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길
이철환 지음 / 삼진기획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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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길이라는 제목은 무엇을 의미 하는 것일까. 연탄처럼 시꺼멓지만 따뜻한, 그런 우리네들의 삶을 뜻하는 것일까? 이 제목의 의미를 알면 내용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이처럼 의문을 가지는 것은 단 한가지, 이 책에서 그다지 큰 감동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들의 마지막에 간간이 등장하는 큰 글자로 쓰인 말들은 구구절절이 늘어놓지 않아도 느껴지는 뭔가가 있다.

하지만, 정작 그 큰 글자의 문구가 더 절실히 느껴지도록 해야할 이야기에서는 별 느낌이 없다. 내가 이런 종류의 책들을 많이 읽어서 그런건지는 몰라도, 그저 '아, 그렇구나. 참 안됐네.'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아무래도 나는 감정이 메말랐나 보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별 생각 없이 휙휙 지나갔지만, 나에게 큰 감동을 준 이야기들도 몇편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은, 뭐라고 써낼 수 없는 감동을 준 이야기인 나팔꽃에 대해 써보고 싶다.

'나팔꽃'. 이 이야기에서, 영희의 아버지는 아내가 떠난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매일을 술로 보내며 알코올 중독자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영희의 운동회 전날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 영희와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운동회에 가겠노라고. 아버지는 몇 달만에 머리도 깎으셨다. 즐거워서 총총거리며 걸어가는 영희를 보면서, 분명 그는 아내없이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으리라. 학교로 가는 길가에는 노란 장미가 예쁘게 피어있었다. 영희가 좋아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딸에게 노란 장미를 주고 싶었나보다.
담을 훌쩍뛰어 올라 노란 장미를 한송이 꺾어 주었다. 장미를 연신 코에 부비며 걷는 영희와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자꾸만 땀을 닦아내는 아버지가, 그렇게 길을 걸었다. 학교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뜻밖의 말을 한다.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것. 딸에게 주기위해 노란 장미를 꺾으면서, 그는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른 영희는 술만 마시는 아버지가 싫다고 말한다. 운동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의 얼굴에 하얀 거즈가 붙은 것을 보고 영희는 또 한번 심한 말을 하고 만다.

읽으면 읽을수록 이 두 등장인물의 마음이 나에게 흘러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너무 슬펐다. 아니, 슬펐다기 보다도 뭐라고 표현할지 모르는 가슴 밑바닥에서부터의 아픔, 아릿한 느낌이 나를 울게까지 만들었다. 연일 술만 마셔대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영희가 했을 생각들. 아버지가 영희의 운동회 전날 했을 생각과 분명히 보였을 한줄기 희망. 말끔한 모습으로 영희와 학교로 갈 때 느꼈을 기쁨. 장미를 꺾다가 다쳤을 때의 낭패감. 너무나 기대하고 있는 딸아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한 갈등.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아픔과 감동의 순간들- 도저히 내 감정의 그릇으로는 담아낼 수 없을 것 같이 많은 느낌들이 한 구절, 한 구절에서 전해져왔다.

노란 장미, 하얀 거즈, 빨간 피, 형형색색으로 펄럭이고 있을 운동회의 만국기, 그리고 진홍색의 나팔꽃. 이 화려한 색들이 내 안에서 소용돌이 치는 듯이- 그렇게 느껴졌다. 이것은 감동, 그 이상의 것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정말로 나는 그 어떤 이야기에서도 느끼지 못한 느낌을, '나팔꽃'에서 느꼈다. 이 이야기는 내가 연탄길에서 읽은 최고의 이야기이다.

연탄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도 힘겹게 한발 한발을 옮기며 타들어가는 연탄들이 있다. 붉은 눈물을 흩날리며 검은 몸을 태우는 연탄들이 있다. 겉으로만 보면, 아무도 알 수 없다. 이 연탄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몸을 녹여줄 수 있는지. 나팔꽃을 읽으며, 그 외에도 많은 이야기들을 읽으며 느꼈던 여러 생각들. 나는 연탄이 되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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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여행 1
우리누리 / 대교출판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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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있으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빨주노초파남보, 일곱빛깔 무지개의 색을 가지고 그 색의 고유한 특성이나 그 색을 좋아하는 사람의 성격, 어울리는 직업을 소개해주고, 각각의 색깔의 특성을 가진 동·식물, 별자리, 명화, 보석과 같은 것들을 너무도 세련되게 배치해서 알려준다.

