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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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서 국경과 민족을 논하는 것이 의미없는 시대가 되었다. <디아스포라 문학>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만큼 문학의 세계는 이미 탈국경화, 탈민족화가 진행되고 있다. 문학을 순수하고 명확하게 문학 그 자체로만 받아들이고 있는 추세인 것이다. 문학을 문학 자체로만 바라보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차원에서 그리 나쁜 현상은 아닐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최근 한국문단에 대한 일본소설과 기타 해외문학의 도전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반응할 필요는 없다고 하겠다. 특히 쓰나미처럼 한국문단을 뒤덮으면서 하나의 존(Zone)을 형성할 정도로 강력한 일본문학의 침투는 문학매니아들에게 다양한 기쁨과 즐거움을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일본소설의 약진이 비단 어제와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최근 들어 그 양과 질에 있어 심히 압도적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별다르게 큰 격변과 요동을 겪지 않았던 일본 현대사의 특질은 그들의 문학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역사적으로 무거운 담론에 구속될 이유가 없으니 작가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밖에 없으며, 그러한 자유의 만개에서 가지각색의 다양한 상상력이 발휘되는 것이다. 이에 비해 6·25전쟁, 남북분단, 독재권력 등 역사적으로 암울한 시대를 겪은 한국의 현대사는 작가들에게 무거운 작가의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이같은 외적 조건이 어느 정도 해결되고 젊은 세대의 생활상과 가치관이 크게 변화한 오늘날까지 한국 작가들은 거대담론이나 후일담 또는 공격적 페미니즘 소설을 들고 나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재의 획일성은 한국소설이 지나치게 무겁고 서사가 약하며 상상력이 빈곤하다는 비판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하고 있으며 소위 <위기>라고 불리는 한국문단의 현주소의 동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 리얼리즘과 판타지은 매우 중요한 두 개의 줄기라 할 수 있다. 한국소설은 사실성은 훌륭한 데 비해 환상이 없다. 상상력이 부재다. 한국소설에는 공상과학(SF), 추리소설, 공포소설, 판타지가 없다. 뛰어난 상상력과 소재의 선정, 감각적인 묘사와 섬세한 필체로 중무장한, 무엇보다 무겁지 않아 독자에게 부담감을 주지 않는 일본소설의 편안한 매력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부각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리라. 

  이러한 매력적인 일본문학의 현주소에서 매우 강렬해 보이는 여성작가의 존재가 있으니 그녀가 바로 온다 리쿠다. 요 몇 년 사이 온다 리쿠의 작품은 쓰나미의 핵을 연상시킬 정도로 엄청난 작품이 출간되고 있다. 그녀의 수많은 출간작 중, 추리소설 『유지니아』와 단편소설집 『도서실의 바다』를 통해 이미 온다이즘을 경험한 내게, 그녀의 유명작 『밤의 피크닉』은 '역시 온다야!'라는 감탄사를 발산할 만큼 지극히 인상적이었다.  

   『밤의 피크닉』은 청소년 성장소설이다. 보행제라는 걷기축제에 함께 참여하는 몇몇 고등학생들의 하루동안의 이야기를 발군의 스토리 텔링으로 멋지게 창조해냈다. 사람, 사랑, 우정, 용서, 그리움, 두근거림 등. 인생의 내면적 주제들이 등장인물들의 과거와 현재에 부드럽게 녹아들고 있다. 

  역시나 온다답게 시점의 다변화가 인상적이다. 소설의 시점은 수시로 변화한다. 소설속 중심화자인 니시와키 도오루와 고다 다카코의 시점이 끊임없이 교차한다. 두 인물의 화자시점과 시간시점이 자유롭게 바뀌고 또 바뀌면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으며, 둘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어떻게보면 세상 어느 누구보다 가까울 수 있는 존재지만, 마음 문을 열지 못하고 과거의 상처와 충격을 극복하지 못한 채 도오루는 다카코를 무시하며 증오한다. 이를 모를리 없는 다카코도 도오루의 시선을 의식한 채 긴장감을 갖고 거리를 두고 있다. 

