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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 - Late Autum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1.
<만추>를 보면서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기억해냈다. 시간의 단절이 가져올 수 있는 대책없는 그리고 지독한 어긋남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만추>는 <8월의 크리스마스>보다 더 길고 서늘한 꿈이 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
2.
[날 원해요]라고 묻는 애나는 예뻤다. 그녀가 너무 예뻐서 슬펐다는 유행가 가사처럼 자그마하고 동그란 입술이 발화할 때, 그녀의 입술과 그녀의 저음마저 너무 고와서 서늘했다. 물론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고 그녀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아무렇지도 않게 해결되거나 배설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정도는 화면안에 있는 사람도 화면밖에 있는 사람도 짐작할 수 있다. 누군가와 쉽게 사랑할 수 있다고 과거의 어느 기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도 아니고, 설령 해방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자유를 담보해 주는 것도 아니다. 해방이 자유로 이어질 것이라는 착각은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과 더불어 자웅을 겨룰 만큼 미련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언제나 그 다음이 문제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질 무엇이 그녀 혹은 그를 다시 수감할 수도 있다. 그것이 속세다.
3.
기다리겠다고 약속했던 사람이 있었다. 물론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그 약속을 신뢰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둘은 그 말이 미래의 어느 시간 한 토막을 가져온 것 처럼 행동했다. 최소한의 예의였고 통과의례는 필요했었다. 그것을 미련하고 더 나아가 가식적인 행동이라고 평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감정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사랑은, 적어도 남녀간의 사랑은, 잉여를 연료로 삼는다. 세상에 티끌만큼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그저 언젠가 썩어버릴 자기애의 잉여.
4.
애나의 손목에 채워진 시계는 쉽게 뺄 수 있을 정도로 헐겁고, 손목이 신경쓰일 정도로 무거워보였다. 애나에게 있어 어쩌면 시작일 지도 모르고, 어쩌면 종결되었을 지도 모르는 훈과의 사랑, 그것이 사랑이라면 애나에 손목에 올려진 금속시계는 무엇보다 그것을 잘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5.
영화 <만추>의 마지막 장면과 영화를 감싸고 있는 안개는 전체적인 영화의 완성도를 생각하지 않게 한다. 함부로 위무하지 않는, 불필요하게 적나라하지 않은 태도, 그것이 <만추>라는 영화가 갖는 미덕이다. 또한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과 사랑이 끝난 사람들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