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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Road -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박준 글.사진 / 넥서스BOOKS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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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가 처음 국외 여행을 간 곳이 바로 태국, 방콕이었다.  돈무앙 공항에 내려서자 후덥지근한 바람, 눅진하고 매캐한 공기가 나를 반겼다.  이 책은 마치 그때의 공기와 바람이 닿는 듯 했다.  뭔가 이질적인 분위기, 낯선 것이 주는 설렘과 같은.

  카오산 로드.  배낭여행자의 성지라고 불릴 만큼 많은 배낭여행객이 있는 곳이다.  그 곳이 태국의 방콕일 뿐, 온 인류의 집합소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카오산 로드의 풍경을 이 책을 통해 들여다보게 되니 참 반가웠다.

  저자 박준 씨의 저서는 <네 멋대로 행복해라>에 이어 <On the Road> 이 책이 두 번째이다.  이 책은 참 오래전부터 보고 싶었던 책인데 이제야 보게 되었다.  그때도 카오산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마구 설레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지금 역시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내가 이 세계 수많은 나라를 여행한 것은 아니지만 몇 나라들을 여행해 보았는데 나는 태국이 가장 좋다.  먼가 정감이 넘치는 나라였다.  태국이 미소의 나라라는 말도 있는데 이 부분은 아직 잘 모르겠다.  내가 만난 태국인은 아주 잘 웃거나 전혀 웃지 않거나 했기 때문이다.  (사실 어느 나라든 그렇긴 하지.  모두 웃을 수는 없고 모두 찡그릴 순 없지)  그러나 웃음 지은 그들은 정말 인상적이리만큼 활짝 웃었다.  그 미소를 본 누구나라면 무뚝뚝한 얼굴의 태국인보다 그들의 얼굴이 훨씬 태국인의 얼굴을 대표할 수 있을 만큼 각인이 될 것이다.

  이 책은 태국인들을 만날 수는 없었다.  방콕 카오산 로드를 여행 중인 한국인을 포함한 외국인들과의 인터뷰가 실린 책이다.  내가 만나지 못할 또 다른 이들과의 만남, 그리고 그들과의 대화는 참 즐거웠다.  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고 가치로운 생각을 공유할 수 있어서 말이다.  무엇보다 여행자에게서 배어 나오는 삶의 여유와 편안함이 너무 좋다.  다양한 사람들만큼 사연도 다양하다.  학교를 무단결석하고 여행을 왔는가 하면 아예 자퇴를 해버린 경우도 있었다.  아무리 여행이 좋아도 나는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취할 용기도 없거니와 내 입장에서는 이것이 옳으리라 생각되진 않는다.  이렇게 누군가와의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 또 생각해볼 문제들, 한 번도 염두에 두지 않았던 부분들에 대해 스스로와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박준 여행 인터뷰 집에서 항상 같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게 뭐냐면, 왜 외국인과의 인터뷰에서는 반말로, 한국인과의 인터뷰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높임말로 기술될까?  외국인은 저자보다 나이가 어려도 반말로 기술되고, 한국인은 저자보다 어리다 하더라도 존댓말로 기술된다.  예를 들어 "이번 여행 어때?" 하고 질문을 했을 때 한국인의 경우는 "참 좋은 것 같아요.  즐거우니까요" 라고 기술하고 외국인의 경우는 "참 좋아.  즐거우니까" 라고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 이 둘은 달라야 할까?  여기서 외국인은 대부분 서양인인 것을 봤을 때 저자는 서양이 동양보다 당당하고 자주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나는 이러한 표기가 동서양, 엄밀히 말해, 한국과 서양인을 나타나는 문체의 하나라고 생각진 않는다.  저자의 편견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왜 한국인은 항상 조심스럽고 겸손할까?  왜 서양인은 모두 당당하고 자기 주관이 강할까?  혹자는 반말과 높임말에 있어 독자인 내가 편견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닐지 되물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 반말과 높임말은 뉘앙스가 상당히 달라진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마치 규칙처럼 반말과 높임말을 나누어 적용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의식적인 뉘앙스를 싣고자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것이 그의 무의식 중에 생기는 일이라면 이러한 편견은 없어야 되지 않을까?  이점이 가장 안타깝다.