  사카키 안나의 존재가 소설속에서 무겁고도 특별나다. 다카코와 미와코와 안나는 고등학교 시절 가장 절친한 삼총사다. 미국유학으로 인하여 고등학교 마지막 보행제를 함께 하지 못한 안나. 비록 소설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인 '보행제'의 현재적 화자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 어떤 등장인물보다 안나의 존재감은 무겁기만 하다. 도오루와 다카코의 태생적 원인에서 오는 증오와 원망이 안나의 우정과 지혜를 통하여 해결되기 때문이다. 소설의 마지막, 안나의 남동생이 보행제의 종지부를 향해 걸어오는 무리에게 달려가는 모습은 해피엔딩의 전형으로 비춰지지만, 전혀 식상하지 않고 지극히 강렬하며 인상적이다.
  모두 밤에 걷는다. 단지 그것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특별한 걸까.   <p41>
 

  <그리움>이라는 것은 멋있는 것이다. 사랑했기때문에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나친 그리움은 문제가 되지만, 현재를 살아가면서 종종 아름다운 과거로의 회귀를 그리며 깊은 사색에 잠기는 것은 현재를 더욱 풍성하게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과거는 영원히 정지해 있고 현재는 화살같이 날아가는 속성이 있기에 영원히 정지해 있는 과거의 한 장면을 화살로 삼아 현재의 활시위에 잠시 올려놓을 수 있는 여유는 인간이라는 종족만이 가능한 특권이다. 그것이 사랑이든, 실연이든, 아픈 상처든. 그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잊혀진다는 것은 우울하면서도 무서운 것이다. 잊혀진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강렬히 사랑했을지라도 머나먼 시공간의 한계에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 될 수 밖에 없다. 은하계를 몇 개나 뛰어넘은 거리에 있을지라도, 수 천 년의 시간이 지난다 할지라도 잊혀지지 않는 존재. 그런 존재가 되고픈 마음은 나만의 소망일까?
  그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가까이 없으면 , 잊혀지는구나. 잊혀진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p42>
 

  우리가 <사랑>을 한다고 말할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사랑한다는 것일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일까? <사랑>을 사랑하는 것일까? 다시말해서 사랑의 본질적 대상이 내가 사랑하고 있는 그 <사람>인지, 아니면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상태>인지에 대한 깊은 사유가 책을 읽은 후 머리속에서 일렁인다. 

  <청춘>과 <걷기>. 단지 두가지 소재만을 가지고 단 하루동안의 시간적 배경 안에서 발군의 스토리 텔링으로 녹여낸 온다 리쿠의 작가적 기술력은 심히 압도될 만한 내공이라 상찬하지 않을 수 없다. 별 것도 아닌 소소한 것에 활력을 불어넣어 지극히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내며 전복적이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그녀의 필치에 나는 심히 매료되었다. 만 하루동안 그저 걷기만 하는 것을 소재로 삼은 이 소설이 이리 큰 가슴 뭉클함과 감동을 선사할 줄이야. 온다 리쿠로 인해 또 한 번 가슴을 적신다.
 
 

  잡음 역시 너를 만드는 거야. 잡음은 시끄럽지만 역시 들어두어야 할 때가 있는 거야. 네게는 소음으로밖에 들리지 않겠지만, 이 잡음이 들리는 건 지금뿐이니까 나중에 테이프를 되감아 들으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들리지 않아. 너, 언젠가 분명히 그때 들어두었더라면 좋았을걸 하고 후회할 날이 올 거라 생각해.
<p155,156>


  시간의 감각이라는 것은 정말로 이상하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순간인데, 당시에는 이렇게도 길다. 1미터 걷는 것만으로도 울고 싶어지는데, 그렇게 긴 거리의 이동이 전부 이어져 있어, 같은 일 분 일 초의 연속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어느 하루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농밀하며 눈 깜짝할 사이였던 이번 한 해며, 불과 얼마 전 입학한 것 같은 고교생활이며, 어쩌면 앞으로의 일생 역시 그런 '믿을 수 없는'것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아마 몇 년쯤 흐른 뒤에도 역시 같은 말을 중얼거릴 것이다.
  어째서 뒤돌아보았을 때는 순간인 걸까. 그 세월이 정말로 같은 일 분 일 초마다 전부 연속해 있다는 걸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하고.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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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행진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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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라는 것은 좋은 것이다. 유머는 삶을 부드럽게 하고 소통을 원활하게 하며 세상을 여유있고 아름답게 하는 힘이 있다. 딱딱하고 건조한 것보다는, 적절히 부드럽고 적당히 촉촉한 것을 지향하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 특성일 것이다. 최근 TV 개그프로그램이 많은 시청자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으며, 더욱이 유머있는 남자가 미인들로부터 인기가 많다는 연애의 불문율은 <유머>가 얼마나 중요한 삶의 요소임을 대변한다. 