나는 어릴때부터 이 책을 무척 사랑해 왔다. 한 번 읽고, 또 읽어도 새로운 느낌과, 오묘한 색의 조화가 나를 행복하게 했다. 각각의 색깔마다 마련된 코너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단어에서 색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과 보석에 관련된 내용, 그리고 명화이다. 어찌나 머릿속에 잘 들어오고, 아름답게 인식되는지……. 이 책이 없었더라면 나는 일찍이 그림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아이였을 것이다. 색깔별로 소개된 명화가 나를 잡아끌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명화 코너에서는 빨간색은 앙리 마티스의 '붉은 방'을, 주황색은 폴 고갱의 '언제 결혼하니?', 노란색은 빈센트 반 고호의 '누런 밀밭과 사이프러스 나무'를, 초록색은 마르크 샤갈의 '곡예사'를, 마지막 파란색은 P. A. 르느와르의 '우산'을 소개하고 있는데,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나는 그림만 봤지, 내용은 잘 안봤던 것 같다. 만약에 내용을 잘 봤더라면 나는 미술 시험을 더 잘 칠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고? 내가 인상파냐 아니냐를 놓고 고민했던 르느와르와 고호, 샤갈의 작품소개와 함께 그들의 화파가 나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시험을 치기전에 교과서를 들여보는 것 대신 이 책을 한번 더 들여다 봤더라면 행복한 얼굴로 맞출 수 있었을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워진다.

색의 이미지 떠올리기는 내가 정말 사랑하는 코너라고 할 수 있다. 얼마나 적절한 단어들로 색을 표현하는지, 감격스러울 정도이다. 책을 보면, 빨강은 '열렬한 사랑, 더위, 창조, 생명, 태양과 불, 일출과 저녁 노을, 크리스마스, 혁명, 분노, 적극적인 행동'등과 함께 떠올릴 수 있다고 되어있고, 주황은 '기쁨, 힘, 만족, 풍부함, 유쾌함, 앙증맞음, 아기의 하품, 초조함', 노랑은 '명랑한 기분, 귀여움, 깜찍함, 발랄함, 대담한 마음, 희망, 병아리', 초록은 '위로, 젊음, 희망, 초여름, 자연, 어린이, 새싹, 서늘함, 습기, 깨끗함, 숲'등과 떠올릴 수 있으며, 파랑은 '차가움, 깊은 물 속, 바다, 영원, 성실, 호수, 푸른 눈, 푸른 새, 천사의 사랑'을 떠올릴 수 있는 색이라고 한다. 얼마나 멋진 비유인가. 강렬하게 와닿는 단어들 속의 색깔에서, 제시된 색깔을 찾을 수 있는게 너무 신기하다.

마지막으로 보석. 아름답게 빛나는 보석들과 색들의 맛깔스러운 조화가 어떻게 여자 마음을 설레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보석 사진이 자연스레 진열되어 있는 페이지를 보면서, 얼마나 행복함을 느끼는지 모른다. 빠알간 빛을 내는 루비와, 주홍빛의 호박, 찬란한 노란빛을 띄는 토파즈, 부드러운 초록색 빛을 가진 에메랄드, 침착한 분위기를 풍기는 파란빛의 사파이어……. 잘 세공된 금, 은과 함께 왕관에나 박아넣어야 할 것 같은 당당한 풍채를 가진 보석들의 향연이란. 그렇게 화려할 수가 없다. 마치 내가 보석들을 모두 가지고 있는 듯한 기분에 이상하게도 즐거워지는 곳. 그곳이 바로 보석 코너이다.

