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은행잎도 절정을 지나 급히 겨울 채비를 하려고 한다.
서리가 오기 전에 모든 걸 정리하려는 듯이. 일을 마치고 밤 9시 무렵 퇴근을 하면서 보면 가로등과 전조등 불빛에 비친 은행잎이 너무 고와 과묵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입을 다물고 있기 어려울 거이며 매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냥 미련없이 발길을 돌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 은행잎도 무성함에서 점차 성글어 간다. 그래도 일년 중 햇빛이 가장 좋은 계절은 지금이 아닐까. 햇볓이 무르녹는 봄에는 또 다른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이런 날은 어디 차를 몰고 답사나 갔으면 좋으련만 아직 내겐 차가 없고 이런 날은 그냥 호젓한 숲을 잔잔히 벗과 대화를 나무며 걷고 싶지만 아직 내겐 시간이 자유롭지 않으며 이런 날은 연인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에 만나 덕수궁 돌담이나 한 번 걷고 싶지만 애인도 없네.
이런 날은 연구실에서 일에 몰두하며 자신의 실력을 다지고 가끔 숨을 돌리며 자신에게 침잠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거기서 밀려오는 뿌듯함과 성취감도 예사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며 즐거움도 적은 것은 아니기에. 그러다가 점심이나 먹으려고 길을 나선다면 잠시 달콤한 휴식이 되지 않으랴. 점심을 들고 잠시 낙엽길을 걷는 것도 인생의 즐거움이 아니랴. 가을날의 망중한이 아니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