  개인적으로 <미스테리>를 좋아한다. 시종일관 알 수 없는 이야기의 흐름과 전복적이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묘미, 예상치 않았는 데 직면하는 반전의 카타르시스는 내가 미스테리물을 좋아하는 이유들이다. 영화든 드라마든 소설이든 흥미진진한 미스테리 속으로 빠져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는 내 자신을 목도할 때면 왠지 모를 웃음을 짓곤 한다. 영화감독이나 드라마PD나 소설가와의 두뇌싸움은 언제나 흥미진진한 스릴과 긴장감을 주기에 미스테리물은 내가 접해야 할 1순위 테마가 되어 있다. 

  오쿠다 히데오의 최근 출간작 『한밤중에 행진』은 앞서 언급한 <유머>와 <미스테리>가 함께 공존하는 흥미있는 소설이다. 10억 엔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다양한 캐릭터들이 코믹하게 벌이는 흥미진진한 스토리에 시간의 속도를 잊은채 읽을 수 있었다.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다분히 특이하며 코믹하다. 이벤트 회사를 운영하는 젊은 사장 <요코야마 겐지>는 여자를 꼬시는 일과 공갈하며 협박하는 일이 주취미이며 인생의 한방을 노리는 대박인생의 표상이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일본 굴지의 대기업에 입사한 <미타 소이치로>는 암기능력을 포함한 두뇌능력은 천재성을 발휘하지만 형편없는 업무능력과 굼뜬 동작으로 언제나 문제가 된다. 빼어난 미모를 지닌 <구로가와 치에>는 일반적인 여성의 삶을 거부한 채 강한 자신감과 당찬 삶을 표방한다. 마지막으로 <후루야 데쓰나카>는 인텔리 야쿠자로서 말보다 행동이 먼저 나가는 와일드한 조폭이다. 4명의 인물들이 얽히고 설키면서 코믹한 미스테리의 서사가 완성된다. 

  젊은 시절에 꿈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다. 이야기를 전개해가는 중요 등장인물인 3인방(요코야마 겐지, 미타 소이치로, 구로가와 치에)은 모두 스물 다섯의 나이다. 인생에 대한 뚜렷한 목적 없이 그들은 젊은 비주류 인생의 표상으로 그려진다. 설계도 없이 대박을 바라는 젊음, 명문 대기업에 입사했지만 아무런 성취와 만족감을 얻지 못하는 지리한 셀러리맨의 젊음, 아버지에 대한 극도의 증오감으로 오직 복수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젊음 등이 인생에서 가장 빠른 속도감을 지닌 20대의 삶을 어둡게 차지하고 있다. 그러한 어두운 20대의 공감적 내면상이 그들을 최대한 빠르고 단단하게 뭉칠 수 있는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돈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지나친 강박관념이 생생하게 나타난다. 돈으로 시작해서 돈으로 끝나는 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돈에 민감하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가 돈에 대해 해탈할 수 있냐마는, 그들이 갖고자 하는 <돈>의 성질은 부정직, 불성실, 비상식 등의 부정적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비록 코믹하고 가벼운 터치로 이야기를 그렸지만 이야기의 중심에 존재하는 비현실적이고 과대망상적인 맘모니즘에 대한 갈구함은 무겁고 씁쓸하기만 하다. 

  소설의 플롯은 마치 엉킨 실타래가 풀리는 것처럼 나아가다가 소소한 반전의 반전을 거듭한다. 왠지 모르게 마지막에 있을 한 방의 큰 반전을 기대하지만 작가는 안전한 정공법을 택해 해피엔딩의 결말로 마무리 짓는다. 개인적으로 뒷부분의 이야기를 보다 더 꼬아서 예상치 못한 결말을 이끌어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 『와일드 씽』 처럼 마지막 부분을 보다 꼬고 뒤틀고 엉키게 했으면 더욱 인상적인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머리속에서 일렁인다.  

