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실 동화의 세계란 본디 어른들의 세계와 밀접하게 닿아있다. 아니, 실은 현재 읽히고 있는 대부분의 동화들이 처음엔 동화라는 이름이 붙은 이야기가 아녔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나 [신데렐라]의 원형이 피어나던 시기의 세계에서 아이들의 자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저 달콤한 이야기들의 원류는 대부분 폭력과 욕망으로 뒤덮힌 어른들의 잔혹한 우화였다. 그래서 오랜 시간을 거쳐 비로소 동화의 체계가 잡히고 시장이 생기기 시작한 때가 아이들의 노동착취가 극심하게 이뤄졌던 19세기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판의 미로]는 오필리아의 환상 속에서 펼쳐지는 동화와 스페인 내전이라는 현실의 대비를 통해 그러한 동화의 원류와 진화 상태를 해부해보이면서 동화의 외피 속에 감춰져 있던 추한 뼈까지 통째로 드러낸다.

 

2.  얼핏 영화는 성장을 거부하는 아이의 전통적인 환타지를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이 영화가 마치 오필리아의 의식 속처럼 동화적 사고관을 따른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볼 때도 해당된다. 마치 동화 속에서처럼 영화 속 인물들은 선(게릴라)과 악(정부군)으로 분명하게 단면화되어 있다. 환상의 세계를 꿈꾸는 오필리아는 나무를 죽이는 독두꺼비나 아이들을 잡아먹는 식인귀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들과 상대해야 한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보는 내내 오필리아가 현실 속에서 게릴라에게 가거나, 임무를 완수하여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해도 그녀가 행복해질 것 같진 않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스페인 내전의 결과를 알고 있으며 그 결과에서 비롯된 감독의 시선은 게릴라들을 지치고 무력하게만 보이게 만든다. 판은 어떤가. 요정은 곤충으로 형상화되서 돌아다니고(기예르모 델 토로가 [미믹]을 통해 바퀴벌레가 얼마나 무시무시할 수 있는지 알려줬던 감독이란 걸 상기해보자), 미로를 지키는 판은 온전히 오필리아의 편이라고 여기기엔 거부감이 돋을 정도로 기괴하다. 따라서 여기서의 환타지는 그리 아름답고 즐거운 일이 아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환상과 현실의 빈번한 교차편집을 통해 구분되어 있는 듯한 두 세계가 궁극적으로는 일맥상통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실상 오필리아가 겪어야 하는 환상 속 모험은 전쟁 속에서 언제 강간당하거나 죽을지 모르는(영화의 분위기로 봐선 농담이 아니다) 현실의 지옥과 별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불안불안하다. 두꺼비와 벌레들은 그녀를 더럽히고, 식인귀는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게 만든다. [판의 미로]에서 환타지와 현실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

 

4. 그러나 그녀는 현실에서와는 달리 환상 속에서는 어떻게든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고자 한다. 어째서?

 

5. 현실은 이미 그녀에게 가망이 없다. 아버지는 죽었고 그녀는 시골 외딴 곳에서 파시스트적 폭력을 휘두르는 새아버지와 함께 지내야한다. 그녀의 어머니조차,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새아버지와 결혼했으며 애까지 밴 상태다. 처음부터 그녀는 철저하게 외토리다. 그런 그녀에게 '진짜' 아버지와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는 지하왕국이라는 목적은 절박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해서든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현실과 그래도 노력하면 뭔가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환상. 이 지독한 양자택일 속에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환상의 세계에 매달리게 된다. 오필리아는 현실에서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지에 관심이 없다. 그녀는 거의 마지막까지 오직 달아나고파 한다. 그래서 두번째 모험에서 나오는 아이들을 잡아먹는 식인귀가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절제를 못하는 오필리아의 '인간적' 욕망을 확인함으로써 몸을 움직이고 눈을 뜨게 되는 식인귀는 전장에서 아이들을 덮치는 무고한 죽음 그 자체를 상징하고 있다.

 

6. 그러나 그녀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러 환상의 달콤한 제의를 거부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환상을 통해 현실을 넘어서려던 그녀가 마침내 얻어낸 의지의 승리, 진정한 천국으로의 발걸음이다.

 

7.

에피소드 자체가 메르헨의 패러디였던 [베르세르크] 16권 단죄편의 마지막화를 불러오는 것이 어떤 대답이 될 수도 있겠다. 자신을 괴롭히는 현실에서 달아나려고 하는 질에게 현실과 다를 바 없는, 그보다 더 독한 지옥을 보여준 다음 가츠는 말한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는 거야."

 

8.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는 오필리아의 얼굴에서 시작하여 지하왕국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나레이션은 영화의 마지막을 통해 영화 전체를 고착된 시간대의 윤회하는 구조로 묶어버리고 환상과 현실의 구분에 대한 호접몽적인 비전을 음울하게 보여주며 영화를 맺는다. 반복과 윤회, 영원히 공주를 기다리는 왕의 이야기, 부서진 시계. 마치 오래된 동화, 혹은 원형의 미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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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2006-12-08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못봤는데 대부분의 평론이 단지 '어른들의 동화'라고만 언급하고 말아버리는데 역시 찾아온 보람이 있네요. 예고편으로만 본 '판'의 모습이 '미믹'감독의 연출이라니.. 꼭 보고싶네요 ㅋ

hallonin 2006-12-08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파티드보다 잔인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디파티드는 의외로 피가 별로 안 나왔던 듯.

배가본드 2006-12-10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아직 보지는 않았습니다(핑계거리인 기말시험이라)..끝나면 볼 참인데, 묘하게.. 제브라맨이 생각나는..ㅎ

hallonin 2006-12-10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제브라맨이?-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