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안 하기 게임 일공일삼 65
앤드루 클레먼츠 지음, 이원경 옮김 / 비룡소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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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원서에 붙은 서평을 보고 궁금해서 내 맘대로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6학년인 아들 주려고 골랐다. 어차피 책은 환영받지 못하는 선물이니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사겠다며 사서 비밀리에 포장도 하고, 리본도 매서는 크리스마스 아침에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내가 먼저 읽었다. 

재미있다. 

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이 남자 대 여자로 말 안하기 대결을 벌인다. 서로의 또래집단을 끔찍히 싫어하는 초등학교 5학년 남자애들과 여자애들. 주인공 남자애는 어느 날 침묵하기로 하고 혼자만의 실험을 하다가, 여자애들의 하릴 없는 잡담에 발끈해서 도발한다. 서로의 집단이 쓸모없는 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이 말 안하기 게임을 하고, 시끄럽기로는 학교 내 최고였던 학년의 갑작스러운 돌변에 선생님들은 당황한다. 또래집단의 성 대결은 어른들과의 대결로 결국 무화된다. 


나는 동성을 좋아한다,보다 이성을 좋아하기가 어렵지 않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구의 동성애 혐오가 무언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고도 생각한다. 

말은 자연스럽지 않다고 하지만, 자연스럽다는 건 뭘까, 라고도. 

동성을 좋아하는 자연스러움,은 이성을 혐오하게도 한다고도 생각한다. 

비슷한 존재를 좋아하고 다른 존재를 싫어하는 태도가 있지 않나,라고도 생각한다. 

이민족 혐오처럼, 이성혐오가 존재하다가, 살아가면서 다듬어지고 깎여서 그러구러 살아가는 게 아닌가,하고. 

자라지 않는 사람들, 자라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포장해서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면서 이성혐오를 길게 늘이는 세태를 보고 있으니, 필요한 건 기성세대의 억압인가,라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도 든다. 또래집단 안에서 성 대결은 어떻게 완화될 수 있을까. 소설처럼, 세대대결 양상으로 넘어가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삼십대 남녀가 싸우는데, 사오십대 기득권자들이 특정 성을 지지한다. 지금의 페미니즘 이슈가 그렇게 보인다. 

입맛이 쓰고, 답답한 마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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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소녀를 아는 사람들
정서영 지음 / 팩토리나인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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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었다. 

무도덕의 악녀가 등장한다. 

자신의 도덕이 있지만 공동체의 도덕에는 관심이 없다. 

사랑과 관심을 원하지만 어떤 방법이 있는지도 모른다. 


법적인 금기나 공동체의 금기에 관심이 없다. 

밥을 주는 인간에게 자신의 장난감(쥐?)을 물어다주는 고양이같다. 

죽음을 가볍게 생각하기 때문에, 작은 배신에 큰 앙갚음을 한다.  

쓰려고 펼쳐놓고는 다시 읽었다. 무엇을 정말 했었는지 보려고. 직접 하기도 하고, 타인에게 조언하기도 한다. 슬지의 말들을 누군가는 실행하고, 누군가는 무시한다.

함께 살아가기에 슬지는 어떤 사람인가. 

슬지는 어떤 존재인가. 

슬지의 관점이 아니라, 소녀를 아는 사람들이 화자인 이야기들이다. 

슬지는 쥐를 죽였고, 개를 죽였고, 사람을 죽였고, 누군가를 죽게 만들었다. 

재미있어서, 누군가와 절친이 되고 싶어서, 사랑을 빼앗겨서, 감당할 수 없어서, 사랑해서, 죽음에 이르게 한다. 죽음이 무거운 게 아니고, 가벼운 거여서 슬지는 그럴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더하여, 슬지는 이기적이어서, 논리적이어서, 그러는 것도 같다. 


이게 재밌다면 어떤 면에서 그랬을까. 