  아쉬움은 각설하고, 충분히 유쾌하고 충분히 통쾌하며 충분히 상쾌한 소설임에는 틀림없다. 이 소설은 인간과 삶에 대한 통찰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 그 어떤 철학적 메시지나 교훈을 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충분히 재미있다. 익살스럽다. 읽는 데 지루함이나 부담감이 없다. 스트레스 풀기에는 그만이다. 영화 『트랜스포머』를 보면서 그 어떤 무게감이나 깊이를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한밤중에 행진』은 그런 소설이다. 

  오쿠다 히데오의 다른 소설에도 큰 관심이 간다. 『공중그네』, 『명장선거』, 『오! 수다』 등. 그의 유명한 작품들부터 먼저 만나봐야겠다. 요즘 들어 더욱 강하게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세상은 넓고 읽을 책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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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0-01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

다윗 2007-10-01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체셔고양2님. 닉네임이 너무 신선한걸요? ^)^
 
당신의 인생을 역전시켜라 - 최윤희가 제안하는 이 시대의 성공학
최윤희 지음 / 여성신문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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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독서습관이 있다. 내가 구입한 책보다 남에게 선물받은 책을 먼저 읽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남이 나에게 선물을 하는 의도에는 여러 특질이 있을 것이다. 상대방의 독서기호와 책의 내용과 메세지를 고려하여 선물하는 것이 대체로 상식으로 통한다. 하지만 여기에 중요한 것 하나를 추가하자면 바로 <현재성>이라는 것이다. 책을 건네는 이가 나에게 건네주는 시간의 현재성은 결코 묵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상대방의 손을 떠나 내 손에 책이 들어온 시간과, 그 책이 내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의 갭이 멀면 멀수록 마음의 양식을 주고받는 행위에 대한 현재성이라는 시간가치가 퇴색될 수 있다는 우려때문이다. 내가 내 자신이 아닌 다른 이로부터 받은 책을 나름대로 소중히 여기며 빨리 읽기를 원칙으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뜻하지 않은 책이 손에 들어왔다. 지인에게 선물받은 것도 아니고, 이벤트로 당첨된 도서도 아니다. 이벤트에 당첨되었던 『바람이 흙이 가르쳐주네』를 흥미있게 읽은 후 쓴 서평이 인터파크 이 주의 우수 독자리뷰에 선정되면서 해당 출판사인 여성신문사로부터 감사의 의미로 『당신의 인생을 역전시켜라』를 받은 것이다. 여성신문사에서는 동봉된 편지를 통해 이 책이 자사의 스테디셀러임을 피력한 뒤 은근히 빨리 읽기를 독려하는 뉘앙스(?)를 풍겨주었다. 그리하여 <Right Now 정신>을 발휘하여 읽어야 할 수많은 책들을 뒤로 미룬채 한달음에 달려 완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신의 인생을 역전시켜라』는 [절망하기보다 오히려 희망이라는 보석을 '캐'낸 사람들]이라는 책의 앞표지 문구가 말해주듯 절망 가운데서 좌절하지 않고 용기와 열정으로 새로운 삶을 영위했던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저자 최윤희는 자신의 고백을 전체 분량의 2할정도 할애하고 있으며, 나머지 8할은 지인들의 다양한 삶의 편린들을 소개하고 있다.  

  나는 여성들의 힘을 믿는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 과거 여성들이 가진 달란트는 유교가 만들어낸 습속과 남성우월주의의 영향 아래 잘 발휘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작금에 이르러서는 여성들의 활발한 사회참여가 당연한 것으로 장려되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남성보다 뛰어난 것이 입증된 여성들의 논리&언어 능력과 섬세한 감성이 리드미컬하게 활동력을 갖고 우리사회에 침투할 때에 더욱 발전되고 행복한 사회가 될 것은 자명하다.  

  저자 자신을 위시하여 소개되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역경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작고 크게 승리한 삶을 살았다. 이혼, 사별, 남편의 사업 부도, 건강의 문제 등 생각지도 않게 쓰나미처럼 덮쳐버린 인생의 순간에서 그녀들은 충분히 <강>했고 훌륭히 <승리>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완벽하게 소외계층을 벗어낫다고 할 수 없는 여성의 입장을 고려한다면, 그녀들의 인생 역전담을 박수와 경외로 상찬하는 데 전혀 인색할 필요가 없다 하겠다.  

