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 버린 사람들
나렌드라 자다브 지음, 강수정 옮김 / 김영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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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 시절이다. 세계사 공부를 할 때에 소위 '밑줄 짝~'이라는 교육문구가 강조되면서 시험마다 출제되는 중요한 용어가 있었다. 바로 '카스트 제도'라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인도만이 갖고 있는 유일무이한 제도로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계급이 정해져있고 그 계급에 할당된 정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3,000년 전에 탄생한 그 제도가 21세기에 이른 작금의 시대까지 한 국가의 정신적, 이념적 체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에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생생하다. 

  카스트 제도라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을 크게 네 가지의 계급으로 나누는데 최상위 계층은 '브라만'으로 사제들이고, 군인계층 '크샤트리아'가 그 다음이며, '바이샤'라는 계층은 상인이나 평민이 속하고, 마지막으로 최하위 카스트인 '수드라'는 노예들이 속한다는 계급 제도다. 더욱이 아웃카스트라고 해서 카스트 안에 들지 못하는 계층이 있는데 '불가촉천민'으로 불리는 달리트가 그들이다. 현재 인도에 1억 7천만명의 불가촉천민이 있다고 한다. '불가촉천민'의 개념은 접촉을 하지 말아야 하는 천한 계층이라는 의미라고 하니 명칭만 들어도 그들의 일상을 대략 유추해 볼 수 있으리라.  

  사실 카스트 제도는 인도의 독립 이후 1950년 인도헌법에서 법적으로 폐지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인도 사회에서 카스트는 엄연히 존재하며 인도의 정치, 경제, 사회 등의 전 부분에 걸쳐서 억누르고 있다. 카스트는 인도의 국교라 할 수 있는 힌두교에서 연유한다. 힌두교에서는 신이 카스트 제도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기원전 1,000년경에 만들어진 힌두경전 '리그베다'는 인간의 계급이 어떻게 탄생되는지 언급하였다. 그에 따르면, 태초에 우주의 본질을 상징하는 거대한 신 푸루샤가 자신을 희생하여 인류를 창조했는데, 푸루샤의 입은 사제인 브라만이 되었고 팔은 군인계층 크샤트리아가 되었다. 허벅지에서는 상인 계급 바이샤가, 두 발에서는 노예인 수드라 계층이 탄생하였다. 이 네 계급을 색깔이라는 의미의 바르나 제도, 곧 사성제라고 불렀다. 여기에 사성제에 들지 못하여 아웃카스트로 불린, 앞서 언급한 불가촉천민이 있었다는 것이다. 

  인도 사람들은 아직도 이 카스트 제도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미 법적으로는 폐지되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인도인들의 삶과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힌두교에서는 윤회사상에 기인하여 현세에 낮은 카스트로 태어나면 다음 세상에는 높은 카스트로 환생한다고 세뇌하고 있다. 이에 나름의 안정감을 얻은 인도인들은 아직도 카스트라는 제도에서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비인간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비과학적인 제도에 앞서 다음 세상에 대한 강한 믿음(?)을 기약하며 자신의 의지와 관계되지 않은 운명적 카스트 안에서 계급에 따른 지위와 명성, 생활양식 등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의 인도인들인 것이다. 

