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를 볼 때, 모든 갈등이 끝났는데, 16화는 뭘 하려나, 싶었다. 

결혼을 하려나. 주인공 커플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양가부모의 허락도 받았고, 서브커플도 맺어졌다. 프로포즈를 벌써 두 번쯤은 한 것도 같고, 도대체 16화는 뭘로 채우려나, 싶었는데 내심 결혼하려나 기대도 했는데, 역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연애지상주의자들이 연예계에 가득한가. 두 번이나 청혼받은 석류는 받기만 한 게 미안하다면서 청혼도 했으면서 당장 결혼하기보다 결혼을 미루고, 아직 젊은 자신의 부모들에게 드레스를 입힌다. 이건 뭘까. 

티비라는 올드매체의 시청자가 젊은 커플보다 커플의 부모세대이기 때문에, 결혼이 평화롭고 다시 한 번 드레스를 입기를 원했던 걸까. 정말 지금 젋은 세대들은 결혼이 그렇게까지 두려운 걸까. 석류와 승효가 결혼을 미룬 이유는 못 해본 연애를 원없이 하고 싶다, 이고, 모음이랑 단호가 결혼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모음이가 남극기지로 파견갔기 때문이다. 

젊은이는 결혼을 왜 하는 걸까. 젊은 여성들은 왜 결혼이 두려운 건가. 연애와 결혼의 차이는 뭔가. 정말이지 내가 궁금해서 누구라도 붙들고 물어보고 싶은데, 이런 질문은 너무 무례해서 할 수가 없다. 

나는 연애가 정말 너무 귀찮은 사람이라서, 젊은 커플들의 결혼거부증을 이해할 수가 없다. 좋아서 죽겠다면서, 정말 네가 너무 좋다는 로맨스의 결말들이 이러니까 내가 또 이해가 안 되는 거지. 영원히 너만 사랑하면서 늙고 싶다면서 왜 결혼을 두려워하는가 싶은 판타지 속의 젊은 연인들- 사내맞선 하태커플도, 선재업고 튀어의 솔선커플도, 일타스캔들의 열선커플도 그랬다-을 모르겠다. 아니면, 나같은 올드한 시청자들이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게 '결혼하자'에 '좋아'라고 대답하는 장면에서 드라마를 끊지 않는 지금의 세태를 모르겠다. 그게 더 멋있나? 역시 모르겠구나. 사랑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믿는 로맨스 창작자들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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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왜 의미 있는가 - 속물 사회를 살아가는 자유인의 나침반
이한 지음 / 미지북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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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실패하지만 늘 시도하는 책장정리 가운데, 포스트잇이 붙은 이 책을 꺼냈다. 포스트 잇을 떼어내고 싶다. 우선 그 내용을 적자 싶어서 언제 읽었는지 찾았다. 2020년 8월에 마쳤다. 

'삶의 의미를 묻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 지 탐구하는 것은, 과거에도 앞으로도 불가능하지 않을까'라고 써놓았더라. 불가능한 일을 하기 위해 책 한 권을 펼쳐놓았다. 그때도, 제목보다는 부제 때문에 꺼려지는 마음이 있어서 아무 것도 못 남긴 거 같다. 


거친 것을 알려고 오는 사람에게 적절하게 거친 말, 즉 거짓말로 공손하게 답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른 도가 아니면 그를 피한다"는 뜻이다. 

순자가 위에서 "더불어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조급하다"고 표현했다는 점에 주목하자. 그는 소용이 없다거나 화가 나는 일, 금지된 일이라고 하지 않았다. 사람은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지금 바로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는 힘들어도 언젠가는 좋은 대화 상대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미래의 잠재적 교류 대상이다. 또한 그들 역시 문화 속에서 살고 있으며, 타인에게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어느 순간 그들이 어떤 주제에 관하여 진지한 물음을 표할 때 진지한 태도로 응하면 된다. "피한다"는 표힌이 단어 그대로 대답하지 않고, 질문을 무시하고, 자리를 피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와는 "도"에 대해서, 즉 가치 있는 것에 대해서 지금 당장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p183