  한 가지 지적하고픈 부분이 있다. 저자는 개구장스런 문체로 활력있고 열정적으로 인생을 역전시킨 여성들의 삶을 대변하고 있다. 저자가 대변하는 대부분의 내용이 좋았지만 한 가지 거슬리는 저자의 관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가 남성을 바라보는 안목에서 다분히 강성적 페미니즘을 목도했다. 여성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상찬하지만 남성에 대해서는 비아냥거리는 표현의 문구가 적잖다. 57페이지에 실린 저자의 주장을 보자.

  사회적으로도 여성의 힘은 절대적이다.
  오래 전 일이지만, 씨랜드 사건에서도 이장덕이라는 여성이 없었다면 아마도 진실은 밝혀지지 않은 채 흐지부지되었을지 모른다. 신창원 사건에서도 역시 최은이라는 여성이 없었다면 그렇게 신속하게 해결될 수 없었을지 모른다.
  지금 우리나라를 한번 보자.
  남자들에게 맡겨놓은 우리나라의 모습은 참담 그 자체다. 입으로는 개혁입네 사회 정의입네 떠들어대면서 과연 그들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는가.   <책 내용중, p57>

  과거 몇몇 사건에서 드러난 여성의 활약이 사회적으로 여성의 절대적 힘을 대변하는 논거로 제시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이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최근 불거진 신정아씨 사건을 논거로 '역시나 여자들은 문제'라고 주장하는 것과 무엇과 다른 것인가? 더욱이 작금의 대한민국 사정을 거론하며 <참담>하다고 평하는 저자의 주장에는 강한 거부감이 발생한다.  

  나는 지금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절대로 참담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 세계 어느나라와 비교해도 꿀릴 것이 없는 살기 좋은 나라라고 생각한다. 식민지배와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세계 최빈국이 불과 몇 십 년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기까지 희생하며 승리한 남자들의 존재감은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더욱이 GDP 2만불을 넘어 3~4만불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사회적 일렁거림을 <참담>하다고 표현하며 남자의 탓으로 돌리는 저자의 안목은 좌정관천이요, 정저지와의 극치를 보여준다. 

  19세기 여성의 인권회복을 기치로 등장한 페미니즘은 본래 좋은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들어 페미니즘의 색깔이 변색되고 성향이 무서워지고 있다. 어느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의 존재감을 부정하며 여성의 절대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남성과 여성이 본래 동등하며 평등하다는 인류 보편의 이상과 상식을 넘어선, 여성우월주의라는 또다른 역발상적 신조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본질과 비본질의 우선순위가 뒤바뀐 이러한 행태에는 절대로 동의할 수가 없다. 간간이 책에서 남성을 바라보는 저자의 경향을 목도하면 다분히 여성우월적이며 여성주권적인 냄새를 강하게 느낀다. 절대 공감할 수 없다는 얘기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라는 속담에 저자는 심히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듯 하다. 세 번에 걸쳐 인용하면서 암탉이 울어야 집안이 잘된다는 의미로 수정하여 인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윗속담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시간대에서 결코 맞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저자가 위의 속담을 반박하는 논거가 수준미달이다. 암탉이 우느냐 울지 않느냐의 문제는 비본질이다. 본질은 <어떻게 우느냐>는 것이다. 나는 저자보다는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내 앎과 이상과 가치관의 기준에서 확신하는 나름의 진리가 하나 있다. 여자의 <지혜>는 자신을, 가정을, 국가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다는 것을. 우냐 안우냐의 문제가 아닌 어떻게 우느냐의 문제. 그것이 본질이다. 

  내가 지적한 저자의 페미니즘적 성향에 대한 반박이 책 전체의 존재감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저자의 남성관에 대해 일부분만 보고 성급하게 일반화하여 반론하는 것일 수도 있을게다. 책 전체의 내용이 주는 풍성함의 색깔은 충분히 역동적이며, 충분히 유머스럽고, 충분히 힘이 있다. 앞서 언급한대로 인생의 IMF에서 열정과 도전을 갖고 희망찬 삶을 살았던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는 오롯하게 감동적이며 경외스럽다.  