  위와 같이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여행기는 항상 어디든 떠나고 싶게 하고 또한 진정 떠나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 같다.  세상 속에서 세계인을 만나는 여행기, 박준 책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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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키드 :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하는 40가지 이유
코린느 마이어 지음, 이주영 옮김 / 이미지박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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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하는 40가지 이유’ 라는 부제가 붙은 <NO KID>  출간 당시 굉장히 쇼킹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 읽어봐야지, 봐야지 하다가 잊어버리고 며칠 전 갑자기 생각이 나서 이제야 읽게 된 책이다.  참고로 나는 부부의 인생에 있어 아이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뒤에 가서 더 이야기하겠지만 나는 ’결혼은 안 할지언정 아이는 반드시 낳아 기르고 싶다’는 망측한 발언을 처녀시절 엄마 앞에서 하고 온 집안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그만큼 아이가 좋고 아이란 인생에서 가장 축복받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하는 40가지 이유’라니.  대체 어떤 이유로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프롤로그, ’이 책은 앞으로 부모가 될 사람들의 사기를 꺾어놓고자 집필되었다(p.20)’한다.  솔직히 겁났다.  ’이 책이 지나치게 설득력이 있어서 내가 아이없는 삶도 괜찮겠구나’ 하고 불온한 사상을 갖게 되지는 않을까 싶어서.

  그런데 다 읽어 본 결과, 어느 하나 내 맘을 움직이는 대목이 없었다.  저자가 아이를 낳기 싫어하는 이유는, 단지 ’자신’ 때문이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 임신과 육아의 과정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저자에게 나는 반문하고 싶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라면 세상은 어떻게 살아가냐고’  일단 그 40가지 이유를 한 번 살펴보자.  다음과 같다.

  01. 다른 사람들이 원해서 아이를 갖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02. 출산은 고통이다.
  03. 걸어 다니는 젖병이 되지 마라.
  04. 점점 할 수 없는 일들이 늘어난다.
  05. 사무실에서 40시간, 아이에게 30시간, 총 70시간 노동
  06. 친구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라
  07. 아이들이 하는 바보 같은 언어를 배우지 마라.
  08. 둘이 더 좋다.
  09. 아이는 성욕을 죽이는 존재다.
  10. 아이가 생기면 부부 생활도 끝이다.
  11.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느냐, 아니면 부모의 역할을 다 하느냐를 선택하려 하지 마라.
  12. 아이는 천성적으로 잔인한 악동이다.
  13. "우리 엄마는 직업이 없어"
  14. 아이는 너무 비싸다.
  15. 자본주의의 둘도 없는 친구
  16. 아이를 집중시키기는 어려워
  17. 최고로 힘든 부모의 노동
  18. 이상화된 아이의 모습에 속지 마라.
  19. 아이 때문에 실망할 날이 반드시 오리라.
  20. 전업주부가 되는 건 끔찍해.
  21. 무엇보다 부모의 역할이 우선이라고? 아니, 사양하겠어요!
  22. 아동 전문가의 계획을 가로막아라.
  23. 가정이 무서워.
  24. 키덜트가 되지 마라.
  25. ’무엇보다도 내가 우선이에요’ 라고 굽히지 않고 말하는 당신은 용감하다.
  26. 아이는 젊은 시절의 꿈을 산산조각 낸다.
  27. 아이의 행복만을 위해 살게 될 것이다.
  28. 진드기 같은 존재
  29. 학교는 타협을 봐야 하는 처벌 수용소
  30. 아이를 기르는 건 무엇을 위해서지?
  31. 너그러운 중입적 태도를 버려라.
  32. 부모는 늘 달콤한 노래만 불러야 하는군.
  33. 모성이라느 모든 여성을 옭아매는 덫이다.
  34. 엄마가 될 것이냐, 아니면 일에서 성공할 것이냐.
  35. 아이가 생기면 아버지의 존재는 사라진다.
  36. 요즘 아이는 완벽하다.
  37. 위험한 아이를 조심하라.
  38. 미래에 소외될 텐데 왜 사서 고생을 하는가?
  39. 이 땅엔 아이들이 너무 많다.
  40.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지켜야 하는 우스꽝스러운 십계명 따위는 무시하자.

