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을 기억해 - 이주은의 벨 에포크 산책
이주은 지음 / 이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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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만난 이주은 교수의 책은당신도, 그림처럼이었다. 뭐랄까, 읽는 내내 은은하며서 달콤했다. 그림 한 점 한 점, 아이 얼굴을 쓰다듬듯 저자의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다.

햇살 좋은 오후
, 차 한 잔 놓고, 그림을 마주 보는 그런 분위기, 도슨트가 오직 나만을 위해 그림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고 흔히 놓칠 수 있는 부분을 섬세하게 짚어 주는 그런 독특한 느낌이랄까.

나는
당신도, 그림처럼》을 통해 제임스 티소, 조지 레슬리와 타마라 드 렘피카를 알게 되었다. 특히 제임스 티소 그림을 통해 19세기 중반 영국에 유행했던 티 문화의 풍경을 엿볼 수 있었고, 젊은 청춘들의 은밀한 단면을 알아챌 수도 있었다. 램피카의 그림에서 위대한 개츠비의 시대인 1920년대 도시를 휘젓고 다니던 모던 걸의 모습을 살필 수 있었다.

이어 보게 된
그림에, 마음을 놓다에서는 메리 커샛과 에드워드 호퍼가 인상적이었다. 나는 화가들의 그림을, 비록 디지털 형태로 저장된 것이긴 했지만, 구글에서 일일이 찾아 눈으로 읽었다. 이 책에는 쉬잔 발라동의 그림도 나온다. 툴루즈 로트렉의 누드 모델이었다가, 화가의 길로 들어선 쉬잔 발라동. 책에는 대화가 단절된 모녀의 모습을 담은버려진 인형이 소개되어 있다.

이 교수의 새 책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해에는 로트렉의 그림이 소개된다. 로트렉과 쉬잔 발라동과의 인연-로트렉은 발라동의 청혼을 거절했다-은 지난 책에서 잠시 다루어서 그런지 이번에는 잔 아브릴이 등장한다. 어릴 적 낙마 사고로 척추를 다친 로트렉은 성장이 멈추는 바람에 극심한 우을증에 사로잡힌다. “전혀 외출하지 않았고, 오직 혼자서 그림만 그렸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 듯집을 나서 물랭루즈를 찾는다. 거기서 만난 무희 잔 아브릴에게 연정을 느낀 로트렉은 그녀를 자신의 화폭에 담는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저자는 로트렉처럼 불운했던 천재들의 삶에 따사로운 시선을 보낸다
. 에드바르트 뭉크도 그랬다. 그는 어릴 적에 모친과 누나를 폐결핵으로 잃고, 엄격한 부친 슬하에서 좌절을 겪고 끝내 알콜 중독과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했다. 저자는 지난 책에서질투를 소개했고, 이번에는사춘기〉〈흡혈귀〉를 선보인다.

책 표지를 장식한 그림은 에리크 베렌스키올의
기억〉(Recuerdos, 1890)이다.기억에 등장하는 두 여인은 실제로 자매였다고 한다. 왼편의 여인은 화가의 아내 소피이고, 오른쪽 여인은 그녀의 언니이다. 자매는 각각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한 사람은 눈을 감는 것으로 '지금'을 애써 유지하고자 하고, 또 한 사람은 먼 곳을 바라봄으로써 '여기'를 부정한다. 자신에게서 바깥 세계를 차단하려는 여인과 현실이 아닌 다른 세상으로 눈길을 돌리는 여인이 대조를 이루는 것 같다.(105)

저자는 이어
창밖과 창 안, 거리와 가정, 도시와 시골, 자유와 도덕, 이 둘 사이에 놓인 인간의 갈등은 세기말 예술을 불안정한 분위기로 이끄는 데 큰 몫을 한다.”고 해제한다.

그렇다
! 이번 주제는 유럽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였던 세기말, 세기 전환기 또는 좋은 시절이라는 뜻의 벨 에포크(la belle époque)!  영국만 해도 빅토리아 여왕 시절, 그 번영과 행복이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다. 적어도 제1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그 전운은 조르조 데 키리코의철학자의 정복에서 이미 드러나 있다.

이 교수는
이 시대를 불면증과 피로감으로, 심지어는 광기로 거쳐간천재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래서 그녀는 100년 전의 문화와 예술, 그리고 그 시대 사람들의 감성을 우리 시대의 눈으로 살펴보면서, 21세기의 거리를 초조한 마음으로 내딛고 있는 우리 자신의 원형을 찾아보려고 한다.”고 토로한다.

