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어떻게 죄가 되는가
매트 타이비 지음, 이순희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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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나 지금이나, 여기나 거기나,라며 읽게 되는 사례들이, 급박한 묘사들로 이어진다.

여러가지 증거들, 사례들, 현장들을 묘사한다. 월가의 억만장자들이 법망을 빠져나가는 것, 가난한 사람들이 법의 촘촘한 그물망에서 옴싹달싹 못 하는 것,을 묘사한다. 


나는, 읽는 내내, 누군가에게는 장점일 책의 서술방식이 거슬렸다. 소설처럼 묘사되는 정황, 빠르게 급류를 타고 넘는 듯한 묘사, 법정에 선 가난한 사람들의 절망감, 억만장자들의 기업사냥을 마치 스릴러물처럼 쓰는 것이 교묘하다고. 이미 강경한 자신의 '주장'이 있고, 나머지 묘사는 도구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사실만을 열거하는 것이 딱딱할 수도 있고, 주관은 없이 모두 다 사실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만큼 충실한 취재지만, 이미 소설적 묘사는 이성보다 감성에 호소하고 있다고 느낀다. 계속되는 '민주당 정부 들어서'라는 표현도 우리나라 실패한 정부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면서 역시 또 거슬렸다. 민주당 정부 들어서 오히려 완화된 경제범죄, 심각해진 이민자 추방,에 대한 묘사가 이 책의 주장 대신 다른 의문을 머릿속에서 솟구치게 하는 지경이 되었다. 여기나 거기나 왜 그런 걸까. 왜 한번도 그 진심을 의심한 적 없었던 '노무현'대통령은 결국 실패했던 걸까. 도대체 왜. 


책 속에, 재판받는 경영진에 대한 묘사가 있다. 재판정에 선 사장은 지금껏 한 번의 범법행위도 하지 않은, 성실한 가장이며, 지역의 유력자로써 지금까지 행한 여러 활동에 대하여 묘사한 변호, 여러 회사 밖 인맥들의 탄원서를 첨부하고, 방청석에는 온갖 지인들-보통은 함께 어울릴 사장님이나 서장님이나 교수나 변호사같은 사람들-이 자리를 메우고, 아내와 자녀는 방청석에 앉아 눈물을 흘린다. 그 묘사를 보고 있자니, '판사도 사람인데' 싶은 거다. 뒤이어, 자기 집 앞에서 서 있었다는 이유로 체포된 유색인종의 재판이 묘사될 때는 '사람이 하는 일'들이 사람답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한지 생각하는 거다. 그리고, 사람을 만나고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노무현,대통령은 권력을 잡았고, 그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는 그게 존경받아 마땅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독재에 이미 길들어, 권력을 잡았으니, 권력을 휘두르라고 하는 말은 무의미하다고도, 왜 '참여정부'라고 부르고 싶었는지도 조금은 알겠다. 

그렇지만, 그 기간 동안 내내, 그러니까 IMF이후 계속 비정규직은 늘어났고, 고용은 불안정해졌고,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자신의 모든 시간을 팔아 돈을 벌면서 살게 되었다. 망해가는 기업에 세금을 쏟아 부었어도, 그 기업의 주상복합을 산 사람이 결국 지어지지 않은 그 집을 그 돈을 그저 날리는 걸 사람들은 보았다. 합리성을 주장하는 말들이 넘치면서, 초보적인 수준의 합리성이 큰 의미를 잠식했다. 공동체는 깨어지고, 불평등은 심화되었다. 

오바마,는 정치를 하면서 후원금을 청하는 전화가 가장 힘들다고 했단다. 정치에는 돈이 들고, 권력이 없던 자가 권력을 잡았을 때, 권력을 통해 이권을 누리려는 사람들이 쓰게 되는 이권의 값은 오히려 하락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 가치,자체가 거래되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온갖 훌륭한 말들과 태도와 결국 둘 중에서 하는 선택이라면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정당이, 집권한 다음 실패하는 것이 아닐까. 기득권세력처럼 뻔뻔하지 못한 것 때문에, 오히려 실패하는 건 아닐까, 라는 비약이 심한 생각들로 머리를 어지럽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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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칼국수 팔아서 20억이래.

 

연매출은 재료값이 안 들어가, 뻥이야.

그리고 샤브칼국수면, 그게 칼국수 팔아 번 돈이라니, 고깃집에서 된장찌개나오면 그게 된장찌개팔아 번 돈이라니, 고기팔아 번 돈이지.

엄마는 줄 길면 안 간다.

 

그런데, 진행 중에 나온 칼국수 가격이 1인당 7천원.

아, 칼국수 판 건 인정.

 

근데, 저기 일하는 사람들 보이지? 벌써 몇 명이야?

열명도 넘어보이는데, 연매출 중 반이 수익인 거면-보통 그 정도 안 남아, 게다가 장소를 빌리면 세도 줘야 한다구-10억인데, 스무명이면 얼마겠냐?

