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두나무 왼쪽 길로 - 전5권
박흥용 지음 / 황매(푸른바람)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호두나무 왼쪽 길로]는 길에 대한 이야기다. 쿤데라도 말했지만, 길은 도로와 다르다. 도로는 종착지가 없으면 의미가 없을 터. 목적 없이 서성이는 것을 도로는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길은 길을 가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다. 길은 방황하고 주저하며 무언가를 찾아가는 사람들의 것이다. 주인공 상복은 오토바이를 탄다. 오토바이를 타는 동안, 상복에게는 대도시의 다차선도로도, 오지의 포장되지 않은 샛길도 모두 길이다. 자동차를 타지 않기에 상복은 길 위에서 땅에 발을 디딜 수 있고 바람과 구름을 맞이하며 함께 숨쉰다. 무엇보다 길 위에서 상복은 사람들을 만난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이 상복에게 땅의 내력을 들려주고 지나온 삶의 궤적을 들려준다. 더 이상 여행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기원이란 목적을 상정하는 것이므로 길 위의 여행자에게는 불필요한 것이다. 대신 실핏줄처럼 이어지는 끝을 알 수 없는 길, 그리고 사람 찾기만이 끈질기게 남아 있을 뿐. 그래, 실핏줄처럼 뒤엉켜 있으면서도 어딘가에 서로 연이 닿아 있는 것이었다, 스무 살 상복이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한 사람들의 관계란 것은. 길 위에서 하나같이 청승맞고 비루한 사람들과 마주치며 예견치 못한 여정으로 이끌리는 상복은 고단하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그것이 바로 삶이란 것인데. 상복은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토록 피곤하고 원망스러운 삶이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가 함께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를 위무하고 견디기 위해서는, 나아가 이겨내기 위해서는 헤아릴 수도 없는 무수한 이름 없는 사람들이 삶이라는 길 위에 함께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역사와 공동체, '광주'는 결코 다른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상복은 어머니를 용서하고 아버지를 인정하며 자신의 서러운 여행과 운명을 긍정할 수 있을 것이다.

성장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 성장소설이 좋아도 지나친 나르시시즘적 귀결은 부담스러운 사람들, 오토바이에 관심 있는 사람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 여행을 좋아하지만 이 땅에는 별로 관심을 가져보지 못했던 사람들, 관광명소를 찾는 데 눈이 벌개진 사람들, 그리고...... 어떻게든 이곳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이 두루두루 읽었으면 좋겠다. 한컷 바라보고 숨 한번 고르며 먼 곳을 쳐다볼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이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무슨 내용이냐고? 그저 길에 대한, 사람에 대한, 역사에 대한, 우리에 대한 이야기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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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7-15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파란 세이버>에 이어 이 책이 나왔나봅니다.
저번 알라딘에서 세일할 때 사둘 걸.
품절이네요. 아쉬워라.^^
(오늘 시아일합운빈현님이 '길' 사진 페이퍼 올린 것 보셨어요?^^)

사량 2005-07-15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낱권으로는 사실 수 있어요. ^^ 한국일보에 연재되었던 작품이라고 하네요.

2005-07-17 0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량 2005-07-17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 감사합니다. '속삭임'이란 것 처음 들어보네요.^^

2005-07-18 14: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량 2005-07-18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 넵, 슈슝~

비로그인 2005-07-19 0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좋네요. 근데 전 5권이예요? 너무 길다. -_-; 한권도 읽기 벅찬데... 그쵸?
쿤데라가 그런말을 했어요? 얼마전에 쿤데라의 책을 처음 접했는지라...
" 길은 길을 가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다. 길은 방황하고 주저하며
무언가를 찾아가는 사람들의 것이다 " 이 대목 상당히 좋네요. 그렇죠. 길이란...
전 항상 그런 생각을 해요. 내가 나의 길을 제대로 찾아가고 있는 걸까?
하지만 길이 도로가 아니니깐. 그런 생각은 어쩌면 필요없는 생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드네요. 길에서는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테니깐요. ^-^
한권이면 사 볼텐데.. 5권이라.. 엄두가 안나요 -_ㅠ

사량 2005-07-19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과 도로에 대한 쿤데라의 언급은 다음과 같습니다.

"길 : 사람들이 걸어가는 대지의 벨트, 도로는 비단 사람들이 그 위를 자동차로 달려간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한 지점을 다른 한 지점과 연결하는 하나의 단순한 선이라는 점에 의해서도 길과는 구분된다. 도로는 그 자체로는 어떤 의미도 갖지 않는다 ; 단지 그것이 두 지점을 연결해 준다는 의미뿐. 길은 공간에 대한 경의이다. 길의 한 토막 토막이 그 자체로 하나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러나 도로는 신난 듯이 공간의 가치를 저하시켜, 오늘날의 공간이란 인간의 이동의 한 장애요 시간 손실일 뿐 다른 그 무엇이 아니게 되었다."
--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불멸], 청년사, 1992, 283쪽.

가격이 부담스러우시면 인근 시립도서관을 잘 뒤져보세요. 있을지도 모릅니다. ^^;;;

비로그인 2005-07-21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좋네요. ^-^ 정말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도로는 단지 두 지점을 연결해준다는
의미뿐. 길은 우리의 발검을음 멈추게한다. 오늘도 전 제 발걸음을 멈추고..
저의 길에서 망설이고 있지요. 괜찮겠죠? 길은 누구에게나 방황의 공간이겠죠? ^-^

히피드림~ 2005-07-26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 책이 이렇게 긴가해서 찾아봤더니 만화네요.^^;
저도 성장소설 좋아해요. 한때는 성장소설만 찾아봤답니다. 이 책도 느낌이 좋네요.
특히 사량님의 리뷰 제목이 좋네요. 제목을 근사하게 잘 붙이시는 것 같아요.^^

사량 2005-07-27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unk / 제목이 근사한가요? 그럴 수밖에 없지요. 표절이니까. -_-;;; 저 제목은 정말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만화영화인 <은하철도999>의 마지막회(TV판, 극장판 포함한 그야말로 대단원)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 그리고 소년은 어른이 되었다"라는 마지막 내러이션(자막으로 처리)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 직전 장면, 그러니까 철이와 메텔이 헤어지는 장면에서 메텔의 마지막 대사는 이렇습니다. "안녕, 철이... 나는 너의 추억 속에만 있는 여자, 나는 소년 시절의 마음속에만 있는 청춘의 환영..." 이렇게 적어놓고 나니 조금 청승맞고 닭살스러운데^^ 직접 볼 당시에는 그야말로 펑펑 울었습니다. 아, 생각만 하면 지금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습니다. T_T [호두나무 왼쪽 길로]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가슴에 조용히 스며드는, 그러나 좀처럼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 컷과 대사를 군데군데 간직하고 있는 만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