  몇 가지나 공감이 되는가?  미안하지만 나는 전혀 단 한 가지도 공감하지 못하겠다.  사실 공감되는 항목이 몇 가지 있기는 하나 이 책을 읽어보고 나서는 그 극단적임과 외곬적인 해석을 인정할 수 없기에 단 한가지도 공감하지 못하겠다.  저자는 아이를 낳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기에 육아와 엄마의 역할에 있어 혐오를 금치 못하는 대목들에서는 누군지도 모를 그 아이가 내내 불쌍해 혼났다.  아기의 모습은 혐오스럽고 끔찍하며 출산은 아플 뿐 아무런 아름다움이 없다니.  물론 서로의 생각이 다를 수 있으니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 마음을 가진 부모 아래 자녀가 사랑받으며 살 수 있을까?  차라리 저자는 영영 아이를 낳지 말아야 했다.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할 이유라는 항목들은 억지스럽고 그 억지스러운 주장을 계속하기 위해 아주 치졸하게 임신과 육아를 반대하고 있다.  몇 가지 굵직한 개념들만 반박해보자.  물론 저자의 주장에 대한 내 주관적인 생각이다.

  육아는 단순히 일일 뿐인가?  육아는 일이기만 한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 안에서 아이에게 감동받을 수도 있고 아이를 통해 세상의 가치들을 깨닫기도 할 것이다.  육아가 고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오로지 일만으로 보는 것은 아이를 통해 삶을 살아감으로 얻게 되는 숨은 매력을 전혀 보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둘이 더 좋다?  아이가 생기면 부부 생활도 끝이다?  오로지 남편과 단둘이 사는 삶이 더 좋기만 할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이를 닮은 자식을 낳고 그 아이를 바라보며 함께 느끼는 행복도 물론 있을 것이다.  아이가 생기면 부부 생활도 끝이라고?  예전만큼 둘 만의 시간을 갖기는 힘들겠지.  그러나 그렇다고 ’끝’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다.  아이가 자라고 나서도 부부 둘 만의 시간을 가질 시간은 우리 인간의 인생에서는 충분히 있다.  다 늙어빠져서 그 때 뭘 하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저자는 언제나 젊기만 하리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리고 젊어야만 사랑할 수 있고 서로가 즐거움을 나눌 수 있다는 발상 자체도 우습다.  

  아이는 천성적으로 잔인한 악동이라고?  짧고 간략하게 말하면 그건 당신이 아이를 제대로 들여다본 일이 없기 때문이고 당신 자신이 천성적으로 잔인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지.  

  아이 때문에 실망할 날이 반드시 오리라.  이 땅의 모든 엄마들을 저주하고 있는 듯해 기분이 나쁘다.  당신은 아이로 인해 단 한 순간도 감동과 기쁨을 느끼지 못하겠지.  때때로 아이에게 실망하는 것보다 아이로 인해 아무런 감동이 없는 삶보다 지독하지는 않을 것 같다.  

  ’무엇보다 내가 우선이에요’ 말하는 자는 용감하다고?  아이로 인해 엄마의 인생을 팽개치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인생에서는 희생이라는 것도 있고 돌봄과 섬김의 시간들도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우선이라고 하는 것은 이기적인 발상이다.  

