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육가설 - 부모가 자녀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탐구
주디스 리치 해리스 지음, 최수근 옮김, 황상민 감수 / 이김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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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되기 전에는 알지 못했다. 

뭔가 부모노릇에 관심이나 있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그래도, 식당에서 아이가 뛰면 부모를 찾고, 역시 아이들은 좀 귀찮다고도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부모가 되어 달리는 차 문을 벌컥 열고 내리려고 한 적이 있다. 아이가 아파서 어린이집을 중간에 나와 병원에 갔다가 오는 길에 탄 택시였다. 목적지가 가까워서 속도를 줄이는데, 그 짧은 길에 아이가 멀미를 할 것 같았다. 차에 멀미를 잔뜩 토하고, 기사 분한테 야단이라도 맞을까봐 그저 속도가 줄었을 뿐인 차의 문을 벌컥 열고, 상상하던 그 이상 욕을 먹었다. 욕을 먹으면서, 내가 왜 그랬을까, 미쳤었네, 그랬다. 아이를 안고 내릴 생각이었지만, 아무리 속도가 줄었대도 멈추지 않은 차였고, 다칠 수도 있었다. 왜 그랬을까. 아픈 아이가 있는데. 


부모도 사람인지라 이야기를 듣는다. 엄마들의 진상짓,이라고 올라오는 인터넷의 글에도, 노키즈 존에 대해 진지하게 말하는 신문의 기사도, 아닌 체 해도 듣고 있다. 아마도 그래서, 일의 선후를 뒤섞고 중한 것과 중하지 않은 것을 헷갈렸다고 내 자신에게 설명했다. 그래도 역시 미친 거였다. 


부모가 되어 저지른 많은 미친 짓에는, 아이를 보기보다 내 또래를 봐서 저지른 일들도 많다. 아이가 원하는 어떤 일을 내가 허용한다면, 아마 사람들은 나보고 미쳤다고 하겠지, 싶은 것들. 여름에 부츠를 신으려고 하는 아이와, 겨울에 두꺼운 옷을 거부하는 아이와 지나치게 싸우고 있을 때 내가 걱정하는 것은 아이가 덥거나 추울까보다, 남들이 나를 뭐라고 할까, 같은 게 앞에 있었다. 아이가 보이는 어떤 모습, 태도가 부모의 평판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렇다고 평판을 두려워해서는 양육을 즐길 수가 없다. 


저자는 아이를 부모가 빚는 피조물로 대하는 '양육가설'과 여기에서 출발한 수많은 조언들로 양육이 괴로웠던 엄마다. 두 딸을 키우면서 겪는 어려움 가운데, 양육가설이나 조언전문가들이 자신을 얼마나 억압했는지 내내 설명한다. 말 안 듣고, 어울리지 않았으면 하는 아이들과 어울리는 둘째 딸 때문에 속을 썩으면서 자신이 써온 심리학-성인의 온갖 심리적 문제를 아동기 학대에서 원인을 찾는- 교과서들에 반감이 드는 거다. 부모의 역할은 분명히 있지만, 그 한계 또한 분명하다는 어찌보면 당연한 말들이 가득하다. 이민가정, 또래집단, 입양아 등, 기존 양육가설이 반하는 증거들을 어떻게 배제해왔는지 말한다. 기존의 연구들을 반박하면서 또래집단 가운데 자아정체성을 형성하는 아이들에 대해 말한다. 동양의 부모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면서 그걸 설명하는데 이렇게 많은 말이 필요하다는 것이 의아하다. 그러면서도 역시 내가, 서양에서 비롯된 양육가설에 휘둘리지 않았다고는 못하겠다. 