이 책을 읽으면, 괜시리 색들의 화려함에 휘말려 감성적이 되기도 하고, 즐거워지기도 한다. 얼찌나 명확한 '진짜'색들을 페이지 옆이며 이야기속에 장식을 해대는지, 화려함에서 활력을 얻고 만다. 소설과 같은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 빛깔을 뽐내며 책속에 묻어있는 아름다운 색들은, 나의 마음을 송두리째 가지고 가 버린 주범이랄까.

나는 주황색을 좋아한다. 때로는 노란색도 좋아하고, 하얀색을 좋아했을 때도 있고, 보라색과 노란색의 오묘한 조화를 좋아하기도 했다. 파란색의 차분함도, 초록색의 건강함도 좋아한다. 터져나오는 색깔들의 생각이, 지금 나를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색깔여행이라. 한번쯤 그런 여행을 해 보는 것도 좋지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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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비룡소 걸작선
생 텍쥐페리 지음, 박성창 옮김 / 비룡소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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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어린 왕자를 만난 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꽤나 어렸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몰랐다. 여우, 장미, 그리고 많은 사람들. 그들과 어린 왕자의 만남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이라는 것 자체를 하지 않았다고나 할까. 어린 왕자는 왜 항상 어른들이란 모르겠다고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쩌면 그 어린 나이에 어린 왕자가 '모르겠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어른이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어린 왕자는 내 가슴에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고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그리고 내가 다시 어린 왕자를 만나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어린 왕자는 내가 어릴 때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똑같은 말을 하고, 똑같은 행동을 했다. 어린 왕자는,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내가 어린 왕자의 말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고, 또 감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릴 적에 그를 만났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춤을 췄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흐르는 음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음악소리는 때로는 조용하고, 어떤 때는 경쾌했다. 그 음악소리에 따라, 내 마음이 점점 어린 왕자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어린 왕자는 정말 많은 만남을 가졌고,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그 많은 만남 중에서 내 기억에 가장 남는 만남은, 여우와의 만남이다. '길들이기'. 여우는 이 길들이기를 너무나 감동적인 표현을 사용해가며 설명해 주었다. 여우가 한 말중에서 가장 멋지다고 생각한 말을 아주 조금 떼어서 가지고 와 봤다.

'……넌 금빛 머리칼을 가졌어. 그러니 네가 날 길들이면 정말 근사할 거야. 밀은 금빛이니까 나에게 너를 생각나게 할 테고 그럼 난 밀밭 사이를 스쳐가는 바람소리를 사랑하게 될 거야.……가령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갈수록 난 더 행복해지겠지. 네 시가 되면 벌써 안절부절 못하고 걱정이 될 거야. 그리고 행복이 얼마나 값지다는 걸 발견하게 될 거야.……'

쓰고보니 조금 긴데, 나는 이 여우의 말을 읽었을 때 그만 가슴이 벅차지고 말았다. 슬픈 내용도 아닌데 이상도 하지. 그건 어쩌면 이 속에서 내가 뭔가를 느꼈다는 신호인지도 모른다. 정확히 무엇을 느꼈는지는 나 자신도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두 번째로 기억에 남는 만남은 어린왕자의 사랑스런 장미꽃과의 만남. 어린왕자의 후회를 들을 수 있는 부분이다. 어린왕자가 '그 꽃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했어.……'하며 말하는 것을 읽을 때, 어린왕자의 후회를 너무나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사실, 그 말에서 어린왕자의 생각을 전부 나타내 놓은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생텍쥐베리는 그 절제된 말들 속에서 독자 스스로가 어린왕자의 마음을 찾아내길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도였든, 아니든, 나는 내 나름대로 어린왕자의 마음을 느꼈다.

새침스러웠던 아름다운 그의 꽃. 그가 싹틔운 가시 네 개를 가진 작은 꽃은 어린왕자의 여린 마음을 온통 어지럽혀 놓았음에 틀림이 없다. 그는 종종 장미꽃을 그리워 하며 뭔가를 말했고, 그때마다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어린왕자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내가 애처로와 질 만큼.

