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는 메이지유신(1868) 직전에 태어나 메이지시대가 끝난 후 얼마 안 있어 생을 마친, 말 그대로 '온전한' 메이지인(明治人)이다.

 

우리에겐 흔히 일본을 대표하는 국민작가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끼친 영향의 문화적 심층은 실은 그 이상이다. 메이지시대를 지나 다이쇼(大正)와 쇼와(昭和) 그리고 헤이세이(平成) 시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작가들은 물론 지식인과 대중을 막론하고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적·정신적 세례를 받지 않은 이가 드물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메이지시대 이후 150여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근대와 현대를 통틀이 일본의 정신적 모태와도 같은 존재다. 그런 점이 인정되어서인지 몰라도 최근까지도 일본 지폐 천 엔 권에는 20여 년(1984~2004) 동안이나 그의 초상화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만큼 나쓰메 소세키는 그 자체가 일본의 정서와 정신의 저류를 대변하는 문화력의 화신이라고 말해야 할 정도의 인물인 것이다. 아울러 현재도 일본인들의 심층 깊숙이 자리잡고 살아서 숨 쉬는 활화산의 작가다.

 

비단 일본만이 아니다. 식민지시대 우리 근대문학의 선두였던 이광수와 염상섭 등 수많은 작가들이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에 심취했었다. 중국의 경우에도 본래 의학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던 루쉰(魯迅)이 나쓰메 소세키의 영향을 받아 문학으로 진로를 바꿨다고 할 만큼 나쓰메 소세키가 펼친 정신적 우산은 크고도 넓다.

 

사실 일본의 근대와 현대를 통틀어 나쓰메 소세키만큼 일본인들의 내면 풍경을 정밀하게 그려낸 이도 드물 것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봇물처럼 밀려든 서구문명의 홍수 속에서 일본적 정체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몸부림의 한 정점에 그가 서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쓰메 소세키는『나는 고양이로소이다』『도련님』같은 유머감각 넘치는 작품에서 시작해 점차 인간의 심층심리를 예리하게 관찰하고 한 서점 진열대의 중앙을 장식한『행인』역시 그러하다.

 

이 소설은 소설 속의 화자인 지로와 그의 형 이치로 그리고 형수 오나오 사이에 오가는 미묘한 인간 심리와 감정선의 추이를 예리하고 섬세하게 묘사하며 전개된다. 특히 형 이치로가 동생 지로와 자신의 아내 오나오의 관계를 의심하며 아내의 정절을 시험하기 위해 동생에게 형수와의 여행을 종용하는 데서 정점으로 치닫는다. 그 대목을 옮겨보면 이렇다.

 

"형수의 정조를 시험하다니…… 관두는 게 좋겠습니다."
(…)
"그렇다면 부탁하지 않겠다. 대신 난 평생 널 의심하겠다."

 

건조해 메마르게 느껴질 만큼 툭톡 내던지는 대화 속에는 왠지 모를 날 선 칼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마음의 칼'이었다. 나쓰메 소세키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되묻는다. "과연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이 물음에 회의적이다. 아니 회의적이다못해 절망한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답한다. "자신이 '그 사람'이 아니며, '그 사람'이 될 수 없는 한 아무도 '그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 아무리 가깝고 사랑하는 관계라 하더라도 단지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 데 불과할 뿐이다"라고! 이렇게 보면 나쓰메 소세키는 그 누구도 그 사람이 아닌 한 그 사람이 될 수 없고, 그 사람을 알 수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 사람인들 그 자신을 알까?

 

과연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고 있을까? 아마도 모를 것이다. 아니 모른다.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걸으면서 나는 나를 들여다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여간해서 보이지 않았다. 가장 알 수 없는 게 바로 나였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어찌 남을 알겠는가. 또 남이 어찌 나를 알겠는가? 옛말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기 어렵다고 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 곧 인심(人心)은 깊은 것이다. 인심이 가장 깊다.

 

나는 여전히 길 위에 있다
빈센트 반 고흐가 37세의 아까운 나이에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전 10년 동안만 화가로 살았던 것처럼 나쓰메 소세키 역시 작가로서 산 것은 생의 마지막 10여 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생의 마지막 10년 동안 빈센트 반 고흐가 미술사를 넘어선 문화사를 고쳐 쓰게 만든 것처럼 나쓰메 소세키 또한 그 마지막 10여 년 동안 일본 근대문학사를 넘어 일본의 문화사와 정신사를 새로 쓰게 만든 장본인이다.

 

나쓰메 소세키가 소설을 통해 추구한 것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로 압축된다. 그것에 대한 집요한 천착 덕분에 그의 소설은 백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생생한 생명력을 지니고 사람들의 깊은 속내를 건드린다. 그것도 아주 섬세하고 미묘하게! 나쓰메 소세키가 49세의 나이로 죽기 두 해 전인 1914년에 쓴 작품『마음』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지금보다 더 외로울 미래의 나를 견디기보다 외로운 현재의 나를 견뎌내고 싶은 겁니다. 자유와 자립과 자아로 가득한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모두 그 대가로서 이 고독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될 겁니다.(박유하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02, 84쪽)

 

그렇다. 우리는 모두 고독한 존재다. 그 누구도 나를 알 수 없고 나 역시 그 누구를 안다고 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이들 가운데 둘러싸여 있어도, 아니 그렇게 둘러싸여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더 고독한지 모른다. 그들은 결코 나를 알 수 없을 테고 나 또한 그들을 알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사실 홀로 걷는다는 행위는 그 고독의 심부(深部)로 들어가는 일이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자신을 더듬기라도 하려고! 나쓰메 소세키는 결과적으로 자서전이 되어버린 소설『한눈팔기(道草)』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는 결국 무엇을 하러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그러고는 다시 이렇게 자문자답하듯 말한다. "모르겠어. (…) 모르는 게 아니지. 알아도 그곳에 도달할 수 없는 거겠지. 도중에 멈춰 있는 거겠지."(조영석 옮김, 문학동네, 2011, 262쪽)

 

그렇다. 우리는 그 알 수 없는 도중, 즉 미지의 길 위에 있는 것이다. 다만 나는 걷는다. 도중에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와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 알 수 없는 도중에 있다. 미지의 길 위에 있다. 아마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길은 끝나지 않고 도(道)는 영원할 터이니.

 

*출처: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정진홍 지음, 문학동네, 163~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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