수 없으니 점점 고립된다. 아서 오프와 살렷 터너는 거의 집에 틀어박혀 외톨이로 지낸다.

그렇다면《무게》의 원제 ‘Heft'는 무엇일까?
저자는 한국어 독자를 위한 서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짐이 되는 것, 고통스럽게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복잡하고 힘겨운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단어는 진지하고 심각하며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것 또한 앞의 두 가지 의미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저는 이 책 인물 모두가 나름의 짐을 지고서 그 무게를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삶에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과거에 했던 모든 결정 혹은 다른 사람에게서 떠안은 문제 때문에 마음으로 그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것이지요.“

등장 인물들은 ‘어떤 것’을 두려워하고 그 대상에서 도망치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두려움을 느끼지도 않고, 자신에게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을 대상에 심취하고 빠져든다. 어떻게 보면 소심하기 짝이 없고, 인생의 패배자가 아닐 수 없겠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이상해진다. 어느새 등장 인물들의 모습 속에서 나 자신이 오버랩되는 것을 느낀다. 나도 그들처럼 어딘가에 중독되어 있을지 모른다. 돈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다. 아니 중독이 아니어도 이와 비슷한, 이 빠진 그릇 같이 묘한 불완전성을 느낀다. 내 자신이 진정 원하고 내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타인의 시각과 평가 속에 왜곡되고 고통 받는 그런 삶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이 세상을 향해 소통하고 발을 내딛는 극적인 계기는 결국 자신을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가까운 지인에게서 비롯된다. 아서에게는 율란다가 있었고, 켈에게는 린지가 그랬다. 이들을 중개로 해서 아서와 켈은 세상을 달리 보기 시작하고, 타자와 함께 부대낄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얻는다. 마침내 켈이 아서를 찾아 나서게 된 것은 이 소설에서 다룬 무게와 갈등이 극적으로 해소되는 정점이다. 그래서 나는 아서를 찾아 길을 나서는 켈러를 위해 기꺼이 원피스(거의 입지 않는)를 입는 린지를 보고 미소를 짓는다. 아! 내게도 그런 사람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다. 우리 인생의 ‘무게’는 기꺼이 함께 나눌 가족 혹은 타인에 의해 덜어진다. 하지만 자신을 받아들이고 내보여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숨어들기만 하는 움츠림은 결코 자기 자신도 구할 수 없다. 다만, 일시적인 도피일 뿐.

내가 힘든 길을 나설 때나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릴 때면, 누군가 내 곁에 있어 의지가 되어 주면 좋겠다.

“정말 내가 같이 가주었으면 좋겠어?”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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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파리에 간다면 - 혼자 조용히, 그녀의 여행법
모모미 지음 / 이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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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파리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셀부르의 우산
,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레미제라블, 모나리자, 토탈 이클립스(랭보), 물랭루즈, 몽마르뜨, 전혜린, 바르세이유의 장미, 고흐 형제, 그리고 달빛 흐르는 세느강의 밤 배.

파리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다
. 언젠가 아내랑 둘만의 여행을 갔을 때 아내는 파리가 별로라고 했다. 지저분하고 불친절해서 싫단다. 하긴 몽마르뜨로 갈적에 탄 택시의 운전사가 아랍인이었다. 그는 이리저리 골목길을 빙빙 돌면서 난폭하게 운전했고, 도착해서는 미터 요금보다 더 많이 요구했고, 게다가 팁까지 달라고 버티는 것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말도 통하지 않은 것은 이해한다 쳐도 태도가 영 시원찮았다. 그러니 아내가 질렸다는 표현 대신 파리가 싫다고 했을지도 몰랐다.

난 왜 파리가 좋으냐고 누가 물어온다면 망설임 없이 개방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 내게 파리는 예술의 도시요, 육감적인 도시요, 풍요로운 도시였다.

개인적으로 파리에는 출장과 여행을 합쳐 모두 5차례 이상 갔었다
. 게 중에 한 번이 앞서 말한 아내와 함께 한 거였고.

모모미가 쓴 책
,《다시 파리에 간다면을 혹~하게 읽었다. 나도 파리에 대해선 제법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저자가 발품 손품 팔아 파리 구석구석을 누빈 정성이 온통 묻어나 있었다!

파리에서 머물렀던 스튜디오에는
하루에 한 시간 정도 빛이 들었다.
자신의 방에 언제 빛이 드는지 안다는 것은
아마도 그 공간을 사랑하는 뜻일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머물렀던 곳에 유난히 애착을 보인다
. 후라이 팬도 하나 덜컥 사고, 스튜디오의 주인 베르나르와 니콜 부부를 비롯해서 이웃들과도 살갑게 지냈던 모양이다.

