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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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눈부신 노란색의 새나, 선명한 자주색의 꽃이나, 투명하게 맑은 지나친 파란색의 풀물을 보면 놀란다. 자연에서 비롯하지 않는 그 무엇도 상상해낼 수 없는 인간이면서도, 인공의 색들에 익숙해져서 그 인공의 색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도리어 잊고는 '수박이 냉장고에 산다'고 말하는 꼬맹이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 된다. 연애소설읽는 노인과 나는 그만큼 다르다.

그래서, 노인이 사라진 밀림이 걱정된다. 자연을 건너건너 이해하는 지금의 내가 숲속의 사냥꾼처럼 이유없는 살육을 '이유있다'고 믿으며 어느날 닥치는 복수에 무방비로 놓일까봐 걱정이 된다.

노인도 처음부터 나와 다른 사람은 아니었다. 밀림을 개간하겠다고 고향을 떠나던 젊은 날의 노인은 나처럼 자연을 취하면서 그 하나하나를 모두 이유있다 믿고 있었다. 먹고 입고 자는 하나하나가 직접이 아니라 간접으로 내게 도달할 때, 난 '생존'을 위해 활동하면서도 그걸 느낄 수 없다. 그 모든 간접적 경로가 차단된 공간에서 노인은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생존'의 방법, 자연과 공존하는 법을 배운다. 강변의 마을사람들은 맹수에 죽임당한 시체를 보면서, 단지 맹수를 두려워할 뿐이지만, 노인은 맹수를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인식하고 이해하고 행동한다. 간접으로 '생존'하고 있는 문명속의 내가 할 수 없는 방식을 삶으로 터득하고 있다.

어떤 선언보다 간결하게 내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내가 노인의 소설읽을 시간을 빼앗고 있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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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수염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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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렇지, 나라도 그런 상황이라면 사라지고 싶을 거야. 뼈가 하얗게 드러나는 상처따위 볼 수 없는 척, 내 손으로 내 살을 도려내고 싶을 거야. 머릿속은 텅비고, 손은 내 손이 아닌 것처럼 지독한 관성으로 움직일 수도 있을 거야. 아픔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거야.

책장을 덮으면서, 그래도 여전히 아무일 없던 듯 지속될 수 있는 거라면 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던 마음이 비죽비죽 솟았음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그렇지만, 참을 수 없는 것은 '아무 일 없던 듯'이란 걸 안다.

극심한 마음 속의 갈등들이 아예 없던 것이 되는 순간, 나란 존재는 도대체 무어란 말이냐. 여전히 이런 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아프고, 몸도 아프고, 서운하고, 슬프고, 이런 저런 방식으로 반응하는 나는 도대체 언제 어떤 식으로 존재해 온 것인가 말이다. 내가 알던 사람들, 갑자기 모르던 사람이 되고, 내가 디디고 서 있던 그 견고한 바닥이 일순 무너져 버린다면, 나는 그런데도 여전히 '나'라고 계속 '아무일 없던 듯' 살아질까. 자신이 없다. 다르지 않은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일 내게 닥치지 않기를, 바라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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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이종인 옮김 / 동아일보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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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감정을 툭하고 쳐서는 당황합니다.

늘 마주치던 눈빛이 어느 순간 다른 감정이 되는 것을, 의미없는 말 한마디에 목숨만큼 소중하다고 여겨지던 어떤 것이 가벼워지는 것을 혹은 그 반대가 되는 것을 느낀 적 있다면, 이 소설이 불러일으키는 연상에 당혹과 매혹을 경험할 수 있을 겁니다.

이유없이 고집을 부릴 때가 있습니다. 삶의 어느 순간 내가 가진 감정이 그 다음 순간 설명할 수 없음을 알고 당황스러워도, 그 때 내가 그럴 수밖에 없음을 나는 압니다.

너무 오래 산 하숙집 여주인이 연상시킨 자신의 어머니때문에 한없이 친근하기도 하고, 갑자기 닥친 꼬마아이의 한 마디에 연애를 더이상 지속시킬 수 없기도 하고, 이제 다시 회복되기 시작한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닥친 이별의 전언이 무심히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걱정이 많은 타인에게 아무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에 자책하기도 하고, 공연히 저 사람은 더 잘 날 이해할 거라고 속단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타인에게 감정을 만드는 것과, 이유를 알지도 못하고 내 안에 쌓이는 이 많은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을 소설들은 삶의 모습으로 비춰줍니다.

