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스타(insta>@hahayoii)에 좋아요, 가 달려서 누군지 구경하러 갔다. 자기소개에 파트너 구함,이라고 써 놓은 인스타였다. 그런 좋아요,가 세 개나 달렸는데, 좋아요,는 내가 없앨 수도 없는 거 같다.

그렇지, 좋다는데 어쩌겠어, 라고 생각하고 만다. 


반짝이는 워터멜론,에서 아버지,로 하는 하이찬과 청아 아버지의 대화 말고 좋았던 대화가 참 많은데, 그 중에 하이찬과 청아의 내 마음이니까,도 있다. 


최세경에게 반해서 그녀를 위한 밴드를 만들어보인다는 하이찬을 좋아하는 청아는, 그 마음을 들켜버린다. 하이찬이 나는,이라고 자신에 대해 설명하려고 할 때, 청아는 나도 네가 세경이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있다고, 내 마음은 내 꺼,라고 대답한다. 

네가 최세경을 좋아하는 건 네 마음,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 


다른 사람 마음을 내가 어쩌겠어. 내가 너를 너무 좋아해서 너를 불편하게 했다면 그건 말해줘. 그렇지만, 그게 아니라면, 내버려둬야지, 별 수 있나. 


내가 내 인스타에 좋아요,를 건 어쩌면 성매매종사자일 지도 모르는 그 사람이 자신의 인스타에 드러낸 그게 내 마음에 안 든다고, 그 좋아요,를 지울 수 있을까. 지우는 기능이 있다면 지워야 할까. 그건 그저 작은 하트인데, 내 마음의 검열에 걸렸다고 그 사람의 마음은 없애야 할까. 

없앨 수 있다면 없애고 싶었다. 내 인스타가 그런 사이트 홍보의 연결점 같은 게 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데, 과연 누가 그런 좋아요,까지 누군지 확인할까, 싶기도 하고. 이런 SNS의 좋아요,나 하트는 사람마다 다르니까, 내가 무겁게 생각한다고 다른 누구도 진지할 거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으니까, 싶기도 하고. 


내 마음만 내 마음, 다른 사람 마음은 다른 사람 마음. 어쩌지 못하는 것은 어쩌지 못하는 채로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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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족 2023-11-30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는 계정을 차단하고 신고했더니 지워졌습니다. 세 개까지는 그럴 수도 있지, 였는데 일곱개까지 자기 소개가 똑같으니까-사이트광고가-_-;;;- 신고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이 보이지 않는, 스팸 계정으로 신고했습니다.
좋아요, 까지 없어져서, 뭔가 여기 쓴 말이 거짓말이 된 거 같아 댓글을 답니다.
 
[eBook] 한자의 풍경 - 문자의 탄생과 변주에 담긴 예술과 상상력
이승훈 지음 / 사계절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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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읽었다. 

문자에 대한 이야기지만, 문자에 대한 이야기인가 싶은 순간들에 그렇지 문자란 살아 움직이고 언제나 변화하지,라고 생각했다. 

뼈 위에 새겨지던 문자가, 청동기 위에 남기던 문자가, 대나무 위에, 나무판 위에서 비단 위에 종이 위에 옮겨지고, 지배계층의 제사와 전쟁에 사용되던 문자가 모두에게 사용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떤 삶들이 문자에 남아있는지 이야기한다. 

종교적인 의미들로 형상을 묘사하던 한자의 초기 모습이 어떻게 간략화되었고 변화되었고, 다시 소리를 의미하는 방식으로 변화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았음을 듣는다. 오래 전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축소된 형상 가운데 추정하고, 그 때 모두들 알아차린 그 형상이 지금은 그저 한자로만 남아 있다. 간략화되고, 변화하고, 피와 살이 튀던 원형은 은유로 남고, 사람들의 삶 속에 아직까지 살아남았다. 이런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책의 모습은 고대의 제사장 이야기였다가, 춘추전국의 전쟁이야기였다가, 발굴되는 죽간들로 한 번씩 점프하는 연구의 이야기였다가, 서체로 묘사되는 어떤 예술에 대한 이야기도 된다. 재미있다. 


