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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ㅣ 비룡소 걸작선
생 텍쥐페리 지음, 박성창 옮김 / 비룡소 / 2000년 5월
평점 :
내가 처음으로 어린 왕자를 만난 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꽤나 어렸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몰랐다. 여우, 장미, 그리고 많은 사람들. 그들과 어린 왕자의 만남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이라는 것 자체를 하지 않았다고나 할까. 어린 왕자는 왜 항상 어른들이란 모르겠다고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쩌면 그 어린 나이에 어린 왕자가 '모르겠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어른이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어린 왕자는 내 가슴에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고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그리고 내가 다시 어린 왕자를 만나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어린 왕자는 내가 어릴 때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똑같은 말을 하고, 똑같은 행동을 했다. 어린 왕자는,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내가 어린 왕자의 말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고, 또 감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릴 적에 그를 만났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춤을 췄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흐르는 음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음악소리는 때로는 조용하고, 어떤 때는 경쾌했다. 그 음악소리에 따라, 내 마음이 점점 어린 왕자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어린 왕자는 정말 많은 만남을 가졌고,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그 많은 만남 중에서 내 기억에 가장 남는 만남은, 여우와의 만남이다. '길들이기'. 여우는 이 길들이기를 너무나 감동적인 표현을 사용해가며 설명해 주었다. 여우가 한 말중에서 가장 멋지다고 생각한 말을 아주 조금 떼어서 가지고 와 봤다.
'……넌 금빛 머리칼을 가졌어. 그러니 네가 날 길들이면 정말 근사할 거야. 밀은 금빛이니까 나에게 너를 생각나게 할 테고 그럼 난 밀밭 사이를 스쳐가는 바람소리를 사랑하게 될 거야.……가령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갈수록 난 더 행복해지겠지. 네 시가 되면 벌써 안절부절 못하고 걱정이 될 거야. 그리고 행복이 얼마나 값지다는 걸 발견하게 될 거야.……'
쓰고보니 조금 긴데, 나는 이 여우의 말을 읽었을 때 그만 가슴이 벅차지고 말았다. 슬픈 내용도 아닌데 이상도 하지. 그건 어쩌면 이 속에서 내가 뭔가를 느꼈다는 신호인지도 모른다. 정확히 무엇을 느꼈는지는 나 자신도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두 번째로 기억에 남는 만남은 어린왕자의 사랑스런 장미꽃과의 만남. 어린왕자의 후회를 들을 수 있는 부분이다. 어린왕자가 '그 꽃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했어.……'하며 말하는 것을 읽을 때, 어린왕자의 후회를 너무나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사실, 그 말에서 어린왕자의 생각을 전부 나타내 놓은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생텍쥐베리는 그 절제된 말들 속에서 독자 스스로가 어린왕자의 마음을 찾아내길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도였든, 아니든, 나는 내 나름대로 어린왕자의 마음을 느꼈다.
새침스러웠던 아름다운 그의 꽃. 그가 싹틔운 가시 네 개를 가진 작은 꽃은 어린왕자의 여린 마음을 온통 어지럽혀 놓았음에 틀림이 없다. 그는 종종 장미꽃을 그리워 하며 뭔가를 말했고, 그때마다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어린왕자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내가 애처로와 질 만큼.
어릴 때 만난 어린왕자와 최근에 만난 어린왕자의 다른 모습. 내가 좀더 어른이 되어서 이 책을 읽으면 또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이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아봤다. 소리가 들려온다. 오억개의 방울이 깔깔대며 웃는 소리, 오억개의 도르래 소리가. 어릴 때, 어린왕자는 내곁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떠나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눈을 감은채, 어린왕자를 그려보며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린왕자, 너는 그렇게… 너의 소혹성 B612호로 돌아가는 구나…….'하고. 아쉬움을 감추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