  이러한 카스트 제도라는 불가항력의 테두리를 벗어나고자 애쓰며 투쟁하여 나름의 성공한 삶을 산 사람이 있다. 『신도 버린 사람들』은 닿는 것조차, 같이 숨쉬는 것조차 금지된 불가촉천민의 위대한 드라마를 다룬 책이다. 그림자만 닿아도 오염되는 불가촉천민에서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 지도자가 된 나렌드라 자다브는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카스트에 맞서 어떻게 싸워왔으며 그 힘겨운 싸움과 삶의 열정이 종국에 어떤 결과를 만들어 냈는지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저자의 아버지인 다무와 어머니인 소누의 일기와 회상이 이 책의 8할 정도의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두 사람이 만나서 결혼을 시작하여 불가촉천민으로 인간 이하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고된 수난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저자는 철저하게 부모의 일기 기록을 반영하고 있다. 다무와 소누의 1인칭 서술이 교차되면서 당시의 삶을 생동감있게 들려주고 있다. 다무와 소누의 일기식 회상담이 이 책 분량의 8할이라면, 그 중 4할은 바바사헤브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빔라오 람지암베드카르 박사의 달리트 인권 운동이 크게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2할은 저자 자신이 화자가 되어 말하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받은 유산과 당신들의 철저한 교육과 가르침으로 인해 저자 자신을 위시한 자녀들이 어떻게 성장하고 성공했는 지를 고백하고 있다. 더욱이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는 저자의 딸이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받은 고도의 정신과 경외심을 고백하고 있기도 하다. 즉, 이 책은 불가촉천민으로서의 잘못된 제도와의 싸움과 투쟁, 그리고 적극적 삶의 방식을 통해 성공화를 이룬 한 가문의 3대에 걸친 자유와 용기, 정의라는 인간의 숭고한 가치에 대한 경험적 회고를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아버지는 잘못된 전통과 제도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는 동물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개인적 잠재력과 꿈을 무시당한채 살아갈 수 없음을 자각하고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아버지 다무의 자각은 그의 또다른 내포적 힘인 용기와 결합한다. 당시 달리트들의 기본권을 위한 투쟁이 바바사헤브가 지도자가 되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그를 정신적 지주로 삼아 지리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투쟁에 선봉에 서기도 한다. 저자는 뒷부분의 고백에서 아버지 다무를 경외와 상찬의 대상으로 말하고 있다. 비굴하지 않고 옳지 않은 것에 순응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용기와 집념이 지금의 자신을 만든 원동력이었음을 고백한다.
  다다(아버지 다무를 자식들은 다다라 부름)는 결의와 용기라는 더없이 소중한 유산을 남겼다. 다다는 우리의 아버지였을 뿐만 아니라, 철학과 삶의 방식 그 자체였다. 살다가 힘이 필요한 순간이 닥치면, 우리는 우리 안에 간직한 다다를 찾아본다.   <p344>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강렬하게 관찰한 부분은 아버지 다무와 어머니 소누의 흔들리지 않는 깊은 사랑이었다. 불과 10세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녀가 나이 많고 까무잡잡한 청년의 아내로 결혼하여 수십 년의 지난한 삶을 버텨내는 과정은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비록 둘다 불가촌천민으로 태어난 소외계층으로 가난하고 억울한 삶을 살아야했지만 서로 의지하고 존중하며 살아갈 때에, 그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내는 남편의 판단과 결정을 항상 존중하여 우군 역할을 해주었고 남편도 고생하는 아내를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 아이를 10년동안 낳지 못해 다른 아내를 얻어야 한다는 주변의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아내를 지켜주고 보듬어 준 남편의 기백과 강단은 같은 남자로서 멋있기 그지 없는 장면이다. 부부 사이의 사랑이라는 강력한 내포적 힘이 가난과 주변환경이라는 외연적 겉치레를 충분히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러한 두 부부의 흔들리지 않는 사랑에 기반한 가정적 안정감이 자녀들 모두 훌륭한 동량으로 길러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천이었을 것이다.
  다다가 세상을 떠난 후 바이(어머니 소누를 자녀들은 바이라 부름)는 부쩍 늙었다. 바이는 까마귀에게 먹이를 주며 말을 거는 걸 좋아했다. 색깔 말고는 까마귀와 다다가 비슷한 점이라곤 없었지만, 바이는 다다가 까마귀가 되어 당신을 만나러 온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매일 밥을 먹기 전에 부랴부랴 까마귀가 먹을 부스러기를 주러 나가서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자다브가 온 것 같으네."   <p353> 

  책의 마지막 부분에 저자가 비토바 신당을 처음으로 찾았던 때를 회상하는 장면은 압권이라 할 만하다. 한 명의 불가촉천민을 맞이하기 위해 사원의 관계자들이 총출동한다. 저자는 이른바 VIP였고, 사원의 높으신 분들이 앞 다투어 환영했다고 한다. 저자는 어쨌거나 불가촉천민이었다. 사원출입이 금지되었던 카스트 출신이었다. 불가촉천민은 하다못해 그림자도 사원에 드리울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힌두 사원 권력의 심장부와 같은 비토바 신당에 사제들의 환영을 받으며 들어가는 것이다. 사원의 운영회장과 대사제가 세계적인 지도자가 된 저자를 맞이했다. 특히 저자가 사제들에게 돈을 주고 사제들이 갈구하며 돈을 받는 장면은 왠지 모를 전율이 느껴진다. 일개의 불가촉천민이 부모님의 정신과 교육을 이어받아 제도와 전통을 극복한 불세출의 인물로 성장하고 마치 카스트를 비웃기라도 하듯 최상위 카스트인 브라만에게 돈다발을 건네는 것이다.
  나는 있으나마나한, 천하에 쓸모없는 불가촉천민이었다. 주머니에서 빳빳한 100루피 다발을 꺼내어 사제들에게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한껏 내밀어 갈구하는 가촉민의 손바닥에 누르듯 쥐어 주기 시작했다. 그들은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달려들었다.   <p355> 

  그렇다. 한 개인의 능력과 열정은 공동체의 관습과 전통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 우리 주변에는 무수히 많은 공동체가 있다. 가족, 학교, 교회, 회사, 국가 등 크고 작은 수많은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모든 공동체의 습속과 문화가 옳고 선한 것만은 아니다. 사회적 환경의 불순함과 비상식에서 개인의 자유와 상식은 침범을 받기도 한다. 인간의 내면적 숭고함 중에 극치라 할 수 있는 용기와 정의감이라는 가치가 많은 사람들에게 지향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다브 가문이 보여준 절대적 선한 가치에 대한 용기와 정의감이 어떤 인과물을 탄생시켰는지를 이 책은 경험적으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잘못된 것에 맞서는 용기와 공동체에 대한 희생의 가치가 찬란하게 빛날 때에 인류는 더욱 아름다운 지구에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떠한 잘못된 관습과 체제도 한 인간의 인권과 자유에 우선할 수 없다. 그것이 수천 년동안의 12억의 인구를 억누르고 있는 카스트라 할 지라도 말이다.