문자를 사용했던 5000년이라는 시간은 인간 진화의 전체 과정에서 볼 때 너무나 찰나이기 때문에, 뇌에 문자를 읽기에 적합한 구조가 만들어질 여유가 없었다. 인간의 뇌는 오랜 기간 동안 수렵채집자로서 생존에 적합한 구조로 진화되었다. 그래서 『글 읽는 뇌』의 저자 스타니슬라스 드앤은 인간의 뇌와 문자의 관계를 간명한 한 문장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아프리카 초원에서 생존하도록 설계된 뇌를 이용하여 셰익스피어를 즐기고 있는 것이라고. - 16%


그러나 문자를 배운 도시인들은 이런 자연의 신호 앞에 까막눈이 되어버린다. 한번 문자 상자를 활성화시킨 사람은 문맹자가 쉽게 구별해내는 자연계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다. 우리는 a와 A가 같은 문자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문맹자를 무시하지만, 그들은 바로 눈앞에 찍힌 맹수의 발자국도 구별하지 못해 곧 죽을 운명이 닥쳐오는 것도 모르는 우리를 보면서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문자를 얻은 인간은 생존에 필요했던 섬세한 시각 분별 능력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다. -17%


새것을 만들 때는 아무런 바탕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할 수 없다. 익숙한 무언가를 기점으로 삼아 그곳에서 상상을 시작한다. 창의성이란 아무런 토대가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경험에 축적된 뇌의 영역 간 새로운 연결을 통해 생겨난다. - 32%


『한비자』의 "세상에서 제일 그리기 어려운 것"에 얽힌 이야기는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한 것이다. 

제나라 왕에게 그림을 그려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제나라 왕이 물었다. "세상에서 제일 그리기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

화가가 대답했다. "개와 말이 가장 어렵지요."

왕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리기 가장 쉬운 것은 무엇인가?" 

화가가 대답했다. "귀신 따위를 그리기가 가장 쉽지요. 개나 말은 사람들이 다 아는 것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종을 치면 눈앞에 나타나기에 아무렇게나 추측하여 그릴 수는 없지요. 그러나 귀신은 형태가 없으며 종을 쳐도 눈앞에 나타나지 않으니 그리기 쉬운 것입니다." - 『한비자』「외저설좌상(外儲設左上)」- 31%


하지만 음악을 통한 이런 동질화는 유가가 강조하는 차별적인 예를 구현하는 데 적합하지 않았다. 『예기』에서 『악경』의 나머지 부분을 복원하지 않았던 이유도 이렇게 차별적인 예를 구현하는 데 방해가 되는 음악의 속성을 잘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음악은 서로를 같아지게 하는 것이고, 예란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이다. - 33%


주나라 초기 천의 개념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아직 인격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지만, 상제는 더 이상 마음대로 사람들을 통제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상나라의 멸망은 신의 변심이나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 왕이 절제하지 못하고 백성들이 도덕적인 기준을 지키지 못해 자초한 것이다. 하늘의 결정 기준은 하늘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이 세상 인간들의 행위에 있었다. 이제부터 인간은 스스로 도덕과 원칙을 지킨다면 하늘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45%


최근 연구에 의하면 한족이라는 범주는 유전적 계통으로도 구분되지 않는 비과학적 범주이다. 그렇다면 한족이라는 정체성을 설명할 유일한 요소는 한자를 지속적으로 사용해온 사람들의 집합이라는 것뿐이다. - 47%


여기서는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할이 진행되지 않았고, 철학자에 의해 이성과 감성, 진리와 가상을 구분하는 이중 세계가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이오니아학파 철학에서 진리는 도덕이나 감정과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결국 문자의보급이 세계관의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 49%


높다는 개념이 이렇게 추상적인 의미까지 확장된 것은 인간의 거의 모든 언어에서 나타난 공통적인 현상이다. 대부분의 언어에서 높다(高, high)라는 단어는 '높은 계급[고관(高官, high-class)]'에 있는 '고귀한 분(高貴, Highness)'의 '고결하고(高潔, high-souled)' '숭고한(崇高, high-minded)' 태도를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추상개념은 주로 인간의 신체적인 체험에서 비롯된 감각을 빌려 표현된다.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이를 개념 은유라는 틀로 설명한다, - 50%


공자는 주공의 세계관을 이상으로 따르며, 상나라의 주술적 세계관을 일관되게 부정한다. 주나라 초기 사회야말로 죽은 조상에 대한 숭배보다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 질서로서 예를 강조하고, 외형적 겉치레와 화려한 의식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건한 덕을 중요시했다고 믿었던 것이다.- 62%


