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된 정의 - 백수 기자와 파산 변호사의 재심 프로젝트 셜록 1
박상규.박준영 지음 / 후마니타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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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조직은, 개인보다 힘이 세다. 하나보다 둘이 강한 것처럼, 늘어난 사람 수 만큼 힘이 세지고, 다시, 책임 질 일을 나눠 진 만큼 무책임해진다. 그래서, 조직에 속한 사람은 조직 밖이 두렵고, 입이 없다. 조직에 속하면서, 나눠 맡은 일은, 내 조직의 일이라도, 그렇게 고민할 필요가 없고, 자신의 위치나 역할에서는 건조한 극단까지-전체를 보는 존재라면 고민해야 하는 것을, 부분을 보고 고민하지 않는- 치달을 수 있다. 사회 안 에서라면, 교사나 경찰 같은 직업군의 직업병,이 있을 테지만, 다시 그 직업군 안에서는 다시 자기 분야의 특화된 직업병이 존재한다. 조직에 속한 채로 조직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조직의 수장 쯤 될 거고, 조직의 수장이라면 벌어지는 일들과는 멀고, 또 조직의 사람들을 책임지는 자리니만큼 한계가 있다. 조직에 대한 어떤 말도, 조직에 속한 사람은 말하기 힘들고, 결국 입은 사라진다. 그래서, 조직에 대한 말들은 대개 조직을 벗어난 자유인들에게서 나오고, 그 말들 속에 조직은 위험하고 한심하고, 때로는 왜 존재하는지 이유조차 알 수 없다. 

책은, 오마이에 기사를 송고하는 언니가 사줘서 읽었다. 사인까지 받아 준 책은, 다음 스토리펀딩으로도 몇 번 구경한 이야기였다. 국가폭력에 살인자로 누명을 쓴 사람들,이 등장한다. 법적 지원없이, 사회의 가장 약한 사람들이 누명을 썼다. 진범이 등장해도, 경찰과 검찰은 그저 실수를 인정할 수 없어서, 인정하기 싫어서, 억울한 사람들을 방치한다. 책 속에 등장한 억울한 다섯사람 중 넷은 수감 중에 진범이 잡혔지만, 형을 모두 살고도 십수년이 지난 후에야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나는 조직에 속해 있는 사람이라서, 그 경찰이나 검찰이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계속 생각한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왜 때리고, 협박해서 자백을 받았을까, 왜 진범이 나타났을 때 되돌리지 못했을까.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국가권력의 엄정함,은 얼마나 절대적인 것이길래 그랬을까. 아마도, 책임을 나눠졌으니, 상사가 사건을 이관하라면 넘겼겠지, 싶고, 아마도 평가를 받을 테니 범인을 빨리 잡아 사건을 종결하고도 싶었겠지, 싶다. 중요도의 선과 후가 바뀌고 본말이 전도되어도, 조직 내에서 사건을 빨리 해결한 사람, 잡음이 없는 사람이 아마도 승격했겠지 싶은 거다. 조직은, 조직 안에 사람들이 존재이유를 더이상 성찰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쉽게 타락한다. 그래서 조직 안에 사람들은 조직 안에 책임을 나눠져서 무책임해진 사람의 태도 말고, 결국 조직을 벗어날 사람으로 자신의 일을 보고 대해야 하는 거다. 그런 마음과 그런 태도를 지켜야 한다. 아무리 용맹한 개인이 깨뜨린다고 말해도, 알고 있다. 조직은 개인보다 세고, 조직에 속한 그 각각의 개인들은 조직 속의 개인이 아닌 사회 속의 개인에 대해서 균형감각을 가져야만 하는 거다. 그게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내부적인 노력과, 개개인의 성찰, 조직 바깥에서의 노력, 모두 다 필요하다. 모두, 힘 내서, 조직이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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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헬조선'이라고 말하는 게 싫다. '한국이 싫어서'라고 말하면서, 한국을 등지는 사람들이 여전히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라,는 미워도 이뻐도 '나'란 존재가 보태고 있는 거고, '나'는 그 모든 나쁜 점에도 불구하고 내 나라를 사랑하고, 할 수 있다면 고치고 싶으니까, 싫은 존재에, 나는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으니까, 나는 한국,을 싫어하지 않는다. 