어릴 때 만난 어린왕자와 최근에 만난 어린왕자의 다른 모습. 내가 좀더 어른이 되어서 이 책을 읽으면 또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이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아봤다. 소리가 들려온다. 오억개의 방울이 깔깔대며 웃는 소리, 오억개의 도르래 소리가. 어릴 때, 어린왕자는 내곁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떠나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눈을 감은채, 어린왕자를 그려보며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린왕자, 너는 그렇게… 너의 소혹성 B612호로 돌아가는 구나…….'하고. 아쉬움을 감추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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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만화가만을 원해라 - 2002 제10회 대산청소년문학상 수상 작품집 대산청소년문학상 수상 작품집 10
소은혜 외 지음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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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많은 단편들 모두 아주 흥미롭게 읽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다가온 것은 '얼룩'과 '열아홉', '반드시 만화가만을 원해라', '구경꾼'이었다. 네 가지 중에서도 가장 감명깊게 읽은 '얼룩'에 대해서 적어보려 한다.

'얼룩'은 우선, 아는 사람의 글이라는 점이 눈길을 끌어서 제일 처음 읽게 되었다. 내 취향에 꼭 맞는 문체와 왕따라는 소재는 익숙한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얼룩'. 제목이 얼룩이라 읽으면서 계속 얼룩을 찾았지만 얼룩은 한 장을 넘기고 두 장을 넘겨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몇 장. 마지막 장을 잡고 읽는 순간 그 단어, 얼룩은 내 눈에 들어왔다. 열심히 닦아보지만 끝내 지워지지 않는 창문 귀퉁이의 작은 얼룩. 그제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눈에 보이는, 활자로 인쇄된 얼룩을 찾고 있었지만 그 이야기는 애초에 얼룩에 관한 이야기였다.

마치 그 자리에 없는 듯이 세상을 그대로 나타내는 유리창은 교실이었다. 사회였다. 좁은 듯 보이지만 온 몸으로 한없이 넓은 세상을 비추고 있는 것이 유리창이듯, 우리 사회도, 심지어 삼사십명의 학생들의 열기마저 버겁게 수용하는 교실도 좁아 보이지만 한없이 넓은 공간인 것이다. 그리고 그 넓은 공간에 작은 얼룩 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은 매우 드물고 힘든 일이다.

유리창은 열심히 닦으면 닦을수록 쉽게 얼룩이 진다. 멀끔하게 잘 살던,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던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고, 자살을 하고…….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사회가 유리창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왕따당하는 아이인 보미는 얼룩이었다. 이 소설에서 '보미'라는 이름은 이래저래 화제가 되고, 그야말로 줄기차게 나온다. 나는 왜 그 이름이 얼룩이라는 걸 몰랐을까……. 지은이는 보미의 이름을 빌어 얼룩에 대해 쓰고, 끝에 가서야 누가 봐도 얼룩이란 사실을 알 수 있는 유리창의 얼룩을 말함으로써 글을 정리했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소설 제일 처음에 등장하는 낙서의 의미이다. 주인공 미연이와 혜진이가 하고 있었는데 보미가 끼여들었던 낙서. 주인공은 청소시간에 그 못생긴 얼굴 그림을 구겨서 버리려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빳빳하게 펴서 폐휴지 수거함에 버린다. 괴상한 얼굴이 그려진 종이를 팍팍 구기곤 잠시 멈췄다가 열심히 펴서 수거함에 넣는 주인공의 모습이 보인다. 내가 왕따나 당하는 아이와 잠시나마 친구가 되었었다는 사실을 잊고 싶어. 어쩌면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잠시 생각한다. 아니, 그렇지만……. 그 애와의 기억이 서린 그림을 잘 펴서 버린다. 잊고싶지만 구겨서 버릴 수는 없는 보미의 손길이 거친 그림. 다른 종이들에 묻혀도 없어지지는 않는 그 그림처럼 우리의 기억은 없어지지 않는다.