그런데 중국의 청동기 시대에 청동제 생산도구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주장은, 인류 사회의 보편적 역사 발전 단계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유물사관 설명과 부합하지 않는다. 유물사관은 기술의 3단계 발전 순서를 따라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인류가 진보했다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중국 청동기 시대의 독자적인 특수성을 강조했던 뇌해종과 진몽가는 한 때 유물사관에 반하는 반혁명 우파로 몰려 학술 활동이 금지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 64%


이 지역 사람들은 황하라는 큰 강을 끼고 있지만, 정작 필요할 때는 물이 부족하고 필요하지 않을 때 오히려 물이 넘쳐나는 역설적 환경 속에서 생존해야만 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옛날부터 대규모 인원을 동원하여 홍수 방지용 제방 공사를 추진할 막강한 권력자의 출현을 반기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춘추 시대 최초의 패자 제환공과 진문공이 등장했던 곳이 바로 산동에 위치한 제나라와 진나라였다. 황하를 중심으로 하는 기후 환경적 요소는 이 지역의 정치 구조를 결정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 69%


그렇기 때문에 전통 시기 지식인은 유가 사상가로서 관리가 되어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 소명이었지만, 자유분방한 노장의 예술적 상상력을 겸비하지 않으면 속된 사람으로 천시받기도 했다. 유(有)의 철학으로서 유가와 무(無)의 철학으로서 노장이라는 두 사상이 지식인의 마음 속에서 서로 대립하면서도 조화를 이루어야 했다. - 72%


서쪽 변방의 진(秦)나라가 강국이 된 것은 급진적 법가 사상가 상앙이 기원전 356년 무렵 시행했던 일련의 정책 덕분이었다. 이때부터 진은 기존의 봉건적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치조직을 갖춘 제국으로 발전했다. 대규모 종족 조직을 상호 감시가 가능한 소규모 가족 단위로 재조정하고, 위법한 자에게 가혹한 조치를 취했다. 세습적 지위나 특권은 점차 사라졌고 국가에서 인정받은 공로가 있어야만 관직을 받을 수 있었다. - 75%


이 모든 문제의 발단은 오래된 자형인 소전체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당시 통용되는 예서체 글자를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내용을 끼워 맞춘 것이다. 이런 문자 왜곡은 단순한 오락에 그치지 않고 한 사회의 정서에 해악을 끼쳤다.-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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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인 가족 가운데, 유일한 청인 인 하은결은 모범생으로 가족들의 통역사로 살아가는 중에, 기타를 배운다. 자기만의 비밀로 기타를 배우고, 거리공연을 하다가 정식으로 밴드멤버가 된다. 하은결의 아버지는 아직 고등학생인, 공부를 잘 해서 자랑스러운 자신의 아들이 다른 직업을 갖기를 바라면서 반대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아버지와의 갈등이 폭발-폭발이라 하기에는 소리가 없지-하는 와중에 타임슬립해서 하은결은 지금 자신과 같은 나이의 아버지가 사는 시대로 이동한다. 2023년의 하은결인 채로, 1995년의 아버지 하이찬을 만나서 같이 밴드를 한다. 사고로 청력을 잃은 후천적 농인인 아버지의 청춘이 어땠는지, 선천적 농인이었던 어머니는 어땠는지 만난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데, 계모에게 말하기를 강요받는 어머니의 애달픈 삶을 개선하고, 아버지의 사고를 막겠다는 아무도 주지 않은 미션을 스스로 부여해서는 1995년의 모험을 한다. 돈 번다고 자신의 딸은 학대하는 계모 아래 두고 밖으로만 도는 어머니의 부자 아버지, 그러니까 있었던 미래에는 존재를 몰랐던 연락도 없던 외할아버지를 1995년 아직 들을 수 있는 하이찬(아버지)이 미래의 어머니 윤청아와 함께 만나서 이야기한다. 


"아버지는 세상 풍파를 막는 방패라고, 나에게는 그런 아버지가 없었지만, 청아(미래의 부인이고, 하은결의 어머니)에게는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한 말은 아니고 헤밍웨이가 한 말이라고 합니다."

