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미지들에서 기대한 것은, 책날개로부터 기대한 것은, 사람들의 이야기로부터 기대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좀 더 따뜻한 이야기였다.

내가 바라던 것은, 아직 파이가 인도를 떠나기 전, 길에서 세 명의 사제를 맞닥뜨렸을 때였고, 구명보트에서 리처드 파커가 파이에게 친근함을 의미하는 소리를 냈을 때였다.

길들이는 이야기는 어린왕자,의 왕자가 여우를 길들이는 스타일이 좋다. 현실은 파이가 리처드 파커와 동거하면서 200여일을 항해하는 동안의 길들임이 가깝겠지만, 왕자가 여우를 길들이는 판타지를 나는 좋아한다.

소설가를 만난 인도인이 말한 것처럼, 이 책을 읽고 내가 신을 가깝게 느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 책이 그런 인상을 준 것은, 내가 바라던 그 장면들이 전부다. 세 명의 사제를 맞닥뜨린 순간이나, 파이가 모든 종교에 진지할 때 나는 기뻤다. 모든 신들을 내팽개치는 나의 냉소보다, 서로의 신들을 비난하는 사제보다, 모든 신들을 사랑하기로 결심한 파이가 훨씬 행복해보였다.

그렇지만, 그 장면들이 지나가고 나면, 책은 배경은 단조로우나 긴장이 흐르는 바다 위 풍경을 전한다. 상어떼가 아래로 지나는 바다 위의 풍경과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게도 느껴지지만 두 개의 서로 다른 버전이 그리 다르지 않게 느껴질 만큼 현실이다.

파이가 살아남은 것은 포기하지 않은 마음때문이었고, 그것은 물론 존경스럽다. 만약, 이 이야기에서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면, 그건 신에 대한 믿음에 대한 것이어야 하겠지.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무언가를 보지 못한 나는 신에 대한 믿음 대신, 포기하지 않는 낙천성에 대한 이야기를 보는 것이다. 신을 아는 누군가는 나에게, 그것이 바로 신의 증명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궁궐의 우리 나무
박상진 지음 / 눌와 / 200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산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산을 오를 때, 땀이 나는 것도, 내 몸이 그 수고들을 잘 해 내는 것도 대견하고, 봄이 되면 어여쁜 초록, 여름이면 캄캄한 초록, 가을이면 아름다운 색색, 겨울이면 하얀 산, 모두 모두 너무 좋다.

그렇게 오르다가, 나무들을 보고, 꽃들을 보면, 언제나 나를 즐겁게 하는 것들을 제 이름으로 불러주고 싶다. 너무 좋아한다. 산의 풍경들, 산의 나무들, 산의 꽃들, 산의 풀들. 그래, 제 이름을 불러주려고 책들을 찾았고, 내게는 이 책이 제일 좋았다. 나무의 이름들은 이야기들로 기억된다. 어째서 그런 이름을 가졌는지 알게 되면, 그 이름은 산길에서 만난 나무에게 저절로 붙는다. 상세한 나뭇잎의 묘사도 있고, 줄기의 모양도 있는 쓸모에 대한 묘사가 많은 도감을 읽을 때는 일어나지 않던 일이다. 나무에게 그 이름이 붙은 데도 이유가 있는 법이고, 이야기를 알고나니 이름도 쉽게 떠오르고 더욱 살갑게 느껴진다.

박태기나무, 이팝나무, 조팝나무, 생강나무, 고추나무, 밤나무, 함박꽃나무, 서어나무, 으름, 자두나무, 무궁화, 은행나무, 등나무, 닥나무, 다래나무, 돌배나무, 명자나무, 가죽나무. ...

늘 보고 알던 나무도, 모양은 알지만 이름은 처음 듣는 나무도 있다. 처음 만난 나무의 이야기도 반갑지만, 알던 나무의 이름 이외의 것들을 듣는 것도 즐겁다. 나무의 이름들의 유래나, 얽힌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니, 모든 나무들이 친구같이 느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칼의 노래 (1.2권 합본) - 우리 소설로의 초대 4 (양장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언니가 이순신 장군님의 광팬이 되었다. 그래, 산 지는 오래 되었는데, 손이 가지 않던 것을 지난 주에 마저 다 읽었다.

앞서 읽은 서평의 영향인지, 말마따나 처음에는 장군님 대신 김훈이 겹쳤다. 자전거 여행의 기운이 느껴지기도 했고. 그러다가, 이건 먼저 읽은 서평때문일 것이다, 마음을 다잡아 다시 읽으니, 말하는 사람이 장군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장군 마음속의 살풍경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소설은 장군이 백의 종군을 마치고 죽는 순간까지를 묘사하고 있다. 일인칭 시점의 이 소설이 난중일기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가끔 장군의 마음 속은 지나치게 심란하구나, 싶기도 하고. 그런데도, 박정희에 의해 우상화된 영웅이라는 마음 속에 오랜 저항이 끊이질 않아서, 언니처럼 팬이 되지는 않을 거 같다. 그래 공연히 장군님이 손해를 보게 되는 거다.