  나는 비겁한 사람들을 자주 본다. 작든 작지 않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절대적 선의 기준이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외면하며 그 전통과 제도에 순응하는 자들이 적잖다. 그리고 그 잘못된 기준으로 약한 자들을 핍박한다. 어쩌면 나도 그러한 사람일 수도 있다. 이 세상은 지배하는 자와 지배 당하는 자로 철저하게 이등분된다. 현대적인 언어로 다시 표현하자면, 프로그래밍 하는 자와 프로그래밍 당하는 자로 양분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도 그 유명한 팔레토의 법칙은 적용된다. 2할의 지배자가 8할의 피지배자를 다스리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일 수도 있고 경제와 사회, 문화 등의 외연적 결과물로 나타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것을 가르는 동기다. 2할과 8할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내면적 원천은 정의에 대한 용기와 공동체에 대한 희생과 사랑의 가치라는 것, 나는 그리 믿는다. 
 

  그러나 우리 세대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 우리 할아버지와 암베드카르 박사의 노력이 우리 세대에 이르러 결실을 맺었다. 나는 달리트를 나타내는 어떤 표식도 달고 있지 않으며, 내 또래와 다르다고 생각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우리 조상들은 내가 이 세상 모든 소녀들과 똑같이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피땀을 흘렸다. 나는 그들이 나를 위해 밝힌 횃불을 받아 들었고, 이제 나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p354>
- 아푸르바 자다브(저자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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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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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02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정성스런 글 잘보고 갑니다. 다윗님의 글을 읽고나니 이 책에 관심이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ㅎㅎ

프레이야 2007-09-03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윗님, 성실한 리뷰,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꾸욱^^
 
유지니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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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스포일러 없음. 안심하고 읽어도 되는 서평임. 

극작술에서 인과성의 질서는 매우 중요하다. 한 이야기 다음에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것과 한 이야기의 결과로써 다음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이다. 이는 영화에서나 소설에서나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이야기가 잘 흐르는 듯하다가 인과관계가 전혀 없는 상황이 발생하거나 난데없는 인물이 등장하여 사건이 마무리 되면 관객과 독자는 어리둥절하기 마련이다. 최근 「디-워」 논쟁에서 문화평론가 진중권이 2,500년 전의 아리스토텔레스의 극작술에서부터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라는 어려운 문구를 인용하면서까지 흥분한 것이 이해될 만하다. 원인과 결과의 질서가 상식 안에서 정리되어야 관객과 독자는 허무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야기(story)와 플롯(plot)은 다른 개념이다. 이야기는 일정한 시간적 연속성에 의해서 정리되어 있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처럼 정리된 것은 아무런 흥미가 유발되지 않고 단순한 '흐름'에 지나지 않는다. 단순한 시간의 흐름 말이다. 흔히 접하는 일기나 신문의 기사같은 것, 바로 그러한 일반적인 흐름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플롯은 그 흐름 속에 끼어들어 앞뒤의 관계를 밝혀주는 구성원리가 된다. 즉 "왕이 죽고 여왕도 죽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만을 전제로 전달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하나의 사건만이 제시된 '스토리'에 해당된다. 하지만 "왕이 죽고 나서 여왕은 슬픔에 못 이겨 죽었다"고 하면 무언가 달라진다. 물론 여기서도 시간 순서는 있다. 왕이 죽고 여왕도 죽었다는 시간이 존재한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여왕이 죽었는지에 대한 원인과, 또 그래서 여왕이 죽었다는 결과가 확실히 존재함으로써 왕이 죽고 여왕이 죽었다는 시간순서를 압도하게 되는 것이다. 더 크게 부각되는 것이다. 이것을 플롯이라고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플롯은 한 사건의 이야기의 재구성에 작용하는 원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구성이 제법 탄탄한 영화나 연극, 문학이 제법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면서 재미있게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꽤 훌륭한 구성력을 갖춘 소설을 만났다. 온다 리쿠의 최신 출간작 『유지니아』를 읽었다. 쓰나미처럼 한국 도서계를 점령하고 있는 일본 문학의 거대함에 대해 새삼 새로울 것은 없다. 다만 온다 리쿠와 같이 짧은 시일에 한꺼번에 그리 많은 작품을 출간한 작가가 없다는 점이 흥미롭다. 지난 2년간 19편이 출간되었고, 더욱이 지난 한 달간 7편이 쏟아졌으니 봇물 터진다는 얘기가 여기에 쓰는 말일 것이다. 현재 온다 리쿠 소설은 하나의 존(zone)을 형성하여 두꺼운 매니아층을 거느리고 있을 정도다. 그 유명하고 위대한(?) 아줌마 작가와의 첫만남이 『유지니아』라는 미스테리 소설로 이뤄진 것이다. 