 

그런데, 제목으로 크게 뽑은 연매출의 산출방식은 카메라가 찍은 그 하루의 매출액에 한달 30일, 다시 열두달,로 셈한 거였다.

 

야, 저걸 저렇게 셈하면 안 되지. 저 사람들은 일년 내내 엿새 논다니, 사람이 그러고 살 수 있다니?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걸 계산하려면 한 달에 20일 쳐야지, 30일 내내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네가 뭘 싸게 주고 샀다고 좋아할 거 없어. 누군가, 엄청 일하고 돈을 덜 받은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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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 왜 민주주의에서 마음이 중요한가
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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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너무 끔찍해서 뒤엎고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반응을 가끔 본다. 나는, 언제나 그런 반응이 무서웠고, 그래서 '매드맥스'조차 싫었다. 문명이 사라진 세상이라는 것도, 건강하고 젊은 육체에게 부여되어야 한다고 보는 힘,이라는 것도. 그런데도, 나의 이런 태도가 무척이나 '보수적'이라는 자각이 닥치면 또 무언가 무서웠다. 균형잡기 힘든, 삶이란 외줄을 타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 위태롭다고 느꼈다.

산다는 게, 살아갈수록 더 어렵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나는 살아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 보통은 능숙하게 자기합리화를 하지만, 이런 나의 흔들리는 마음들을 설명하기 힘든 날들에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게 힘들어져서, 안으로 안으로 들어간다.

이 책은, 이상을 가지고 새로 시작한 나라, 미국에서 퀘이커교라는 종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이 썼고, '왜 민주주의에 마음이 중요한가'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합리'의 언어로 내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내내 실패하는 와중에, 민주당이 재집권에 실패한 이유가 어쩌면 '마음'에 가닿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결국 그 와중에 내가 한 어떤 말이나 행동도 지금의 나쁜 상황에 일조했다는 생각 때문에 읽게 되었다. '마음'은 어떤 걸까.

책은 '비통함'을 이상과 현실의 간극에 대한 자각,이라고 어떤 삶도 그 간극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간극을 보는 순간, 느끼는 슬픔에 대하여 말한다. 미국의 건국자들이 애시당초 '인간'의 범주에 '여성과 아이와 흑인 노예'를 포함시키지 않고 쓴 선언이라도, 이미 존재하는 선언의 믿음이 자신의 믿음-'여성도 아이도 흑인 노예도 사람'이라는-과 만나고, 그 믿음 속에서 현실을 보는 순간 자각하게 되는 간극에서 느끼는 비통함, 슬픔,에 대하여 말한다. 죽음을 무릅쓰는 용기,가 아니라, 이미 자각하게 된 마음 속의 감옥,을 견뎌낼 수 없는 순간 드러나는 그 용기,를 알겠다. 흑백차별정책에 '싫어요'라고 말한 로자가 '체포될 수도 있어요'라고 말하는 경관에게, '어차피 마음 속이 감옥이다'라고 말하는 그 심정을 알겠다. 마음,이라는, 마음과 다른 삶 때문에 병들고 죽을 수도 있는 그 마음, 때문에, 사람들은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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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에 반대한다 - 왜 우리는 이기기 위한 경주에 삶을 낭비하는가?
알피 콘 지음, 이영노 옮김 / 산눈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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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건 복종과 순응이다.


나는, 올 초까지 내부평가관련 업무를 담당했었다. 회사에서 하는 일을 조직단위로 쪼개고 쪼개어진 조직들을 비슷한 그룹끼리 묶어 해당 조직의 목표를 수치화하고, 수치화한 목표를 비교하여, 1등부터 꼴등까지 순위를 매기고, 순위에 따라 '성과급'을 지급하기 위한 일. 물론 큰 틀의 얼개가 이렇다는 거고, 나의 일은 내가 속한 조직에 할당된 목표,들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알고보면 이 조직의 일은 저 조직의 일을 돕는 거고, 그 일을 하려면 또 다른 이 조직의 이게 받쳐줘야 하는 거라서, 지표를 달성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은 너무 포괄적이라서 현장의 일들과 뚝 떨어져 쓸모 없거나, 혹은 너무 지엽적이라 쓸모없는 것들 이었다. 게다가, 조직이 점점 세분화되어 결국 팀 단위까지 쪼개지고 나면 그저 그 일을 해달라는 게 미안한 지경인 일들만 남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도, 나라에서 회사를 평가하니 나라의 평가기준을 맞추기 위해, 회사도 이런 식의 평가를 해야 한다는 설명을 듣는다. 게다가 나라에서 회사를 평가하는 일은, 또 나라의 일이라서 나라에서 장려하는 사회적 기업이나 여성기업 환경친화기업 등등의 물건을 얼마나 샀는지 등을 지표화하기 일쑤였다. '유기적'인 협력으로 '개인'은 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위해 '조직'을 구성해놓고는 내부에 이런 '경쟁'을 통해 '협력'을 실제로 방해하는 일들을 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드는 날들이었다. 그 때마다 떠오르는 건, '사립학교법' 제정 당시에 근 한달을 장외투쟁하던 지금의 대통령을 뉴스로 전해들으면서 남편과 했던 '돈을 받아쳐먹으면서, 평가를 당연히 받아야지*'라고 한 말이었다. 