슬지는 상상 속의 완전범죄자,고 이야기는 추리소설 같다. 탐정의 관점에서 범인을 잡는, 논리와 이성을 찬양해 마지 않는 추리소설의 얼개는, 뒤집어져서 범죄자가 설계한 사건에 대해 듣는 것으로 바뀐다. 홈즈를 읽었던 마음으로, 읽게 된다. 범죄자가 설계한 사건을 누구는 실행하고 누구는 실행하지 않는다. 슬지는 실행하는 범죄자로도, 조언하는 범죄자로도 등장한다.


재밌게 읽었지만, 지금의 어떤 세태가 이런 태도를 조장하는가, 싶어 무섭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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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반 무 많이 서해문집 청소년문학 16
김소연 지음 / 서해문집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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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일은 중요하다. 그런데, 왜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라는 말은 어렸을 때 그렇게 하찮게 들렸던 걸까. 상황조차 따뜻한 어른들의 말인데, 끼니 거르지 말고 밥 먹고 합시다, 같은 말인데, 왜 그렇게 하찮게 생각했던 걸까. 어렸을 때는 뭔가 동물적인 일들,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일들을 하찮게 생각하는 태도가 있는 게 아니었을까. 그것보다 중한 게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걸까. 시간을 건너고 난 지금, 먹고 사는 거 보다 중한 게 뭐가 있는지 대답하지 못하는 어른이 되어서,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거다. 

우리 역사의 순간들이 다섯가지 음식과 얽혀서 짧은 이야기들로 묶였다. 십대의 소년과 소녀가 겪는 음식과 관련된 순간들이다. 

6.25 피난길에 고구마 한 보퉁이, 전쟁 후 의정부에서 먹는 유엔탕(나중에 부대찌개가 된다), 평화시장 여공가족의 떡라면, 87 민주항쟁 가운데 떡볶이, 98년 IMF 시절의 치킨. 

커다란 역사를 겪어내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강하고 단단하게 살아남는 이야기들이다. 

떡볶이와 얽힌 이야기는 좀 더 아팠는데, 함께 겪는 고난,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기보다 대립의 이야기여서 그런 것도 같다.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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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 선이기 위해서는 그림자가 필요하다. 

너무 밝은 빛 만으로는 어둠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림자를 품은 빛이라야, 악에 물들지 않을 수 있다. 

무슨 뜻일까. 


마지막화에서 부연이의 몸 속에 존재하는 두 개의 혼 중 진부연-진설란,이라고도-이 자신의 신력을 사용하기 위해 봉인했던 낙수 조영의 잠든 혼을 깨워서는 말한다. 세상을 구원한 빛에게 당신의 그림자를 돌려드리겠다고. 그림자를 품어 안은 빛은 절대 어둠에 들지 않을 거라고. 


돌봄과 작업,에서 '오염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조언한다는 것과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흰 옷에 얼룩은 좋지 않지만, 작은 얼룩조차 참아내지 못한다면 지나치게 수고롭거나, 새 옷을 사는 수 밖에 없다. 지나치게 수고로운 것도, 새 옷을 사는 것도, 살아가는 것에 좋은 방식은 아니다. 지나치게 수고로운 것은 스스로를 괴롭혀서 지속할 수 없게 만들고, 새 옷을 사는 것은 결국 그걸 다른 누군가의 수고로 바꾸고, 지구를 더럽힌다. 


그림자는 어둠처럼 보이지만 빛이 없다면 그림자는 없다. 

그림자를 품어안은 빛이라는 말, 어둠에 들지 않을 거라는 말을 선이나 악에 대한 은유로 본다. 


결벽적인 어떤 주장들이 그렇게 치우치는 이유가 그런 것인가, 생각한다. 

결벽적인 주장들, 눈곱만큼도 용납하지 않는 얼룩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고 있으면, 그 의도에 대해서 의심하는 순간들이 많다. 그런 삶은 없는데, 삶은 아주 뒤죽박죽 엉망진창인데, 어떻게 저렇게까지 단정함을, 어떻게 저렇게 까지 완벽함을 요구할까 싶은 주장들에 의심한다. 