  여성은 위대한 존재다. 침묵적이며 수동적이기보다 자신과 가정과 사회에서 적극적이며 역동적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을 나는 지지한다. 단! 또다른 위대한 존재인 <남성>을 존중하며 함께 나아갈 때, 라는 전제 앞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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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4일 거리
요시다 슈이치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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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이라 할 수 있는 아쿠타가와상 수상경력의 요시다 슈이치의 『7월 24일 거리』를 읽었다. 본래 이 소설의 존재도 모르고 있던 터에 『한밤중에 행진』을 구입하면서 함께 동봉된 이벤트도서로 만나게 된 것이다. 200페이지가 채 안되는 자그만 양장본의 이 연애소설은 꽤 섬세한 여인상의 묘사를 읽는 즐거움에 한달음의 속도로 읽을 수 있었다. 

  소설의 도입부터 주인공 혼다의 감상적 성격은 여실히 드러난다. 가본 적도 없는 포르투칼의 리스본이란 도시의 지형을 자신이 살고 있는 자그만 지방도시에 대입한다. 예컨데 버스를 타는 '마루야마 신사 앞'이란 정거장 이름을 '제로니모스 수도원 앞'으로 부르며, 재개발 덕분에 항구에 조성된 '물가 공원'은 '코메르시오 광장'으로 부르는 식으로 말이다. 일본의 소박한 지방 도시를 리스본 시가지와 완벽하게 겹쳐서 생각하는 혼다의 공상이 소설 전체의 연애의 맥을 암시하는 것처럼 인상적이다. 

  주인공 혼다는 남동생 코지의 여자친구인 메구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렸을 적부터 학교와 동네에서 최고의 얼짱이며 인기가 높은 남동생의 비쥬얼과 비교하여 메구미의 별볼일 없는 평범함에 경제적 손해가 계산되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코지의 아이를 갖게된 메구미 앞에서 냉담하기 그지 없는 혼다는 메구미의 솔직한 연애관을 듣게된다. 인기 많은 남자가 좋다는 것부터 <실수>하고 싶지 않은 의지에 이르기까지 메구미의 연애관은 혼다에게 웃음과 냉담함을 동시에 안겨준다. 

  정작 흥미있는 것은 메구미의 처지와 연애관이 혼다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혼다 자신도 고등학교 시절에서부터 동경해왔던 사토시와 여러가지면에서 어울리지 않는 관계가 아닌가? 혼다 자신이 메구미를 싫어했던 그 이유 그대로의 기준에서 사토시와 자신은 어울리지 않는 힘겨운 관계인 것이다. 메구미의 존재는 마치 혼다 자신의 거울임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혼다는 메구미를 싫어하며 거부한다. 그것이 자기 자신의 모습인지도 모른채.. 

  그토록 사토시를 동경하며 갈망해왔던 혼다.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사토시의 작은 마음을 얻은 혼다는 행복하다. 하지만 사토시의 마음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서지 않는다. 메구미에게 코지를 좋아하는 것은 힘겹고 버거운 일이며 <실수>로 단정하고 훗날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얘기하는 혼다. 비슷한 처지인 자신의 상황을 인지하면서 소설의 마지막, 사토시를 향해 도쿄로 향하는 혼다의 방향성은 역설적이지만 강렬하다. 
  "그러니까 나도, 한 번쯤은 실수를 해보겠다고."
  나는 열차에 올라타면서 그렇게 말했다. 실수하지 않기 내내 웅크리고 있는 것보다, 실수를 저지르고 우는 한이 있어도 움직여보려 한다.   <책 마지막, p188>

  한 사람의 존재를 색깔로 표현할 수 있을까? 예컨데 조용하고 침묵적인 사람에게 검정, 튀기 좋아하고 독특한 이미지를 풍기는 사람에게는 빨강, 여성스럽고 현모양처의 느낌을 준다면 분홍 등으로 말이다. 사실 색깔이라는 것은 다분히 시각적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시각적인 관점에서 보고 그 느낌 안에서 시각적으로 색깔화하는 것은 무리가 없는 흥미있는 것일게다. 하지만 외연적 비쥬얼뿐만 아니라 말과 행동, 습관, 가치관을 모두 포함하여 상징적으로 색깔화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다. 인간은 <시각적>인 것으로 단정될 수 없는 훨씬 고차원적 존재감을 지닌 영장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소설 속에서의 주인공 혼다와 사색적인 경비원 남자와의 인간 색깔론은 매우 흥미롭다.  

