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만화가만을 원해라 - 2002 제10회 대산청소년문학상 수상 작품집 대산청소년문학상 수상 작품집 10
소은혜 외 지음 / 민음사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많은 단편들 모두 아주 흥미롭게 읽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다가온 것은 '얼룩'과 '열아홉', '반드시 만화가만을 원해라', '구경꾼'이었다. 네 가지 중에서도 가장 감명깊게 읽은 '얼룩'에 대해서 적어보려 한다.

'얼룩'은 우선, 아는 사람의 글이라는 점이 눈길을 끌어서 제일 처음 읽게 되었다. 내 취향에 꼭 맞는 문체와 왕따라는 소재는 익숙한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얼룩'. 제목이 얼룩이라 읽으면서 계속 얼룩을 찾았지만 얼룩은 한 장을 넘기고 두 장을 넘겨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몇 장. 마지막 장을 잡고 읽는 순간 그 단어, 얼룩은 내 눈에 들어왔다. 열심히 닦아보지만 끝내 지워지지 않는 창문 귀퉁이의 작은 얼룩. 그제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눈에 보이는, 활자로 인쇄된 얼룩을 찾고 있었지만 그 이야기는 애초에 얼룩에 관한 이야기였다.

마치 그 자리에 없는 듯이 세상을 그대로 나타내는 유리창은 교실이었다. 사회였다. 좁은 듯 보이지만 온 몸으로 한없이 넓은 세상을 비추고 있는 것이 유리창이듯, 우리 사회도, 심지어 삼사십명의 학생들의 열기마저 버겁게 수용하는 교실도 좁아 보이지만 한없이 넓은 공간인 것이다. 그리고 그 넓은 공간에 작은 얼룩 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은 매우 드물고 힘든 일이다.

유리창은 열심히 닦으면 닦을수록 쉽게 얼룩이 진다. 멀끔하게 잘 살던,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던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고, 자살을 하고…….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사회가 유리창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왕따당하는 아이인 보미는 얼룩이었다. 이 소설에서 '보미'라는 이름은 이래저래 화제가 되고, 그야말로 줄기차게 나온다. 나는 왜 그 이름이 얼룩이라는 걸 몰랐을까……. 지은이는 보미의 이름을 빌어 얼룩에 대해 쓰고, 끝에 가서야 누가 봐도 얼룩이란 사실을 알 수 있는 유리창의 얼룩을 말함으로써 글을 정리했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소설 제일 처음에 등장하는 낙서의 의미이다. 주인공 미연이와 혜진이가 하고 있었는데 보미가 끼여들었던 낙서. 주인공은 청소시간에 그 못생긴 얼굴 그림을 구겨서 버리려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빳빳하게 펴서 폐휴지 수거함에 버린다. 괴상한 얼굴이 그려진 종이를 팍팍 구기곤 잠시 멈췄다가 열심히 펴서 수거함에 넣는 주인공의 모습이 보인다. 내가 왕따나 당하는 아이와 잠시나마 친구가 되었었다는 사실을 잊고 싶어. 어쩌면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잠시 생각한다. 아니, 그렇지만……. 그 애와의 기억이 서린 그림을 잘 펴서 버린다. 잊고싶지만 구겨서 버릴 수는 없는 보미의 손길이 거친 그림. 다른 종이들에 묻혀도 없어지지는 않는 그 그림처럼 우리의 기억은 없어지지 않는다.

자기중심적이었지만 쾌활하다고 생각한, 얼룩이 아니었던 '보미'의 흔적. 주인공은 왕따라고 해도, 이제는 그녀가 얼룩이라 해도 그 기억이 아무렇게나 처박혀 굴러다니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아이가 인간으로서 어떻든, 왕따라는 말을 들으면 반감이 생기고 함께있고 싶지 않은 우리의 모습을 한 장의 낙서가 보이고 있다. 큰 것을 따르는 우유부단한 실상. 낙서, 잘 펴진 낙서, 잘 펴지고 버려진 낙서……. 이 낙서는 우리의 기억이고, 실상이자 초상이다. 그리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창문의 작은 얼룩과 연관된다. '얼룩'. 심사평에서 말한 것처럼 훌륭한 집중력을 보인 글이었다.

이 책에 실린 당선작들은 학생이 썼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풋풋함을 지니고 있었다. 마치 풋과일같이. 풋과일이란 익지 않은 과일을 가리킨다. 익지 않은 과일의 풋풋함은 때때로 미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40편의 시와 소설은 마음을 다해서 쓴 절실함과 함께 어우러졌기에 사랑스럽고, 아름답다. 가능성이라는 아름다운 날개를 펄럭이며 서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정말로 멋있는 광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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