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

 

- 김진경

 

새벽이 가까이 오고 있다거나

그런 상투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겠네.

오히려 우리 앞에 펼쳐진

끝없는 사막을 묵묵히 가리키겠네.

섣부른 위로의 말은 하지 않겠네.

오히려 옛 문명의 폐허처럼

모래 구릉의 여기저기에

앙상히 남은 짐승의 유골을 보여 주겠네.

 

때때로 만나는 오아시스를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사막 건너의 푸른 들판

이야기하진 않으리.

자네가 절망의 마지막 벼랑에서

스스로 등에 거대한 육봉을 만들어 일어설 때까지

일어서 건조한 털을 부비며

뜨거운 햇빛 한가운데로 나설 때까지

묵묵히 자네가 절망하는 사막을 가리키겠네.

 

낙타는 사막을 떠나지 않는다네.

사막이 푸른 벌판으로 바뀔 때까지는

거대한 육봉 안에 푸른 벌판을 감추고

건조한 표정으로 사막을 걷는다네.

사막 건너의 들판을 성급히 찾는 자들은

사막을 사막으로 버리고 떠나는 자.

 

이제 자네 속의 사막을 거두어 내고

거대한 육봉을 만들어 일어서게나.

자네가 고개 숙인 낙타의 겸손을 배운다면

비로소 들릴 걸세.

여기저기 자네의 곁을 걷고 있는 낙타의 방울소리.

자네가 꿈도 꿀 줄 모른다고 단념한

낙타의 육봉 깊숙이 푸른 벌판으로부터 울려나와

모래에 뒤섞이는 낙타의 방울소리.

 

김진경,『갈문리의 아이들』, 청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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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소나무

 
- 김광규

 

새마을 회관 앞마당에서

자연 보호를 받고 있는

늙은 소나무

시원한 그림자 드리우고

바람의 몸짓 보여주며

백여 년을 변함없이 너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송진마저 말라 버린 몸통을 보면

뿌리가 아플 때도 되었는데

너의 고달픔 짐작도 못하고 회원들은

시멘트로 밑동을 싸 바르고

주사까지 놓으면서

그냥 서 있으라고 한다

아무리 바람직하지 못하다 해도

늙음은 가장 자연스러운 일

오래간만에 털썩 주저앉아 너도

한번 쉬고 싶을 것이다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기에

몇 백 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너의 졸음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백여 년 동안 뜨고 있던

푸른 눈을 감으며

끝내 서서 잠드는구나

가지마다 붉게 시드는

늙은 소나무

 

* 지난 주말 빗속을 뚫고 경북 영덕의 칠보산 자연휴양림, 울진의 불영사, 소광리 금강소나무 숲을 다녀왔다. 불영사로 들어가기 전 잠시 들렀던 행곡리 처진 소나무를 보며 떠오른 시 한 편. 마침 지난 주 수업시간에 읽었던 시인데, 행곡리 처진 소나무를 보니 바로 생각이 났다. 늙어간다는 것은 자연의 법칙인데, 인간만 늙지 않으려고 애쓴다.

* 행곡리 처진 소나무의 모습은 http://blog.aladin.co.kr/happyteacher/4162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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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에게

 

  -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열림원, 1998 

 

   어제 우리 학교에서 시낭송 축제를 했다. 전라북도 모악산 자락에 혼자 사시다 몇 년 전에 지리산 근처의 하동 악양으로 이사한 박남준 시인도 먼길을 달려오시고, 학생들이 준비한 시 낭송, 시 노래, 시 연극, 유씨씨 등을 곁들여서 소박하지만 가을밤에 어울리는 축제였다. 우리 동아리 학생들도 어줍잖게 참가를 하게 되어서 긴장 반, 설렘 반으로 공연을 지켜봤다. 그러다가 2학년 학생들이 정호승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수선화에게'를 부르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갑자기 눈물이 살짝 날 것만 같았다.  

   동아리 지도 선생님께서 피아노 반주에 맞춰 시를 낭송하시고, 대여섯 명의 학생들이 이어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반주가 이어지는 가운데 노래를 불렀던 OO이가 미리 써 온 짧은 시 감상문을 읽었다. - 읽은 내용 중에 약하고 여린 존재거나, 강하고 굳센 존재거나 모든 존재는 외롭다고 시인은 말한다.... 이런 구절이 있었는데 이상하게 그 말이 마음 속을 쑥 밀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 전부터 눈가가 살짝 빨개지기는 했지만! 