그녀의 친구
y는 파리에 오면 에펠탑은 못 봐도 로댕 미술관만은 꼭 가봐야 한다고 했는데, 난 그러질 못했다. 루브르, 오르세, 피카소는 둘러보았지만 로댕은 놓치고 말았다 그녀의 글을 읽다 보면 못내 아쉽다.

y
를 따라 로댕 미술관의 어느 전시실로 들어갔을 때 나는 잠시 멈춰서고 말았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부드러움이 내 시야에 맺혔다. 그것은 빛이었는데,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빛이었다.(45)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빛.‘ 그래, 그걸 어떻게 말로 표현할까? 그냥 느끼고 또 느끼는 거지. 지중해에 가면 강렬한 빛의 향연에 압도되듯이 말이다.

특이했던 풍경은 쉬는 날만 열린다는 카발로티 거리의
휴일 미술관.’ 이 곳은 젊은 여성 예술가 두 명이 아이디어를 내어 상가 셔터문에 고갱, 모딜리아니, 로트렉 등 많은 에술가들의 작품을 그려 놓았다고 한다. 그러니 상점이 문을 열면, 곧 셔터가 올라가면 볼 수 없으니 이른 아침이나 일요일 오후에 찾아야 한다고 한다. 거리의 낙서(그래피티)와는 조금 색다른 느낌이 나서 좋았다. ^^


이제 완연히 가을이다
. 이 맘 때 파리에서라면 어디가 좋을까? 저자가 추천하는 곳은 와인 파티가 열리는 베르시 공원이다. 이 공원은 한 때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와이너리 중 하나였으며, 지금도 400그루의 포도나무가 남아 있다고 한다. 가을이 가장 아름다운 이 공원에서 매년 와인과 관련된 큰 파티를 연다고 하니 벌써 내 마음은 현지에 달려가 있다.

이외에도 모모미는 발품으로 찾아낸 빌라촌, 거리 등등 탐나도록 이쁜 곳들을 두루두루 소개한다. 가령, 지도를 보아 우연히 꽃들의 도시를 발견하고 무작정 찾아가거나, 바스티유 근처 주말 시장에 갔다가 저 멀리 고가도로 위로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보고 그쪽으로 향한다. 여행이란 이런 것일 테지? 꼼꼼하게 일정과 볼거리를 체크하고 나서는 것도 알뜰하게 보낼 수 있어서 좋겠지만, 무작정 발가는 대로 맘가는 대로 길을 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

내가 특히 인상적이었던 곳은 스튜디오의 안주인 니콜이 소개해 주었다는
파리의 고양이 마을’. 이 곳은 파리 19구에 있는 빌라촌으로 건물에 아르튀르 랭보, 클로드 모네, 폴 베를렌, 펠릭스 포르, 사디 카르노 등 프랑스 유명 인사들의 이름을 붙여 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마을의 진짜 명물은 사람을 전혀 경계하지 않고 애교 넘치는 고양이들. 골목마다 많게는 서너 마리의 고양이들이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집주인들의 취향이 엿보이는 정원들이 세심하게 가꿔져 있다고 한다.

그녀는 살림꾼 기질을 유감없이 보여주기도 한다
. 벼룩 시장이나 재래 시장을 찾아다니며 그 풍경을 멋지게 스케치해서 보여준다. 시장 만큼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 또 어디 있을까.

 

 


우리 가족이 영국에서 매주 일요일이면 인근 공원이나 공터에서 열리는 카 부츠 시장
(차 드렁크에 물건을 싣고 와서 파는 벼룩시장)에 거의 빠짐없이 들러 어린이책, 장난감 그리고 생활용품 등을 한아름 사오곤 했다. 우리의 아름다운 가게도 실은 영국의 옥스팜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파리지앵도 아나바다 정신이 몸에 배여 있는 모양이다. ^^

이 책을 읽다 보니 그간 파리에서 내가 놓친 것들이 많은 것 같아 아쉬움이 컸다
. 내가 다시 파리에 간다면, 그녀가 했던 것처럼 따라 해 보고 싶다. 게 중에서도 진짜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비오는 날 미술관에 죽치고 앉아 있는 것, 트램을 타고 파리 외곽을 한 바퀴 도는 것, 그리고 커피가 맛있는 카페에 앉아 거리와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녀는 책 부록편에 직접 둘러보고 꼼꼼하게 체크해 봤음이 틀림없을 진짜배기 카페
, 레스또랑, 베이커리, 상가(벼룩 시장까지) 그리고 숨어 있는 볼거리들을 잔뜩 채워 놓았다. 이만하면 팬서비스도 만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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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을 기억해 - 이주은의 벨 에포크 산책
이주은 지음 / 이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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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만난 이주은 교수의 책은당신도, 그림처럼이었다. 뭐랄까, 읽는 내내 은은하며서 달콤했다. 그림 한 점 한 점, 아이 얼굴을 쓰다듬듯 저자의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다.

