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오리엔트의 역사를 통해 조명하는 구약성서의 이해
심종석 지음 / 이컴비즈넷 / 2004년 8월
품절


하나님께서 어느 날 천사들을 불러 모아 이르시기를 '내가 나와 대화할 수 있고, 사귈 수 있는 인간을 창조하려고 한다'는 뜻을 피력하셨다. 사실 신성을 가진 천사는 하나님과 주종관계(主從關係)의 지위를 갖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주종관계 이상의 지위를 갖는 친구와도 같은 지위로써, 그것도 신성을 갖고 있지도 않은 미약한 존재로써 인간을 창조하신다는 의지[計劃]에 전에 없이 반발하게 된다.
당시 천사장 미가엘(Michael)과 같은 수준의 지위를 갖고 있었던 루시퍼(Lucifer)라는 천사가 그 반발의 주동이 되었고, 이에 천사의 3분의 1이 루시퍼의 만발에 동조하게 된다.
루시퍼의 이해(利害)에는 후일 심판의 날에 이르러 그를 포함한 모든 천사가 인간의 수종(隨從)이 되어야 했던 이유에서 더욱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91쪽

이 같이 끝없이 교만하였던 루시피는 결국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음부(陰府)에 추락하게 되는데(墜落天使, 叛逆天使), 그가 곧 사탄(Satan)이다.
루시퍼 곧 사탄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한 인간이 그의 멸망[咀呪]의 원인이 되었기에, 그가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끊어 버리고, 또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배반하게 하여, 그와 같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만들어야 한다는 필연[報復]이 존재하게 된다. 왜냐하면 루시피는 창조된 인간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게 되었고, 하나님을 배반한 반역의 괴수로 낙인찍혀 음부에 추락하는 파멸을 맞았기 때문이다.
루시퍼는 이에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끊게 하려는 목적에서, 일례로 수많은 신화를 이 세상에 전하여 간섭하기 시작하고, 나아가 신약(新約)에 이르러서는 인간을 너무도 사량하여 그 죄를 대속(代讀)하기 위해, 그 또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하나님]을 광야에서 시험하기도 한다.
루시퍼는 불완전한 인간의 심성을 그의 신성을 통하여 익히 잘 알고 있는 까닭에, 그가 인간의 파멸과 멸망을 위해 역사하는 일면은 인간의 생각[理解]으로 너무나 쉽게 수용할 수 있게끔 작용한다. 곧 루시퍼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극히 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불완전한 본성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납득할 수 있게 역사한다. 예컨대 탐스러운 선악과(善惡果)에 대한 유혹, 인간의 본성을 자극하는 쾌락과 부귀영화, 하나님을 떠난 세상에서 일신상의 기복(祈福), 끊임없는 전쟁으로부터 인간의 파멸과 멸망, 유일 신앙을 현혹할 수 있는 다양한 미신과 사이비 종교의 창궐(猖獗) 등이 루시퍼에 속한 역사의 실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루시퍼와는 달리 인간이 생각하기에 극히 비합리적이고 신비적이며 비논리적으로 다가와, 그 자유의지에 따라 정(正)과 사(似)가 구별될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92쪽

이는 루시퍼와는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는 역사의 차이점이다 예컨대 이스라엘 앞에 놀인 홍해(Red Sea)가 갈라지며,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일곱 바퀴를 돌았더니 견고하기 이를 데 없었던 여리고(Jericho)성이 일순에 무너지고, 홍해와 같이 요단(Jordan)강이 갈라지고, 예언되었던 바대로 모세에 의한 애굽에서의 열 가지 신비적 재앙이 일어나고, 해와 달이 멈추어 서는 등의 사건이 하나님께 속한 역사의 실재로 예시할 수 사실이다. 이 두 가지 역사의 기로에서 인간은 그 자유의지에 따라 필연적으로 하나의 길을 선택하여야 하는데, 그 결과가 곧 인류의 흥망성쇠의 역사로 남게 되고, 또한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이는 명백한 성서에서의 역사[記錄]이자 신관이다.
기독교적 신앙에 의지할 경우, 루시퍼 곧 사탄에의 역사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지 않도록 그와 싸워 이겨야 하는 것은 창조주를 기억하는 피조물로써 당연한 인간의 숙명이라 할 수 있다.
루시퍼가 가장 두려워하고, 또한 인간이 루시퍼와의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창조의 이유였던 바와도 같이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대화[祈禱]이다.
피조물로써 신앙을 지켜야만 하는 방위는, 곧 사탄과의 싸움에서 이겨 그가 주재하는 악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하나님과 피조물 된 지위에서 친구에 상당하는 관계를 유지하며, 창조주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역사에 동참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그 이유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내던져진 미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삶의 목적일 수 있다
이것이 구약성서에서 신관으로 표창(表彰)할 수 있는 사실이고, 필자 또한 이것이 계약의 핵심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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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단편문학선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
김동인 외 지음, 이남호 엮음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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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괴로움의 바다요, 불붙는 집이라면, 감옥은 그 중에서도 가장 괴로운 데다, 게다가 옥중에서 병까지 들어서 병감에 한정없이 뒹구는 것은 괴로움의 세 겹의 괴로움이다." -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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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과 해석학 서울대학교 인문학 연구총서 24
이남인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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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썰의 초월론적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현상학”이라는 부제가 말하듯 양자의 관계를 규명한 논문집이다. 흔히 하이데거가 후썰의 현상학이 인식론적으로 편향된 것에 반발해 존재론적 인식론으로서의 해석학적 현상학을 제기하게 되었다고 하고 있다.

