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소년만화의 법칙을 따라 신경 써서 구축한 흔적이 역력. 히로인이 주인공을 바라보는 시각이 좀 중구난방이고 액션씬이 서투를 때가 있다는 정도를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무난. 너무 무난하기에 이런 만화가 갈 길은 [강철의 연금술사]가 되느냐 조루연재가 되느냐 둘중의 하나인 케이스가 많다.

 

결말을 봐도 덤덤해진지 오래인 만화지만 그림만은 초전작살. 아니, 오바타 다케시의 화력이란 거의 만개한 게 아닐까 싶은 정도. 

 

생각해보니 유현만화를 처음 봤던 게 챔프신인상에 들어왔었던 여고에 전학온 여장 미소년 이야기였는데.... 이 작품 또한 적당히 트랜스 캐릭터의 매력에 기대면서도 구미호라는 친숙한 소재를 통해 요마물적인 요소를 가미. 라온이라는 캐릭터의 매력은 괜찮은 편이고 컨셉도 좋은데.... 웬지 부족한 느낌은 라온 주위의 인물들이 다소 비실하다는 점 때문인가. 그래도 술렁술렁 잘 읽힘.

디자인면에서 [러브리스]와의 혐의점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도 딜레마일 듯.

 

와인도 찾고 떡도 치고 잇세 너 이새끼....

그런데 떡씬이 너무 개판으로 그려져서 심하게 안타까웠음. 거의 대본소 도장만화에서 나오는 떡씬 수준(농담아니고).

 

 

전권까지 너무 힘을 줬던 탓인가. 억지 유머에 지능적 꽃뱀이자 양다리 여왕님인 히로미의 정신세계를 재점검하(라기 보단 그냥 발로 차버리)고 싶어진다는 의미에서 힘빠진 타이어 같았던 8권.

엥? 끝이야?

 

프랑수아 플라스의 동화는 이걸로 처음 접했는데 단번에 전작을 훑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제국주의와 인간의 어리석음, 그로 인한 멸종되어가는 생물에 대한 보편화된 우화보다도 나를 사로잡았던 건 파노라마적 시야 속에서도 세밀하고 조심스러운 묘사를 통해 탁월한 동화적 리얼리즘을 성취해내고 있는 그의 그림.

 

라이브 실황인데.... 왜 이렇게 답답하게 느껴지는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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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X 2006-12-13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드래곤 랄Ω그라드 는 원서로 봐야할 것 같습니다. 얼마나 삭제가 될 지. ;;;

hallonin 2006-12-13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딱 정서도 비슷한 바스타드 정도의 삭제가 이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아이즈가 무삭제판으로 다시 나오는 현재 상황에 비춰보면 무삭제가 기대도 되고. 사실상 노출이 많다고는 해도 근본적으로는 지극히 소년만화적인 정서라.
정말 제대로 출간이 가능할지 걱정되는 건 언더 더 로즈 4권. 들려오는 얘기에 따르면 굉장하다는군요. 한층 더 파탄난 등장인물들의 정신세계에서부터 표현상으론 헤어노출까지 나온다고....

없음 2006-12-26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비아 -> 프랑수아. <붉은강나라에서 현기증도시까지> 보유중!

hallonin 2006-12-27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한창 엠마뉴엘 시리즈 전편을 보던 중에 페이퍼를 올린 탓에 그만 실비아라고 오타를-_- <붉은강나라에서 현기증도시까지>를 소장중이시라니 부럽군요....
 



1. 사실 동화의 세계란 본디 어른들의 세계와 밀접하게 닿아있다. 아니, 실은 현재 읽히고 있는 대부분의 동화들이 처음엔 동화라는 이름이 붙은 이야기가 아녔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나 [신데렐라]의 원형이 피어나던 시기의 세계에서 아이들의 자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저 달콤한 이야기들의 원류는 대부분 폭력과 욕망으로 뒤덮힌 어른들의 잔혹한 우화였다. 그래서 오랜 시간을 거쳐 비로소 동화의 체계가 잡히고 시장이 생기기 시작한 때가 아이들의 노동착취가 극심하게 이뤄졌던 19세기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판의 미로]는 오필리아의 환상 속에서 펼쳐지는 동화와 스페인 내전이라는 현실의 대비를 통해 그러한 동화의 원류와 진화 상태를 해부해보이면서 동화의 외피 속에 감춰져 있던 추한 뼈까지 통째로 드러낸다.