  아이의 행복만을 위해 살게 될 것이라고?  그건 어디까지나 아이와 나를 완전히 분리된 객체로 보았을 때다.  다시 말해, 아이를 기르며 사는 삶에서 아이로 인해 행복을 느끼는 순간도 있다는 말이다.  가족이라는 것은 비로소 하나가 되는 것이기에 모든 일과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는 감정의 끈을 갖게 된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엄마가 될 것이냐, 일에 성공할 것이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극단적인 양자택일의 경우는 또 뭐람?  엄마도 될 수 있고 일에 성공할 수도 있고 엄마가 되고 일에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둘은 하나를 택하면 하나를 반드시 버려야만 하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마치 엄마가 되기를 택하면 당신의 인생은 실패할 것이라고 매도하고 있다.  전혀 논리적이지도 못하고 설득력이 없다.

  그 밖에 항목들 역시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 책은 단지 도발적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 책은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하는 40가지 이유가 아니고 저자가 ’아이를 싫어하는 40가지 이유’일 뿐이다.  기고만장한 글의 시작과는 달리 글은 도무지 논리적이지 못하고 설득력이 없다.  또한 모든 상황들을 충분히 고려하고 하는 말이 아니고 배려가 없는 직감적인 말들이다.  그렇기에 일부 공감 정도면 감지덕지할 것이고 이런 글로 전적인 공감을 얻어내기에는 절대 부족이다.  왜 안 그럴까?  이 세상에는 오로지 나뿐인 사람이 보살펴야 하고 돌봐야 하고 나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성가신 존재를 어떻게 감히 감당할까?  아니 아이뿐 아니라 자신의 앞길에 조금이라고 거치적거리는 대상을 모조리 경멸하고 기피하지는 않을지.  

  생명을 잉태하는 신비로움과 사랑의 대상을 빼닮은 또 하나의 존재로 인해 힘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감동하고 그로 기쁨도 느끼며 비로소 인생에서는 희생과 봉사도 있음을 알고 아이와 남편으로 더불어 다양한 감정들을 공유하며 사는 삶.  이것이 인생이 아닐까 말이다.  오늘같은 저출산 시대에 이 책이 제대로 쓰였다면 금서가 될 뻔 했다.  그러나, 전혀.  그럴 가치나 그리될까 염려할 필요가 없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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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이들 - ADHD 꼬리표 붙이기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 지음, 조응주 옮김 / 민들레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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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유치원 교사로 ADHD에 관심이 많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중 ADHD가 의심되는 유아도 몇 명이 있었고 최근 어린이 ADHD가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ADHD 과연 이 아이들은 왜 그런 것이며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며 어떻게 이해해주어야 할지 도움을 얻고 싶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은 ADHD 아이들에게 약물치료를 하는 것을 엄중히 반대하고 있는 책이다.  ADHD 아이들 중 리탈린이라는 약을 복용 중인 아이들을 ’리탈린파’라고 부르기도 하며 이러한 처방은 절대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이에게 ADHD라는 질병을 낙인찍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단지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이들’이라고 볼 뿐이다.  그리고 이 아이들에게 맞는 교육법은 따로 있으나 학교와 교사가 단순히 지도하기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아이에게 약물을 집어넣고 온순하게 만들려고 하나 아이들은 그 모든 분노와 불안을 속으로 표출할 뿐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리탈린이라는 약물이 아이에게 치명적인 여러 부작용을 초래한다고도 말한다.