후썰의 초월론적 현상학은 초중기의 정적 현상학과 후기의 발생적 현상학으로 대별되는 데, 저자는 후썰의 미발표 후기 논문들을 연구하면서 발생적 현상학에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현상학에서 제기된 내용이 담게 있다고 양자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고 강조하는 게 이 두꺼운 책의 내용이다.

과학만능주의에 빠진 현대 학문의 추세를 비판해 인본주의를 추구하려 했던 두 사람은 1916~30년까지 사제지간으로서 학문적 대화를 나누었다는데 후썰이 하이데거의 문제제기를 받아 정적 현상학을 보완해 발생적 현상학으로 나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승이 제자에게 배우게 되었다는 얘기가 되지 않을까.

그 이후 나치의 유태인 정책으로 대화가 단절되고 서로 자신들의 연구에 몰두해 서로의 진전된 연구를 못 본채 체 기존의 사상에 대해 일방적인 비판을 가하게 됨으로서 양자의 차이를 강조하게 되었고, 후대의 학자들에게 그 차이를 각인시키게 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양자 사이의 다양한 차이점과 함께 소홀하게 여겨 왔던 공통점을 논증했다는데 의의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를 600쪽에 걸쳐 논증한 걸 읽는다는 너무나도 지루한 노릇이었다. 100쪽 정도로 압축해도 충분했을 것이란 느낌이다.

“‘transzendental'을 ’초월‘ 혹은 ’초월론적‘이라고 번역할 경우, 이러한 번역어에 들어 있는 ’초월‘이라는 표현을 철두철미.... ’낮은 단계의 대상적 의미를 토대로 더 높은 단계의 대상적 의미를 향해 초월함‘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338)한다고.

“하이데거가 보다 더 근원적인 영역을 향해 자신의 해석학적 현상학적 분석을 심화시켜 나가면서 보다 더 이상적인 발생의 영역을 향해 끝없이 육박해 들어간 반면 후썰은 발생적 현상학적 분석을 심화시켜 나가면서 모든 유형의 초월론적 발생의 발생적 근원인 과거지평을 파고 들어갔던 것이다.”(562)

“후썰의 경우 현상학의 근본정신은 ‘사태 자체로’ 귀환하려는 태도이며, 하이데거 역시.....현상학의 근본정신에 대해 ‘문제가 되는 것은 비판으로서의 비판이 아니라, 사태를 들추어 내고 이해를 끌어내는 작업으로서의 비판이다’라고 천명하고 있는데,  양자 사이의 진정한 철학적 대화는 이러한 현상학의 근본정신을 회복할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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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존 R. 스토트 지음, 정옥배 옮김 / IVP / 2005년 1월
구판절판


우리는 일을 할 때보다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우리의 일을 중단할 때 가장 인간다운 인간된다. 이처럼 안식일은 "인류의 일, 일하는 6일 동안 한 일의 내용들을 상대화한다. 그것은 인류가 땅을 정복하는 일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보호하고, 일을 인간 삶의 전부이자 목적으로 만드는 왜곡을 예견하며, 인간의 인간됨은 그가 하고 있는 일과 관련해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와 나누는 복되고 거룩한 시간에 눈을 위로 들어 올릴 때에만 성취되는 것임을 알려 준다." 여기에 마르크스주의자와 기독교 간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결국 인간은 ‘호모 파베르(homo faber)가 아니라 ‘호모 아도란스(homo adorans)다.
-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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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 - 지식의 대통합 사이언스 클래식 5
에드워드 윌슨 지음, 최재천.장대익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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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윌슨의 『통섭(統攝,consilience)』은 우리가 꿈꾸던 통합 학문을 추구하는 책이다. 개미에서 인간에 이르는 모든 동물의 사회적 행위를 연구하는 <사회생물학>을 창시한 그가 고도로 세분화되어 가는 분과 학문들의 벽을 허물어 궁극적으로 인문학과 자연과학으로 통합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희귀한 낱말인 통섭(統攝)을 consilience의 번역어로 삼은 것은 윌슨이 의도한 “사물에 널리 통하는 원리로 학문의 큰 줄기를 잡고자” 선택한 제목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의 제자인 최재천교수의 옮긴이 서문부터 흥미롭다. 뇌의 진화는 ‘생존의 뇌(survival brain)’, ‘감정의 뇌(feeling brain)’, ‘사고의 뇌(thinking brain)’의 세 단계로 나뉜다고 하면서 뇌를 가진 다른 동물들과 다른 인간의 특성으로 네 번째 단계로 ‘설명의 뇌(explaining brain)’를 제안한다.

“‘설명하는 뇌’, 즉 통섭의 뇌는 인문학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학문이란 인문학으로 시작하여 인문학으로 마무리하는 것이다. 분석은 과학적인 방법론을 사용하여 할 수 있지만 통섭은 결국 언어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과 글을 갖고 있지 않은 동물들도 발견과 분석을 할 수 있다. 다만 그들에게는 그들의 발견을 꿸 실이 없을 뿐이다. 과학이 모든 학문을 통합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윌슨이 생각하는 과학은 다분히 인문학적 과학이다.”(19)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이 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자유 의지의 몸부림과 다시 신에게로 돌아가려는 운명적인 믿음 사이에서 벌어지는 서사시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세계를 올바로 인식하고 그 속의 나 자신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진정 아름다운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꿰뚫는 보편적인 진리를 찾아가는 노력 즉 통섭의 노력, 역시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22)

윌슨은 생물학자답지 않게 글 솜씨가 뛰어나 그의 책은 읽기가 좋다. 자연과학자도 논문을 쓸려면 인문학적 기반이 있어야 한다. 극단적으로 세분화되어 가는 현대의 분과학문 경향에 통합적 안목을 일깨우게 만드는 책이다. 분석과 종합은 서로 긴밀하게 주고받으며 숙성시켜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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