자기중심적이었지만 쾌활하다고 생각한, 얼룩이 아니었던 '보미'의 흔적. 주인공은 왕따라고 해도, 이제는 그녀가 얼룩이라 해도 그 기억이 아무렇게나 처박혀 굴러다니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아이가 인간으로서 어떻든, 왕따라는 말을 들으면 반감이 생기고 함께있고 싶지 않은 우리의 모습을 한 장의 낙서가 보이고 있다. 큰 것을 따르는 우유부단한 실상. 낙서, 잘 펴진 낙서, 잘 펴지고 버려진 낙서……. 이 낙서는 우리의 기억이고, 실상이자 초상이다. 그리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창문의 작은 얼룩과 연관된다. '얼룩'. 심사평에서 말한 것처럼 훌륭한 집중력을 보인 글이었다.

이 책에 실린 당선작들은 학생이 썼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풋풋함을 지니고 있었다. 마치 풋과일같이. 풋과일이란 익지 않은 과일을 가리킨다. 익지 않은 과일의 풋풋함은 때때로 미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40편의 시와 소설은 마음을 다해서 쓴 절실함과 함께 어우러졌기에 사랑스럽고, 아름답다. 가능성이라는 아름다운 날개를 펄럭이며 서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정말로 멋있는 광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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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은 책상이다
페터 빅셀 지음, 이용숙 옮김 / 예담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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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은 책상이다>는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읽게 되었다. 교과서에서 읽었을 때도 생각한 거지만, 글이 굉장히 간단명료하면서 단단하다. 그러나 읽다보면 느낄 수 있으리라, 겉과 달리 속은 의외로 부드럽다.

이 책에 나오는 일곱 개의 단편들은 각각 아주 기이한 행동을 하는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가지고 있다. 그들 모두는 그 '기이한 행동' 때문에 사회에서 고립되어간다. 하지만 누군가가 '미친놈!'이라고 소리칠만한 그들을 작가는 부드럽게 감싸준다. 작가의 문체가 마치 바게트빵처럼 겉은 단단해 보여도 속이 폭신폭신 보드라운 것은 그의 마음이 그 소외당한 사람들을 감싸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작가는 늘 그래왔다. 지구가 정말 둥근지 확인해 보려고 길을 떠난 노인을 기다리고, 말을 바꿔 세상에서 멀어진 남자를 혼자 주목해준다. 콜롬빈의 이야기를 믿어주고, 자신의 발명품들로 가득 찬 세상을 모르고 발명만 한 발명가를 존중해주며 기억력이 좋은 한 남자에게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숫자를 외울 기회를 준다. 말을 할 때마다 요도크, 요도크, 자나깨나 요도크밖에 모르는 할아버지를 아이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애정으로 감싸주고, 마지막으로 아무 것도 더 알고 싶지 않았던 한 남자를 원래 삶으로 돌려보낸다. 보이지 않는 곳, 혹은 보이는 곳에서 작가는 이 기이한 남자들―이 일곱 개 단편의 주인공들은 모두 '남자'다―을 이해하며 따뜻한 시각으로 바라 봐준다.

잘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안으로, 안으로 굴을 파며 혼자가 되려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자폐증 환자처럼 퀭하니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들, 편집증이라도 있는 것처럼 혼자만의 망상 속을 헤엄치고 있는 듯한 눈을 가진 사람들……. 누군가의 생활은 그 물밀 듯 들어오는 정보들에 의해 풍요로워지고, 편리해지고 있다. 그러나 복잡하고 정신없는 오늘날은 수많은 집단들이 있다.

다시 말해, '누군가(some)'라는 집단이 있다면 '다른 누군가(another)'라는 집단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다른 누군가'는 정보가 만든 벽을 치며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어한다. 이들은 정보화 사회가 낳은 희생양일지도 모른다. 구원의 손길이 절실한 이 시대, 페터 빅셀의 따스한 글이, 문자로 표현된 그의 손길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일지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그를 찾은 것도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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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12-06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옷, 이 책 꽤 오랫동안 절판인데도 명란님이 읽었구나 싶어 신기했는데, 교과서에 실렸다니 더욱 놀랍네요. 그런데 리뷰를 봐도, 페이퍼를 봐도, 명란님의 나이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