옳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다양하다. 시간에 따라,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극단적인 양 끝은 주장을 저쪽은 이쪽으로 당기고, 또 이 쪽은 저쪽으로 당기고 있다. 


그림자가 없다면 빛은 어둠과 다르지 않다. 

밝기만 해서는 어둠처럼 눈을 가려서 여기가 어딘지조차 알아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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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차(https://blog.aladin.co.kr/hahayo/14143752)

단편선에 딱 하나 실린 여성작가의 소설이 지나치게 염세적이라서 놀랐다. 나를 죽인 자와 함께 탄 죽음 뒤의 마차에서 죽인 자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는 걸 본다. 


나에게도 이런 태도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자신만만하게, 태어난 게 원죄라는 기독교도, 완전한 소멸이 목표라는 불교도 싫지 않냐고 했었지만 지금은 삶이 고통의 바다,라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죽는다는 것이, 그래서 그렇게 싫은 게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관계들, 때문에 나의 죽음이 나에게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당근 할 수 있지,라고 생각하는 수동적인 태도를 가진다. 나를 아는 누구에게라도 결국 언젠가는 죽음이 올 테니, 나를 위해서라도 기다려 주십사, 생각한다. 


2.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 (https://blog.aladin.co.kr/hahayo/8192500)

피다한 부족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문명의 말들에 대해 생각하고 남겼었다.

살기 싫은 감정,이 그럴 수 있다는 나의 태도 때문에, 그 태도가 얼마나 기이한 건지 알기 때문에 나는 어쩌면 아이들에게 관대할 수 있는 거라고 썼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 나의 파충류 뇌가 예민하게 노력하고 있다. 나의 파충류 뇌가 작동하는 동안에 살기 싫은, 어쩌면 한가한 감정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그런데, 이미 죽음은 어디에도 안 보이게 잘 치워둔 세상이기 때문에 삶은 무료해지는 게 아닌가도 싶다. 





3.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https://blog.aladin.co.kr/hahayo/2220098)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면서 일기를 쓰는 십대 소년의 이야기 속에서 소년의 관대함을 본다. 


소년은 죽었고, 일기의 그 첫 문장은 남은 사람들에게 비수가 되지만, 일기를 다 읽은 소녀는 그 말이 다른 의미임을 안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본다면, 잔소리하는 엄마도, 귀찮게 구는 동생도 자신을 거절하는 여자애도, 지금 삶을 꺾을 것처럼 거대하고 괴로워 보이는 일들도 참 별게 아니라고, 소년은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죽음을 상상하는 일은 삶을 더 잘 살아가게 하는 것이 된다. 

나도 아직 가끔 모르겠는 걸 참 일찍 깨달은 소년이네,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다. 


수동적이라는 말이 나쁜 말이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지금은 오히려 더 강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살고 살아남는 건, 수동적이어야 가능하다고까지 생각한다. 


나는 '누가 낳아달랬어?'라고 부모에게 항의한다는 자식들 이야기를 들으면 변명을 궁리한다. 그게 과연 나만의 욕망이었을까. 그건 너였어. 네가 나를 세상에 나오는 통로로 쓴 거지. 어떻게 내가 내 의지만으로 너를 낳을 수 있겠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 복에 살지요'라는 동화가 어린 날 나의 자신만만함의 근거였다면, 부모가 된 지금의 나에게 부모된 자의 변명이 된다고 생각한다. 더하여, 수동적인 태도의 연장으로 염세적인 태도의 연장으로 죽음만큼 삶도 내 의지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누군가에게 내가 관대해 보인다면, -그런 놈은 죽여야 되,라는 말에 언제나 물러서는 것 같은- 죽음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태도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닥치는 죽음은 벌이 아닌데, 죽음을 주는 것이 합당한가.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도 뛰어드는 죽음이라는 것이 벌로 기능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가혹함,에 거리가 생기는 건 나의 이 애매한 태도, 수동적이고 염세적인 태도 때문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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