  '2006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이라는 객관적인(?) 평가와 '노스텔지어의 마법사'라는 자극적인 문구가 책의 첫 장을 넘기는데 기대감과 흥분을 고조시킨다. 소설의 구성은 미스테리 소설답게 매우 복잡하다. 각 장이 바뀔 때마다 1인층과 3인층의 서술 시점이 교차되며 소설의 흐름을 이끌어간다. 또한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의 시공간 변화가 수시로 이뤄진다. 한 사건에 대한 다양한 인물들의 인터뷰 내용과 각 장의 인물들의 현재적 플롯이 교차되면서 탄탄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지방 재력가문인 아오사와 가의 잔칫집에서 일가족을 비롯해 친적과 이웃사람들까지 열일곱 명이 희생된 독살사건이 이 소설의 핵심사건이다. 현장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소녀 아오사와 히사코만이 유일하게 화를 면한다(소설을 읽다보면 가정부도 한 명 살아남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현장에는 수수께끼 같은 편지가 남겨져 있다. “유지니아, 나의 유지니아.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줄곧 외로운 여행을 해왔다.” 몇 달 뒤, 한 남자가 자신이 아오사와 가 독살 사건의 범인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다. 결정적인 몇 가지 증거로 인해 사내가 범인이라는 결론이 내려지고 사건은 종결된다. 그러나 진범은 따로 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는다. 소설은 이미 밝혀진 범인 이외의 또 다른 진범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며 마치 퍼즐을 맞춰나가는 식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그 퍼즐이 하나 하나씩 맞춰질 때마다 명확하고 확실함이 아닌, 항상 2% 부족한 공간을 남겨놓는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간상들은 철저하게 과거에 얽매여있다. 20년 전의 사건의 영향 아래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인물들의 과거로의 회귀를 매우 뛰어난 감각으로 그려내고 있다. 각 인물들마다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전부 다르다. 다른 시각, 다른 관찰이 다양하게 펼쳐지고 소설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사건과 진실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독자를 압도한다. 더욱이 저기압이 몰고오는 후텁지근하고 끈끈한 공기, 갑자기 불어닥치는 비바람, 숨이 멎을 듯 옥죄어드는 더위에 대한 묘사는 전율이 느껴질만큼 생생하다. 이러한 묘사는 무언가 명확하지 않고 베일에 가려져있는 듯한, 앞으로 완성될 퍼즐로 향하는 서사 전개와 좋은 궁합을 이루기도 한다. 

  이 소설은 고전적인 추리소설과는 맥을 달리한다. 작가는 범인이 누구인지, 범행동기가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것 이상의 숙제를 던져주고 있다. 사실 범인의 존재는 도입부에서부터 암시된다. 그 작은 암시가 소설의 서사구조가 완성되어가면서 보다 뚜렷하고 좁혀져가는 듯 보인다. 마지막 한 존재를 향해 밀려가는 소설의 흐름 속에서 결말은 시원함을 제공하지 못한다. 진범의 존재감, 범행의 동기, 편지가 의미하는 뜻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주지 않은 채, 작가는 오히려 독자들에게 그것에 대한 의무를 넘기고 있다. 무언가 시원한 한 방을 원했던 독자는 무언가 흐릿흐릿하고 몽환적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자신의 전두엽을 활발하게 작동시키는 것이다. 

  소설 속의 중심 화자 두 명은 어느 한 존재감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고 있다. 강렬하게 그 존재를 향해 몰입한다. 그들의 목마름은 소설의 서사가 완성되어가면서 더욱 확연해진다. 그 목마름의 본질은 호기심을 넘어선 연민으로 보이지만, 어쩌면 사랑의 감정이었을 지도 모른다. 왜 그랬을까, 하는 마음을 넘어선 마치 내 자신이 네가 되려고 하는 심정으로 강렬하게 갈구한다. 두 명의 인물, 즉 인터뷰를 진행하는 자와 당시 사건을 소설로 재탄생시킨 자의 시간성과 방향성은 철저하게 과거의 그 존재에 구속되어 있는 것이다. 

  과연 사실은 존재하는 것일까? 혹시 우리가 흔히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이 "어느 한 방향에서 본 주관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과연 이 세상에 명확한 사실은 존재하는 걸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이 세상의 전부일까? 깊은 사색이 밀려온다. 

  복잡하면서 잘 짜여진 뛰어난 플롯과 흐릿하고 명확한 답이 없는 무의식적 세계가 잘 조합되어 서사의 훌륭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이 소설은 온다 리쿠라는 거대한 이름값에 대한 첫만남을 풍성한 만족감으로 채워주었다. 온다 리쿠의 다른 소설 속으로 침투하고 싶다. 그녀의 다른 소설들이 어떤 완성도와 무게감으로 읽힐 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일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소설을 꺼리며 내내 한 사람의 시점에 갇히는 것이 자기에게 잘 맞지 않는다, 라는 온다 리쿠의 고백이 진실이라면 그 자체만으로 내가 그녀의 작품세계를 천착할 가치는 충분하다.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 더 나아가 그 탐구의 다각적인 시선과 다채로운 해석에 전적으로 내 독서기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왠지 전작주의에 빠질 것 같다. 온다 리쿠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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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8-28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윗님, 굿모닝! 온다리쿠의 소설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님의 리뷰가
상당히 치밀합니다. 꾸욱^^
 
내 안의 창의력을 깨우는 일곱가지 법칙
켄 로빈슨 지음, 유소영 옮김, 백령 감수 / 한길아트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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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의 제목과 표지 비쥬얼에서 언뜻 강한 도전을 주는 자기계발서나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책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착각은 자유였다. 이 책은 철저한 인문학 도서다. 굉장히 지루하고 건조하며 재미없는 책이다. 다루고자 하는 본질인 '창의력을 깨우는 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교육체계의 문제점과 역사적 원인에 대해서만 거의 논문 수준으로 다루고 있다. 인문학을 위시하여 심리학, 사회학, 미학, 철학, 뇌의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두루 다루고 있지만 난해한 학문적 외침과 비본질적인 정보의 부각으로 굉장히 힘 없는 책이 되었다. 17,000원이라는 책 값도 어리둥절하다. 양장본도 아니고 300페이지가 채 안되는 분량에 17,000원의 책 값은 비합리적인 가격이다. 이벤트 당첨 도서로 받은 것이기에 개인적 출혈은 없다손치더라도 너무한 것은 너무한 것이다. 여튼 책에 대한 전체적 평가는 여기서 각설하고 내용을 얘기해보자.
 