  최근 TV에서 ADHD 어린이들만 생활하는 전문학교가 소개된 적이 있다.  이 책 역시 ADHD 어린이들이 생활하는 전문학교였는데 TV에 방영된 내용과 너무 비슷한 구조와 학습지도가 이루어지고 있어 같은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이들이 이 학교에서 생활하게 되면 일부러 일반 학교의 규율에 억압받을 일도 없고 아이에게 많은 놀이의 경험을 줌으로 더 많이 움직이는 산만한 아이에게 에너지를 분출할 기회를 주고 긍정적인 자기관을 갖게 하고 더 나아가 선택학습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집중도를 높여가는 수업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나도 ADHD 아이를 지도해 본 일이 있는데 솔직히 힘든 게 사실이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며 그 아이로 인해 모든 수업 분위기가 엉망이 됨은 물론 계속 눈여겨보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온 신경이 곤두선다.  그저 ’정말 못 말리는 말썽쟁이’ 인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러한 교사들의 시각이 아이들을 학교에서 내쫓고 있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학교에 맞추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학교가 아이에게 맞추어 주어야 한다고.  이 대목에서 우리 교사들의 ADHD에 대한 인식이 막연히 부정적이고 그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좀 더 눈과 마음을 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정말 친환경적이고 자연스러운 치료를 권하는 책이다.  말 그대로 약물을 거부하고 놀이만으로 아이들을 치료하는 학교란다.  문제 행동이 다분했던 아이들이 이 학교에 적응하고 에너지를 분출하고 성취감을 얻는 모습들은 참으로 훌륭했다.  모두 자신과 비슷한 아이들이기 때문에 아이는 각별히 지적받던 일상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반감되는 것이다.  정말 아이를 위한 학교 기관이라는 인상이 들었다.  ADHD 어린이뿐 아니라 모든 학교가 이렇게 아이들이 흥미롭고 즐겁게 학습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은 ADHD 자녀를 둔 부모라면 리탈린이라는 약물 투여로 치료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약물을 대체할 수 있을만한 전문 학교 기관이 아직은 없다는데 있다.  다시 말해, ’약물이 아니다’ 라는 것을 알고도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 학교 사례뿐 아니라 ADHD 어린이들을 약물없이 치료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들이 진행 중이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도 단순히 아이의 기운을 빼버리는 약물 투여를 치료의 한 방법으로 고집할 게 아니라 전문학교 기관이라던지 이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치료 프로그램 개발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이 책은 에세이 형식으로 ADHD 아이들의 일상을 담고 있는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렇게 약물없이 치료를 하는 아이들이 얼마의 기간이 지나 호전되기 시작하는지, 아니면 졸업을 한 어린이들은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등.  좀 더 눈으로 신뢰할 수 있는 연구결과라던지 수치들을 증빙자료로 게재해두었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학술을 뒤엎고 그에 반하는 이론을 주창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다.  이런 경우 확연히 차이를 보이는 결과는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관심이 갈만한 수치들은 제시되어야 한다.  그런 것이 없이 ’약물없이 치료해야 한다’ 라고 한다면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이 학교가 앞으로는 이런 연구에 게을리하지 않아 수치화하는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학계에서도 관심을 갖게 될 것이고 과연 그러한지를 밝히려는 연구들이 또 이어질 것이다.  그제야 ADHD를 보다 명확하게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고 치료 방법 또한 연구, 개발되리라 본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정보들과 연구나 새로운 시도에 발 빠르게 움직였으면 좋겠다.  이 학교의 효과가 입증되고 이러한 교육이 ADHD 아이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 명확해진다면 ADHD 어린이를 치료하는 데 있어 새로운 지평이 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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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보다 나를 더 사랑한다 - 아이보다 더 아픈 엄마들을 위한 심리학
신의진 지음 / 걷는나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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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잘 사는 것만 같던 한 친구가 내게 충격적인 얘기를 했다.  "첫 아이를 낳고 아파트 창 밖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데 순간 뛰어내리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  그런 생각이 몇 번 더 들었어"  정말 충격이었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자살.  내 친구도 그런 생각을 했다는데 나는 너무 놀랐고 가슴이 계속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 내가 놀란 반응을 보이는 것이 무안하지 않을까 싶어 "야! 애 없는 나도 그런 생각 들 때가 있는데 처음 엄마가 된 넌 오죽했겠니. 그럴 수도 있지" 라며 대충 말을 맺었다.  그리고 바로 "이제는 그런 생각 안 들지?" 라고 묻자 "애 고생스럽게 다 키워놓고 내가 미쳤니? 내가 그때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몰라" 하고 완벽하게 과거형으로 답하자 그제야 벌렁 이던 심장이 조금씩 안정되었던 적이 있다.