어이없는 일들이 아직은 물 밑에 숨어 있을 때, 사드와 국정교과서로 저항이 불붙었을 때, 초등학교 4학년 딸아이가 글짓기 숙제를 받아가지고 왔다. '국가적 자긍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점'이 글감이었다. 당시 상황의 뻘짓들과 연결되어, 미쳤구나, 싶은 글감이었다. 그래도 열심히 아이의 글감에 말들을 보태면서, 나라,란 게 얼마나 추상적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라,를 어떻게 느끼는지 생각했다. 나에게 나라,란 나의 부모님이나, 나의 가족이나, 나의 친구들, 어울려 사는 이 마을이, 나의 직장이, 그렇게 나라구나, 싶었다. 다행히도 내 나라 말을 가지고, 내 나라 글을 쓸 수 있어서, 말 글로 하나되는 사람들, 이구나, 싶었다. 그래서, 이 땅 위에서 벌어진 민족의 수난사에 울컥울컥하고,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의 삶에 목이 메이고, 다시 그래서 촛불을 들고 길 위에 서는 거다. '애국심'이란 말이 어쩌면 왜곡되었지만, 누가 말하듯이 '애국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애국심'이 넘쳐서, '너희들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 나라'여서, 길 위에 서는 거다. 

무한도전,의 역사힙합 콜라보,를 16년의 마지막날, 촛불들이 거리를 가득 채우던 그날, 집에서 아이들과 보았다. 길에 서지 못한 미안한 마음과 노래 속의 이야기들에 눈물이 났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둘째가 노래 속의 시인이 누구인지 물었다. 이순신과 세종대왕은 알지만, 아직 윤동주와 안중근은 모르는 아들이다. 노래를 들으면서, 힙합이라는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어쩌면 디스와 허세가 난무하는 장르의 이미지에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배움은 모자랄 지 몰라도, 마음은 다르지 않은데,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어쩌면 배반당해서, 싫다고, 헬이라고밖에 표현하지 못한 거였나, 싶었다. 그래도 여전히, 말은 스스로를 구속하니, 가능하면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가능하면 자신을 귀히 여기고-허세,나쁘지 않다-, 할 수 있는 한 타인을 그렇게 또 귀히 여기면서 아름다운 말들로 노래하자,고 말하고 싶다. 이제 왕의 권력은 나를 포함한 모두에게 나누어졌고, 우리는 이 권력을 우리가 좋아할 만한 나라,를 만드는 데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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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쟁이가 들려주는 백설 공주 이야기 피리 부는 카멜레온 197
제럴드 게럴스 그림, 낸시 로웬 글, 최용은 옮김 / 키즈엠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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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받아 온 책이다. 이야기 속의 다른 등장인물의 관점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들 중에-늑대가 들려주는 빨간모자 이야기와 야수가 들려주는 미녀와 야수 이야기를 가지고 온 적이 있다- 하나고, 그런 과정에서 주인공에 대한 미화가 사라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백설공주 이야기를 다섯째 난장이 입장에서 듣고 있자니, 친구 뒷담화하는 걸 듣는 것처럼 불편했다. 세 번이나 마녀에게 속아넘어간 백설공주의 어떤 성정을 묘사하기 위해서였겠지만, 건망증이 심하다,라고 묘사하는 것은 거부감이 들었다. 백설공주는 착했던 거야, 불쌍한 할머니가 애써 방문한 그 오두막에서 그 할머니를 그냥 보내기 힘들었던 거라고, 그건 나쁜 태도가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었다. 난장이가 백설공주의 그런 성정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였다고 말하지만, 왕자까지 건망증 대마왕으로 묘사되고 보니, 원래 백설공주 이야기의 교훈은 뭐였나, 이런 생각을 했다. 교훈,따위는 없는 거였어도, 원래 이야기에는 무언가 여즉 살아남을만한 무언가가 있었던 거야,라는 생각 말이다. 

그러다가, 아마도 내가 나이드는 중이라서, 이 이야기가 여즉 살아남은 것은 자명한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름다움이라도, 절세의 아름다움이라도, 시간이 흐르면 다음 세대에 자리를 내어주게 마련이라는 것. 그걸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고, 결국 악해진다는 것, 말이다. 아름다움이 아니라, 권력이라도, 그건 마찬가지다. 다들 아는 그 자명한 것이, 이야기 속에 있기 때문에 아직도 여전히 읽히고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권력이나 돈을 가진 사람들이 이런 자명한 것들을 거스르려고 행하는 무수한 노력들이 마녀가 거울을 보며 찬탄하는 태도처럼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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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라고는 아무 것도 보지 않는 딸아이가-예능만 본다T T 아형과 런닝맨과 무도와 안녕하세요와 개콘과 다들 보는데 왜 나는 SNL을 못 보냐고 하는 초등학교 4학년이다- , 예고편을 보고는 보고 싶다더니 일요일 재방을 보았다. 티비 곁을 알짱거리는 동생들이 시끄럽고 귀찮다고 툴툴거리면서, 1,2편 재방을 함께 보았다. 읽은 적 없는 원작의 제목만 본 걸, 엄마가 책을 읽은 줄 오해하는 딸과 보면서, 이야기 속의 부모들을 본다. 고2인 아이들,-찾아보니 원작에는 중2다-, 학교에서 벌어진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따라간다.