햇살 좋은 오후
, 차 한 잔 놓고, 그림을 마주 보는 그런 분위기, 도슨트가 오직 나만을 위해 그림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고 흔히 놓칠 수 있는 부분을 섬세하게 짚어 주는 그런 독특한 느낌이랄까.

나는
당신도, 그림처럼》을 통해 제임스 티소, 조지 레슬리와 타마라 드 렘피카를 알게 되었다. 특히 제임스 티소 그림을 통해 19세기 중반 영국에 유행했던 티 문화의 풍경을 엿볼 수 있었고, 젊은 청춘들의 은밀한 단면을 알아챌 수도 있었다. 램피카의 그림에서 위대한 개츠비의 시대인 1920년대 도시를 휘젓고 다니던 모던 걸의 모습을 살필 수 있었다.

이어 보게 된
그림에, 마음을 놓다에서는 메리 커샛과 에드워드 호퍼가 인상적이었다. 나는 화가들의 그림을, 비록 디지털 형태로 저장된 것이긴 했지만, 구글에서 일일이 찾아 눈으로 읽었다. 이 책에는 쉬잔 발라동의 그림도 나온다. 툴루즈 로트렉의 누드 모델이었다가, 화가의 길로 들어선 쉬잔 발라동. 책에는 대화가 단절된 모녀의 모습을 담은버려진 인형이 소개되어 있다.

이 교수의 새 책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해에는 로트렉의 그림이 소개된다. 로트렉과 쉬잔 발라동과의 인연-로트렉은 발라동의 청혼을 거절했다-은 지난 책에서 잠시 다루어서 그런지 이번에는 잔 아브릴이 등장한다. 어릴 적 낙마 사고로 척추를 다친 로트렉은 성장이 멈추는 바람에 극심한 우을증에 사로잡힌다. “전혀 외출하지 않았고, 오직 혼자서 그림만 그렸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 듯집을 나서 물랭루즈를 찾는다. 거기서 만난 무희 잔 아브릴에게 연정을 느낀 로트렉은 그녀를 자신의 화폭에 담는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저자는 로트렉처럼 불운했던 천재들의 삶에 따사로운 시선을 보낸다
. 에드바르트 뭉크도 그랬다. 그는 어릴 적에 모친과 누나를 폐결핵으로 잃고, 엄격한 부친 슬하에서 좌절을 겪고 끝내 알콜 중독과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했다. 저자는 지난 책에서질투를 소개했고, 이번에는사춘기〉〈흡혈귀〉를 선보인다.

책 표지를 장식한 그림은 에리크 베렌스키올의
기억〉(Recuerdos, 1890)이다.기억에 등장하는 두 여인은 실제로 자매였다고 한다. 왼편의 여인은 화가의 아내 소피이고, 오른쪽 여인은 그녀의 언니이다. 자매는 각각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한 사람은 눈을 감는 것으로 '지금'을 애써 유지하고자 하고, 또 한 사람은 먼 곳을 바라봄으로써 '여기'를 부정한다. 자신에게서 바깥 세계를 차단하려는 여인과 현실이 아닌 다른 세상으로 눈길을 돌리는 여인이 대조를 이루는 것 같다.(105)

저자는 이어
창밖과 창 안, 거리와 가정, 도시와 시골, 자유와 도덕, 이 둘 사이에 놓인 인간의 갈등은 세기말 예술을 불안정한 분위기로 이끄는 데 큰 몫을 한다.”고 해제한다.

그렇다
! 이번 주제는 유럽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였던 세기말, 세기 전환기 또는 좋은 시절이라는 뜻의 벨 에포크(la belle époque)!  영국만 해도 빅토리아 여왕 시절, 그 번영과 행복이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다. 적어도 제1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그 전운은 조르조 데 키리코의철학자의 정복에서 이미 드러나 있다.

이 교수는
이 시대를 불면증과 피로감으로, 심지어는 광기로 거쳐간천재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래서 그녀는 100년 전의 문화와 예술, 그리고 그 시대 사람들의 감성을 우리 시대의 눈으로 살펴보면서, 21세기의 거리를 초조한 마음으로 내딛고 있는 우리 자신의 원형을 찾아보려고 한다.”고 토로한다.

