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OO이의 자기소개서를 퇴고해 주었다.
사실은 OO이가 구랍 29일 저녁에 문자로 자기소개서 쓰는 방법을 좀 가르쳐 달라고 해서, 30일, 방학하는 날에 학교 도서실에서 만났다. 학교 선생님들은 방학을 겸해서 2004년을 정리하는 자리라 송년모임을 가셨고 학교는 텅 비었었다. 자기소개서를 쓰는 방법에 대해 같이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나, 이야기를 시작하다보니 이런저런 온갖 이야기가 다 나왔다. 선생과 학생의 대화가 아니라, 현직 교사와 예비 교사 사이의 인터뷰라고 할까...
언제나 어른스럽고 당찬 학생인 OO이. OO이와는 몇가지 웃긴 해프닝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을 일이 있다.
그 때가 가을쯤이었다. 학생들은 한창 수능준비로 바빴던 것 같다. 그 날도 여느 날처럼 수업이 끝나고 앞자리에 앉은 몇 명의 학생들이 질문을 해 오길래 교탁 근처에서 질문에 답을 해 주고 있었다. 그 때 제일 앞에 앉아 있던 OO이가 일어서며 다른 아이에게 설명하고 있는 나에게 슬쩍 다가와서 가만히 속삭이고는 앞문으로 나갔다.
- 샘, 바지 지퍼 열렸는데요...
처음엔 농담인 줄 알고 웃으며 '그래' 이러고, 설명은 계속하면서 한 손으로 바지 지퍼쪽으로 손을 내렸다. 순간 움찔! 지퍼가 반쯤 내려가 있었다. 순간 얼굴은 빨개지다 못해 하얗게 변했다. 그래도 입으로는 하던 설명을 마저 했기에 다른 학생들은 눈치를 못 챈 것 같았다. OO이가 다시 앞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내가 하던 설명을 계속 하고 있으니까 걱정스러운 말투로 한 마디 더 했다.
- 샘, 아까 제 말씀 들으셨어요?
- 응, 들었어. 그래, 정말 고맙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순간은 참 민망했다. 서둘러 설명을 끝내고 교무실로 돌아오니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OO이에게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나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 -수업 시간에 아이들이 다 듣는 앞에서 짖궂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그 후로도 OO이는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OO이는 그렇게 속이 깊은 아이다. OO이가 이번에 모대학의 국어교육과에 원서를 넣었다. 결과가 좋으면 앞으로 몇 년 후에는 내가 그런 것처럼 한 학교에서 같은 국어교사로 근무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지금은 교사라는 직업을 가지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지금의 제도 아래에서는 학과 공부를 충실히 하면 누구라도 교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좋은 교사가 되기는 정말 어렵다. 물론 '좋은' 이라는 형용사는 다양하게 정의내릴 수 있기 때문에 사람마다 의미가 다르겠지만, 어렵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좋은 선생님-아이들을 사랑하고, 잘 가르치고, 헌신적인 선생님-이 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OO이에게서 좋은 선생님의 싹을 본 오늘 기쁜 날이다. 내일 심층면접을 보는 OO이에게 게으름부리지 않고, 지금껏 공부해 온 노력의 결과가 한껏 나타나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