 저자는 공교육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저자의 모국인 영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이 특정한 학문적 능력을 지능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면서 개인의 창의력을 계발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아카데미시즘(academicism)은 특정한 학문적 능력(academic ability)을 전반적인 지능과 혼동하여 다른 능력을 무시하고 오직 그것만 개발하는 편견일 뿐이라고 질타한다.
 

  사실 그렇다. 거의 대부분의 국가의 교육체계는 '경제적' 모델과 '지적' 모델 두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현재 세계 많은 나라에서 채택하고 있는 서구 교육체계의 기반이 되는 경제적 모델은 '산업주의'의 산물이며 지적 모델은 '아카데미시즘'의 연장이다. 그런데 경제적 모델은 작금의 시대상황에 낡았을 뿐만 아니라 지적 모델은 전혀 부적절하며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산업경제에서 노동력을 공급하는 데 적합하도록 디자인 된 교육체계가 아직까지 대부분의 국가에 보편적 공교육의 형태로 남아있는 것이다. 더욱이 산업화와 민주화의 과정이 초유의 짧은 시간으로 점철된 한국의 경우 공교육의 심각한 문제점은 거의 비교 거부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교육체계의 오류와 비합리성을 지적하면서 명제적 지식과 논리-연역적 추론 능력만을 강조하고 있는 보편적 교육방식을 질타하고 있다. 대부분 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이들은 학문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창의력과 표현력, 리더쉽과 의사소통 등의 능력은 그들의 '우수함'의 영역에는 반영되지 않고 있다. 그렇기때문에 기업과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상과 공교육과 대학에서 길러낸 인재상의 차이는 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점을 지적하면서 산업사회와 아카데미시즘의 잔재라 할 수 있는 작금의 교육체계에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뤄줘야 한다고 역설한다.
 

  몇 년 전 미국 타임즈지 기사에서 한국인의 지능지수(IQ)가 세계 1위임을 발표했었다. 대만이 2위, 일본이 6위, 유태인이 9위, 미국인이 16위였다. 한 민족이 지능지수의 보편적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대략 천년이 걸린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두뇌와 교육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는 한국인이 아직도 노벨상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노벨평화상의 경우 비학문분야이며 상징적이라는 점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상 수상은 제외하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철저하게 대한민국의 교육의 문제점에서 연유한다. '국영수'로 대변되는 대한민국 공교육은 천성적으로 훌륭한 두뇌구조를 갖고 있는 한국인들의 잠재능력을 사장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세계 역사상 초유의 빠른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쳤다는 점과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뜨거운 교육열의 방향이 '대학입학'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점은  한국의 교육체계가 오로지 '대학입시제도'의 관문으로만 디자인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개인마다의 다면적 지능이 빛을 보지도 못하고 완전 차단 당하고 있는 현실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세상을 단 한 번 살아간다. 초기에 꺾여버린 싹처럼 처절한 비극도 없으며, 외부에서 주어진 한계를 스스로의 한계로 잘못 인식하여 노력할 기회, 희망을 가질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것만큼 부당한 일도 없다."   <스티븐 제이 굴드, p77>
 

  암기식이고 주입식인 대한민국의 교육제도는 많은 부작용을 생산하고 있다. 명제적 지식과, 논리-연역적 추론 능력만을 지극히 강조하고 있어 인간이 아닌 기계나 계산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생각이 들 정도다. 작금의 젊은 세대들의 말하는 능력과 글쓰기 수준은 민망할 정도다. 더욱이 토론수준은 저급함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참여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실시된 '대통령과 검사와의 대화'를 상기해보자.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라 할 수 있는 현직 검사들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대통령과의 십대 일의 토론에서 무참하게 무너졌다. 사안을 바라보는 통찰력은 물론이요, 주장하는 논리와 인과성의 전 부분에서 토론의 최저수준을 보여주었다. 우리나라의 획일적이고 비합리적인 교육환경이 어떤 수준의 엘리트들을 생산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회를 짊어질 동량을 길러내는 데 있다. 거기에는 뛰어난 학문적 능력도 중요하지만 창의력과 리더쉽, 예절과 도덕성 등의 가치도 매우 중요하다. 특정 부분의 논리적, 수학적 능력만 계발하다보니 감성능력을 개발할 기회가 적다. 이는 바로 감정과 이성의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고 자신의 감정을 자제하며 조절하지 못하는 냄비근성의 국민성에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특히 감정의 주체가 되지 못한 성인의 경우 비사회적인 인간으로 살아갈 가능성도 적잖다. 도덕적이고 정직함은 물론, 날카로운 이성과 풍성한 감성, 그리고 뛰어난 소통능력을 길러내는 전인교육이 필요함이 여기에 있다. 
 

