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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자본 발전사전 - 자본주의의 세계화 흐름을 뒤집는 19가지 개념
볼프강 작스 외 지음, 이희재 옮김 / 아카이브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리뷰를 작성하기 위해 제목을 고민하다가, 언젠가 홍세화선생님께서 술자리에서 흘렸던 말씀이 떠올랐다. "이성으로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서 낙관할 수 있다" 아마 그즈음 나는 이성도 아닌 감성으로 세상을 비관하고, 주위에 침을 뱉고, 속으로 악을 쓰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쪽팔리고 한심하지만, 공부도 사유도 그 끝을 가보지 못한 나는 어디에도 쓸모없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여하간, 그 시절 내 최대 낙관은 어서 빨리 종말로 가세, 정도 였다.
그리 긴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지만, 다시 이 책<反 자본발전사전>을 읽으며 그 때의 어리석음을 복기했던 것은 내가 얼마나 치열하게 공부하지 않는 인간이었으며 더 나아가 여전히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것을 주장할 때, 혹은 내 신념이 무엇이다,라고 말할 때 그것을 설명하는 방식에는 문제가 없는지, 혹은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발화했던 부분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생활우파에 속했던 것은 아닌지 점검했어야 했는데 늘 나는 게을렀다. 심지어 비관적이었고.
책은 19가지의 개념으로 나뉘어져 있다. 개념 하나하나가 내게는 매우 유용했고, 어떤 호소는 애틋했다. 책의 첫 장은 [발전, 두 개로 나뉜 세계]라는 개념으로 글을 풀고 있는데, 그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말이 가슴을 친다.
"문명의 수준을 생산의 수준과 동일시하고 하나로 융합된 것이 발전이다. 트루먼의 연설 이래로 세계 20억 인구는 저발전인이 되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온갖 다양성을 잃어버리고 남들의 현실로 자기를 비추는 뒤집힌 거울로 일그러졌다."
우리 사회도 70년대 이후 경제적 가치는 모든 사회적 존재의 형식이 지닌 가치들을 폄하하거나 부끄러워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경제적 가치를 실현할 수 없었던 존재들을 무기력한 개인으로 몰아세우곤 했다. 그 결과물에 대해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발전이라는 논리앞에서 무차별하게 얻어맞은 것들을 떠올리면 치근이 욱씬거린다. 물론, 여전히 상황은 진행 중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두들겨 맞는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저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라는 말로 스스로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죄인이기에, 우리 모두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 것이 그저 나만의 곡해일 수도 있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발전과 경제적 가치라는 헛것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두들겨 맞아야만 우리 모두 죄인이었다는 고백이 살아서 작동할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쉽게 그리고 자주 죄인임을 고백하기만 했던 나를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하다.
세 번째 개념으로 소개된 [평등, 발전이 약속하는 먼 미래]를 좀 더 들여다 보자.
"빈곤층의 가난은 부유층의 풍요를 만들고, 빈곤층의 굴욕은 부유층의 자부심을 낳고, 빈곤층의 의존성은 부유층의 자립성을 낳는다. 따라잡기를 통한 평등은 현실의 불평등을 조직하고 합리화하는 신화에 불과하다."
평등과 관련해 소개된 레인즈버러의 정의는 이렇다. "나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못사는 사람도 가장 잘 사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살아야 할 삶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레인즈버러의 발언은 사람은 살아야 할 삶이 있다는 똑같은 실존적 과제에 직면한 존재라서 평등하다는 것이다. 즉 다른 개념들이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따라서 공동체의 재화가 분배되는 과정에 있어 똑같이 살아야 할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공동체가 어떻게 이해하고 분배하느냐에 따라 공동체에 속한 각 개인의 삶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이 모든 것들을 균일하게 배분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더 나아가 불평등의 문제 특히 빈곤의 문제는 위의 인용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것을 발전이라는 신화에 묻어가는 형태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사회적 상상력을 동원해 빈곤이 아닌 과잉의 문화를 바꾸자,라는 지점에 방점을 찍는 것이 훨씬 빠른 그리고 효과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떤 가치관을 들이밀어야 가능해지는 것인지는 지금부터 끊임없이 고민하고 공부해야 할 대목이겠다.
네 번째 개념으로 [도움, 세련된 간섭]편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구원에 미친 사람들 때문에 살아가는 데 숨이 막힌다. 모두가 모두의 삶을 고치겠다고 나선다. 세상의 길거리와 병원에는 개혁가가 흘러넘친다. 사회는 구원자들이 우글거리는 지옥이 되었다."
봉사자들의 자기위안과 자기과시를 몽땅 빼고 이야기하자고 하면 할 말이 없다고 했던 것 같다. 타인의 뱃속까지 검열하기에는 늘 피곤했다.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고 도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그들을 기꺼이 링크해줬다.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지만 일단 사람부터 살리고 보자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내 입장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무엇인가에 쫓기듯 행동하다 보니 중요한 것을 놓쳤다. 그것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서있는 지점, 즉 기만적인 사회적 조건이었다. 어쩌면 나는 내심 그것들을 긍정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착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모든 도움이 자구를 위한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이것 역시 발전이라는 개념안에 갇혀있다면 그저 세련된 형태의 간섭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것이 한 개인의 문제이건 사회의 문제이건 발전이라는 것을 미리 염두해 둔다면 이미 도움이라는 것을 불신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니 이 부분만큼은 특별히 명민한 두뇌와 뜨거운 가슴을 소유한 그대들의 전복적 상상력이 필요한 대목이겠다. 나는 정녕 모르겠으니.
책에 소개된 자본주의의 세계화 흐름을 뒤집는 19개의 개념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전부 소개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지만 그것은 이 책을 참으로 욕보이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공부도 짧고 의지도 박약하고 글도 만신창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꼭 하고 싶은 말은 읽어보시라는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익히 알고 있거나 사유한 것들일 수도 있으나, 이제 막 움트는 청춘들에게는 한 번쯤 권하고 싶은 책이다. 청춘이 아니더라도 오늘과 다른 내일을 꿈꾸는 그대들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마지막으로 열 여섯번째 개념으로 소개된 [사회주의, 오해와 오류의 역사]라는 편에 실린 한 구절을 적는다.
"사회주의 전통은 자본주의에 갇힌 상상력을 벗어나게 해주었으나 점차 수많은 개념상의 어려움과 의미 전달의 어려움, 역사적 하중을 견디지 못하는 상투어가 되었다."
이 문장을 옮기는 것은 자본주의적 발전을 줄기차게 공격했던 사회주의가 어찌 몰락할 수 밖에 없었는지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그것의 해답은 자본주의적 특징이었던 사회적 환원주의의 덫에 갇힐 수 밖에 없었던 사회주의자들의 한계, 즉 하나의 사회적 패권을 또 하나의 사회적 패권으로 바꾸는 수준에 머물렀던 개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또 하나는 사회적 다양성이라는 주제를 제대로 짚어내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서구식 자본주의에 맞서 싸울 사람들이나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상상하는 사람들이 간과해서는 안될 지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