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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수염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월
평점 :
절판
그렇지, 나라도 그런 상황이라면 사라지고 싶을 거야. 뼈가 하얗게 드러나는 상처따위 볼 수 없는 척, 내 손으로 내 살을 도려내고 싶을 거야. 머릿속은 텅비고, 손은 내 손이 아닌 것처럼 지독한 관성으로 움직일 수도 있을 거야. 아픔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거야.
책장을 덮으면서, 그래도 여전히 아무일 없던 듯 지속될 수 있는 거라면 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던 마음이 비죽비죽 솟았음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그렇지만, 참을 수 없는 것은 '아무 일 없던 듯'이란 걸 안다.
극심한 마음 속의 갈등들이 아예 없던 것이 되는 순간, 나란 존재는 도대체 무어란 말이냐. 여전히 이런 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아프고, 몸도 아프고, 서운하고, 슬프고, 이런 저런 방식으로 반응하는 나는 도대체 언제 어떤 식으로 존재해 온 것인가 말이다. 내가 알던 사람들, 갑자기 모르던 사람이 되고, 내가 디디고 서 있던 그 견고한 바닥이 일순 무너져 버린다면, 나는 그런데도 여전히 '나'라고 계속 '아무일 없던 듯' 살아질까. 자신이 없다. 다르지 않은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일 내게 닥치지 않기를, 바라기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