 

2.  얼핏 영화는 성장을 거부하는 아이의 전통적인 환타지를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이 영화가 마치 오필리아의 의식 속처럼 동화적 사고관을 따른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볼 때도 해당된다. 마치 동화 속에서처럼 영화 속 인물들은 선(게릴라)과 악(정부군)으로 분명하게 단면화되어 있다. 환상의 세계를 꿈꾸는 오필리아는 나무를 죽이는 독두꺼비나 아이들을 잡아먹는 식인귀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들과 상대해야 한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보는 내내 오필리아가 현실 속에서 게릴라에게 가거나, 임무를 완수하여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해도 그녀가 행복해질 것 같진 않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스페인 내전의 결과를 알고 있으며 그 결과에서 비롯된 감독의 시선은 게릴라들을 지치고 무력하게만 보이게 만든다. 판은 어떤가. 요정은 곤충으로 형상화되서 돌아다니고(기예르모 델 토로가 [미믹]을 통해 바퀴벌레가 얼마나 무시무시할 수 있는지 알려줬던 감독이란 걸 상기해보자), 미로를 지키는 판은 온전히 오필리아의 편이라고 여기기엔 거부감이 돋을 정도로 기괴하다. 따라서 여기서의 환타지는 그리 아름답고 즐거운 일이 아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환상과 현실의 빈번한 교차편집을 통해 구분되어 있는 듯한 두 세계가 궁극적으로는 일맥상통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실상 오필리아가 겪어야 하는 환상 속 모험은 전쟁 속에서 언제 강간당하거나 죽을지 모르는(영화의 분위기로 봐선 농담이 아니다) 현실의 지옥과 별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불안불안하다. 두꺼비와 벌레들은 그녀를 더럽히고, 식인귀는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게 만든다. [판의 미로]에서 환타지와 현실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

 

4. 그러나 그녀는 현실에서와는 달리 환상 속에서는 어떻게든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고자 한다. 어째서?

 

5. 현실은 이미 그녀에게 가망이 없다. 아버지는 죽었고 그녀는 시골 외딴 곳에서 파시스트적 폭력을 휘두르는 새아버지와 함께 지내야한다. 그녀의 어머니조차,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새아버지와 결혼했으며 애까지 밴 상태다. 처음부터 그녀는 철저하게 외토리다. 그런 그녀에게 '진짜' 아버지와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는 지하왕국이라는 목적은 절박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해서든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현실과 그래도 노력하면 뭔가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환상. 이 지독한 양자택일 속에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환상의 세계에 매달리게 된다. 오필리아는 현실에서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지에 관심이 없다. 그녀는 거의 마지막까지 오직 달아나고파 한다. 그래서 두번째 모험에서 나오는 아이들을 잡아먹는 식인귀가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절제를 못하는 오필리아의 '인간적' 욕망을 확인함으로써 몸을 움직이고 눈을 뜨게 되는 식인귀는 전장에서 아이들을 덮치는 무고한 죽음 그 자체를 상징하고 있다.

 

6. 그러나 그녀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러 환상의 달콤한 제의를 거부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환상을 통해 현실을 넘어서려던 그녀가 마침내 얻어낸 의지의 승리, 진정한 천국으로의 발걸음이다.

 

7.

에피소드 자체가 메르헨의 패러디였던 [베르세르크] 16권 단죄편의 마지막화를 불러오는 것이 어떤 대답이 될 수도 있겠다. 자신을 괴롭히는 현실에서 달아나려고 하는 질에게 현실과 다를 바 없는, 그보다 더 독한 지옥을 보여준 다음 가츠는 말한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는 거야."

