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와 입시를 연관시키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긴 하지만 <문장강화>를 읽기 시작할 때 ‘논술’, 나를 짓누르는 그 이름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걸 다 읽으면 논술이 좀 쉬워질까, 하고 말이다. 그렇다. 요즘 논술은 수학 다음으로 나를 괴롭게 하고 있다. 글쓰기를 나름 좋아하고 서재에서 페이퍼를 끼적여 본 경험도 있지만, 일정한 틀이 있는 논술은 많이 부담스럽다. 각설하고, 몇 장 읽으면서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논술이라는 한정된 영역에서만 보기에는 아까운 책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좀 더 좋은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책을 읽어나갔다.

  <문장강화>는 예상외로 읽기 쉽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이태준이 쓰는 문장들이 ‘수필의 맛은 야채요리처럼 가볍고 산뜻한 데 묘미가 있다’ 하는 식으로 문학적이고 추상적이어서 따로 정리를 해야 요점이 눈에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번호까지 매겨져 있어서 읽기가 수월했다. 그리고 어떻게 찾은 건지 놀랍기만 한 풍부한 예시들 덕분에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1. 우리말의 일부, 한자어
  이 책에서는 ‘한자어’에 대한 지적이 가장 놀라웠다. 일상적으로 한자어를 그렇게 많이 접하는데도 한자어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나 자산에게도 놀랐다. 예를 들어 독서의 어감과 책읽기의 말맛은 확연히 다르다. 그렇다고 ‘독서’나 ‘어감’이 우리말이 아닌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한자어도 떳떳한 우리말의 일부이다.


2. 문체의 변화
  문체에 대해서 아는 것은 없지만, 나는 적당히 오래된 맛과 한국 특유의 느낌이 두드러지는 글을 좋아한다. 이 ‘느낌’이 바로 문체의 한 부분이리라고 생각해본다. 한국인이 쓴 글인데도 일본 소설같이 단정하고 영어 번역처럼 가벼운 글이 있다. 요즘 들어 특히 그런 글들이 많아지는데, 읽고 있으면 텅 빈 껍데기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과 함께 조금 기분이 상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글의 ‘느낌’이 바뀌는 것이 싫었다. 그런데 <문장강화>를 읽으면서 이런 흐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태준은 ‘문체란 사회적인 언어를 개인적이게 쓰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사회적인 언어’가 무섭도록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만큼, 작가들도 언제까지나 과거의 조류를 따르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내 취향에 맞는 작품들 역시 그 이전의 것들과는 많이 다른, 지속적인 변화와 탐구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지금 일반적으로 쓰는 '하였다'도 '도다'나 '하니라'에 불만을 가진 누군가의 발견일 것이다. '거니와'도 고어 냄새가 나면서도, '였지만'에 단조로움을 느껴 새로 많이 쓰이는 새 맛의 토다. (<문장강화> 95쪽)
  당연하다는 듯이 쓰던 말이 예전에는 새로운 발견이라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지금은 읽어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닌 연암 박지원의 문체도 당시에는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연암은 도도한 어조로 당시의 배치를 이렇게 묘파한다. “비슷하다 함은 이미 참이 아닌데” “눈 앞의 일 속에 참된 정취 있거늘 / 어쩌자고 머나먼 옛날에서 찾는가” “사마천과 반고가 다시 살아난대도 / 사마천과 반고를 배우진 않으리라” 어설프게 고문을 본뜨지 말고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삼라만상’에 눈뜨라는 것이다. 사마천과 반고의 문장이 위대한 건 바로 그런 경지를 확보했기 때문인데, 그걸 보지 못하고 그저 베끼기에만 골몰하다니. 그들이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그들은 지금 시대에 맞는 전혀 새로운 문장을 만들지, 예전 자신들이 썼던 문장을 본뜰 리가 없다. 그건 이미 지난 시대의 문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이 천근타 말하지 말라 / 천 년 뒤엔 응당히 높을 터이니.”(<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131쪽)


3. 어휘력
  내가 독후감을 쓸 때 그 책보다도 더 많이 들춰보는 것이 있다. 바로 국어사전이다. (이제는 인터넷 사전을 이용하므로 정확히는 ‘들춰보는’ 게 아니라 ‘찾아보는’ 것이지만.)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단어도 글로 쓰려고 하면 확실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이다. 그래도 그런 경우는 찾아볼 수라도 있어서 다행이지만, 내가 표현하고 싶은 말을 도저히 글자로 떠올릴 수 없을 때는 정말 난감하다. 대부분의 계획이 그렇듯 금방 그만두긴 했지만, 한때는 국어사전을 읽겠다는 원대한 계획도 세웠었다.
  <문장강화>의 저자 이태준과 <유혹하는 글쓰기>의 저자 스티븐 킹 두 사람 모두 어휘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에 생각을 같이 하고 있다. 이태준은 모파상의 말을, 스티븐 킹은 삼촌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를 강조한다. 
  모빠쌍의 말대로 유일어를 찾는 노력을 피해 아무 말로나 비슷하게 꾸려버리는 것은, 자기가 정말 쓰려던 문장은 아니요 그에 비슷한 문장으로 만족하고 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장강화> 90쪽)
 
 “그건 그래. 하지만 말이다, 스티브. 일단 여기 와봐야 또 뭐가 필요할지 알 수 있지 않겠니? 연장은 전부 다 갖고 다니는 게 좋단다. 안 그러면 뜻밖의 일이 생겼을 때 김이 빠져버리거든.” (중략) 가장 많이 쓰는 연장은 글쓰기의 원료라고 할 수 있는 낱말들이다. (<유혹하는 글쓰기> 136쪽)
  물론 나도 깊이 공감하는 바이다. 일단 쓸 말이 떠오르지 않으면 힘듦을 떠나서 아예 글쓰기를 시작할 수가 없다.


  <문장강화>를 통해 이태준은 말한다. 글을 쓸 때는 반드시 느껴지는 바를 적어야 하며, 개념이나 지식은 다 내버려도 좋다고 말이다. 두고두고 곱씹으며 읽을거리가 많은 책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이 말을 깊이 새기고 싶다. 그리고 늘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김 아무개나 이 아무개, 박 아무개…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말만 지껄이고 있는 게 아닌지, 맛없는 글만 쓰고 있는 게 아닌지.

 

아, 오랜만에 열심히 써 보려고 했는데, 잠이 심하게 온다... 슬프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RINY 2006-08-28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후감을 쓸 때 국어사전을 찾아보면서 쓰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감탄*감탄!

明卵 2006-08-31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뜻을 제대로 모르니까 찾는 건데요 뭐..^^ 의외로 제가 알고 있던 뜻과 다른 경우가 많더라구요 ㅇㅅㅇ;

무지개언덕 2006-10-15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정말 모르고 있던, 그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아름다운 우리말이 아주 많음을 알고 놀라게 될 때도 있어요.

明卵 2006-10-15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
어제 알게 된 건데 웃음을 나타내는 말들은 뜻이 참 예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