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좋아서 선물도 하고, 나중에 아이에게 읽게 하려고 다시 산 책에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라는 청소년 소설이 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2220098)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로 시작하는 죽은 친구의 일기를 읽는 소녀의 이야기다. 읽으면서 많이 운 나는, 죽음을 생각하며 잔소리하는 엄마를 용서하는 소년의 삶의 태도가 대단하다고 남편과 이야기했다. 당장 내일 내가 죽어도, 당장 내일 내 눈 앞에 당신이 죽어도, 지금 나의 이 말이, 행동이 후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쉽지는 않지만, 그렇게 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래서, 티비에서 이 광고를 봤을 때 너무 놀랐다. 

4년이나, 저러면서 살 수 있어? 게다가 그 상황들은 남자에게 부당하다는 느낌이 들었거든. 

쉬겠다는데 나가자고 바지를 잡아당기는 아내, 나가려고 준비를 마치고 이제 나가자는데 여전히 옷을 고르다가 '안 가'라고 말하는 아내, 변기뚜껑을 내리지 않았다고 드라이기로 이상한 데를 말린다고 화를 내는 아내, 게임을 하고 있는데 이제 자라고 코드를 뽑아버리는 아내. 광고를 보는 아들이 결혼을 안 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겠는걸 싶었다. 

결혼은 문명의 충돌이 맞지만 -아, 나는 문명의 충돌,을 못 읽는구나.- 누가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가정은 서로 다른 문명이 부딪쳐 만드는 것이 맞지만, 일방적일 수는 없다. 좋은 말들을, 서로에 대한 감사를 조금씩 조금씩 훈련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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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검객무정검 세트 - 전5권
고룡 지음, 최재용 옮김, 전형준 감수 / 그린하우스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중학교 때였던가, 사랑하는 여인의 결혼식에 웨딩드레스를 보내는 남자 이야기가 있었다. 여자는 너무 슬퍼서, 그게 발목이 다 나오는데도 고치지 않고 입었다던가, 그런데, 나중에 나중에 아주 나중에 그 드레스를 고치는데-잘 기억이 안 나는데, 딸의 결혼인가, 손녀의 결혼인가, 뭔가 이제 고칠 수 있는 사람이 그 드레스를 고치는 거지- 단을 풀었더니, 어디 어디로 언제 나오라는 쪽지가 들어있다던가, 하는 이야기였다. 누군가 아련아련하게 들려주던 그 이야기를 나는, 뭐야? 싶게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게 뭐래, 그게 왜 아련아련이라니, 바보 멍충이들이구만. 뭐 인연이 아닌 거지. 

내가 이런 사람이라서, 나는 이 이야기가 그렇게 좋지 않았다. 우정과 사랑 가운데, 우정을 택한 남자가 자신을 사랑한 여자를 양보?한다? 와 역시, 여자인 나는 좋지 않다. 기둥 줄거리가 그런 거다. 읽은 거라고는 김용 뿐인 일천한 무협독자가 게다가 건조하기가 상상을 초월하는 여자인 내가, 이 책을 좋게 읽을 여지는 정말 여러모로 없는 거다. 무협영화의 쓸쓸한 아련함을 그래도 좋아하는 나에게, 남은 게 있다면 쓸쓸한 분위기다. 잔뜩 힘을 주고 묘사하는 문체를 탈탈 털고 나면, 여전히 칼을 잘 쓰는-이게 가능한가,라는 실용적인 질문은 항상 했다, 내가- 술꾼 아저씨가 십수년이 지난 사랑을 아쉽게 붙잡고 있는 이야기 가운데, 오래된 은원이 뒤섞여 다시 이야기가 펼쳐진다. 여자 악당들이 등장하고, 남자 악당들도 등장하고, 교활한 아이도 등장하는 이야기 안에서 나는 좋다던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무언가 '시동'을 보고 읽었을 때 느꼈던 거리감을 또 느끼면서 읽었다. 지나치게 수동적인 여성-그래서 사랑은 받지만, 사랑할 수는 없이 불행한-과 지나치게 능동적인 여성-사랑받고 있는 동안, 사랑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조종하려고 하는, 그래서 결국은 버림받는-이 등장한다. 남성들의 우정 가운데, 여성이 배경이나 악당으로 존재하는 이야기를 어렵게 읽으면서, 거대한 거리를 느낀다. 남성과 여성이 얼마나 다른 이야기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지 새삼 다시 한번 느낀다. 