 

8.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는 오필리아의 얼굴에서 시작하여 지하왕국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나레이션은 영화의 마지막을 통해 영화 전체를 고착된 시간대의 윤회하는 구조로 묶어버리고 환상과 현실의 구분에 대한 호접몽적인 비전을 음울하게 보여주며 영화를 맺는다. 반복과 윤회, 영원히 공주를 기다리는 왕의 이야기, 부서진 시계. 마치 오래된 동화, 혹은 원형의 미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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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2006-12-08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못봤는데 대부분의 평론이 단지 '어른들의 동화'라고만 언급하고 말아버리는데 역시 찾아온 보람이 있네요. 예고편으로만 본 '판'의 모습이 '미믹'감독의 연출이라니.. 꼭 보고싶네요 ㅋ

hallonin 2006-12-08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파티드보다 잔인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디파티드는 의외로 피가 별로 안 나왔던 듯.

배가본드 2006-12-10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아직 보지는 않았습니다(핑계거리인 기말시험이라)..끝나면 볼 참인데, 묘하게.. 제브라맨이 생각나는..ㅎ

hallonin 2006-12-10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제브라맨이?-_-
 

 

우리는 일찍이 클램프의 [클로버]에서 극단적으로 분할된 컷과 틀을 부순 배치를 통해 정적인 뮤직비디오의 만화 버전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지만의 고독한 향연이자 해독불능, 혹은 너무 얕았던 자폐적 유희로 채워진 오만에 가까웠고, 더군다나 음악을 얘기하고 있음에도 방법상으론 그 음악을 느낄 수 없었던 독자로선 흑백화면 속에 배치된 감각적으로 야심찬 몽타주들이 되려 빈한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경험을 치러야 했다.

[서플리]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 또한 [클로버]에서 이미 확인했던 과격하게 분할된 몽타주의 흐름이다. 그러나 오카자키 마리는 클램프보다 훨씬 능숙하고 솜씨 있게 그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과감한 실험을 성공시키고 있다. 작가의 머릿 속에 그려져 있을 인물의 동선 속에서 조심스럽게 골라내진 각 컷들은 대담하다 싶을 정도로 분리되어 다닥다닥 페이지를 채우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배치는 산만하지 않으며 인물의 감정을 풀이해내는 큰 흐름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되려 자유롭게 분할됐지만 할 말을 다 하면서도 방만하다는 인상을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미적인 탁월함과 인과의 부드러움을 산출해내는 컷들의 계산된 연결은 [서플리]의 기술적 미덕이다.

 



 

저 2권 속에서, 양페이지를 점하고 있는 주인공의 심리의 흐름에 대한 연출을 보라. 두 페이지의 위쪽 중앙을 가로지르며 압축된 컷과 컷들 사이로 물고기가 자리한, 컷이 있기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 여백-공간-물은 흐르고 흘러 그녀의 회의의 너비를 가늠하게 만들고 있고, 그것은 물고기의 꼬리끝과 머리가 이어주는 페이지를 넘어서는 대사의 연결('게이나 됐으면 편하겠다는 심정' -> '어쩌면 난 그러기 위해 일하고 있는 게 아닐까?')이 극히 자연스럽다는 점에서 오른쪽 페이지 아래에서의 그녀의 사고의 전개가 일종의 심화과정에 대한 섬세한 표현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에 덧붙여 격식을 깨는 컷의 분할과 배치에서 혹여나 빌지도 모를 감수성의 공백을 유기적으로 이어주는 것은 말풍선의 적극적인 응용과 의식속-물 속에서 이뤄지는 나레이션의 절묘한 배치를 통해서다. 그리고 그 모든 결과들이 얼마나 부드럽게 도출되는지를 말그대로 두페이지를 통괄하는 의식의 구조-그림 그 자체로서 설명해보이고 있다.