  1,900만명이 안되는 유태민족이 66억 인류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의학의 전 분야를 대부분 지배하고 있다고 한다. 2억 3천의 미국 인구 중 유태인은 900만이 채 되지 않는다. 900만이 채 안되는 유태민족이 미국 부의 51.7%를 차지하고 있다. 사실 전쟁을 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는 미국 국가 정부의 문제가 아니라 유태인의 문제이다. 유태인의 뛰어남에 대해 유태인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일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것은 바로 독특하고 철저한 가정교육이다. 아이들 앞에서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을 유지하면서 성경과 삶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바로 그 가르침이 유태인 자녀들 마음 속에 큰 그릇이 만들어지는 원인이 되면서, 그 마음의 그릇에 나와 너와 우리와 자연과 우주를 품는 위대한 대인으로 서나가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교육의 힘은 바로 그런 것이다. 
 
 
[인상 깊은 구절]
창의적인 조직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근본 특징이 있다.
첫째, 사람들에게 위험을 무릅쓸 자유를 주는 곳이다.
둘째, 사람들이 자신이 타고난 지성을 발견하고 발전시키게 해주는 곳이다.
셋째, '어리석은' 질문, '옳은' 대답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넷째, 불손함, 생기발랄함, 역동성, 놀라운 것, 장난기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곳이다.
<책 내용중,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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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8-28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들이 하나하나 참 좋습니다. 다양하게 읽고 쓰시네요. 대문에 걸어둔 서재인사말,
독서에 대한 정의도 과장없이 본질적입니다. 그냥 가려다 인사드리고 가는 게 옳겠다
싶어서 몇자 남깁니다. 종종 들러야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장국영이 죽었다고?
김경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김경욱과의 두 번째 만남이 이뤄졌다. 신작 장편역사소설 『천년의 왕국』을 읽은지 얼마되지 않아 2년 전 출간된 그의 단편소설집 『장국영이 죽었다고?』를 읽은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밋밋하기 그지 없는 소설집이다. 그의 현재에서 과거로의 시간적 순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2년이라는 시간의 역행에서 2년만큼 퇴보했고, 시간의 순행에서 2년만큼 진보했다. 즉, 김경욱은 『천년의 왕국』으로 굉장한 진화와 발전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만큼 『장국영이 죽었다고?』는 재미없는 소설집이다.

  소설의 창조목적은 결국 인간에 대한 탐구로 귀결된다. 소설 속에서 소개되는 다양한 인간상들의 모습에서 독자는 나와 너를 보고 우리를 보며 우주를 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삶을 깊이 있게 통찰하는 동시에 자신의 삶을 거울에 비추기도 한다. 나의 독서경향도 이러한 보편적 문학의 특질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작가가 만들어 놓은 길을 걸어가면서 다양한 인간상들과의 호흡과 만남, 그것이야말로 내가 문학을 사랑하는 절대불변의 이유이자 목적이다. 

  이번 소설집에서의 김경욱표 인간탐구는 2%가 부족한 것이 아닌 2%만 만족했을 정도로 초라하다. 읽기 진도를 더딜게 하는 다듬어지지 않은 스토리 텔링, 화려한 외연적 수사를 뒷받침하지 못하는 밋밋한 플롯, 더이상 새로울 것 없는 설정과 인물에 대한 미지근한 천착, 등장인물과 주제선정의 획일화 등은 답답하기만 하다. 그나마 건질 단편이 있다면 표제작이자 최전선에 비치한 「장국영이 죽었다고?」와 신선한 구성과 사랑에 관한 주옥같은 표현이 돋보이는 「낭만적 서사와 그 적들」 뿐이다. 그 외의 단편들은 대부분 비슷한 수준에서의 미지근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말미작 「나가사키여 안녕」은 허무하기만 하다. 

  「장국영이 죽었다고?」에서 저자는 인터넷 채팅으로 대변되는 가상공간의 세계를 비웃고 있다. '장국영'이나 '아비정전'은 그저 극적 소재로 사용될 뿐이다. 만나기로 했던 약속장소에서 동일한 복장을 하며 매표소에 줄을 서는 수십 명의 사람들을 목도하는 주인공의 마지막 모습은 사이버 세계의 모순과 허구를 비아냥거리고 있는 듯 애처롭고 가련하기만 하다. 

  「낭만적 서사와 그 적들」은 꽤 훌륭한 단편이다. 주인공의 세 번에 걸친 우연이 서사의 맥을 이루고 있으며 틈틈히 주옥같은 사랑에 대한 명언들이 채워진다. 극장에서의 첫 번째 우연으로 연애를 시작하고, 은행에서의 두 번째 우연으로 결혼을 한다. 결국 이혼하지만 미술관에서의 세 번째 우연이 일어난다. 일식집에서의 네 번째 필연을 다짐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지금까지의 우연을 필연으로 미화하고자 하는 낭만적 상상의 의지를 엿본다. 이런 서사의 흐름에서 작가는 사랑과 관련된 주옥같고 정제된 표현들을 교차해서 들려주며 낭만적 서사를 완성하고 있다.
  사랑에 대한 낭만적 상상은 우연이 필연으로 비약하는 데 필요한 정족수를 터무니없이 줄여준다. 그리하여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단 한 번의 우연조차도 필연으로 미화하는 논리적 비약을 서슴지 않는다.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본디 사랑이라는 감정은 비약에 근거하므로.   <p98>
  사랑은 그녀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사랑이어서 연인과 헤어질 때 우리를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은 그녀를 잃었다는 슬픔이 아니라 사랑을 잃었다는 슬픔이다. 내가 사랑(욕망)한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를 향한 그녀의 사랑(욕망)이었다.   <p110>


