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라 다들 즐겁게 지내는데 나는 누가 오라는 사람도 없어 아르바이트나 하며 보내다가 바람의 전설에게 가 보았다. 거리를 조금 걸으니 나무에 꼬마 전구로 장식한 트리 같은게 보인다. 광화문에 특히 그런게 많은데 나는 왜 나무가 잠도 못자게 전구로 고문하듯이 칭칭 감아 놓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나무가 고통스러운게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보고 있는 내가 괴롭기 그지없다. 나무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 제발 잠좀 자게 해줘 ...제발, 플리즈, 칭, 도조...

이런 밖의 풍경과는 다르게 바람의 전설은 조용히 바둑을 두고 있었다. 옛 그림들을 보면 오래 묵은 소나무가 있고 그 아래 노인들이 있는데 그 사이에 바둑판이 있다. 이게 상산사호도이다. 그리고 위진 시대 때 줄림 칠현들이 노는 그림에도 바둑 판이 등장한다. 그래서 그런지 바둑을 좌은이라고 한다. 坐隱, 이것은 나의 다른 아이디이기도 하다. 바람의 전설은 오청원의 바둑을 복기하고 있었다. 오청원은 중국인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 바둑계를 평정한 바 있는 전설 같은 인물이다.
내가 온 것을 알고 바람의 전설은 바둑알을 염주알 만지듯이 잘그락잘그락 하기만 할 뿐 두지를 않는다. 한 수 가르침을 받기에 좋은 기회이다.

나 : 현인이시여, 바둑의 도는 무엇입니까?

바람의 전설 : 고요속의 폭풍, 폭풍 속의 고요라고나 할까? 결국 자기를 다스리는 것이지.

나 : 좀 더 가르침을 청하옵니다.

바람의 전설 : 바둑의 도에는 열 가지 비결이 있나니 이를 일러 위기 십결이라고 하느니라.

나 : 圍棋十訣이라 함은 무엇을 말합니까?

바람의 전설 : 지금 부터 내 바둑의 열가지 도를 말하노니 너는 주의 하여 들어라.

첫째, 욕심을 내면 이기지 못하니 이를 일러
탐욕불승貪欲不勝이라고 하고

둘째, 적진에 들어갈 때에는 천천히 들어가야 하니
이를 일러 입계의완入界宜緩이라고 하고

세째, 적을 공격할 땐 우선 나의 약점을 돌아보아야 한니
이를 일러 공피고아攻彼顧我라 하고

네째, 자신의 돌을 버리더라도 선수를 취해야 하니
이를 일러 기자쟁선棄子爭先이라고 하고

다섯째,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곳으로 나가야 하니
이를 일러 사소취대捨小就大라 하고

여섯째, 위험을 만나면 자신의 돌을 미련없이 버려야 하니
이를 일러 봉위수기逢危須棄라 하고

일곱째, 경망스럽게 빨리 두는 것을 삼가야 하니
이를 일러 신물경속愼勿輕速이고 하고

여덟째, 돌을 움직일 때는 서로 호응하게 두어야 하니
이를 일러 동수상응動須相應이라 하고

아홉째, 적이 강한 곳에서는 우선 나를 보호해야 하니
이를 일러 피강자보彼强自保라 하고

열째, 나의 세력이 고립된 곳에서는 화친을 취해야 하니
이를 일러 세고취화勢孤取和라 하느니라.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이 들어가고 내용이 달라질 때마다 표정의 미묘한 변화가 일었는데 거기엔 온화한 가운데에도 승부의 긴장된 호흡이 강하게 전해 왔다.

나 : 현인이시여, 지금 말씀하신 위기십결은 바둑의 도입니까? 인생을 사는 도입니까?

바람의 전설 : 바둑의 도가 곧 인생의 도이니라. 그러나 바둑의 도는 둘 중에 하나는 지고 하나는 이기는 도이지만 인생의 도는 싸우지 않고 모두 이기는 도가 있느니라. 바둑의 도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아는 도에 불과하나 (聞一知二)인생의 도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도이니라. (聞一知十)



참고 : 고인들은 바둑을 완물 상지라 해서 경계하였으나 잘 두면 훌륭한 취미가 될 수 있을 듯.
玩物喪志 : 소학에 나오는 말로 어떤 물건에 마음을 배앗겨 큰 뜻을 잃음을 나타내는 말. 바둑이나 편지 글씨 그림 등이 다 완물상지가 될 수 있으니 그 경계하는 의미가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