[서플리]는 뒤늦게서야 세상에 눈을 떠서 하나씩하나씩 삶과 사랑과 일에 대해 깨달아가는 한 워커홀릭의 눈을 통해 여성성에 대하여 끊임없이 묻는다. '여자라서 행복하다'라는 말이 더없이 어렵게(혹은 한심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흐름 속에서 고도로 집적된 이미지들을 통해 우회해서 보여지는 섬세한 감정의 충돌들과 깨달음들은 어느 사이엔가 뒤틀려버린 인물들의 관계도를 긴장감 있게 끌고 나간다. 이 리얼함은 단순히 기술적으로만 능숙했다면 얻을 수 없는 경지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공감마저 더해져서 보너스 점수가 팍팍 올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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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X 2006-11-27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화책 사는 양 좀 줄이려고 했더니만 bdafuck님께서 저에게 지름의 시련을 새로이 내려주시는 군요. 기꺼이 받겠나이다. 어흑. ㅠ ㅠ;;;

hallonin 2006-11-27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owup 2006-11-27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너무 달게 받으시네요.
그나저나 이 만화 당기네요.
아무래도 bdafuck님은 만화 평론가로 데뷔하지 않으실까 싶은데요.
(나중에 그런 일이 생기면, 제가 일찍이 알아 봤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겁니다. ㅎㅎ)

hallonin 2006-11-27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집에 쌀이 떨어져가고 있어서 쿨럭-_- 데뷔고 자시고 당장 먹고 살 일자리와 돈이....

카프리 2006-11-28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플리>.. 동네 대여점에서 들여놓을 것 같지 않아 몹시 고민하고 있는 중입니다.. 살게 몇 권 있다보니 왠지 만화책구입에 상당한 액수를 투자해야 한다는게 눈치보이네요.. ^^''''''

iamX 2006-11-28 0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뜨헉. 저러면 곧휴 진짜 아플 것 같은데요. ;;;

hallonin 2006-11-28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권 현재까지 훌륭한 작품이란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녀가 죽었다] 같은 만화를 왜 그렸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뭐 [그녀가 죽었다]도 1권의 몽롱한 정사씬 만큼은 실로 출중했죠. 더군다나 네크로맨틱의 대상인 히로인이 단발!

거듭 태어나는 겁니다. 강안남자로....

iamX 2006-11-28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해 주시기 전까지는 '그녀가 죽었다'의 그 오카자키 마리 인 줄 몰랐네요. 그림체가 바뀐 건지. 상당히 토실토실한 그림이었던 것 같은데. 사실 '그녀가…' 1권 봤을 때는 꽤 기대했었는데 말이죠. ;; 2권에서 그렇게 끝내버릴 줄은 ;; 그리기 싫었던 건지도 모르겠네요.

hallonin 2006-11-29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스토리작가와 별로 안 맞았던 듯.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에게 있어 [무간도]는 다소 아쉬운 영화였다. 그것은 '무간지옥'이라는 제목에서 따온 그 무시무시한 제목에 비추어 영화가 너무도 '인간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무간도]에서 진영인은 홀로 범죄 조직 속에 들어가 있지만 황국장과 부자관계와 비슷한 정서를 꾸준히 유지하기에 세상에 달랑 혼자 남았다는 억울한 면모가 상쇄된다. 더군다나 인덕이 높은 나머지 한침의 두둑한 신뢰를 얻게되며 그의 정체를 어렴풋이나마 알게된 조직원에게조차 그 높은 품성 덕에 폭로의 위기를 넘기게 된다. 그리고 같은 입장인 유건명과 진영인은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심적으로 서로에게 공명한다. 이 모든 것들은 홍콩영화의 장르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인의, 그 아시아적 정서의 전통적인 현현으로 파악된다. 그래서 유건명이 진짜 무간지옥에 들어가 있음을 절절하게 느끼기 위해선 거의 심리스릴러에 가까웠던 [종극무간]까지 가야했으며 [무간도]의 화면이 내비치는 이미지들은 CF적 감각을 바탕으로 한 도시적 세련됨과 더불어 홍콩영화 특유의 후까시에서 완전하게 벗어났다고 보긴 힘든 혈통성을 보장하고 있었다. [무간도]는 온전히 무간지옥이라고 부르기엔 좀 화려하고 너무 인간적인 세계였다.