  하늘의 별은 아름답다. 맑은 날 시골하늘에서 보는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은 아름다움을 넘어 경이롭기까지하다. 그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대한 특질을 사유해 보자. 하늘의 별은 우리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며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갈급함과 그에 따른 최소한의 신비감. 그것이 <별>이라는 존재가 갖는 <아름다움>의 성격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어느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몸부림치며 갈망한다. 하지만 정작 내 것이 되었을 경우, 즉 원하는 것을 성취했을 경우, 신비감은 줄어들고 초심은 반감된다. 이런 측면에서 어쩌면 인간의 <사랑놀이>는 <신비감놀이>와 동의어로 견주어도 무리가 아닐 듯 싶다. 신비한 것에 대한 열망과 갈증, 그리고 그것을 성취한 뒤의 변화는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유한적이며 경제적인가를 보여준다 하겠다.
  "저, 댁에게는 무슨 색깔로 보이는데요?"
  나는 그를 마주 쳐다보며 그렇게 물었다. 그의 시선이 내 머리끝에서 발끝으로 내려간다. 그러고는 그만 입을 다물어버리고 만다.
  "안 보여요?"
  나는 슬쩍 장난을 치듯 물었다. 그는 안타깝다는 듯이 "네."하고 대답한다.
  "아마, 말을 해서 그럴 거예요. 말을 나눈 사람은 색깔이 안보이는 것 같더라고요."   <책 내용중, p153>

  과연 혼다는 사토시와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소설은 사토시에 대한 혼다의 방향성만을 확인한 채 함구한다. 어쩌면 혼다의 사랑은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이미 그녀도 그것을 알고 있을터. <실수>하지 않기 위해 웅크리고 있기보다는, <실수>를 저지르고 우는 한이 있어도 한번 해보려 한다!, 라고 다짐하는 혼다의 강렬한 의지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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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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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흙이 가르쳐주네 - 네이버 인기 블로그 '풀각시 뜨락' 박효신의 녹색 일기장
박효신 지음 / 여성신문사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몇 주 전 금요일 철야기도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어머니를 승용차로 교회까지 마중나간 적이 있었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우산을 챙기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배려였다. 차를 타고 오는 길에 어머니는 포도가 드시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야밤에 무슨 포도거니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평소 포도에 대해 심히 경도된 어머니를 인식할 수 있었다. 엄마는 왜그리 포도를 좋아해?, 라고 질문했다. 어머니의 답변은 내가 얼마나 도시생활 속에서 과거의 추억을 잊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깨닫게 해주었다. "니 어미가 포도 과수원집 딸이라는 것을 몰랐더냐?" 

  그랬다. 어머니는 대전시(그 당시 대전은 광역시가 아니었음) 유성구 반석동의 과수원집 딸이었다. 외갓집은 내가 어렸을 적에 동네에서 가장 큰 과수원을 운영하는 부호였다. 여름방학이 되면 외갓집에 가서 과수원을 구경하고 포도도 먹고 시냇가에서 수영도 하고 올챙이도 잡으면서 삼촌들과 자연을 만끽하는 것이 낙이었다. 하지만 내가 중학교가 되기 전, 외가집 근처에 군사기밀건물이 들어서면서 과수원은 사라지고 마을 전체가 아랫동네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러면서 과수원과 시냇가의 추억은 내 기억 속에서 차츰 사라졌고 성인이 된 작금에 이르러서는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졌던 것이다. 정말 아름다운 추억인데 말이다.  

  『바람이 흙이 가르쳐주네』를 읽었다. 한 여성의 농사꾼일기라고 할 수 있는데, 억 대 연봉을 받는 능력있는 중년여성이 대도시 서울을 탈피하여 순수 자연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용기와 결단에 심히 놀랐다. 충청도 예산에 내려와 직접 농사를 짓고 인간냄새를 맡으며 살아가는 저자의 모습이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으며 살아야지, 라는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정작 지긋한 연세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단하는 이들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자신의 머리 속에 그리는 미래의 꿈과 현실 속에서 부딪히는 환경, 그리고 자신의 열정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대도시 서울을 한 번 쯤 떠나고픈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서울>이라는 곳은 한강의 기적을 이뤄내며 세계적인 대도시로 발돋움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수도이기도 하지만, 앞만 보고 달려온 부작용도 적잖은 공간이기도 하다. 도시인들의 시각, 청각, 미각, 촉각, 후각 등의 모든 감각은 서울이라는 경직되고 인공적인 대도시의 환경에 맞춰져 있다. 시간 또한 철저하게 비지니스 아워에 맞춰져 있어 경제적 극대화만이 추구된다. <삶>이 아닌 <비지니스 아워>를 살 때에 자연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경제적 시계만이 우리를 지배한다. 이러한 곳을 탈피하여 순수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마음, 누구나 한 번 쯤 사유했을 만한 주제리라. 