예전에 백남기 어른이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알라딘에 그 분의 자제 분과 고등학교 때 한 반이었다며 부자 아버지, 권력자 아버지를 가진 친구들은 보았지만, 자신의 아버지를 그렇게 당당하게 존경하는 친구는 처음 만났다는 글을 퍼 온 걸 본 적이 있다. 그걸 보면서, 아, 부모에게 가장 힘든 일은 아마도 자신의 아이에게 존경받는 것일 거다,라고 생각했다. 가까이 살기 때문에 흠결조차 쉽게 드러나는 그 관계에서, 아이가 부모를 존경하는 것은 정말 대단한 거라고. 아이는 부모를 보고 배운다. 부모의 사소한 하나하나를 통해 말과 다른 행동들은 아이에게 결국 들킨다. 웃는 얼굴로 자신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는 자신의 부모가, 말과 다르게 하는 행동을 통해 아이는 세상을 배우고, 또 부모에 대한 경멸을 쌓는다. 

드라마 속에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을 본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바꿀만큼 권력을 가진 아버지, 그 아버지 덕에 유지되는 학교의 폭군, 학교재단 법무팀장인 아버지와 친구를 잃은 아들- 자신의 아버지가 친구의 죽음을 방조했음을 결국 알게 될-, 자신의 삶의 우울을 아들의 탓으로 돌리는 어머니와 아들, 이제부터는 아버지가 알아서 할 테니 가만히 있으라는 아버지와 딸. 어른과 눈높이를 맞출 만큼 자랐고,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이면서도 아무 것도 허용되지 않는 아이들의 삶을 본다. 꽉 막힌 입시지옥과 과장이라고 믿고 싶을만큼 괴이하게 행사되는 권력들을 보면서, 이것이 아직 이 나라에 오지 않은, 우리가 피할 수 있는 미래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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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본방으로 써프라이즈,를 보았다. 

지금은 지구 상에서 사라진 소련이라는 나라가 미국과 냉전을 벌이던 때에, 소련에서 둠스데이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있었단다. 커다란 두개의 나라가 악착같이 핵무기를 만들며 경쟁하던 그 때에 설계된 그 프로그램은 인공위성으로 적국의 핵무기 발사징후를 포착하고 포착 시 맞대응으로 핵무기를 발사하기 위한 버튼을 가지고 있었다. 인공위성 오신호로 프로그램이 작동했고, 그 때 실무자가 버튼을 눌렀으면 지구가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게 이야기의 전부였다. 실무자는 왜 미국이 다섯발만 쏘았을까?라는 의문 때문에 버튼을 누르지 않았고, 덕분에 내가 지금 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원자력발전소에 다니고 있고, 그래서 '야, 그 당이 탈핵이 강령인데도 지지할 수 있어?'라는 질문을 받았었고, 또 그래서 언제나 직업과 나의 어떤 정치적 판단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어서, 그 이야기가 새삼스러웠다. 소련의 군인이, 그 버튼을 누를지 말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의 괴로움 같은 것을 생각했다. 소련이란 나라에 속해서, 군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그보다 전에 자신이 지구라는 공간에 사는 지구인이라는 자각을 갖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하지 않는 성실함으로 아마도 훌륭한 직업인이었을 아이히만,과 다른 위치에 있는 존재들,을 생각했다. 

모든 직업에는, 모순이 있지만, 모순이 충돌할 때는 항상 교과서에만 남아있다고 비웃는 바로 그, 직업이 가지는 본연의 의미에 충실하게 직업을 수행해야 한다. 그게 바로 본질이니까.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존재,로써의 조직에 속한 개인, 직업인,이 아니라, 본연의 의미에 충실한 조직과 개인으로써의 직업인 말이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고 조직에 충성하는 검사, 조직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고 조직의 명예를 위해 항명하는 검사, 같은 거 말이다. 실망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때문이고, 큰 실망이 가끔 '해체하라'라고 표현될 지라도 그 의미는 결국, 본질에 충실하라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그 본질조차도, 소련의 군인처럼 회의해야 하는 순간이 오고, 그 때 다시 판단의 기준은 나에게 결국 마지막까지 남을 정체성,이어야 하는 게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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