  임신 우울증, 산후 우울증 참으로 많은 우울증의 종류들이 여자, 그중에서도 엄마들에게 발병한단다.  산후 우울증을 앓는 여자들에 대한 다큐를 티뷔에서 본 일이 있고 한 엄마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강물에 던져버린 엽기적인 사건도 알고 있다.  ’세상에~ 가장 귀한 선물을 받은 엄마가 왜 우울하고 왜 저 지경이 되는 거야?’ 하며 이해 못 할 일이라는 나도 서서히 생각이 달라졌다.  ’그럴 수 있어.  그래서는 안되지만 그러고 싶을 수는 있어’ 라고 말이다.  

  한 가정에 귀한 딸로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잔뜩 받고 살다가 자기를 바라볼 때 눈이 하트가 되는 남자를 믿고 결혼을 하고 사랑의 결실인 아기를 갖는다.  임신으로 직장을 그만두는 산모도 있지만 부른 배를 부둥켜안고 온갖 졸음과 피곤을 뒤로하고 임신하지 않은 여자처럼 아등바등 직장생활을 하는 산모도 있다.  ’임산부지만 전과 같이 똑같이 일할 수 있다’는걸 보이기라도 할 기세다.  퇴근해서도 쉴 수 있는 게 아니다.  남편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좀 더 쉴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지 그녀들을 완전하게 휴식하지 못한다.  배는 점점 불러오고 날씬하게 허리를 감싸던 옷들은 장롱 속에 집어넣고 펑퍼짐한 원피스에 쫄바지 하나가 그녀들의 패션의 전부다.  어째 살도 좀 붙은 것 같고 얼굴도 보름 달이다.  처녀적 예쁘던 그 모습은 다 어딜 갔는지.  그녀들을 그렇게 비로소 아줌마가 되어간다는 사실이 마냥 편하게 받아들일수만은 없다.  그렇게 열 달을 배에 품고 낳고 보니 이렇다 저렇다 말도 없이 빽빽 울어대는 애를 이리 어르고 저리 어르고 귓가에는 애 울음소리로 쟁쟁하고.  퇴근한 남편은 오랜만에(아침 출근 전에 보고 퇴근 후에야 보니 오랜만이지) 보는 아기라 이쁘다고 난리다.  그래놓고 잠들면 새벽에 애가 죽어라 울어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잔다.  엄마는 또 일어나 아이를 달래고 안아주고 보니 코까지 드렁드렁 고는 남편이 미워 죽겠다.  ’아이는 나 혼자 낳았나’ 싶고 ’지금 잠이 오나’ 싶고 나 하나를 공주같이 떠받들던 남편이 이제는 나 몰라라 하는 것에 화가 치민다.  제법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고 해오던 직장도 관두고 육아에 전념하기로 결심한 엄마는 눈물이 난다.  내가 왜 이렇게 됐나 싶어서.  이제는 무릎 나온 바지가 주된 패션이고 가슴에 지퍼가 가로 놓인 모양 안 나는 수유복만 입고 머리를 산발한 채 화장기 없이 앉아 있다.  아이는 자라며 엄마의 은혜를 알기는커녕 머리가 좀 굵어졌다고 ’내 인생에 간섭하지 마세요’ 하고 막말을 하며 엄마를 외면한다.  