십년이 굉장히 길게 느껴질 좀 더 어린 남자가, 사랑과 우정 가운데 고민하면서 읽는다면 아마도 좋으려나. 그렇게 어린 어떤 날 읽고 다시 읽으면 또 다른 기분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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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이유가 불편해서 아무 말도 못 남겼던 책이다. 다들 좋다는데, 나는 불편하네, 내가 뭐라고 나쁜 말만 남기나, 이러면서 남기지 않았었는데, 이제 내게 책이 없으니 뭐라도 남기기로.  


1.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되는 법


나는 왜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의 좋은 서평을 보고, 저자의 이 책을 사서 읽었을까. 이게 더 궁금했기 때문이었나. 

책을 읽고 무언가 앙상한 느낌이라 아무 말도 남기지 못했다. 

나는 이게 오리엔탈리즘, 처럼 느껴졌다. 

그 남자의 삶을 따라가는 것이 문학적인 느낌이 남았다기 보다, 서양이 동양을 보는 방식처럼 느껴졌다. 

뭔가 서양인이 부유해진 것은 달랐단 말이야, 싶은 반발심이 들었다. 

어디라고 달라? 싶은 반발심이다. 




2. 작은 것들의 신


슬픈 사랑이야기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의 배경이 껄끄러워서 집중하지 못했다. 인도를 배경으로 쓰여진 아픈 이야기가, 영국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나는 이 이야기의 어떤 면이 그럴 수 있었는지 생각했다. 이야기의 가장 큰 갈등은 전통적인 카스트제도에서 비롯된다. 카스트제도에 묶여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이 가장 나중에 드러나는 어떤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의심한다. 카스트,라는 절대 악이 존재했었던 과거의 세계를 결국 극복하지 못한 지금의 인도가 묘사되기 때문에, 영국인이 좋아했던 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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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은 동경하게 되는 걸까. 자신이 가진 것, 자신이 하는 일에 뚱한 마음이 점점 커지고 다른 사람이 가진 것,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보는 마음이 자꾸 커지는 걸까. 자신이 가진 것에 행복할 수 있다면 더 좋을 텐데. 

삼시세끼 어촌편6을 보는데, 엄마 아빠 생각이 났다. 엄마랑 늘 가깝다고 생각했었지만, 회사에 들어가면서 아빠를 이해했다. 내내 학생이었다가 직장인이었던 그 순간에 아빠의 수고를 이해하면서 엄마를 조금은 노는 사람처럼 생각도 한 거 같다. 아이를 낳고 나서야, 아이를 기르면서야 엄마의 수고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엄마랑 아빠가 얼마나 서로를 고마워했었는지도 떠올랐다. 가족들끼리의 원망이나 다툼이 없었다는 게 아니라, 그래도 그 안에서 서로의 역할을 존중했다. 