인재시교,를 읽은 나는, 서양의 학문이 시간 축을 잘라내고, 누군가를 책임지우기 위해 상황을 단순화시킨다고 삐딱하게 본다. 서양의 학자들처럼 말하지 못하는 나의 추상성을 이제, 다른 식으로도 말한다. 양육가설을 읽으면서 함께 읽은 '심층마음의 연구'덕분에 어쩌면, 동양은 자아를 형성한 다음, 그 자아가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으며 나아가는데, 서양은 그게 안 되는 건가, 생각도 한다. 첫번째 밑줄은 그런 것이다. 이렇게 분명하게 '"나"의 내면은 변화를 멈췄다'고 단정하는 것에 화들짝 놀랐다. 동양에서는 다음 단계가 있으니까, 내면은 변화하고 성장한다고 믿으니까, 적어도 나의 내면은 스물 다섯보다는 나이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말은 너무 부끄러운 말이 아닌가, 싶고, 설마 서양은 문화에서는 부끄러운 말이 아닌 것인가, 싶기도 한 것이다. 


아이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 부모인 나는 나와 아이 밖의 말들에 조금은 귀를 닫고 내가 즐길 수 있을 만큼 양육한다. 

열일곱 살에서 스물다섯 살 사이 언젠가부터 "나"의 내면은 변화를 멈췄다. 변화를 멈춘 이유는 아마도 뇌가 완전히 성숙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보다 늦게 성숙하는 남자는 조금 더 오래 유연한 채 남을 수 있을 것이다. -p414

하지만 양육이란 섹스가 그렇듯 고생스럽게 여길 일이 아니다. 진화는 우리에게 채찍만이 아니라 당근도 줬다. 자연은 인간이 어떤 일을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그에 걸맞은 기쁨과 만족감을 보상으로 제공한다. 양육이 힘겹고 어렵기만 한 일이라면 침팬지들이 그 일을 견뎌낼 수 있겠는가? 부모란 양육을 즐길 수 있는 존재다. 양육을 즐기고 있지 않는다면 어쩌면 힘에 부칠 정도로 노력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p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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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션스 8
게리 로스 감독, 헬레나 본햄 카터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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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멋이 잔뜩 든 그저 그림,이라는 생각을 했다. 


주말에, 남편은 이걸, 초6 딸래미는 안 보겠다고, 나는 서치?를 보자고 하다가, 서치는 무섭다는 결국 한때나마 딸래미가 보고 싶어했던 적이 있던-그 때는 티비로 나오지 않았다-오션스8을 결제하고 봤다. 

오랜만에 산드라 블록은 반갑고, 여자들이 예쁘고 멋있게 등장하는 것은 좋지만, 이야기를 끝까지 따라가는 것은 허무했다. 화장실에서 결의를 다지며, '세상에 모든 범죄자를 꿈꾸는 소녀들을 위해 성공해보이겠어'라고 말할 때는 헛웃음이 나고, 영화를 통틀어 공감이 되는 것은 묘지에서 만난 할아버지가 하는 말이다. '네가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꼭 할 필요는 없다'는 말. 

상상한 모든 걸 할 필요도 없고, 타인에게 증명하기 위해, 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도둑질이 다른 무엇보다 더 부도덕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 대상이, 보석이라서, 세상 현금화하기 어려운 보석!이라서, 도대체, 뭔 짓을 하는 건가 싶은 순간이 많았다. 이야기를 여성들을 쌓아 여성들이 즐겁도록 만들려고 했다는 건 알겠는데, 바닥에는 여성들에 대한 오래된 편견을 깔았다. 여자들은 반짝이는 예쁜 것들을 좋아하니, 보석을 훔치게 하자,라던가. 결행의 목적에는 나를 배신한 연인에 대한 복수도 깔자, 뭐 이런. 이유를 모르겠으니, 목표를 모르겠으니, 설명이 부실하니, 아무리 예뻐도, 아무리 경쾌해도, 아무리 많아도 헛헛했다. 바이크를 타고 달리는 삶은 술취한 사람들에게 물맛나는 술을 먹이고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싶은 거다. 세상은 그렇게까지 허술하지 않고, 정작 그 돈들을 쓰지도 못할 텐데, 뭐 이런 거. 


많은 이야기들, 과학, 서양의 것들이 시간 축을 오려내고 단면만을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신뢰나 믿음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고, 그 다음과 그 다음과 그 다음의 이야기들이 있는데, 영화라는 한계가, 혹은 그걸 알고 싶어 하지 않은 바램이 그대로 펼쳐진다. 


