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번 꽃이 피고 꾀꼴새가 우는 날이거나 국화가 피는 중양절에 일대의 시인 . 묵객. 금우琴友 .가옹歌翁이 이곳 유괴정사에 모여 거문고를 뜯고 피리를 불거나, 시를 짓고 글씨를 썼다. " - 『청유첩, 마성린』
나는 아무래도 저 시절에 태어났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리보니 그 시절 여자로 태어났으면, 어쩌면 말짱 헛것이지만 말이다.
어제는 찔레꽃 향기에 취해서 저도 모르게 꼬꾸라졌다는 한량의 이야기를 들으며, 찔레꽃대 가만히 끊어먹었던 기억이, 달달하고 알알한 맛이 되살아나 혼자서 벌쭉 웃었다. 누가 보면 필시 미쳤다고 할 것이고, 옳다구나! 이때다 싶어 백차를 불러, 저것을 좀 가두시오, 이 봄이 갈 때 까지, 하겠지만, 여튼, 그렇게 좋을까? 나 자신 어리석을 만큼 무엇이든 피어난다는 말이 그리 좋고, 또 알록달록하고 푸른 것들만 보면 이것 저것 뜯어 허발하고 먹어대니 참 무안한 일이다.
나는 그런 생명이 참 좋다.
언제 추웠더냐, 언제 열매 떨어졌더냐, 언제 꽃몽우리 졌더냐, 하면서 겁나게 들고 일어나는 그런 생명이 그지없이 기특하다. 참말로 새싹 돋는 화분 앞에서도 '살아줘서 참 거시기하게 고맙다.' 하며 엉엉 울었더라. 그러면서 또 내 너를 위해 시 한 수 지어주마,하고는 막상 그럴 재주가 없어 어정쩡하게 우물우물 하다가 꼭 화분이 눈 지릅뜨고 기다리는 것만 같아, 에라! 모르겠다 싶어 '봄날은 간다' 한 소절을 읊어주고 돌아섰다.
" 눈을 감으면 문득 그리운 날의 기억 아직까지도 마음이 저려오는 건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아마도 "
돌아서는 내 뒤통수에 대고, 뭐 저런 물건이 있어,라고 화분이 한 마디 쏘아붙였겠지만, 모른 척 또 웃는다. 봄날은 오면서 또 그리 가지만, 그래, 그렇게 뭐든 살아야지, 세상에 나왔으면 그 격에 맞춰 뭐든 살아야지,하며 마지막 말을 흘린다. 허, 참, 말은 말이지만 내가 들어도 미친년 널뛰는 소리같다. 듣는 이가 화분이라 다행이다 싶다.
그나저나 시방 한 말이 참말인가? 진심인가? 언제나 노래처럼, 꿈처럼, 주문처럼, 기필코 꽃 그늘 아래서 죽어번지리라, 아쌀하게 막 피고 번지고 날리고 하는 잘생긴 꽃나무 아래서 나는 오필리어처럼 화환 쓰고 아주 누워번지리라 했는데, 이렇게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고 있다. 뭐든, 살아달라니, 저는 기를 쓰고 죽어번지리라 말하면서, 뭐든 살아달라니. 내 마음 하나, 내 입 하나 펄럭이는 것을 단속하지 못하는 나는, 이 봄이 어김없이 겁난다.
나는 뭐랄까 항시 그랬다. 태어나는 것은 기뻐서 안쓰럽고, 죽어가는 것은 슬프지만 걱정없고.
뭣 땀시 그런 심보를 갖었냐고 묻는다면, 아이 해브 노 아이디어다.
그저 나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은 이미 지상의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단디 믿었던 것 같다.
그럼 시방 네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수작이야고 묻는다면, 네버다. 그렇게까지 화끈하게 미쳤겠는가. 그저 한 번이라도 아름답고 싶었다, 온전한 생명이고 싶었다, 까지다.
아! 봄이다.
책은 무신 책. 글은 무신 글. 이런 계절에는 까닭없이 걷고 내남없이 노래하면 그만인것을.
팔각 성냥통 안에 불 붙은 성냥 개비 하나를 던지 듯, 봄바람이 이 가지 저 가지 불을 놓으니, 꽃불이 따로 있을까, 꽃불에 들러붙은 혼불은 또 얼마나 많을까. 산소에 피어 있던 꽃 나무 아래서, 나는 그렇게 발목을 자르고 싶었다. 설레서 초라하고 쓸쓸한 이 마음을 주저 앉히고 싶은 봄이다.
"밤은 이미 깊었고 우리 이야기는 이게 이생에서의 영이별이라는 결론으로 밀려갔다. 금홍이는 은수저로 소반전을 딱딱 치면서 내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구슬픈 창가를 불렀다.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 그늘진 심정에 불질러버려라 운운.' " - 『봉별기逢別記,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