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독재자
레네 아빌레스 파빌라 지음, 권미선 옮김 / 아침나라(둥지)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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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이국적인 인명과 지명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나는 내내 이것이 바다 건너 먼 나라의 일임을 잊었을 것이다. 겹쳐지는 독재의 과거때문에 나는 내내 불편했다. 우리 나라 역사 속에 80년의 기억을 어떤 문학이 재현하려 했을 때의 불편과 같은 종류다. 좀 더 오래 전의 일들에 대한 묘사에 진지하거나 경건하거나 만족하는 것과 달리, 그리 멀지 않은 일이면서 여전히 청산되지 않은 일, 미적지근한 상태로 남아있는 일에는 단호해지기 힘든 그런 심사 말이다. 독재에 대항하다, 어느 날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문학적인 어떤 것으로 감상하기에는 아직도 너무 불편하다.

할 수 있는 일은 없어보이고, 난 상황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많았다'라고 묘사하는 이상은 아니고. 소설 속의 상황들, 토막토막나 있지만, 커다란 그림 속의 하나하나인 그 상황들은 너무 슬프기만 한 그림이라서,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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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의 광기를 잠재운 여성들 - 시사인물사전 14
이휘현.고훈우.최을영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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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에는, '시사인물사전'이라는 낯선 형식에 내가 적응하고 있지 못한 탓도 크다. 원인이 거기에도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내가 아홉명의 페미니스트에 대한 기술들 중에서 유독 거의 동시대의 여성들에 대한 묘사에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고정희씨나, 최보은씨나, 권인숙씨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게 작위적이거나, 감상적이거나, 낭만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다시 생각하면, 그런 인상이 된 데에는 '무엇을 했지'라는 질문에 간결해질 수 없는 글쓴이의 태도도 문제였다. 고정희에 대한 묘사에서 '사람들에게 작은 자리뿐이지만'이란 식의 토는 그녀가 어떤 자리였는지 궁금해 읽고 있는 나에게, '혹시 이 사람도 그녀의 자리에 자신이 없는 건가?'라고 생각하게 했다.

내내 '너무 길잖아'라는 느낌을 주는 글 때문에 혹시 이것이 글쓴이의 문제인가, 싶었지만, 같은 사람이 외국의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인물을 기술한 것을 보고는 아니란 걸 알았다. 동시대의 인물을 기술할 만한 확신이 그들에게도 부족했던 게 아니었을까. 간결하기에는 무언가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하는 묘사라니 읽고 있는 나조차, 확신이 떨어지고 있었다. 차라리, 고정희시인의 시를 읽던지, 아줌마(최보은)의 글을 읽던지, 권인숙씨의 칼럼을 읽는 편이 더 나을 거란 생각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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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말걸기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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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을 알고 좋아하게 한 건, '새의 선물'이었다. 냉소적인 시선을 아이가 지녔을 때의 그 경쾌함을 잊지 못한다. 그런 경쾌함을 기대하고, 심지어 선물할 의도로 이 친절하고 소심한 제목의 책을 골랐다.

선물하기에는 지나치게 냉소적이었다. 아이가 그런 시선을 지녔을 때 생은 아직 미지의 것이라서, 여전히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었지만, 이미 살아낸 어른이 지닌 냉소는 너무 차다.

그런데도, 여전히 은희경의 시선이 좋은 것은 그걸 알고도 살아내는 것은, 환상 속에서 살아내는 것보다는 유리하거나 현명하거나 용감한 것일 거라는 동의 때문이다. 과거를 낭만적으로 회상하지 않는 독립적인 여자들이라서, 쉽게 상처받지 않을 모습이라서 여전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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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와 현실사이의 여성들 - 여성주의 문화 이론을 향해
수잔나 D. 월터스 지음, 김현미 외 옮김 / 또하나의문화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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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화비평서가 그 텍스트로 삼은 것이 처음 듣는 것일 때, 난감함은 말로 못한다.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 이름만 주워섬긴 영화가 서너개쯤 되고, 장면이나 이미지 하나 연상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해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 책이 묘사하는 영화들이 내게 그나마 가까운 것은 헐리웃의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헐리웃의 상업영화, 주말 밤의 스릴러, 흔해빠진 치정극, 로맨틱 코미디, 오래된 로맨스, 내가 그 영화들을 따라 흥분했었고, 분개했었고, 유쾌했었고, 가슴아팠기 때문에, 뒤늦게 알아차리는 '음모'라는 것에 흥분하는지도 모른다.

어느 틈에 들어왔는지 알 수 없던 편견이 돌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손에 땀을 쥐고 본다는 주말 밤의 스릴러에 형편없이 묘사되던 여자들이 한 몫 단단히 했음을. 내가 살아가는 동안 피할 수 없음을. 노력하여 매 순간 자각하지 않는다면, 결국 물들고 받아들이고 말 것임을. 알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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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과장 1
히로카네 겐시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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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나를 떠나지 않은 것은, '일본여자들 참 살기 어렵겠다', '그래, 그래서 내가 야망이 없는 남자를 원하지'..

등장하는 여자들은 술집의 마담이거나, 경리거나, 전업주부이거나, 능력을 인정받는 여직원이라도 커피를 나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내 나는 '팍팍하여라', '팍팍하여라'하였다. 놀랍도록 관대한 그녀들은 그들이 명예나 부를 성취하는 때, 한때나마 그들의 사랑을 가지는 것으로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남자들의 이름 뒤에 있는 것을 충분히 기꺼워한다. 물론 어른들의 얘기다. 그녀들은 스스로 선택하여 행동하고, 받아들이고 또 떠나보낸다. 그러나, 이렇게 놀랍도록 관대한 성품마저도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사회란 걸, 커피를 가져와야 하는 여직원-해외에서 유학한 재원으로 묘사되던-, 결혼과 함께 퇴사하던 여직원에 대한 묘사에서 알아 버린다.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해야만 한다, 라고 묘사되는 시마의 행동을 보면서는 '왜 그럴까' 계속 묻는다. 아내와 아이를 위해서라는 초반의 명제가 사라지는 이혼 후에도 여전히 권모와 술수에 휘말려서는 원하지 않는 것을 '하고' 있다. '죽이지 않으면 죽어 버린다'고도, '그것이 최선이었다'고도 하는 그 모든 상황을 난 이해할 수가 없다. 결국은 '원했던' 게 아닐까,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성공하는 것까지. 그 안에서 살아남고 성공하기 위해서였으며, '원하지 않았다'는 건 단지 제스츄어 였던 거라고. 사랑이나, 아이나, 가정보다 중요했던 것은 조직이었던 걸. 회사인간이란 비유는 그래서 적절하다. '회사를 떠날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모든 행동은 이유가 없고, 그의 게임은 박진감을 잃는다. 그래, 난 야망없는 남자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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