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야채 같은 것 민음의 시 115
성미정 지음 / 민음사 / 200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은 절판되었는지 쉽게 구하기 어려운 책이 되어버린 성미정의 첫 시집 [대머리와의 사랑]이 가져다준 흥분을 나는 잊지 못한다. 동화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 모성적인 이미지과 파괴적 이미지들이 현란한 말놀이와 리듬 속에서 발랄하고 깜찍하게, 그리고 서러우면서도 사랑스럽게 한데 빚어지고 어울리는 성미정 시의 풍경들을 보게 되면서부터, 나는 아이러닉하게도 시에 대한 흥미를 잃었는지도 모르겠다. 좀 과장하자면, 성미정을 읽다 보니 정작 다른 시들에서 좀처럼 재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만큼 성미정의 시는 참신했고 기발했다. 

그러나 두 번째 시집 [사랑은 야채 같은 것]은 전작에 비해 시적 긴장도가 현저하게 떨어져 있어 조금 안타깝다. 첫 시집 [대머리와의 사랑]에 <다소 악마적인>이라는 시가 있었다면 이 시집에는 <다소 엽기적인>이라는 시가 수록되어 있어 분위기상 두 시집 사이에 연속성이 없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토끼가 사냥꾼을 잡아 먹으면서 눈이 빨갛게 된다는 <다소 엽기적인>의 세계는 자신의 살을 떼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먹이는 <다소 악마적인>의 세계보다 더 엽기적일지언정, 더욱 가슴 저미고 애틋하지는 않다. 형식적인 측면에 주목하자면, 첫 시집에서는 거의 모든 수록작이 행갈이가 없는 산문시였던 데 반해, [사랑은 야채 같은 것]에는 행갈이와 연갈이가 이루어져 우리에게 보다 친숙한 형태로 다가오는 시들이 많다는 점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성미정의 산문시가 동어반복과 언어유희를 마침표와 행갈이 없이 쉴 새 없이 배치함으로써 당대의 어떤 시보다도 발랄하고 생동적인 운율을 이루어왔음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형태상의 변화는 그녀만이 가질 수 있던 귀한 재능 하나를 가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 큰 아쉬움은 시집 전반에 걸쳐 , 특히 후반부부터 성미정 자신의 이야기가 지배적인 시적 모티프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일상과 시에 대한 단상들로 전개되는 이 부분들은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첫 시집의 세계와 견주어 볼 때 지극히 무던하고 평범하다. 몇몇 부분들을 서로 비교하면서 읽어보면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놀랄 것이다. 물론 자기연민, 나아가 자기모멸을 보이는 자의식 과잉의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고 적당한 익살과 넘치지 않는 자조를 보여주고 있어 나름대로 일정한 재미를 갖추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정서는 굳이 성미정이 아닌 여타의 시인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흔한 것이다. 겨우 두 번째 시집에서 조로하는 것인가? 정리하자면, 성미정의 두 번째 시집 [사랑은 야채 같은 것]은 전반적으로 흥미롭고 재기가 담긴 시집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겠지만, 그녀의 첫 시집을 떠올린다면 사실 '범작'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시작(詩作)의 내공 면에서는 '뒷걸음친' 양상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히피드림~ 2005-05-13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합니다! 꾸욱!

로드무비 2005-06-09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머리와의 사랑> 이야기하시는 분이 많군요.
구해서 읽어봐야겠어요.^^

비로그인 2005-07-04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시 좋아하는데.. ^^ 사랑을 하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하죠? 한때는 저도 시를 꽤 섰던것 같은데.. ㅋㅋ <대머리와의 사랑> 과 <사랑은 야채 같은 것> 같이 읽어보고 비교해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