무패의 장군이 있어, 그 난이 그렇게 끝났는데도, 그런 마음의 저항을 하고 있다니, 공을 인정하지 않는 선조나 다른 신하들과 다를 게 무언가 싶기도 하고. 전쟁의 풍경들이 가슴 아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매리지 블루
유이카와 케이 지음, 서혜영 옮김 / 문이당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좋지 않은 태도다. 누군가 쓴 소설에 '나도 쓰겠다'라는 평을 붙이는 것은. 게다가, 실상 내가 쓸 수 없다는 것까지 알면서 그런 평을 붙인다는 것은. 그런데도, 습관처럼 그런 생각이 스물스물 기어나온다. 이렇게 습관적인 비난 때문에 정작 시도조차 못하면서 -누군가 내가 썼을 때 그런 생각을 품을까봐- 또 그런 생각을 하고 마는 것이다.

매리지 블루, 를 읽으면서 계속 그랬다. 지나치게 드라마틱한 설정에는 결국 또 질려버리면서, 이렇게 평범한 삶들이 연대기처럼 펼쳐지는, 게다가 그 과정이 내가 겪는 상황과 그리 다르지도 않다면, 습관이 괜히 습관이겠는가, 머릿속에 떠 다니기 시작하는 것이다.

책의 말미에 밝힌 것처럼 현대를 사는 여성은 모든 것을 가지려고 한다. 나도 다르지 않아, 결혼을 했고, 직장에 다니고 있다. 그래서, 직장에 다니는 노리코와 결혼을 하면서 살림만 하기로 한 -윽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노리코조차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건지 모른다는 의심이 닥친다. 동생에게 읽으라고 준 뒤라서 확인 불가다- 노리코의 동기의 삶이 삶의 순간 순간 마주치는 것을 보는 것은 솔직히 기분이 나빴다. 지나치게 솔직한 두 여자의 마주침, 질투 등이 눈에 들어와 미운 마음이 되는 거다. 내가 다르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 그런 모습 미워하고 있기 때문에, 정면으로 들여다 보기 싫은 것이다. 두 여자의 삶이 또 평범하니까, 더욱 나랑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고. 반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원래 그렇다는 걸 아니까 그저 피하고만 싶은 심사가 되는 것. 알고 있는 미운 구석에 자꾸 거울이나 현미경을 들여다 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미화따위 없는 평범한 일상의 전시가 또 싫은 것. 나는 그랬다. 그래서 재미가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르세르크 15
미우라 켄타로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집을 비운 사이 또 장편의 만화를 집에 들여놓았다. 어쩔 수 없다. 내가 산 것도 아니고.

내게 물어본 적이 있다. 이걸 살 생각인데, 어떻겠냐고. 나는 친구 집에 놀러갔을 때 그 집 화장실에서 딱 한 권을 본 적이 있다. 보고 남은 기억은, 잔인하고 징그럽고, 포악하다는 것. 그 기억 때문에 나는 반대했다. 그러고 나니, 잠깐 참았을 뿐이고, 내가 집을 비운 사이 들여놓은 것이다.

이미 집안에 있는 것, 나도 읽기 시작했다. 그 기억 그대로, 그림은 까맣고, 기형의 괴물들이 출몰하며, 괴물은 여자를 강간하고 남자들을 잡아먹는다. 19세이상에게 허락된 만화들처럼, 여자들은 지나치게 글래머이고, 사람들의 몸통은 뎅강뎅강 두동강난다.

악몽을 꾸겠다고, 이런 만화책을 보겠나, 싶기도 했지만, 사실, 줄거리는 탄탄하고, 짜임새는 치밀하여 참을 만 하다. 욕망앞에 유약한 인간들, 에 대한 이야기이고, 무언가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그것은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조차 없다-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베르세르크 뜻을 물어도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어서-사실, 책 주인에게밖에 묻지 않았다-, 혹시 영어일지도 모른다고 검색하였다. 영어 맞다.  

berserk [bəːrsə́ːrk, -zə́ːrk, -́-] a., ad.
광포한, 맹렬한; 광포하게.
㉺go [run] ∼ 광포해지다, 난폭해지다.
㉺send a person ∼ 아무를 난폭해지게 하다

'재미있으나 광폭한'나의 감상은 지독히도 정확한 것이, 광폭하지 않다면 '베르세르크'가 아니었겠지, 싶다.(사전은 한컴사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