  이 땅의 모든 엄마들이 이렇게 우리를 길렀다.  정말 암담하다.  이게 우리 초짜 엄마들의 모습이다.  나는 엄마가 아니라 아직 이들의 삶을 그냥 이해만 할 뿐 체험해보지 않았기에 모른다.  그러나 나라도 절망의 순간에 여러 번 놓일 것 같다.  물론 ’내 남편은 그렇지 않을 거야’ 하고 믿기도 하고 그렇게 소망해보기도 하지만 사랑만 받고 살던 내가 한없이 사랑을 주고 보살핌을 주는 입장이 된다는 것이 어쩌면 속상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아이에게 칸이고 쓸개고 다 꺼내주고 오로지 아이만을 위해 산다.  그러다 보니 그녀들을 아프다.  마음도 아프고 몸도 아프고....  결론적으로 행복을 위해 희생했던 자신의 삶은 전혀 행복하지 않다.  행복하지 않은 엄마 아래 자라는 아이 역시 행복할 리 없고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 신의진 교수의 말이다.  듣기로는 신의진 교수의 소아정신과 상담 예약이 향후 3년까지 모두 찼다고 한다.  이 말은 무슨 말일까?  이만큼 아픈 아이들이 많다는 얘기다.  이렇게라도 줄 서서 어떻게라도 해봐야 할 부모들이 3년치 분량 이상 있다는 얘기다.  끔찍한 이야기다.  엄마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엄마, 똑같이 사랑받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한 그녀의 자녀들.  신의진 교수는 100점짜리 엄마가 아니라 80점짜리 엄마가 되라고 한다.  완벽할 필요 없고 완벽할 수도 없다는 얘기다.  그저 좋은 엄마 정도이면 되는거다.  내 인생을 이 아이에게 올인한다고 내 인생 더불어 아이의 인생까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엄마가 될 사람이 자신의 부모에게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그것을 풀고 임신하라고도 권한다.  엄마는 자신도 모르고 자신의 부모가 했던 아픈 기억들과 닮은 행동을 자신의 자녀에게도 하게 된다는 말이다.  마치 고리처럼 주렁주렁 비슷한 삶이 답습된다는 얘기다.

  엄마와 아이, 비로소 둘이 분리되는 첫 단계는 출산이다.  그리고 탯줄을 자른다.  그러나 둘은 결코 각 각이 아니다.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아이의 탯줄은 출생 후에도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닐까 말이다.  그렇기에 엄마의 감정과 기분과 행동이 아이의 모든 성격과 학습행동에도 드러나고 고스란히 엄마의 감정들과 행동들을 전달받는다.  그러니 아픈 엄마의 아이는 자연히 아플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의진 교수는 대다수 문제 행동의 원인이 엄마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내담자는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이가 이상해요’ 라고 할 뿐이란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엄마로 인해 아이가 지금 아픈 것이라고.  그래서 신의진 교수는 엄마를 먼저 치료하고자 나섰다.  신의진 교수의 이런 노력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아이보다 더 아픈 엄마들(2002)에 이어 이 책은 엄마 살리기의 두 번째 책이다.  

  나도 엄마가 되면 책 속 그녀들처럼 내 자녀로 인해 문제를 갖게 될 수도 있다.  나 역시 아픈 엄마가 될 수도 있다.  희생을 준 대가로 더 아픈 상처를 훈장처럼 얻게 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건강한 엄마 밑에 건강한 아이가 있고 바르게 커갈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다.  엄마는 몸도, 마음도 건강히 하고 나의 삶을 아이와 함께 영위해가야 할 것이다.  그래도 엄마는 무조건 아이를 위해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주파수를 고정하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나를 건강히 하고 내가 즐거운 것이 아이를 더욱 바르게 자라게 할 것이라고.  이 세상 모든 엄마들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건강한 가정이 엄마의 손에서 나오고 엄마의 심장은 온 대지를 품을 만큼 넓다.  부디 이토록 위대한 자신을 업신여기지 말고 당당히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을 위한 행복의 시간을 배정했으면 한다.  시대 속에 결코 소멸될 수 없는 이름, 엄마.  그 이름을 보배롭고 참되게 영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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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셀레스티나 을유세계문학전집 31
페르난도 데 로하스 지음, 안영옥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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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문학은 두어 편 읽어보았지만 사실 고전은 이 작품이 처음인 것 같다.  이 책 띠지에 ’스페인 중세 문학의 걸작으로, 『돈키호테』와 쌍벽을 이루는 작품!’ 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런데 사실 스페인 고전 중 잘 알려진 작품은 돈키호테밖에 없지 않나.  이 책을 읽음으로 한 작품을 더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현대문학은 좀 소개가 되는 것 같은데 그 수가 적은 편이다.  앞으로도 더 많은 스페인 소설을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작품은 희곡이다.  그렇기에 전개가 빠르고 모든 장면, 장면이 작품에서 필요치 않은 부분이 없다.  비록 대화체로 기술되는 희곡이지만 화자의 감정이 그 대화들에 고스란히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또 희곡이라는 형태의 성격상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등장인물의 캐릭터가 명확하게 구분이 된다.  칼리스토, 멜리베아, 셀레스티나, 파르메노, 셈프로니오, 아레우사, 엘리시아, 센투리오가 주된 인물들이다.  