나는 저자가 이끄는 손길에 따라 그림을 계속 읽는다
. 때로는 따사롭고 온화한 그림도 나오고, 때로는 우울하고 음침한 그림도 나온다. 이 모두는 과거 살았던 사람의 일상이었고, 현재는 우리들의 삶을 지탱하는 한 단상일 것이다. 그래서 영국 휴양지 브라이튼으로 향하는 기차 객실과 촘촘하게 들어앉은 역마차의 모습이 등장하고, 정원을 가꾸고 땅을 일구는 사람들도 등장한다
.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결코 우리 일상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 신화적 상상을 통해 우리가 꿈꾸는 희망의 원형, 그리고 유토피아를 모색한다. 그래서 그녀는 여전히 아담과 이브, 메데이아, 오펠리아까지 아우르고 싶어한다.

이 책에서 빼 놓을 수 없는 특징 중 하나는 고전
(古典)과 명화의 교감어린 소통이라는 점이다. 지난 작품에서 저자는 작가의 개인사 혹은 그림을 보는 관점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이번에는 벨 에포크 시대를 이끌었던 고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마치 지인들과 차 한 잔 놓고 명화 한 점 바라보며, 당시 시대를 묘사했던 작가들을 한데 불러오는 시간같다.

나는 특히 고갱의 그림과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와의 교감이 좋았다. 몸은 파리 태생이었지만, 10세 때 양친을 잃고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런던 성 토머스 의학교에 입학하여 의사면허를 취득하지만, 끝내 작가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달과 6펜스가 발표된 때는 1919. 1차 대전이 종전을 맞은 해였다.

한편 고갱은 파리 증권거래소에서 중개인으로 일했지만
, 주식시장이 위기를 맞게 되면서 해고를 당한다. 그는 오히려 기뻐하면서 지구 반대편의 섬, 타히티로 떠난다. 이때가 189141일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우리의 인습적인 현실”, 아포리아를 극복할 원형을 발견했을 것이다.

'달과
6펜스'는 둘 다 둥글고 은빛으로 빛난다. 빛나는 것은 사람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지닌다. 달빛은 영혼을 설레게 하며 비밀스러운 신비의 통로로 사람을 이끈다. 잠들어 있던 욕망을 일깨워 걷잡을 수 없는 충동에 빠지게도 한다.

6
펜스란 영국에서 가장 낮은 단위로 유통되었던 은화이다. 이 동전은 처음 나왔을 때 반짝거리지만, 곧 꺼멓게 산화되고 더럽게 손때가 타서 빛을 잃는다. 촉감은 차갑고 소리는 시끄러우며, 6펜스로 살 수 있는 가치는 매우 하찮다. 달이 열정적 삶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뜻한다면 6펜스는 돈이 기준이 된 인습적인 현실을 가리킨다. 이 소설은 한 중년의 사내가 달빛 세계의 마력에 끌려 6펜스의 세계를 탈출한 이야기이다.(170~171)

, 월인천강(月印千江)! 천 개의 강에 비치는 달빛!
흔히 우리는 달빛의 원형, 사물의 본성을 바로 보지 못하고, 투영된 그림자와 온갖 미혹에 현혹되고 만다. 결국 고갱과 몸이 찾고자 했던 것은 바로 달빛의 본성, 그것이었으리라. 아마도 이 교수는 메리 커샛, 제임스 티소 그리고 윈슬로 호머의 그림에서 그 원형을 보지 않았을까?

여담이지만 재미있게도 이번에는 렘피카의 모던보이가 등장한다
. 그녀가 묘사한 모던보이는 바로 다플리토 후작. 모던걸과 모던보이를 함께 소개해 본다.

 


마지막으로 나는 루커 필즈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다. 사실 필즈는의사〉(The doctor)로 더 유명하다. 딸이 죽어가던 때를 지켜보던 의사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아래 그림에서 서 있는 남자가 바로 필즈다. 이 교수는 필즈의임시 수용소의 지원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티소가 가진 사람들의 화려한 일상을 그렸다면, 필즈는 산업혁명기 시절 어려운 사람들의 애환을 묘사했다. 이는 장기 불황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우리를 위로하기 위한 저자의 작은 배려인지도 모른다.

 

 

이 교수는 참으로 따뜻하면서 섬세한 감성으로 우리의 지친 심신을 어루만지고 쓰다듬어준다. 예나 지금이나 삶은 여전히 고달프지만, 그래도 우리가 꿈꾸는 세상과 희망을 버릴 수는 없겠다. 우리의 삶 하나하나가 너무나 아름답고 소중하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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