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등급 국민 - 우리시대 강도 만난 사람들
김철호.임태영.김옥연 지음 / 대장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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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를 볼 때 들던 그 위태로운 감정이 그대로 되살아난다. 

버나드 콘웰의 아더왕연대기에서 결국은 기독교로 개종한 화자가 개종 전에 기독교를 묘사했던 게 다시 생각난다. 

인간인 나는, 나면서부터 가지는 감각 그대로 내가 혼자서 독립적으로 설 수 있기를 최소한 나 자신만은 그래도 보호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문명 안에서 약한 존재임을 그대로 또 자각하고 만다. 


종교적 언어로 묘사하는 활동은 지나치게 시혜적이고, 피해자의 증언은 그러니까 지나치게 비굴하다. 언론과 여론에 난도질당하는 피해자의 위치에서 가지는 어쩔 수 없는 방어적인 태도라 감안해서 듣는다해도, 법적으로 보장된 파산과 면책권에 대해 조언하는 단체의 태도는 지나치게 시혜적이라 거부감이 들었다. 


차라리, 욕을 하라고,라는 심정이 되는 거다. 

아 썅, 내가 백만원을 빌려서, 이자만 천만원을 갚았는데, 파산 면책이 안 된다는 게 말이 되냐고. 욕을 해줬으면 하고 바랐던 거다. 그래, 내가 그 조건 알고도 빌린다고 쓰긴 썼어, 그래, 내가 그걸 갚을 수 있을 줄 알고 그러기는 했어. 그래 그런데, 내가 그걸 갚다가 이 지경이 되었으면, 그래 네가 심판이라며, 그 종이쪼가리가 중요해, 내가 중요해,라고 차라리 따졌으면 하고 바라는 거다. 

'맘몬,이니 희년이니' 말고. 목숨이 중요해, 종이쪼가리가 중요해,라고.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앞으로 봉사하면서 살겠습니다' 말고, 그 정도 뜯어먹었으면 떨어지라고, 라고. 이 상황에서 그래도 빚을 갚으라는 그래 너 법원, 정부, 언론,은 제 정신인 거냐고. 

이 책 대신, 화차를 읽는 게 더 재미있다고 말하겠다.  

자기 자신을 먼저 보호하는 강경한 태도,를 사람들이 가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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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 - 일리노이 주립대 학장의 아마존 탐험 30년, 양장본
다니엘 에버렛 지음, 윤영삼 옮김 / 꾸리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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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다닐 때, 함께 공부하던 모임에서 아는 언니가 자살에 대해 '모두 한 번쯤 생각해봤잖아'라고 당연한 듯 말해서 놀란 적이 있다. 나는 그 때 그 자리에서 나는 안 해봤어,라고 말하는 게 무언가 멋대가리 없어 보이는 거 같아서 그런 적 없다고 말하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들어 넘겼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인 내가 제일 두려운 것은, 아이가 '살기 싫어하는' 거다. 살면서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고, 다치고 아플 수도 있지만, 살기 싫다고 하면, 나는 아이에게 무슨 이유로 살라고 설득해야 할 지 모르겠다. 내가 내 삶에 무력감을 느끼는 순간을 알기 때문에, 아이의 삶을 쥐고 흔드는 부모들을 보면, '너 때문에 내가 살고' '너 잘 되라고' 그런다는 부모들을 보면, 아, 무섭지 않나, 라고 생각한다. 문명인으로 살면서, 내 삶의 주인을 온전히 자기자신이라고 느끼기는 아주 힘들다. 그래서, 책 속의 피다한 부족의 삶은 어쩌면 이상적이다. 


피다한 부족은 아무도 때리지 않는다. 옳은 것에 대한 강박도 죄책감도 금기도 없는 부족 안에서 젖을 뗀 아이는 어른과 똑같이 존중받는다. 아이에게만 존재하는 금기란 없다. 어른이 겪어야 하는 위험이라면, 아이도 겪어야 한다고, 피다한 부족의 어른은 아이에게 술도 담배도 준다. 무엇도 쌓아두지 않는 사람들은 삶에 결핍을 느끼지도,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미안하다는, 고맙다는 말도 없고, 그저 삶의 어떤 순간 다시 되갚는 것으로 충분하다. 


저자가 피다한 부족에게 선교하기 위해 자신의 가족사-가난한 노동자 집안, 어머니의 자살 같은 것-를 증언할 때, 자신의 불행을 신이 어떻게 개선했는지 설명하는 대목에 부족민이 웃는 이유를 어쩌면 알겠더라. 부족민의 눈에, 매일 매일 아마존의 밀림 속에서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자살하는 문명인'은 우스울 거다. '왜? 자비로운 자연이 너만 죽이지 않을까봐, 스스로를 죽여?'라는 웃음이 아니었을까, 싶은 거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존재하는 자체로 받아들이고-창조신화가 없다고, '누군가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단다-, 본 것만 믿는 이 사람들이 가지는 삶의 단순성이 삶을 오히려 살 만하게 하는 거라는 생각도 한다. 