 

시나리오만 봤지 원작은 안 봤다고 누누이 얘기했던 마틴 스콜세지는 [디파티드]에서 어떤 인의도 느껴지지 않는 진짜 지옥을 열어보인다. 여기서 진영인역이 컨버전된 빌리 코스티건은 정말 살아남기 위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바둥거려야 할 운명이다. 그와 그를 침투시킨 국장과의 관계는 정이라곤 거의 느껴지지 않으며 철저하게 계급관계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빌리와 보스인 코스텔로와의 관계 또한 오직 냉정한 업무관계의 연장에서만 파악될 뿐이다. 그래서 그는 코스텔로의 손에 의해 죽게 될지, 아니면 무언가 틀어져서 바깥세상과의 연결이 모조리 끊기게 될지를 계속해서 걱정하는 신경증적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유건명의 컨버전인 콜린 설리반 또한 마찬가지다. 반복해서 보여지는 주의회의 이미지 속에서 신분상승의 욕구를 강하게 내비치지만 코스텔로와의 위험한, 그리고 철저하게 '비즈니스적'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그는 유건명처럼 충분히 능력있는 면모를 보이면서도 훨씬 비열한 인상으로 쉬지 않고 초조해하며 불안 속에서 조급증에 시달린다. 더군다나 이 둘은 한가지 공유하는 게 있지만(원작과 비교하여 가장 달라진 부분이기도 하다) 그것은 서로에게 공감하는 정서가 아니라 그나마 인간답게 살기 위해 차지해야 할 조건, 제한된 위안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 한정된 자원을 차지해야 하는 절박함에 있어서 또한 이 둘은 교감이라기 보단 서로 어떻게든 물어뜯어야 할 처지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멧 데이먼은 이 두 바닥난 인물들을 연기하는데 있어서 손색이 없는 기량을 보여주며 그것은 스콜세지의 기름기 쫙 뺀 연출과 부합된다. 보스턴시에서 벌어지는 이 아귀지옥을 다루면서 스콜세지는 어떠한 후광과 이미지적 화려함도 동원하지 않고 지독하게 삭막하고 건조하게, 심지어 [무간도]와 비교하자면 촌스럽고 투박하게까지 묘사해보인다. 그래서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무간도]에서 느껴졌던 그윽한 눈빛 하나로 만사를 파악했던 고수들간의 무언의 합이 아니라 주먹질과 끊이지 않는 진한 욕설, 내내 폭발할 것 같은 분노가 오가는 투견장에서의 진탕속 개싸움에 가깝다.

 



 

사실상 두시간 이십여분의 상영시간 속에서 더이상 얘기할 건덕지가 없이 온전하게 이야기 자체를 끝마치는 [디파티드]는 원작과는 달리 남은 이에게 영원한 억겁의 지옥을 선사해주진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확실하게 [디파티드]가 [무간도]와 같은 자리에서 시작하여 다른 이야기가 된 것을 보장한다. 마지막씬에서도 드러나는 그 노골적인 미장센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는 가히 '미국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영토성과 관련해서도 말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산 채로 지옥을 순례하는 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죽은 이(the departed)'에 관한 이야기기 때문이다.

 

추가 - 생각해보면 이상하게도 난 이 영화에서 잭 니콜슨이 별로 기억에 남지 않았는데 아마 짐 호버만은 기억에 안 남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맘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4001&article_id=43075