"헤밍웨이, 아니고 스탕달. 아버지 아니고 어머니.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었어"


타임슬립물에서 미래를 해피하게 바꾸는 설정,에 거부감을 갖는다. 기존의 미래?라는 것과 너무 멀어지지 않아야, 이 타임 슬립 자체가 유효한 게 아닌가, 생각하는 거지. 같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같은 존재의 사람이 과연 될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 거다. 바꿀 수도 없는데 여행을 왜 하겠어?라고 뭔가 목적론자 같은 태도가 있을 수는 있지만, 여행 후에 달라진 게 나 뿐이어도, 삶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즐겁게 따라온 청량한 드라마의 엔딩에는 실망한다. 


그대로 옮겨놓고 싶었던 저 대화는 즐거웠고, 미래에서 온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동년배 소년에게 아버지에게 받을 만한 느낌을 받았다는 외로운 소년은 좋았다. 

부유하고 화려한 미래,라는 나의 불편한 엔딩은 이 이야기를 보는 사람이 사십대 자아가 없다는 나같은 사람이 아니라, 아직 청량한 젊은이들이길 기대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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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요시노 겐자부로 지음, 김욱 옮김 / 양철북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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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본 다음에 책을 구해 읽었다. 

어른이 아이들을 위해 쓴 책이다. 아버지를 잃은 소년의 외삼촌이 소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적어서 건네는 노트와 같은 구성이다. 소년이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들과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있고, 그 사건들 다음에 외삼촌이 소년에게 건네는 이야기가 있다. 어렸을 때 읽은 '사랑의 학교'가 생각났다. 

영화를 볼 때는, 잘못을 저지른 자국에 대한 변명이다,라는 식의 평가가 부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소설로 읽으니까, 뭔가 불편한 감정이 생기는 게 신기했다. 소년은 아버지가 없지만, 부유하고, 그 부유함의 배경은 없다. 1930년대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부유한 소년과 소년의 친구들 사이에서 식민지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결국 아이에게 어른이 해 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나는 이미 어른인데다가 식민지 조선인이었을 거라서 걸리는 감정들이 생긴다.

아이에게, 얼마나 정직해야 할까,라는 질문이 닥치고, 어른이 가지는 모순된 감정들이 닥친다. 아이들은 단순하고 극단적이기 때문에, 이야기 가운데 아이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들어서 이 소설의 단순하고 밝은 톤이 그대로 받아들여지다가도, 억울하다는 마음이 생기는 거다.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어른들이, 아이들은 보호한답시고, 아이들에게 다른 미래를 주겠다고, 아이들을 집에 두고 밖에 나가 나쁜 짓을 하고 있었어. 이 정도 이야기조차 금서라고 막았다고.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들이, 다시 어른이 되었을 때, 나쁘지 않은 세상은 가능한가 생각하는 거다. 잔인함을 적당히 막아서야 하지만, 지나치게 톤 다운시킨 이야기 가운데, 삶의 잔인함을 직시할 수도 없는 아이들을 키웠던가 회의하기도 하는 거다. 내가 느끼는 불편함을 아이들도 느낄 지 궁금한다.

아이들의 요구를 들으면서, 부모인 내가 어때야 하는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하는지 생각한다. 


네가 학교에서 배운 대로 또는 세상이 인정하는 대로만 살아간다면 언제까지나 자립한 사람이 될 수 없단다. 어린아이일 때는 그렇게만 해도 돼. 하지만 지금 네 나이라면 그것만으로는 모자란단다. 중요한 건 세상의 눈이 아니라 네 눈이야. 네 눈이 무엇에서 사람의 훌륭함을 찾고 있는지, 그것을 네 영혼이 알고 있어야 한단다. 그리고 진심으로 네가 생각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져야 해.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하고,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 때도, 네가 그것을 좋아한다고 확신할 때도 그 감정은 언제나 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단다. 기타미를 따라 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삶에는 "누가 뭐래도"하는 오기가 필요하단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와 네 엄마가 바라는 것처럼 훌륭한 사람은 될 수 없어. 네가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꿈꾸면서 열심히 노력하더라도 단지 겉으로 '훌륭해 보이는 사람'이 될 뿐 네 자신에게 떳떳한 '훌륭한 사람'은 되지 못한단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며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단다. 그들은 남들 눈에 비치는 자기 모습에만 신경 쓰다가 결국 진짜 나는 누구인지 잊어버리고는 하지. 나는 네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코페르, 다시 한번 말하는데 네 마음이 감동받을 때와 네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을 소중히 간직하렴. 그 기분을 잊지 말고 언제나 그 뜻을 생각해 보도록 해 -p52~53, 용감한 친구


어머니는 코페르를 보지 않고 뜨개질을 계속하면서 말했다. 