늙어가는 중이라 젊고 경쾌한 오락영화 속에서 가장 늙은 말을 찾아 그것 하나에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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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곰탕 1~2 세트 - 전2권 - 김영탁 장편소설
김영탁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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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학교에서 빌려오라고 해서 1권을 봤다. 2권이 아무래도 없다고 해서, 2권은 서점에서 샀다. 학교 도서관에 2권을 버리라고 그렇게 당부하고 샀다. 


시간여행자가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조금 진지해지면 질문이 계속 생기는 이야기이다. 그러지 않을 수 있다면, 시간여행을, 레이저총이 두꺼운 콘크리트들을 차례로 뚫고 그 안 에 사람을 동강낼 수 있다는 걸, 머리에 칩을 심는 것으로 공간을 자유자재로 뛰어넘을 수 있다는 걸 이야기가 재밌어서 믿어주기로 한다면, 흥미진진한 SF영화를 미래에서 지금으로 온 사람들 때문에 벌어지는 온갖 아수라장을 구경할 수 있다. 읽는 중에 질문이 마구 떠오르지는 않는다. 

흥미진진한 SF지만, 질문은 곰탕같고 이야기는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계속될 이야기다. 아버지가 되는 이야기,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 가지는 감정이나 아들이 아버지에게 가지는 감정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 애석한 이야기, 지난 다음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후회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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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수없는 며느리 VS 파란 눈의 시아버지
전희원 지음, 김해진 그림 / 모티브북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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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래 전에 읽었다. 초판이 2004년이고 아마 그 즈음에 읽었나보다. 

다른 사람들처럼 배꼽 빠지게 읽은 건 아니지만, 그때의 나에게, 나의 어떤 태도에 도움이 되었다. 


결혼하고 나서 억울한 게 참 많았다. 저녁을 남편에게 맡긴 적도 있었는데 넘겨지지 않는 것들, 싸이클 전부를 책임지지 않으면 모를 태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왜 그 싸이클에 신경쓰는지는 모르겠지만,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내다버리고, 전 과정을 하지 않으면 모를 어떤 요구들에 화가 나는 순간들이 많았다. 어떻게 매번 새 반찬을 원할 수 있나, 끓인 찌개 두 번은 먹지 말지,라는 말이 나올 수가 있나. 어떻게 모든 재료를 갖춰서 요리하라고 할 수 있나, 어떻게 어떻게. 그런 요구를 들을 수도, 끼니에 딱 먹고 없앨만큼 찌개를 끓일 수도, 그렇다고 남은 찌개를 톡 털어 쓰레기통에 버릴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처해서 '우리 집에 돼지라도 키우냐'라고 소리치거나, '제 몸뚱이만 깨끗하면 다냐, 쓰레기는! 지구는!'이라고 소리지르거나 하는 날들이 있었다. 이런 고민을 나만 하는 게 억울하고, 이런 것들에 마음쓰고 있다는 게 억울한 순간들이었다. 딱 둘 뿐인 가족에서 그게 굉장히 힘든 일이라는 걸 지금은 좀 더 알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요리에 대해 주방을 장악한다는 것에 대해 '좋은 거네'라고 조금은 생각할 수 있게 되었던 거 같다. 그때가 아니라 지금, 누군가 요리하는 게 싫다고, 밥 걱정하는 걸 억울해하는 말을 하면 이 책에 대해 말하게 된다. 

국제 결혼을 해서 남편과 시댁에 함께 사는 한국인 며느리다. 주방을 장악한 시아버지 덕분에 손에 물 묻힐 일도 없다. 결혼하고 억울한 게 참 많았던 그 시기에 세상 부러울 게 없어보이는 그 삶 속에 하는 불평들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김치가 없는 끼니라니, 해 주는 데로 먹어야 하다니, 참 쉽지 않겠다.  

