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 전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였고 그로부터 천 년 후 스페인 내전(1936~1939) 당시 프랑코 총통의 본거지이기도 했던 부르고스 시내를 지나다 길가의 서점에 진열된 책들에 눈길이 갔다. 거기엔 내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다름 아닌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행인』의 스페인판(El caminante)이 비중 있게 진열돼 있는 것이 아닌가.

 

뭔가에 이끌리듯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서점 안 진열대를 보니 비단 나쓰메 소세키만이 아니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행인』외에도 ‘일본문학의 마스터들’이란 타이틀 아래 일본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는 에도시대의 극작가 치카마츠 몬자에몬의 『소네자키 동반자살 외』, 일본 환상문학의 대가 이즈미 교카의 『고야산 스님 외』, 일본의 자연주의 작가 시마자키 도손의『파계』, 그리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모음집 등이 함께 진열되어 있었다.

 

책들을 한 권 한 권 들추며 서지사항들을 눈여겨보았다. 내가 그 책들을 열심히 뒤적이자 서점 주인이 내게 ‘자폰’이냐고 물어왔다. 나는 ‘코리안’이라고 응수한 후 한참을 그 책들 앞에 서 있었다. 솔직히 부러웠다. 그것은 단지 일본이 경제력을 앞세워 그들의 문학작품을 스페인에서 번역, 출간하도록 지원하고 독려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 이상이었다. 그들의 문학작품은 단지 번역되었다는 사실에 방점이 찍힌 박제된 기념물이 아니라 실제로 스페인 독자들에게 읽히는 살아 있는 작품이었다. 그 대목에서 정말이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의 문화적 저력을!

 

부르고스 시내 시점에서 나쓰메 소세키를 만나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천착!

백 년이 지나도록 그의 소설이 여전히 생명력을 갖는 이유다.

 

더구나 그 일본의 문화적 저력을 대변할 만한 인물이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이 스페인어로 번역돼 서점 맨 앞자리에, 그것도 스티브 잡스의 자서전과 어깨를 나란히 해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면서 솔직히 나는 묘한 질투심 같은 것을 느꼈다.

 

물론 우리도 이문열 같은 작가의 작품이 스페인어뿐만 아니라 서구의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실제로 작가 이문열의『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스페인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으로도 번역된 바 있다. 하지만 꼭 백 년 전인 1912년에 아사히신문에 연재되었던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행인』이 스페인어로 번역돼 서점 진열대의 전면에 오롯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이문열의 스페인어 번역서도 애써 찾아보았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어쩌면 우리는 그 책이 번역되었다는 것에 강조의 방점을 찍고 그만이었던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나쓰메 소세키의 백 년 전 작품은 놀랍게도 여전히 초베스트셀러의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스티브 잡스의 자서전과 대등하게 서점 전면에 나와 앉아 있었다. 한마디로 살아 있었던 것이다.

 

*출처: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정진홍 지음, 문학동네, 160~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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