일본의 인문학자 오구마 에지는 일본의 전후 학생운동이 몰락하는 데 기여한 윤리주의를 "나는 지식인이다, 학생이다, 특권계급이다, 그러므로 특권과 사생활을 버리고 노동자에게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말로 요약했다. 윤리주의의 관점에서는 모든 것이 흑과 백, 전부와 전무로 나뉘며, 강경하게 발언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더 많은 발언권과 힘을 얻는다. 윤리주의는 운동의 전망을 가망 없게 만들고 참여에 높은 장벽을 쌓는다. 따라서 참가자는 적어진다. 참가자가 적어지므로 비난과 죄책감으로 참가자를 끌어내려는 시도가 강해진다. "각오"가 되어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너는 데모하러 오지 않았잖아?", "바리케이드에서 빠져나가는 거야?"라고 힐난한다. "그런 데에 정나미가 떨어져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고, 남은 자들 사이에서는 더더욱 윤리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악순환이 발생한다.""스스로도 괴롭고 확신을 지닐 수 없으므로" 타협에 혐오감을 보이고 "타인을 세차게 몰아붙이기 쉽다." 그 결과 "내부 대립과 배신자 취급이 마구 벌어"진다. 정치적 책임을 수행하며 자신과 타인의 발전을 함께 도모하는 활동이 "윤리를 내세워 견뎌내야 하는 일종의 인내심 경연대회 비슷하게 되어" 버린다. 윤리주의는 새로운 속물들을 창출한다. 이 속물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단체나 조직에서 윤리의 위계를 세우고, 그 위계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인간의 가치라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 p246


민주주의 사회에서 변화는 한 명의 독지가를 설득하고 승낙을 받아내는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정치적 책임을 수행하는 일의 성격은 세네카의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배의 이음매들이 사방으로 느슨해지고 틈이 벌어져서 배 안으로 물이 들어올 때(...) 퍼내도 퍼내도 물이 줄지 않고 자꾸만 더 들어온다고 해서 그가 하던 일을 내팽개치지는 않을 것이다. 없어지지 않고 자꾸 생겨나는 악에 맞서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악을 근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우위를 차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p255


"가령 말이야. 창문은 하나도 없고 절대로 부서지지도 않는 쇠로 된 방이 있다고 치세. 그리고 그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다고 하세. 다들 곧 질식해 죽겠지. 하지만 혼수상태에서 곧바로 죽음의 상태로 이어질 테니까 절대로 죽기 전의 슬픔 따위는 느끼지 못할 걸세. 그런데 지금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서 비교적 정신이 맑은 사람 몇몇을 깨운다면 말이야. 이 소수의 불행한 사람들은 만회할 수 없는 임종의 고통을 겪어야 하지 않겠나? 그러고서도 자네는 그 사람들에게 미안한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있겠나? 

그러자 친구가 대답했다."하지만 몇 사람만이라도 깨어난다면, 쇠로 된 방을 부수고 나올 수 있다는 희망이 절대로 없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에 루쉰은 "희망이란 미래에 속한 것이라, 과거에 내게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거로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글을 쓰기로 약속했다.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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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다르게 배운다 - 누구나, 언제나, 저마다의 속도로
이수인 지음 / 어크로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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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내가 딱 하나만 읽는다면 읽겠다던 '인재시교'를 떠올리게 해서 골랐다. (https://blog.aladin.co.kr/hahayo/9371196 ) 

아이들을 키우는 중이라, 교육이 뭘까, 라는 질문을 자꾸 자꾸 하게 되서 이런 책을 읽는다. 큰 아이가 고3이라 지금 입시나 교육이 왜 이런지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대학은 필수적인 경로나 교육이 아니다. 30프로만 갈 수 있을 때에도 그랬고, 거의 100프로의 수험생이 갈 수 있는 지금도 그렇다. 상승욕구가 있고, 자녀에게 더 나은 삶을 주고 싶은 부모가 방법을 모르는 채로 떠민다. 또래집단 안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압력이 작용한다. 사교육시장은 비대해지고, 사교육시장도, 대학도 살아남기 위해 케케묵은 담론들을 이용하고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한다. 많은 교육관련 책들은 그래서 위험을 안고 있다. 그래서 목표는 무엇인가? 좋은 대학을 보내는 것인가? 좋은 직업을 가지는 것인가? 어떤 삶을 살면 좋은 삶인가? 어떤 것이 성공인가? 질문은 많고 답은 모른다. 

그래서 책들을 읽으면서 생각한다. 

저자는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게임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남편의 유학길에 동행해서 첫 아이를 낳는다. 아이는 유전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고, 아이를 돌보기 시작하면서 느리게 배우는 자신의 아이를 위해 아이가 적어도 글을 읽고 쓸 수 있을 만큼, 수를 이해할 만큼 적어도 2학년짜리만큼은 되길 바라면서 게임을 만들기 시작한다. 에듀테크,라고 불리는 분야의 기업가가 되어 쓴 책이다. 엄마의 마음, 기업가의 마음이 드러나는 글들이다. 근원적인 질문을 엄마도 하고 있을 거다. 그래도, 기업가기 때문에 더 하지 못하는 말들이 있다. 엄마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말들도 있다. 할 수 있는 만큼 그래도 최선을 다 해서 말한다. 자신의 일이 좋은 일이기를 기대하면서 일하는 사람의 마음이 드러난다. 배움의 목표는 무엇일까,에 답은 없어도, 여전히 끊임없이 배우고 있는 사람을 본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배움의 목표는 '좋은 사람'이라고 유학의 '군자'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가능한 목표여야 끝까지 배울 수 있고, 그래야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래서 부모는 태도를 가르쳐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을 대하는 태도, 깜깜한 미래를 기쁘게 기대하는 태도, 자기 자신을 귀하게 돌보는 태도,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키우고 키워서 사회에 책임을 다하는 태도, 그런 걸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질문하고 의심하고 노력하고 정진하는 저자의 말들에 디지털 교과서에 대한 기대도 조금은 하기로 했다. 