아이들과 있으면서도 이야기책을 읽는 나는, 피다한 부족의 만족,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 삶,도 상상하기가 쉽지는 않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만들지도 듣지도 않는데도, 직접 경험한 이야기만으로, 꿈꾼 이야기만으로, 사람들이 부딪치면서 만드는 말들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는 그 삶이 정말이지 꿈,같다. 


안온한 문명 안에서 자라 스스로를 지킬 줄 모르는, 불만에 가득찬, 아이를 때리는 기독교도,가 되고 싶은 부족민은 없었고, 편애하지 않는 자연 안에서 서로에게 관대한, 삶에 만족하는 부족민을 보고 저자는 종교를 버린다. 

 

배울 수 없는 나면서부터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이 삶을 지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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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섹스 - 그놈들의 섹스는 잘못됐다
은하선 지음 / 동녘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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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혼도 했고, 아이도 셋이나 있으니, 더 이상 성적인 담론들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이 아무 의미도 없는 노출증, 억세게 운이 좋은 여성의 성생활 탐구생활, 로 읽힌다. 

궁금한 것은 글쓴이의 성적 욕망, 욕망을 추구하는 용맹한 태도가 아니라, 굳이 왜 그렇게까지? 였다. 사람이 가진 모든 욕망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나는, 섹스처럼 상대가 필요한 문제에서 그 욕망을 충족하겠다고 실행에 나서는 여성이 의아한 거다. 거의 용맹정진하는 태도까지. 왜 그랬을까, 살해당할 수도 있고, 임신할 수도 있는데. 그게 궁금해서 마지막 장까지 넘겼다. 조금이라도, 무언가 이야기해주지 않을까 하고. 그런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오직 성생활, 불같이 타오르던 사춘기의 단발성 만남부터,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해 애쓰던 장기연애, 여자들과 남자들과 섹스토이. 

여성이 성욕을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다른 세상에 사는 남자들이 아닌 이상, -순결해야만 한다고 여성을 억압하는 문화에서 남성은 순결하지 않은 여성을 혐오하고 경멸하고 증오하도록 고양되니까- 여성이 처음 만난 남자와 섹스했을 때 그 남자가 연쇄살인마일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뭐, 죽는 게 두려워 안 살래?라고 묻는다면 나는 살기를 선택하는 사람이지만, 감수할 만한 위험인가는 늘 고려해야 하는 거니까. 크기 상 나는 성욕이 이긴 적이 없었던 거지.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그게 상대에게 불쾌할 수도 있을 거라고, 늘 당하던 입장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욕을 드러내는 남자들의 시선이나 태도에 불쾌해 본 적 있다면, 자기가 그러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에 미안한 마음이 되는 거다. 그러니까, 나는 언제나 입을 닫는다. 


성적인 쾌락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아냐고, 그것 없이 사는 삶은 앙꼬없는 찐빵이라고 주장하는 거라면, 뭐 사람들은 여러 종류랍니다,라고 대답하고 말겠다. 

자신의 성욕을 과시하면서 여자들을 걸레취급하는 남자들의 위선에 대해 말하는 거라면, '걔들만 손해야'라고 비웃어 주고 말겠다. 


뭐든 하면 는다. 무얼 추구할 지는 선택할 수 있는 거고, 나는 쾌락을 선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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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목소리 - 미래의 연대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은혜 옮김 / 새잎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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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학을 하기에는, 아니 학문을 하기에는 어떤 태도가 결여되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보편화'라는 게 안 된다. 예전에 생물학에 대한 묘사에서, '자연은 어떤 주장의 근거도 보여줄 수 있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게 협력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든지 우월한 존재가 살아남는다,든지. 결국 자연을 근거로 한 어떤 주의나 주장도 '당위'로 '절대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이해했다. 


이 책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이후 증언을 담은 증언집이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하기 위해 증언을 모은 게 아니라, 감성의 문을 열어놓고 듣는 청자다. 그래서, 이 증언집의 어떤 말은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말 같고, 어떤 말은 전체주의에 대한 말 같고, 어떤 말은 모든 문명에 대한 말 같다. 사고 수습에 투입되었던 소방관 아내의 슬픔은 절절하고, 소련 붕괴 후 내전을 피해 소개지로 들어온 아이엄마는 또 그렇게 참담하고, 인간을 믿고 인간의 가능성을 신봉했던 늙은 당간부의 증언은 또 그렇게 암담하다. 자신을 위해서 살기만을 요구받는 지금 세상의 공허함 가운데 놓인 나는, 타인을 위해 살기를 요구받은 사람들이 느끼는 배신감에 또 바닥을 잃는다. 어떤 상황, 현실 속에 놓인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이야기들은 혼란스럽고 정리되지 않는다. 나는, 이 혼란스러움이 바로 이 책이 가지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단순화하길 원하는 나 자신을 알기 때문에, 삶 자체가 단순해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진지함이나 정직함이라고도 생각한다. 