  사계절 모두 각기의 맛이 있지만 저자는 가을이라는 계절에서 많은 풍성함을 얻고 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을>이라는 책의 소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농사꾼으로서 매년 풍성한 소출을 안겨주는 가을이 좋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리라. 봄, 여름에 농사지은 것들을 대부분 가을에 거둬들이니 땀흘린 대가를 확인하는 성취감과 기쁨은 두말할 나위 없으리라.  

  나 또한 개인적으로 가을을 가장 좋아한다. 봄은 미지근해서 싫고, 여름은 더워서 싫고, 겨울은 추어서 싫다. 하지만 가을은 시원하고 아름다워서 좋다. 단풍의 계절이자, 천고마비의 계절이자, 남자의 계절이자, 고독의 계절이자, 무엇보다 독서의 계절인 가을. 사계절이 뚜렷한 대한민국에 태어나 1년의 정확한 사등분을 차지하고 있는 가을을 완벽하게 누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과 조상들께 어찌 감사할 수 없으리요! 

  저자가 서울 생활을 접고 내려올 때 다짐한 세 가지 항목이 흥미롭다. 
  더 이상 인연은 만들지 말자.
  더 이상 미워하지 말자.
  더 이상 가지려 하지 말자.
사랑, 미움, 욕심.. 인간을 인간되게, 혹은 비인간되게 하는 인간사의 가장 큰 이슈가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오랜 기간의 대도시 생활을 통해 위의 세 가지가 얼마나 자신을 번뇌케했는지 고백하고 있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수많은 인연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상처가 발생하며, 사람을 미워하면서 마음의 그릇이 작아지기 일쑤며, 채우고 채워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욕심들로 인해 정신이 얼마나 피폐해지는가? 하지만 저자는 자신이 다짐을 하게 된 원인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사랑과 미움과 욕심은 어디에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즉 공간의 문제가 아닌, 철저한 자신의 문제였음을 깨달은 것이다. <어느 곳>의 문제가 아닌, <어떤 생각>의 문제. 인간을 번뇌케 하는 것들의 상당한 분량은 바로 자기 자신에서 연유한다는 깊은 통찰을 저자는 자연 속에서 깨닫고 있다.

  우리가 대도시의 생활에 지루하고 지쳐있음을 느끼는 이유를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 너무 많은 까닭이 아닐까? <결핍>의 문제가 아닌, <지나침>의 문제가 아닐까? 필요치 않은 것의 범람과 소소한 것에까지 경제적 대가가 필수불가결한 대도시와는 달리, 꼭 필요한 것과 있어서 나쁘지 않을 것에만 노출되는 <시골>의 매력이 저자의 시공간을 그리로 옮겼을지도 모른다.

  대도시 서울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세계적인 경제도시로서 분명 살기 좋은 곳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필요치 않은 것들이 너무 많다. 그것이 사람을 지치게 한다. 또한 <경제적 극대화>가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고 있다는 점도 삶을 번뇌케 한다. 왠지 모를 원초적이고 인간적인 냄새가 그립다. 순수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땅에서 느낄 수 있는, 바람과 흙이 가르쳐주는 웅숭깊은 맛과 향기. 그것이 그립다! 
 

[인상깊은 구절]
우주의 시간표는 약속된 시간을 어기지 않는다.
예정되어 있는 시간에 싹이 나오고, 예정된 시간에 정확하게 열매를 맺는다.
요즘 나는 자연의 시간에 내맡기는 법을 배운다. 뿌리고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배운다.
아무 말이 없는 땅, 그러나 참 많은 것을 가르쳐 주는 땅...
<책 내용중,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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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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