며칠 후 병원의 유전학자인 닥터 골라비가 병실에 찾아와서 무슨 질문이든지 해보라고 했을 때, 나는 "이 아이와 같은 유전 정보의 아이를 찾아서 어떻게 자랐는지 알아볼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그 할머니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어린아이를 대하듯이 조곤조곤 말을 쏟아냈다. "너는 유전적으로 정상인 아이를 하나 보면 그 아이가 어떻게 자랄지, 공부를 잘할지 못할지, 착하고 남을 돕는 사람이 될지 악인이 되어 교도소에서 삶을 마무리할지 알 수 있겠니? 장애가 있는 아이든 그렇지 않은 아이든 마찬가지야. 아이가 어떻게 자라고 어떤 삶을 살아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어."

나는 머릿속에서 막연히 '장애가 있는 아이'와 '장애가 있지 않은 아이'를 나누고, 그 부모의 인생도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 불행한 삶'과 '그렇지 않은 행복한 삶'의 두 갈래로 나눠지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닥터 골라비는 아이와 그 가족의 인생을 예측하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라고, 부모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고 말해주었다. 더군다나 우리 아이의 유전질환은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조합도 아니기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축복이지 않니? 아무도 모른다고!" -p17~18


그러다가 아이가 다른 반 교실로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찾아가기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다. 쉬는 시간에 그런 아이들을 마주치면 매우 반가워하면서 말을 걸고 같이 놀고 싶어 한다고 했다. 방학 중 추가 학습이 필요한 아이들이 모인 교실에서 다른 아이들을 도와주고 말을 걸면서 아이는 매우 행복해했다. 이런 광경을 몇 번 지켜보자, 차라리 특수학급에서 비슷한 수준의 또래들과 함께 있게 했다면 아이가 더 행복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p200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던 교육의 목표가 잘목되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았다. 그림 그리는 것의 목표가 직업을 얻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는 기능을 훈련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결과물의 수준도 목표가 될 수 없다. 또래와 비교해서 미술대학에 들어갈 정도로 잘 그리는 것, 상업적으로 팔릴 것을 목표로 그리면 안 된다. 교육의 목표가 '어떤 수준을 달성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워야 한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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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편과 아내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책이다.

2003년에 나온 책이네, 나오자 마자 사서 읽은 거면 결혼하고 이듬해에 읽었겠네. 

두 권짜리고 기억에 나는 큰 사건도 없어서 엄청 어렵게 읽었다. 그 때는 책을 시작하면 끝내야 한다는 주의였어서, 끝까지 겨우겨우 읽었다. 읽고 나서 써놓고 보면 단순한 교훈을 마음에 새겼다. 

내 기억 속에서 책 속의 부부는 오해 가운데 말로 할 걸 쌓아뒀다가 이혼한다. 왜 부인이 발가벗고 창가에 서 있었는지 물어보면 될 것을, 그걸 보고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있었을 거라고 남편은 혼자 생각하고 결국에는 헤어진다. 보면서 바보 멍텅구리들이네, 말을 좀 하지,라면서 읽었다. 

그런데도 살면서 화가 쌓일 때 한 번씩 책 속의 부부가 떠올라 한 번 더 말해 볼 마음을 먹는다. 고마운 책이라서 다시 읽어볼까 해도, 음, 다시 읽을 수는 없었다. 


2. 싹수없는 며느리 vs 파란 눈의 시아버지

https://blog.aladin.co.kr/hahayo/10409909


이것도 읽기는 2004년쯤 읽고 책에 대해서는 2018년에 썼다. 조금은 지나간 일들에 대해 고마운 맘이 되서 썼다.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되고, 함께 살아가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먹고 입고 자고 씻고 살면서 하는 그 많은 일들 가운데, 같이 누리는 것들을 누리기 위해 해야 하는 수고를 누가 할 지 하나 하나가 다툼이 될 수 있다. 

그런 순간에 도움이 되었다. 


