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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한 초상
이갑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7월
평점 :
이러쿵 저러퉁 하기보다는 결론부터 먼저 말하고픈 욕심이 드는 작품이다. 굉장하다! 국내에도 이런 잘 짜여진 추리소설이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참, 참한 작품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문학 중에서 유독 추리소설은 다른 장르에 비해 등한시되고 외면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작가들의 집필욕구가 낮은 것인지 아니면 독자들이 무시하며 외면하고 있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추리소설가나 그들의 작품을 발굴해내는 안목이 부족한 출판시장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상당히 취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이런 기류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듯 싶다.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이 삼박자가 기가 막히게도 잘 맞아들어가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사돈 남 말 할 일이 아니고 나 역시 이 분위기에 일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로맨틱한 초상>은 한국 작가의 추리소설로는 처음 읽은 것 같다. 그런데 그 첫 작품이 이갑재씨의 <로맨틱한 초상>이라는 것은 어쩌면 다행일런지도.
이 책은 1994년 첫 출간되었는데 13년 뒤인 2007, 올해 목차와 표지만 약간 달리해서 나온 작품이란다. 그런데 변경된 표지나 chapter의 소제목이 13년 전의 것보다 훨씬 예술적 감각을 잘 살리지 않았나 싶다. 아름다우면서 뭔가 음울한 기운이 감도는 표지, 그러나 왠지 모르게 자꾸 눈길이 가는 몽환적인 분위기. (나는 이것이 전라의 여체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는 중 내내, 곡의 모티브가 된 John Surman의 Portrait of Romantic이라는 곡이 궁금했다. 책장을 1/5쯤 남겨두었을 때였나? 그 때, 이 곡을 들었다. 이 곡 역시 아름다우면서 처연한, 그리고 기이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작가가 이 곡에 부여한 그 느낌 그대로가 전이되어 그리 느꼈을 런지도. 우선, 표제와 표지 그리고 내용(John Surman의 곡도 포함해서)이 서로 딱 들어맞은 작품이 아닌가 싶다. 모든게 조화로운 느낌? 가늘고 섬세한 실들이 서로 규칙적으로 교차하여 매끈하고 보드라운 느낌을 자아내는 천을 어루만지는 느낌이랄까?
내용 또한 허무맹랑하지 않고 믿을만했기에 더 실감나지 않았을까. 이런 믿음은 책 속에서 소개된 적잖은 정신분석학 이론이나 개념들이 뒷받침 되었기에 그럴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저자인 이갑재씨 본인이 간질을 앓았다는 점. 그러나 병에 대한 지식은 단순히 환자가 자신의 병을 알고 이해하는 일반적인 수준 이상이었다. 이에 의문이 드는 점은 집필을 위해 의도적으로 그런 서적들을 섭렵했는지(서두에서 저자는 실제 여러 심리학자나 정신분석학자의 이론서를 읽었다고 했다.), 적을 알고 덤비자는 심산으로 자신의 병을 낱낱이 알고자 했던 의기양양한 환자의 모습인지 하는 것이다. 여하튼 그의 그런 고된 노력은 <로맨틱한 초상> 이라는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그의 '초상'이다. 그리고 그의 부친은 경관이라는데 이로 인해 수사과정이나 경찰들의 업무를 좀 더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었으리라. <로맨틱한 초상>은 지적이다. 학술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그렇기에 살해, 범죄라는 단어 앞에서도 꽤 겁 없이 책장을 넘길 수 있지 않았을까.
<로맨틱한 초상>의 줄거리에 대해서는 생략하겠다. 그러는 편이 더 좋을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아니, 벌써 범인이 밝혀지면 어쩌자는거야? 아직 책장은 많이 남았는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범인으로 추정되는 인물과 혐의를 단숨에 내놓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는 범인이 누구인가 추측하고 추적하기 보다는 범인의 심리와 병적상태, 그로 인한 이상행동들을 좀 더 소상히 밝히기 위한 작가의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로맨틱한 초상>은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 위에 세워진 글이기에 더 완전(完全)에 가까웠다. 또한 작가의 박학다식은 작품을 더 돋보이게 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아, 어쩜 이리도 아는게 많아?' 하며 그를 동경과 질투의 눈빛으로 바라보기도 해야했다. 단 한 편의 작품으로 판단하는 일은 섣부를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가 이미 고인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내가 세상에 살았었소' 하는 고인의 족적이 이리도 훌륭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