   우리 동아리의 공연도 무사히 끝났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안치환의 '수선화에게'를 들었다. 페이퍼에 담아두려고 검색했으나 유튜브에는 가수 양희은이 부른 영상이 하나 있는데, 퍼오기가 안 되는 것 같았다. 이틀 동안 이 노래가 머리 속에서 맴돈다. 

   행복한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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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0-24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때때로 유튜브가 불안정한 것 같아요~

전 안치환 이 앨범에서,'풍경달다'라는 곡을 참 좋아해요.
행복한 가을이라고 하실 수 있다니...참 부럽습니다.



느티나무 2010-10-25 10:15   좋아요 0 | URL
그 노래도 들어봐야겠네요. 아무튼 지난 주말과 휴일은 그 노래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행복한 가을'은 뭐... 전 꼭 가을이 아니더라도 대체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인지라...(원래 별 생각이 없는 사람이 그렇지 않을까요?)
 

길 

 

- 도종환   

 

우리 가는 길에 화려한 꽃은 없었다. 

자운영 달개비 쑥부쟁이 그런 것들이 

허리를 기대고 피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빛나는 광택도 

내세울 만한 열매도 많지 않았지만 

허황한 꿈에 젖지 않고 

팍팍한 돌길을 천천히 걸어 

네게 이르렀다 

 

살면서 한 번도 크고 억센 발톱과 

쩌렁쩌렁 울리는 목청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귀뚜라미 소리 솔바람 소리 

돌들과 부대끼며 왁자하게 떠드는 여울물 소리 

그런 소리와 함께 살았다 

그래서 형제들 앞에서 자랑할 만한 음성도 

세상을 호령할 명령문 한 줄도 가져보지 못했지만 

가식 없는 목소리로 말을 걸며 

네게 이르렀다 

 

낮은 곳에는 낮은 곳에 어울리는 목소리가 있다 

네 옆에 편안히 앉을 수 있는 빈자리가 있다 

 

- 해인으로 가는 길, 문학동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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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 징계를 앞두고 

 

노영민 (부산 사직고 교사)

 

그간 행복이 참 많았다
빠지는 달 없이 월급 통장에 꽂혔고
그 돈 빼내어 맛있는 것 해먹고 옷 사입고
가고 싶은 곳 가고
아이대학에도 보냈다
크게 아픈 일 없었고
한데로 밀려나 산 적도 없었다


그간 행복이 참 많았다
가르치는 일 마친 퇴근길
성지곡 삼나무 길 걷고, 보듬고
호수에 그림자 담그고 막걸리도 마셨다
버스는 어김없이 내 앞에 서주었고
잘 다녀오세요,
아침에 배웅했던 아내는
여보 왔어요,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제 조금 힘든 일이 생겼다
마음에 둔 정치인에 몇 푼 후원한 일이 죄가 되는
세상,
그것이 해임과 파면의
사유가 되는 시대
학교를 잠시 떠나야 할 일이 생겼다
수업 시작하기 앞서 “휴지 주워라”, 그 말 못 하게 될 일이 생겼다


잠시 통장에 돈 꽂히는 일이 멈추고
돈 빼쓰는 일이 조심스러워질 것이다
“노영민 선생님 안녕하세요?”
언제이름을 부르며 인사하는 특수반 현오를 못 보게 될 것이고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그늘보다 먼지 나는 운동장을 더 좋아하는 아이들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조금
고통스러운 일이 생겼다

고통이 곧 불행은 아님을 나는 믿는다
성지곡 삼나무는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고
운동을 마친 아이들은 여전히 수돗가 물을 덮어쓸 것이고
집의 문은 나를 위해 열려 있을 것이다


예기치 않은 힘든 일로
가족들은 더 단단히 묶이고
자식들은 스스로의 성장을 촉진하게 될 것이다
이해해주시는 늙은 아버지, 장모님께는 내 몸을 더욱 가차이 기댈 수 있을 것이다


그간 행복을 행복이라고 느끼지 못할 만큼 행복이 많았다
고통이 곧 불행이 아님을 믿는 나는
살아 있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축복
고통은 행복의 감수성을 키우고
삶에 대한 환희와 감사의 마음을 벼리는 기회가 될 것임을 믿는다
새로운 행복의 씨앗이 될 것임을 믿는다  


6.30 전교조 공무원 노조 힘내라, 지키자 민주주의! 부산시민대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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