급류처럼 나를 휩쓸어 어느 미지의 해안에 내려놓는 대신,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훅하고 내가 서있는 데로 불어와서는 온 몸의 작은 털들을 흔들어 댑니다. 내가 이걸 느낄 수 있다는 게 되려 신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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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번째 주검 캐드펠 시리즈 2
엘리스 피터스 지음, 김훈 옮김 / 북하우스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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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흔아홉번째 주검'이래서, 계속 죽어나가는 그런 소설인 줄 알았지 뭐야', 빌려읽은 방 언니가 말했습니다. 몸을 길게 늘이고 다른 책을 읽고 있던 나는 생각합니다. '난 뭐라고 생각하며 그 책을 골랐었더라?'

고를 때, 그리고 읽기 시작할 때 어떤 기대를 했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았지만 읽고 나서 어떤 느낌이었는지는 간신히 기억해냅니다. 후다닥, 읽어 치운 다음 그랬습니다, '엇, 참 맥아리가 없잖아'. 언니랑 다르지 않은 기대 나도 하고 있었나 봅니다. 아흔 아홉을 죽이는 연쇄 살인마의 등장 따위 말입니다.

그렇지만, 또 다음 순간 생각합니다. 참 익숙해졌구나, 잔인한 살인의 장면에, 난폭한 시체의 묘사에.. 그런 생각들 하고 나니까, 소설의 좋았던 느낌들 새록 새록 새로와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는' 거라서 가문의 적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사람과, 오해에서 비롯되었더라도 그 믿음을 지켜주려는 사랑과, 비겁하지 않은 적과 용감한 도망자 말입니다.

너무 잔인한 게 익숙해진 내 자신을 돌아보게 한 수사님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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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한 다음에 인생을 즐기자
에바 헬러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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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난 여성인 내 자신에게 얼마나 관대한가, 여성인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는 고전적 여성상에 대한 강박만큼 혹여 여성인 나를 드러내어 도움을 청해서는 안 된다는 현대적 수퍼우먼 페미니스트에 대한 강박때문에 내 자신을 고되게 하지는 않는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솔직한가?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내 자신에게 하게 되는 질문이었다.

지빌레는 '지금까지, 수천년동안 남자가 여성을 부양했으니, 지금 네가 나를 부양하는 것은 사실 공평하다'는 식의 남자를 부양하다가, '넌 몸매를 좀 가꾸어야 해'라는 일방적인 결별을 당한다. '너는 해방된 여성이니, 내게 연연하지 말라'는 절친한 충고까지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네게 필요한 건 새로운 연인이야'라는 친구의 충고도 가볍게 들어넘기고, 자신에게 스무번도 더 물어 도달한 간결한 소원-그 남자의 새로운 관계의 파탄-을 실행에 옮긴다.

여성인 내가 자주 잊는 것은 내 자신에게 진정 원하는 게 무언지 묻는 것이다. 늘 어떤 이미지들에 갇혀서는 원하는 것들에 솔직하지 못하다. 지나친 소심함! 지빌레가 이런 나의 단점을 가뿐히 뛰어넘을 때 몹시 부러웠다. 그렇다고, 내가 그녀의 그런 결정들 충분히 동의한 건 아니다. 그런 남자 뭐가 좋다고 반, 그런다고 달라질게 뭔가 반...

그렇지만, 예상보다 굉장히 많이 달라진다!!!! 모든 해피엔딩은 관계의 회복만을 의미하지는 않으니까, 진면모를 알게 되고 사기꾼을 등쳐먹는 기쁨을 누리는 것도 아주 많이 행복한 엔딩이다.

여성에게도 천가지 만가지 표정이 있음에도, 얼마나 같은 얼굴 같은 표정을 바라는지 소름끼칠 때가 있다. 맞추기 너무 힘든 옷에 몸을 맞추는 것처럼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은 모순되고 불가능하다. 그건 고전적 여성상이건, 현대적 여성상-그 남자의 입에 붙은 '해방여성'-이건 마찬가지다. 둘 중 어느 것도 까다롭지만,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를 상쇄하거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늘 투정으로 비칠까 '나도 힘들어'란 말 하지 못했는데, 소설을 보니 위안이 된다. 내가 행복하다면, 내 마음이 평화롭다면, 나는 난데 뭐 그리 고달프게 한단 말인가! 다시 한 번 묻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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