이게 떠오르면 나는 내가 평가하는 자일 때와 평가받는 자일 때 그저 편리한 식으로 말하고 있는 건가 싶어 한심했다. 그런데,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그러니까, 나는 같은 언어, 경쟁의 언어를 쓰고 있었던 거다. 

'경쟁의 언어'를 쓰는 것은, '평가자'의 존재, '결과를 수용하는 태도', '결과를 통한 불이익을 감수하는 복종'을 모두 포괄한다. 더하여, 서로를 믿지 못하는 개인까지. 

나는 양육자,의 위치에서 저자가 경쟁을 통한 교육,을 말하는 것을 듣는다. 부모나 교사처럼 절대적일 수 있는 사람의 가치기준은 쉽게 아이에게 전해진다. 경쟁을 통한 교육에는 이미 정해진 기준을 수용하는 태도, 결과에 승복하는 태도, 가 필요하다. 끊임없이 학습되는 것은, 모두 다른 개인의 모두 다른 삶의 방식이 아니라, 결과로 드러나는 같은 기준이다. 

부모나 교사나 경영자의 위치에서 경쟁하는 방식은 이미 세팅된 여러가지 방법 중에 고르면 될 정도로 많고, 쉽고, 빠르고 직관적이다. '누가 제일 잘 하나 볼까'라고 말하기만 하면 충분한 거다. 그런데,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런 게 정말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다 늦게 깨닫는 중인 나는, 내가 그걸 깨달아 온 회사에서 회사 안이 그런 식으로 달라지는 걸 보고 있다. 나라 전체가 경쟁의 언어로 물들어 버려서, 나라가 운영하는 조직이 -그러니까 정부 행정조직과 공기업들이- 그런 방식의 운영에 압력을 받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 지금이라면, '야, 도대체 뭔 짓을 하길래 재단에 사외이사 한 명 넣겠다는 걸 저렇게 반대하는 거야'라고 말해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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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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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었다. '한국이 싫어서'가 끔찍했는데도, 작가의 커리어의 시작인데다가 '한겨레 문학상'수상작으로 책장에 이미 꽂혀있어서 읽어보았다. 무언가 다를까,하고. 역시 기분 나쁘게 마쳤다. 그러고는 한참을 그 기분나쁜 감정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마이뉴스 오연호기자가 쓴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를 읽다가 알게 되었다. 왜, 무엇이 그렇게 기분나빴는지. 


사는 건, 그냥 태어났으니 사는 거고, 나는 특별하지 않다. 

살기 위해서 특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타인과 동등한 만큼의 특별함, 생명이 가지는 무게만큼의 특별함이 있다면 있는 거고. 

특별함이라는 게 두드러지는 영웅적 업적, 만고에 길이 남을 이름,?따위라면 없는 거다. 


나는, 아예 책속의 화자와 아예 똑같은 세대인데도, 책속의 말들이 내내 의아했다. 


체제는 고착되었고, 변화의 여지는 없다? 정말? 

이미 전 세대가 일궈놓았고, 우리 세대가 할 일은 없다? 정말?

삶의 정점에서 삶의 무의미성을 죽음으로 웅변하겠다? 엥?

그 삶의 정점이라는 게 면허시험 합격? MBA수석졸업? 취업?이야?

이걸 삶의 정점,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죽음이, 무언가 연결된 또 다른 죽음이, 연쇄적인 죽음이 무슨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무슨 말? 

원래 태어났으니 사는 거고, 나는 특별하지 않은데?


나는, 자기가 특별하지 않아 아예 못 살 지경인 사람을 살면서 만났었을까? 

 

읽는 동안 내내 거슬렸던 건 남자들의 환상을 응축해놓은 것 같은 여성 캐릭터였고, 책을 덮으면서는 이 기분나쁜 감정을 설명하고 싶었다. 

아예 다른 세대라면 '한국이 싫어서'를 읽을 때처럼 구경이라도 하겠는데, 나의 세대라고 생각하니 억울한 마음이 되었다. 이 한심한 세대가 나?의 또래집단이라고? 

작가가 겪은 결과 내가 겪은 결이 얼마나 다른지 우선 놀라고, 이야기가 전부 욕처럼 읽힌다. 도대체, 무얼 읽으라고 이 이야기에 한겨레는 '문학상'씩이나 준 거냐고 묻고도 싶었다. 


나의 이십대는 저렇지 않았고, 나의 사십대도 저렇지 않다.  


굳이 교훈이라면, 아이에게 개인의 '특별함'을 강조하는 건, 정말이지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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