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게 글을 쓴 건 참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나요? ^ ^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도표를 분석하는 투로, 그는 말했다. “솔직히, 난 잘 모르겠다.”
나는 그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 뭔가 말을 해야만 했다. 괴로워. 그런 차가운 얼굴로 보지 말고, 그런 말은 하지 말고, 내가 괴로울 때 늘 그랬듯이 어깨를 안아주면 안 될까.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뭔가 말해야만 했다. 뭐라도 하지 않고는 두 발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내 속이 빙글빙글 끓고 있는 것 같았다.
"때리고 싶어."
알 수 없는 감정이었기에, 때리면 나아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럼 때려.”
“안경 벗어.”
미친 생각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올릴 수조차 없었다.
“...한번도 누구 때려본 적 없어서 못 하겠어.”
“넌 그런 점이 제일 무서워.” 그는 말했다.
이 순간을 다시 돌릴 수만 있다면.
손이 아팠다. 나아지기는커녕, 손이 너무 아팠다.
“더 할 말 없어? 이제 가도 되지?”
그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내려와 뒤도 안 보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
“이야기, 하고 왔어.”
친구는 나를 꼭 안았다. 나는, 내가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어째서인지 서 있기가 힘이 들어서 친구에게 안긴 채 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친구는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교실에 들어가서는 엎드린 채 있었다. 내가 그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지금은 알 길이 없다. 수업 종이 울렸다. 수업, 듣고 싶지 않았다.
“나, 양호실 갈게.”
짧게 말하고 교실을 나섰다. 수업 시간에 양호실에 가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양호 선생님을 자주 뵈는 편도 아니어서, 왠지 긴장되는 대면이었다.
“선생님, 한 시간 쉬어도 될까요.”
“어디가 안 좋니?”
많이 안 좋아요.
“머리가 아파요.”
“머리? 열이 있나?”
“아뇨, 그건 아니고- 그냥 좀 어지러워서요.”
“아무나 재워줄 순 없는데-”
제발.
“속도 안 좋고요.”
“어떻게 안 좋은데?”
못 하겠다. 혼자 있기만 하면 되니까 다른 데를 찾아보자.
“그러니까- 아니, 그냥 수업 들으러 갈...”
어째서일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상하리만치 단 한 방울 나지 않았던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아마, 입을 다물어서 꼭 잠가두었던 것이 입이 열리면서 한꺼번에 쏟아진 것일 게다. 선생님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뭐 충격받은 일 있니?”
‘충격’. 그래, 그렇게 부르면 되는 건지도 모른다.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진정하고- 들어가서 쉬어라.”
감사합니다, 그만큼만 물어 주셔서- 침대방에는 이미 누군가 잠을 자고 있었다. 신발을 벗고, 조심스레 두 번째 침대에 몸을 뉘이면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끅끅거리며 소리를 낮춰서 한참을 울었다. 몇 분간의 일이 지난 1년보다도 더 긴 것처럼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
자습 시간에, 그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친구에게 전화했다.
“어디 있는지 알아?”
“아니, 그건 모르고- 지금 괜찮으면 좀 올라와. 이야기 좀 하자.”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두운 자치회실에서 그는 또 다시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접자. 그냥 친구로 돌아가는 거야.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안고 싶어.”
“안 돼.”
“상관 없어.”
막무가내로 목을 끌어안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어깨를 토닥이기 시작했다. 나는 울고 있었다. 그리고 내 머리 위에서 또 하나 눈물로 얼룩진 목소리가 울렸다.
“이렇게나 약하면서 맨날 센 척만 하지.”
그렇게 잘 알면서, 왜? 흐느끼는 소리는 더 커져갔다.
“ … ….”
숨이 멎을 것 같은 한 마디였다. 어째서인지 지금은 단 한 글자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조차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나에 대한 말, 그런 내용의 말이었다.
***
울상이 되어 있는 친구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충 이야기하는데, 자꾸만 말이 끊겼다. 그- 뭐더라- 하고. 아까부터 계속 그랬다. 양호실에 갔을 때부터였다. 치매라도 걸린 것처럼 있었던 일도, 단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자려고 침대에 누웠지만 아픔이 목 근처에서 또아리를 튼 듯 나를 짓눌러왔다. 누워서는 온전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일어나 앉아야 했다. 숨구멍이라도 막힌 듯, 크게 심호흡을 해야만 겨우 편안해졌다. 옆에 누워있던 친구가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막았어야 했는데, 속상해, 하는 말이 드문드문 들렸다. 나도 같이 울고 싶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나는 울 수 없었다. 우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또 눈물이 나지 않았다.
***
한숨을 많이 쉬게 되었다.
***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았다.
“너만 돌아보면 되잖아.”
“왜 니가 돌아보면 안 되는데?”
***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한 일이 너무 많다. 크리스마스 날 전화는 행복한 목소리로 받아주고 싶었다. 그 때 너를 봤을 때는 달려가 안아주고 싶었다. 와 줘서 고맙다고 밝게 웃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리고...
섭섭한 일도 많다. 왜 우리는 단 한 번도 싸우지 않았을까. 서로 얼굴 붉히며 화내고, 언성 높여본 적이 있었어도 좋았을 텐데. 나는 왜 나도 할 수 없는 일을 너에게 바랐을까. 왜 우리는 핀트가 어긋난 배려를 하면서 서로 상처받고 지쳐갔을까. 좀 더 감정을 드러내고 말을 했어도 좋았을 텐데.
***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얘는 애가 이렇게 착해가지고, 내가 싫어져도 싫다고 말도 못하고 계속 내 옆에 있지 않을까- 나도 그런 말 못 하니까, 어쩌면 우리는 계속 그런 어중간한 채로 있어야 할지도 몰라- 어쩌지, 그때가 오면 내가 먼저 말해야 하나?
그 때는 알지 못했다. 그 ‘말’이 이렇게나 아플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웃고 있는 모습을 담은 기억의 조각들이 나를 가장 아프게 할 것임을.
한 달도 더 지났는데 아픔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너무나 긴 이야기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문득 속이 상해서 글을 쓰면 기분이 나아졌던 기억이 나서 오랜만에 한 번 끼적여 본 것이다. 적어보니 참 삼류 연애소설보다 더 같잖은데(뭐 그거야 내 글솜씨 탓도 있겠지만), 여전히 너무 아프다는 게 참 웃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