저자가 아마도 이 모든 혼란스러운 증언들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다면 '영웅을 원하는 시대'를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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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어떻게 죄가 되는가
매트 타이비 지음, 이순희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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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나 지금이나, 여기나 거기나,라며 읽게 되는 사례들이, 급박한 묘사들로 이어진다.

여러가지 증거들, 사례들, 현장들을 묘사한다. 월가의 억만장자들이 법망을 빠져나가는 것, 가난한 사람들이 법의 촘촘한 그물망에서 옴싹달싹 못 하는 것,을 묘사한다. 


나는, 읽는 내내, 누군가에게는 장점일 책의 서술방식이 거슬렸다. 소설처럼 묘사되는 정황, 빠르게 급류를 타고 넘는 듯한 묘사, 법정에 선 가난한 사람들의 절망감, 억만장자들의 기업사냥을 마치 스릴러물처럼 쓰는 것이 교묘하다고. 이미 강경한 자신의 '주장'이 있고, 나머지 묘사는 도구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사실만을 열거하는 것이 딱딱할 수도 있고, 주관은 없이 모두 다 사실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만큼 충실한 취재지만, 이미 소설적 묘사는 이성보다 감성에 호소하고 있다고 느낀다. 계속되는 '민주당 정부 들어서'라는 표현도 우리나라 실패한 정부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면서 역시 또 거슬렸다. 민주당 정부 들어서 오히려 완화된 경제범죄, 심각해진 이민자 추방,에 대한 묘사가 이 책의 주장 대신 다른 의문을 머릿속에서 솟구치게 하는 지경이 되었다. 여기나 거기나 왜 그런 걸까. 왜 한번도 그 진심을 의심한 적 없었던 '노무현'대통령은 결국 실패했던 걸까. 도대체 왜. 


책 속에, 재판받는 경영진에 대한 묘사가 있다. 재판정에 선 사장은 지금껏 한 번의 범법행위도 하지 않은, 성실한 가장이며, 지역의 유력자로써 지금까지 행한 여러 활동에 대하여 묘사한 변호, 여러 회사 밖 인맥들의 탄원서를 첨부하고, 방청석에는 온갖 지인들-보통은 함께 어울릴 사장님이나 서장님이나 교수나 변호사같은 사람들-이 자리를 메우고, 아내와 자녀는 방청석에 앉아 눈물을 흘린다. 그 묘사를 보고 있자니, '판사도 사람인데' 싶은 거다. 뒤이어, 자기 집 앞에서 서 있었다는 이유로 체포된 유색인종의 재판이 묘사될 때는 '사람이 하는 일'들이 사람답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한지 생각하는 거다. 그리고, 사람을 만나고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노무현,대통령은 권력을 잡았고, 그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는 그게 존경받아 마땅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독재에 이미 길들어, 권력을 잡았으니, 권력을 휘두르라고 하는 말은 무의미하다고도, 왜 '참여정부'라고 부르고 싶었는지도 조금은 알겠다. 

그렇지만, 그 기간 동안 내내, 그러니까 IMF이후 계속 비정규직은 늘어났고, 고용은 불안정해졌고,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자신의 모든 시간을 팔아 돈을 벌면서 살게 되었다. 망해가는 기업에 세금을 쏟아 부었어도, 그 기업의 주상복합을 산 사람이 결국 지어지지 않은 그 집을 그 돈을 그저 날리는 걸 사람들은 보았다. 합리성을 주장하는 말들이 넘치면서, 초보적인 수준의 합리성이 큰 의미를 잠식했다. 공동체는 깨어지고, 불평등은 심화되었다. 

오바마,는 정치를 하면서 후원금을 청하는 전화가 가장 힘들다고 했단다. 정치에는 돈이 들고, 권력이 없던 자가 권력을 잡았을 때, 권력을 통해 이권을 누리려는 사람들이 쓰게 되는 이권의 값은 오히려 하락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 가치,자체가 거래되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온갖 훌륭한 말들과 태도와 결국 둘 중에서 하는 선택이라면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정당이, 집권한 다음 실패하는 것이 아닐까. 기득권세력처럼 뻔뻔하지 못한 것 때문에, 오히려 실패하는 건 아닐까, 라는 비약이 심한 생각들로 머리를 어지럽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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