잭 니콜슨의 과잉연기에 대해선 적절하게 동의. 그러나 그렇다고 2인자였던 레이 윈스턴이 더 무서웠다고 하는 것은 먹물 특유의 텍스트에 끌려간 엄살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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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5 1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llonin 2006-11-25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제가 쓴 [무간도]에서의 세련됨이라고 하는 것이 접선장소인 옥상의 열기 속에서 일그러진 도시의 모습, 자동차 위로 떨어지는 황국장, 유건명의 머리 위로 총을 겨눈 진영인의 모습 등등으로 대표되는 이미지적 랜드마크를 말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일단 저는 [무간도]가 별로 슬프지가 않았습니다. 그 인물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이란 것도 위에서 말했듯이 [종극무간]에 이르러서야 느낄 수 있었죠. [종극무간]이 한 미쳐버린 인간에 대한 긴 해설이었다는 걸 감안하자면, [무간도]에서의 고독과 불안은 [무간도] 그 자체만으론 부족했다는 것을 시리즈 자체적으로 반증하는 건 아닌가 생각됩니다. 무엇보다도 [무간도]에서의 그 둘은 맘만 먹으면 언제든 뛰쳐나와도 될 것 같은 그런 여유로움마저 느껴졌거든요. 시나리오적으로 봐서도 그 둘이 약간의 트러블을 감수하면서 얌전히(적어도 유건명이 한침을 살해할 때까지) 거기 머물러 있었다는 건 다소 설명부족인 감이 있으며 동시에 그 둘이 그곳을 뛰쳐나오지 않고 파멸의 운명으로 향한다는 흐름 자체는 홍콩 하드보일드 특유의 후까시적 면모를 강조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디파티드]는 시나리오를 약간 바꿈으로써 거의 완전하게 그 둘이 지옥에 스스로 갇히게 된 경위를 설명해주고 있죠.
물론 전 [무간도]도 [디파티드]도 매우 즐겁게 봤습니다. 그리고 이건 비약적이라고 욕먹을까봐 안 적은 건데 [디파티드]의 마지막은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의 라스트씬을 은근하게 불러오게 만드는 어떤 아우라가 있습니다. 박찬욱과 스콜세지가 만났었다는 얘기가 계속 떠오르더군요. 헐헐.

2006-11-27 15: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llonin 2006-11-27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편은 훌륭하고 3편은 글쎄올시다... 입니다. 절제된 후까시, 저 또한 사랑하는 미덕이죠.
 























http://5cm.yahoo.co.jp

 

내년 봄 개봉 예정. 내용은 두 연인을 바라보는 세개의 짧은 단편 모음이 될 것이며 SF적 요소는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연애물이 될 것이라 합니다. 어찌되었든 간에 더 강력해진 광원효과의 달인이 되어 돌아오고 있는 중입니다. 예고편만 봐도 신카이 마코토의 트레이드 마크격인 씬들이 모조리 업글되서 다 들어가있군요. 자, 전부터 얘기된 것이지만 역시나 스토리가 관건.... 이지만 SF라는 어깨뽕이 빠진 현재, 국문과 출신이라던 그의 능력이 제대로 발휘될 가능성도 있는 것이지요. 제목인 '초속 5센티미터'는 꽃잎이 떨어지는 속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http://www.mncast.com/outSearch/mncPlayer.asp?movieID=10005167320061123032219&player=7

 

 

 

 

 

 

 

EF - a fairy tale of the two. 제작 minori. 12월 발매 예정.

에로겜입니다.

뭐 신카이 마코토가 모조리 감독했다는 건 아니고 오프닝만 맡은 것인데. 아무튼 그 짧은 오프닝에서마저도 자신의 재활용 이미지들을 모조리 드러내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름을 감췄다 하더라도 금방 알아봤을 듯. [초속 5센티미터] 제작비 벌기 위해서였나 아무튼 알바도 확실하게 해치우는 신카이 마코토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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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아 2006-11-23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카이 마코토를 좋아하는데 반가운 소식입니다. 그의 작품은 다 봤네요. 제 짧은 생각에, 그의 서정성은 SF쪽 보다는 현실적인 연애담에 더 어울린다고 봅니다. 화면 하나하나의 색감이나 분위기가 참 좋네요. 좋은 소식 고맙습니다.
게임은 통 문외한이지만, CF만 봐서는 굉장히 낭만적이고 순수한데요.

hallonin 2006-11-24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낭만적인 배경을 병풍 삼아 순수해보이는 캐릭터들이 나와서 XX를 %고 &\를 #으며 **에 $?를 !는 게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