결혼하기 전에, 함께 살기 전에는 분명하던 희생과 기생이 정말 그러한가, 질문하게도 되었다. 함께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함께 살기 위해 하는 수고도 돈도, 우열을 가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도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도 가정 경제에 누가 더 돈을 쓰는지 싸운 적도 있고, 명절을 앞두고 날카로워졌던 날들도 있다. 지금은 조금은 그런 긴장들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까지 있어서, 난이도는 올라갔지만, 아이들이 있어서 오히려 더 어른스러워지려고 노력하면서 조금 더 어른스럽게 문제를 풀어가려고 하고 있다. 

명절 다음 날카로워졌던 그 어느 날 가운데, 너만 힘들었냐? 나도 힘들었어! 라는 남편의 말 다음에, 부모의 다툼에 눈치를 살살 보는 아이들 앞에서,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내가 전을 부쳤다면, 남편은 운전을 했고, 아이들도 그 먼 길을 부모가 부모의 부모를 보기 위해 움직이는 동안 지치고 힘들어도 참은 거니까. 누가 더 힘들었는지는 정말 아무도 알지 못할 테니까. 그저 아이가 아이 몫의 힘듬을 견뎠다는 걸, 엄마가 엄마 몫의 힘듬을 견뎠다는 것, 아빠가 아빠 몫의 힘듬을 견뎠다는 걸 서로 알아주기로 했다. 명절을 쇠고 집에 도착하면 모두 모두를 안는다. 바리바리 짐을 아빠가 들여놓으면, 모두 집 안으로 들어오면, 아직 짐을 정리하지는 않았어도 우선 모두 안는다. 서로서로 고생했다며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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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기독교를 논하다
이제열 지음 / 모과나무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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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독교가 편애하는 신의 차별적인 사랑을 구하는 종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독교가 베이스인 서양의 문명은 함께 어울려 사는 삶에 오히려 장애가 된다고도 생각한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3639264)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서 이 책을 골랐지만, 또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책이 새삼스럽지 않았다. 

그런데다가, 나는 종교를 조금은 철학으로 접근하고 있어서, 종교적 방식으로 하는 설명에 삐딱한 태도도 있다. 나는 동서양의 인간이해,가 두 종교를 설명하는 방식이 좋았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3903037 )

내가 싫어하는 친구긴 한데, 내가 보기에는 그래도 비슷한 애가 그 친구를 막 욕하는 걸 듣는 기분이 된다. 사실, 책에서 하는 말은 욕도 아니고, 기독교와 불교는 그리 가깝지 않다. 서로 이해하기 어려운 두 종교의 입장을 불교의 입장에서 듣는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종교를 실용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는 중이라, 천국이나 지옥, 전생이나 내세, 환생이나 이적에 대해 말하는 데에 전혀 관심이 없다. 


만약 세상에 완전한 자가 있다면 그는 몸과 마음이 청정하여 언제나 평화로워야 하고 구하고 원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 완전한 자는 세상에 대한 희로애락을 일으키지 않는다. 완전한 자가 어떻게 세상에 대하여 이렇게 되었으면 또는 저렇게 되었으면 하는 욕망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욕망은 무엇인가 부족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고 부족하다는 것은 완전치 못하다는 증거이다. -p25


불교의 관점에서 인간은 신의 형벌이 있든 없든 생로병사를 비롯한 갖가지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인간은 애초부터 영생할 수 없는 존재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 아니다. '생으로 말미암아 사가 있는 것'이다. -p49


그러나 불교의 지옥은 그 본성에 있어 실제가 아니다. 마치 꿈의 세계가 진실이 아니듯 불교의 지옥은 미혹한 중생이 업으로 만든 환상의 세계이다. 꿈을 깨지 못한 상태에서는 꿈의 일들이 실재인 것처럼 보이지만 꿈을 깨고 나면 아무것도 없듯 지옥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중생이 업의 힘에 의해 꾸는 꿈이다. 지옥의 모든 형틀 기구와 참상과 전경 그리고 사자들의 모습은 그곳에 태어난 중생들의 마음이 만든 허상들이다. - p94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법(法, Dharma)이고, 바로 그 법 속에서 중생들이 업을 지어 태어나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숫타니파타》에 전하는 다음 말씀이 이를 뒷받침한다. "세계는 업에 따라 존재하고 사람 또한 업에 따라 존재한다. 수레바퀴가 쐐기에 얽혀져 돌아가듯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업의 속박 속에 굴러간다." -p127 -128


혹 불교 경전에서 세상을 구제하기 위해 나타난다는 부처님이나 보살도 인간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해준다거나 그들이 지은 죄를 씻어줄 수는 없다. 다만 그 길을 일러줄 뿐이다. 누가 누구를 대신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는 방식을 불교는 애당초 부정하고 있다. - p161-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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