주방을 장악하는 일이 사는 데 참 중요한 먹는 일에 대하여, 주도권을 가지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게 된 거다. 억울하기만 한 채로는 그 시기를 건너지 못했을 거다. 같이 살면서 조정해야 하는 주도권 가운데, 희생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 와중에 나는 좀 더 요리에 자기 주장을 할 수 있게도 되었다. 지금의 나는 간이 약하다고 하면, 소금을 가져다 준다. 나는 주방의 주인이거든. 잘 먹어주면야 좋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결국 내가 먹으려면 했어야 하는 것이라고도 생각하게 되었다.  

참, 내가 꽤나 숙련된 주부라고 오해할 수도 있어서 추가해야 겠다. 나는, 내가 먹을 밥이니까,라는 마음으로 아침을 김치, 데운 찬밥, 계란후라이로 고정했다. 반찬투정은 금지되었고, 먹지 않으면 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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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키킹 2: 서유기 여정의 시작
정바오루이 감독, 곽부성 외 출연 / 미디어허브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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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에 몬스터 헌트,를 봤다. 인간으로 변신한 몬스터들이 인간과 함께 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몬스터를 대하는 태도가 '도롱뇽과의 전쟁'과 너무 달라서, 예전에 아프리카의 여인을 전시했던 유럽의 태도와 산해경에서 '다리가 뱀처럼 생겼다'거나, '날개가 달렸다'거나, 그러니까 그런 형상을 하고도 무슨 무슨 족,으로 그러니까 인간의 범주로 판단하는 태도가 대조적이었던 기억이 연달아 이어졌다. 이게 계속 나의 편견을 강화시켜서 서양의 태도와 동양의 태도를 비교하고 있다. 철학으로서 동양의 태도, 만물에 깃든 신에 대한 묘사와 하나의 마음 같은 것들 말이다. 그래서, 요새는 서양작가의 창작물들을 피하고 있다. 그게 소설이든지, 사회과학서적이든지, 영화든지, 드라마든지, 태도에 무언가 거슬리는 부분이 생긴다. 

그래서, 티비를 돌리다 멈춰서 '몽키킹2:서유기, 여정의 시작'을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제목도 그렇고, 손오공의 분장도 뭔가 헐리우드에서 만든 건 줄 알았다. 만듦새로 국적을 구분하기 어렵다. CG도 게임들 덕인지, 손오공 자체의 판타지성 때문인지 그렇게 위화감은 없었다. 요괴로 등장하는 공리가 너무 오랜만이라 반가웠다.-사실, 손오공이 곽부성이라는데, 분장이 너무 갈색이라, 알아볼 수가- 

이야기나 철학에 집중하는 지금의 나에게, 삼장이 손오공과 대립하는 그 상황의 이야기가 공감이 되었다. 노파로 변장한 요괴를 손오공이 공격하는 것이나, 아이나 아이의 어머니로 깃든 요괴를 오직 손오공만이 알아보는 것이 쓸쓸했다. 삼장이 손오공에게 벌을 내릴 때, 금강고가 머리를 조여 고통이 닥치는 가운데, 손오공이 삼장을 구하기 위해 아이를 공격하는 것이 슬펐다. 삼장은 아이에게서 아이를 보고, 손오공은 아이에게 깃든 백골정을 보고 있다. 쓰러진 아이에게서 요괴(백골정)는 빠져나가고, 손오공의 의도는 결국 확인되지 않는다. 삼장도 손오공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거나 믿는 존재지만 서로 다른 면을 보고 있기에 둘 사이의 대립이 묘사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명쾌한 어떤 이야기들처럼 쓰러진 아이가 요괴로 변하지 않아서-당연히 그럴 수 없다-, 쓸쓸한 기분이 커졌다. 결국 삼장이 손오공을 용서하지 못하고 위험에 빠지고, 그 위험 가운데, 스스로를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 마음이 요괴가 다시 인간이 되기 위해 날아가는 공간이 좋았다. 악이 악으로만 존재하지 않는 동양의 공간들이 그 모든 혼란들이 그대로 묘사되는 것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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