  그 외의 단편들은 가벼움과 무거움, 냉정함과 강렬함이 부족하고 전복적이지도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지도 않는, 그저 미지근하기만 하다. 단편소설집이 갖는 다양성이라는 명확한 물리적 무기가 있음에도 다채롭지 못한 획일성에 다분히 재미없는 소설집이 되어 버렸다. 남는 것은 작가 자신의 개인기인 화려한 수사 정도다. 하지만 그 어떤 외연적인 힘도 내포적인 힘을 압도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것이 우주의 법칙이자, 문학도 예외가 될 수 없는 자명한 공식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의 마지막 '작가의 말'을 통해 고백한 김경욱의 언급은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지나간 문장의 안쓰러움이 다가갈 문장의 아득함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가갈 문장의 아득함이 지나간 문장의 안쓰러움에 대한 보상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연민은 지나간 문장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지나간 문장의 안쓰러움에 대한 연민이고 사랑은 다가갈 문장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다가갈 문장의 아득함에 대한 사랑입니다. 다가갈 문장의 아득함에 대한 사랑으로 지나간 문장의 안쓰러움에 대한 연민을 베어낼 것입니다. 베어내면서 조금씩 나아 가겠습니다.   <p304, 작가의 말>

  다가갈 문장의 아득함에 대한 사랑으로 지나간 문장의 안쓰러움에 대한 연민을 베어낼 것이라는 그의 고백이 철저하게 반영되어 2년 후 『천년의 왕국』이 완성된 것이 아니겠는가? 가난한 상상력의 창조물인 『천년의 왕국』에서 보여줬던 그의 내포적인 힘을 나는 지지한다. 더 나아가 다가갈 문장의 아득함에 대한 사랑으로 지나간 문장의 안쓰러움에 대한 연민을 베어내는 작업이 지속됨으로 말미암아 그의 문학의 미래가 진보와 진화로 점철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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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지도를 넓혀라 - 광개토 태왕 코드 27
윤명철 지음 / 마젤란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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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작년부터 시작된 대한민국 내 고구려 열풍은 아직도 가실 줄을 모른다. MBC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주몽」을 위시하여 「연개소문」, 「대조영」 등의 사극은 고구려 열풍을 불러일으킨 주역이기도 하다. 더욱이 9월에 방송될 「태왕사신기」는 배용준이라는 한류스타와 더불어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어 당분간 고구려 열풍은 식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우경화와 중국의 동북공정 등 동아시아 강대국들의 위험한 역사인식 가운데 '고구려'라는 민족사 최대의 중흥기에 대한 조명이 한국인들에게 강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현재성의 본질을 깊이 사유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은근히 '약자 콤플렉스', '크기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고 한다. 지난 수 천 년동안의 민족사를 반추하면 이런 한국인들의 콤플렉스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외세의 침략을 당하기에 바빴고, 작은 반도국가로서의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현대사는 이마저도 절반으로 갈라놓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작은 나라이자 약소국으로서의 한맺힌 유전자가 한국인들의 몸 속에 흐르고 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최근 대한민국에 고구려 향수가 만연하게 퍼지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고구려는 '약한 것', '작은 것'으로 대변되는 보편적인 한민족 DNA와는 역설적으로 동아시아의 중핵이자 초강대국이었기때문이다. 바로 그 찬란했던 초강대국 고구려의 중심에는 광개토 태왕이라는 위대한 군왕이 있다.

  광개토 태왕을 모델로 삼아 새로운 세계와 이상향을 실현시켜가는 완벽한 리더의 자세를 현재적 환경에서 재조명한 『생각의 지도를 넓혀라』를 읽었다. 이 책은 '광개토 태왕 코드 27' 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더욱이 책의 띠지에 '꿈을 실천한 완전한 인간모델', '잃어버린 땅, 만주의 광활한 대륙을 달린 광개토 태왕을 따르라!' 는 문구가 적혀 있어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자신감을 은근히 발산시키는 듯 하다. 저자는 역사학과 교수답게 1,600여년 전의 광개토 태왕의 혼과 지혜의 유전인자를 현재의 시간대로 타임워프시키고 있다. 광개토 태왕의 지혜와 경험을 창조, 개방, 조화라는 3가지 측면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27개 코드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역사학자로서 고구려를 공부하면서 광개토 태왕이란 존재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그가 태어나 성장하고 왕이 되어 고구려를 다스렸던 시기가 우리가 사는 현시대와 꼭 닮아 있다고 언급한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21C는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시대이다. 예측하지 못했던 신지식의 탄생, 정보과학이나 생명공학의 급속한 발달, 세계화의 이름으로 세계질서의 전면적인 재편 등이 그 동안과는 너무나 다른, 낯선 환경으로 점철된 시대임을 증명한다. 특히 한국, 중국, 일본 및 러시아 일부 지역의 경우, 자국의 안녕을 지키고 서구인들과 경쟁할 수 있는 힘을 갖추기 위해 동아시아공동체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가 반면, 동아시아 내부에서는 중국과 일본이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팽창하고, 특히 중국은 고구려 역사를 왜곡하는 동북공정 작업을 통해 중화제국주의를 노골적으로 꾀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국력과 세계화라는 논리가 절대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작금의 혼란스러운 시대에 고구려라는 국가, 그리고 광개토 태왕이라는 인물의 존재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광개토 태왕이 누구인가? 그는 18세에 왕위에 올라 39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약소국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중핵으로 만든 불세출의 영웅이다. 사실 그가 태어난 당시의 고구려 사정은 좋지 못했다. 백제와 벌인 대결에서 패배한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데다,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새롭게 재편되면서 북방에서 내려온 선비족과 요동지방을 놓고 군사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나라는 어지러웠고 백성들은 굶주렸다. 그런 어려운 시대에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백제와 거란을 공격해 국민들의 패배감을 씻어주고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했다. 또한 신라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가야까지 세력권에 넣으려 했다. 요동지방을 완벽하게 장악했고 북부여지역까지 직접 통치하기도 했으며, 동으로는 두만강 하구와 연해주 남부를 차지했다. 