삼시세끼는 남자들만 나와서 그저 세 끼 밥을 먹는 거 뿐이지만, 보고 있으면 어떤 일이 더 가치있다 말하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가 생각하게 된다. 단순화시킨 하루의 일상이다. 무얼 먹을지 고민하는 삶. 고기를 잡았으면 그걸로 먹고, 못 잡았으면 다른 걸로 어떻게든 먹는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라는 말이 가지는 그 단순함이 눈 앞에 펼쳐지고 내가 하는 일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낚시를 나가는 유해진과 요리를 하는 차승원, 불을 피우고 요리를 보조하는 손호준은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모습으로 서로의 일들을 존중한다. 낚시를 같이 나갔다 들어온 저녁, 유해진을 고생했다면서 토닥이는 차승원은, 자신은 못 할 일이라며 고마워한다. 하나도 낚지 못한 어떤 날이나, 큰 고기를 잡고 어깨를 쫙 펴고 들어온 어떤 날이나, 그 사람에 대한 고마움이 다르지 않다. 늘 끼니를 걱정하면서 종종거리면서 요리를 척척 해내는 차승원에게 유해진이 전하는 고마움도 다르지 않다. 자신이 하지 못할 일을 해내는 서로에게 전하는 감사함이 전해졌다. 저녁 먹은 다음에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하다고 말하는 손호준에게서도 도움이 되고 있어서 좋은 그 마음이 느껴진다. 어떤 자신의 수고도 다른 사람에게 원망이 되지 않는다. 

더 중하고 덜 중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 맡은 일 가운데 서로를 고마워하면서 함께 일할 수 있으면 좋다. 함께 살아가는데, 서로를 고마워하는 것처럼 중요한 게 어디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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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지니 광고( https://www.youtube.com/watch?v=isIGE_tudCo )를 보고 있었다. 

"엄마 말은 안 듣는 얘가 기가지니 말을 듣네"라는 내 말에 남편이 "어이구, 좋댄다"라고 추임새를 넣어서 빵 터졌다. 

엄마 말을 안 듣는 아이가 기계가 하는 말은 듣는가? 애초에 그 자체에 의문이 드는데 이런 광고는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사람과 말할 때는 눈을 보고 말하고, 화가 나서 말이 안 나올 때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상대가 반응하는 걸 보면서 말의 톤을 조정하고, 말의 투를 조정하고, 이 설명하기 어렵고 복잡하고 감각적인 것들을 아이들은 어디서 배운단 말인가. 엄마가 이렇게 말할 때는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 거야,라는 다음의 예측이 일어나야 하지 않는가. 가족 안에서 배워야, 위험을 피하고, 위협을 감지하고, 상대를 분별하고, 가족 밖에서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아직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피곤한 나는, 기가지니에게 예절을 배우는 어린이가 걱정스럽다.


꽤 오래 전에 삼성의 패밀리 허브 광고를 보면서도 불편한 심사를 써놓은 게 있어서 퍼 놓는다. 기가지니와 대화하고 냉장고와 대화하는 것은 어쩌면 혼자 사는 쓸쓸함 가운데 필요할텐데, 아이와 엄마, 단란한 가족 가운데에서는 영 어색한 이야기만이 생긴다. 


삼성 패밀리 허브 광고, 가
- 사람들 눈에 저게 행복의 묘사인가, 이런 생각을
남편이 산 비싼 글러브가, 아내를 화나게 한다. 화난 아내를 살피며 분리수거도, 청소도 열심인 남편이 묘사된다. 남편이 아니라, 냉장고에게 말 거는 아내는 남편이 거의 포기할 즈음, '칼국수 먹을래'라고 질문한다. 냉장고가 아니라, 아이가 아니라, 자신에게 질문했다는 게 기쁜 남편은 자기가 하겠다며, 냉장고의 설명에 따라 요리를 한다. 칼국수를 끓여 아이와 아내가 함께 먹는다. 나는 묘사 하나하나가 다 무섭다. 남편도 아이도 있는데, 냉장고에 말거는 아내-라디오 좀 켜 줄래-, 비싼 가격이 찍힌 영수증을 보면서 문을 쾅 닫고 들어가는 아내, 혼자 노는 아이. 그저 저런 묘사를 못 보겠다. 냉장고라니, 요리를 보여주고, 속을 보여주고, 라디오도 나오는 냉장고가 '가족을 이어주는'이라니 끔찍해서. 아마도 사물 인터넷으로 다른 것들까지 연결했겠지만 역시 나는 아주 끔찍해서 못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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