  멜리베아를 사랑하게 된 칼리스토, 칼리스토의 하인 셈프로니오는 사랑의 연결고리가 되어줄 거라고 주인을 속이고 셀레스티나라는 뚜쟁이를 소개해준다.  칼리스토는 셀레스티나를 통해 멜리베아와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많은 보상을 주며 셀레스티나를 부린다.  셀레스티나와 셈프로니오는 주인에게서 한 몫 챙길 수 있기를 바라며 다른 충신인 파르메노까지 꼬득인다.  셈프로니오는 엘리시아를, 파르메노는 아레우사를 셀레스티나로부터 소개 받는다.  셈프로니오는 셀레스티나의 영악함과 교활함에 이익을 챙기기 위해 따르고 파르메노 역시 아레우사를 만나게 되며 눈이 멀어 셀레스티나에게 협조하게 된다.  멜리베아는 이들의 계략에 넘어가고 칼리스토를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셈프로니오나 파르메노가 셀레스티나에게 칼리스토에게 받은 재산을 나눠달라고 하고 이를 거부하는 셀레스티나와 다툼 끝에 셀레스티나가 죽게 된다.  셈프로니오와 파르메노는 경찰에 잡혀 참수형에 처하고 아레우사와 엘리시아는 이들 연인의 죽음에 슬픔을 느끼고 아레우사의 원래 연인인 센투리오에게 이 모든 불행의 씨앗이 된 칼리스토를 처단해 달라고 명하고 센투리오는 칼리스토를 처단하고 사랑을 증명하겠다고 하나 스스로 죽일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칼리스토의 사다리에서 낙사한다.  멜리베아는 연인 칼리스토를 따라 자결함으로 모든 비극의 이야기는 막을 내리게 된다.  멜리베아의 죽음을 목도하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슬픔으로 마음이 아려왔다.   

  이들에게서는 서로서로 속이고 진정이 없는 관계를 볼 수 있다.  파르메노가 주인 칼리스토를 향한 충성은 안타깝기까지 하나 칼리스토는 파르메노를 믿지 않는다.  결국 그 역시 셀레스티나와 셈프로니오로 인해 주인을 저버리게 되는데 배신과 배반이 팽배한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애인이 있는 아레우사도 파르메노와 즐기고 엘레시아 역시 셈프로니오 뿐 아니라 다른 연인이 있다.  그리고 셀레스티나는 많은 창녀와 처녀들의 처녀막 재생 수술을 시행할 만큼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  멜리베아 역시 처음에는 셀레스티나를 믿지 않는다.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믿지 않고 의심으로 가득한 관계들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깊이 바라보아야 할 점이 이것이 아닌가 싶다.  의심과 배신과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 이들에게 결말은 죽음이다.

  이것을 현대화하여 드라마화했다면 한 편의 막장드라마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계략과 음모와 여인의 복수는 드라마 황금시간에 딱일 듯 하다.  그러나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줄거리가 보여주는 것 이상의 것을 느끼게 된다.  진심과 진의가 통하지 않고 진정을 가려내지 못하는 분별력 없는 세상 이 안에 채워진 인물들을 가만히 보면 그 누구도 지탄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모두 가엾은 자들이다.  진심이 없이 자신의 이익과 탐욕에 눈이 멀어 누군가의 종노릇을 하며 행동하고 말하고 숨 쉬는 자들.  그 결말은 피 냄새가 진동하며 끝난다.  세상의 진의와 가치, 바른 삶, 충성, 변절 등 인간관계에서 생겨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의미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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