"너도 언젠가는 엄마가 겪은 일과 비슷한 경험을 할 거라고 생각해. 어쩌면 엄마가 겪었던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일지도 몰라. 그리고 엄마보다 더 많이 후회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네 인생에 손해가 되지는 않을 거야. 단순히 그 일만 놓고 본다면 되돌리고 싶을 만큼 잘못했다 싶겠지. 하지만 그렇게 후회해서 중요한 것을 알게 된다면 그 경험은 절대로 나쁜 게 아니야. 그런 일을 겪으면서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어 가는 거란다. 너도 그만큼 훌륭한 인간이 되는 거고. 그러니까 무슨 일을 하더라도 너 자신에게 실망해서는 안 돼. 네가 실수를 이겨 내고 다시 일어선다면 누군가는 그 노력과 마음을 알아 줄 거야. 사람들이 몰라주더라도 하느님은 분명히 보고 계실 거야."-p215~216, 돌층계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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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aladin.co.kr/stavrogin/15030330 , 이 백자평을 봤다.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어렸을 때, 티비로 전국노래자랑,을 보는데, 초청무용수로 공옥진여사가 나왔다. (https://namu.wiki/w/%EA%B3%B5%EC%98%A5%EC%A7%84)

어린 나는 충격을 받았다.

살면서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의 어떤 모습을 지금 저기 티비에서 흉내내는 춤을 추는데,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다들 보고 있다. 그 춤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런 모습을 그런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생각한다. 사람들은 보면서, 웃었을까, 따라 춤을 췄을까. 내가 받은 충격은 춤 때문이었을까? 그걸 구경하는 사람들 때문이었을까? 내 기억이 정확한지도 자신하지 못한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손가락이 없는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말을 못하는 사람, 살면서 쉽게 만나지지는 않았던 사람들을 어떻게 볼 지 어떻게 대할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도, 지나치게 친절한 것도, 지나치게 무심한 것도. 


그런데도, 이런 말에 동의가 되지 않았다. 

'장애人' 대신 '장애友',

'귀머거리' 대신 '농인',

'벙어리' 장갑 대신 '손모아'장갑,

'장님' 대신 '시각장애인',


약점이 드러난다고 해서, 내 전부가 약하지는 않고, 친구라는 게 그렇게 일방적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귀머거리,나 벙어리, 처럼 직관적인 우리말 표현 대신 알아차리기 힘든 한자 표현을 쓰는 것은, 무언가 거리를 만드는 거라고도 생각한다. 


혐오표현,에서 '혐오'라는 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라고도 생각한다. 


이 책을 읽을 때, '사진을 보고 설명해 주세요'에 말을 찾느라 옴싹달싹 못 하는 사람 이야기를 만난다. 


'긴 의자가 양쪽으로 있는 곳에, 흑인인 엄마와 아이가 울고 있어요'라고 설명할 수 있을 사진 한 장인데, '흑인'이 혐오표현이라고 수정하려고 '아프로아메리칸'을 선택하려 든다.

시대도 장소도 알 수 없는 사진을 보고, '흑인'이란 표현대신 '아프로아메리칸'을 택할 수 없다. 

'아메리칸'이란 표현은 부정확해진다. 관찰하는 행위, 표현하는 행위, 에 판단하고 검열하는 개입이 일어나고, 관찰은 부정확하게 표현되면서 부적절한 의사소통을 일으킨다. 




무언가를 혐오표현이라고 하지 말라고 내게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혐오를 드러내는 것 뿐이다. 


공옥진 여사의 춤이 혐오스럽다고 무대에 서지 못하게 했다면, 나는 곱사,의 움직임을 살면서 평생 못 보았을 수도 있다. 

벙어리장갑이라는 비유 가운데, 나는 말하지 못하는 불편함을 간접 체험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혐오표현에 대항하는 방법은 의미를 바꾸는 것 뿐이라고, 자부심의 표현으로 '딴따라'를 쓰는 박진영을 보면서 생각한다. 

검열이나 억압으로 혐오표현을 무력화시킬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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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3-11-04 1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어의 그물에 완전히 포획된 사람들이지요. 도착증에 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