나는 저자가 이끄는 손길에 따라 그림을 계속 읽는다
. 때로는 따사롭고 온화한 그림도 나오고, 때로는 우울하고 음침한 그림도 나온다. 이 모두는 과거 살았던 사람의 일상이었고, 현재는 우리들의 삶을 지탱하는 한 단상일 것이다. 그래서 영국 휴양지 브라이튼으로 향하는 기차 객실과 촘촘하게 들어앉은 역마차의 모습이 등장하고, 정원을 가꾸고 땅을 일구는 사람들도 등장한다
.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결코 우리 일상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 신화적 상상을 통해 우리가 꿈꾸는 희망의 원형, 그리고 유토피아를 모색한다. 그래서 그녀는 여전히 아담과 이브, 메데이아, 오펠리아까지 아우르고 싶어한다.

이 책에서 빼 놓을 수 없는 특징 중 하나는 고전
(古典)과 명화의 교감어린 소통이라는 점이다. 지난 작품에서 저자는 작가의 개인사 혹은 그림을 보는 관점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이번에는 벨 에포크 시대를 이끌었던 고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마치 지인들과 차 한 잔 놓고 명화 한 점 바라보며, 당시 시대를 묘사했던 작가들을 한데 불러오는 시간같다.

나는 특히 고갱의 그림과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와의 교감이 좋았다. 몸은 파리 태생이었지만, 10세 때 양친을 잃고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런던 성 토머스 의학교에 입학하여 의사면허를 취득하지만, 끝내 작가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달과 6펜스가 발표된 때는 1919. 1차 대전이 종전을 맞은 해였다.

한편 고갱은 파리 증권거래소에서 중개인으로 일했지만
, 주식시장이 위기를 맞게 되면서 해고를 당한다. 그는 오히려 기뻐하면서 지구 반대편의 섬, 타히티로 떠난다. 이때가 189141일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우리의 인습적인 현실”, 아포리아를 극복할 원형을 발견했을 것이다.

'달과
6펜스'는 둘 다 둥글고 은빛으로 빛난다. 빛나는 것은 사람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지닌다. 달빛은 영혼을 설레게 하며 비밀스러운 신비의 통로로 사람을 이끈다. 잠들어 있던 욕망을 일깨워 걷잡을 수 없는 충동에 빠지게도 한다.

6
펜스란 영국에서 가장 낮은 단위로 유통되었던 은화이다. 이 동전은 처음 나왔을 때 반짝거리지만, 곧 꺼멓게 산화되고 더럽게 손때가 타서 빛을 잃는다. 촉감은 차갑고 소리는 시끄러우며, 6펜스로 살 수 있는 가치는 매우 하찮다. 달이 열정적 삶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뜻한다면 6펜스는 돈이 기준이 된 인습적인 현실을 가리킨다. 이 소설은 한 중년의 사내가 달빛 세계의 마력에 끌려 6펜스의 세계를 탈출한 이야기이다.(170~171)

, 월인천강(月印千江)! 천 개의 강에 비치는 달빛!
흔히 우리는 달빛의 원형, 사물의 본성을 바로 보지 못하고, 투영된 그림자와 온갖 미혹에 현혹되고 만다. 결국 고갱과 몸이 찾고자 했던 것은 바로 달빛의 본성, 그것이었으리라. 아마도 이 교수는 메리 커샛, 제임스 티소 그리고 윈슬로 호머의 그림에서 그 원형을 보지 않았을까?

여담이지만 재미있게도 이번에는 렘피카의 모던보이가 등장한다
. 그녀가 묘사한 모던보이는 바로 다플리토 후작. 모던걸과 모던보이를 함께 소개해 본다.

 


마지막으로 나는 루커 필즈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다. 사실 필즈는의사〉(The doctor)로 더 유명하다. 딸이 죽어가던 때를 지켜보던 의사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아래 그림에서 서 있는 남자가 바로 필즈다. 이 교수는 필즈의임시 수용소의 지원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티소가 가진 사람들의 화려한 일상을 그렸다면, 필즈는 산업혁명기 시절 어려운 사람들의 애환을 묘사했다. 이는 장기 불황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우리를 위로하기 위한 저자의 작은 배려인지도 모른다.

 

 

이 교수는 참으로 따뜻하면서 섬세한 감성으로 우리의 지친 심신을 어루만지고 쓰다듬어준다. 예나 지금이나 삶은 여전히 고달프지만, 그래도 우리가 꿈꾸는 세상과 희망을 버릴 수는 없겠다. 우리의 삶 하나하나가 너무나 아름답고 소중하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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