  광개토 태왕은 정복자를 넘어서는 영웅이었다. 강력한 국가의 건설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군사까지 아우르는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을 창조해냈다. 그는 만주벌판을 누비는 정복자이기에 앞서 훌륭한 정치가였으며, 담덕이라는 그의 이름에서 느낄 수 있듯 철학자였으며 종교에 심취한 인물이었다. 예술가적인 섬세한 감성과 뛰어난 학자 못지않은 지성을 함께 갖고 있었으며,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보는 예리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21C 작금의 혼란스럽고 변화무쌍함 속에서 광개토 태왕의 이러한 다양한 리더쉽의 편린들이 재조명되고 연구해야 할 가치가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나는 고구려 시대의 역사를 잘 인지하고 있지 못하다. 광개토 태왕 하면 영토를 넓힌 왕, 정복자 정도로 각인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리더쉽이 큰 것과 작은 것을 동시에 추구했던 균형적이고 조화의 리더쉽이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크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힘이 느껴진다. 큰 것은 선이 굵고 장엄하다. 뭔가 한계를 뛰어넘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유가 분명치 않은데도 벅찬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큰 것을 지향하는지 모르겠다.   <p20>
  작은 것은 귀엽다. 못나도 아름답다. 괜스레 안아주고 싶어진다. 포악한 맹수일지라도 새끼는 귀엽에 느껴지지 않는가. 또한 보는 사람을 위축시키지 않고, 편안하게 한다. 목표지향적인 큰 그림가ㅗ 함께 때로는 잠시 앉아서 쉬어갈 수 있는 작은 그림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큰 것만 추구하다 보면 작은 것을 보지 못하기 쉽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결국 큰일 또한 이룰 수 없게 된다. 결국 그랜드 디자인에는 비전과 함께 작은 그림을 포함하는 함축적이고 포용적인 내용이 함께 들어가야 한다.   <p22>


  광개토 태왕의 그랜드 디자인에 큰 것만이 들어갔다면 그는 아마 지금의 평가보다는 절하되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영토의 팽창이나 국가의 부강만을 목표로 하는 큰 그림만 그렸다면 다른 전제군주나 성공한 폭군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뛰어난 전략가나 영토를 넓힌 정복군주 정도로 후세에 기억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백성들의 삶이 풍요롭도록 농사를 발전시키고, 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했고, 전쟁으로 상처를 입은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평양에 9개의 절을 세우기도 했다. 큰 것과 작은 것의 가치를 정확히 통찰했고, 우선순위를 제대로 세워 실행한 유능한 왕이었다. 큰 그림을 우선으로 하되, 여기에 작은 그림을 잘 섞어서 그려놓은 태왕의 리더쉽을 본받을 필요가 있음은 당연하다.

  고구려는 다민족국가이자 다문화국가였다. 주변국가들과 속국들을 최대한 흡수했다. 그리고 각기의 장점들을 균형있게 조화시키는 힘이 태왕에게는 있었다. 유목민과 농경민, 수렵민과 해양민의 강점들을 조정하고 정리하여 국가의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승화하였다. 한때 '노마드'라는 단어가 메스컴에서 유행을 했었다. 이동과 가속의 논리로 대변되는 유목민들의 특장점이 무조건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다. 21C는 기동성만 갖고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은 물론이요, 특히 국가나 기업은 말 그대로 안정과 정착을 최고 목표로 삼고 있다. 전근대사회에서의 농경문화의 중흥과 21세기 디지털문명도 정착문화의 산물임을 기억하자. 정답은 자명해진다. 유목민의 기동성과 수렵민의 민첩성, 농경민의 안정성, 해양민의 회귀성을 접목한 광개토 태왕의 혜안과 통찰력은 '노마드'의 그들보다 훨씬 선진적인 것이다. 섞임의 문화, 나눔의 문화가 바로 고구려를 이루는 근간이었던 것이며 이는 20세기 초강대국 미국이 다시한번 입증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광개토 태왕의 자존심 회복 정신에 크게 매료되었다. '자의식'이라는 것의 개념이 무엇인가? '내'가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 내가 바로 내 삶과 일의 주체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고구려는 철저하게 조선(고조선)의 후예임을 자각했다. 고구려의 정체성이 명확했던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고구려 창업정신인 '다물'은 '되찾자', '회복하다'의 뜻이라고 한다. 광개토 태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가장 먼저 백제를 공격했다. 태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이 바로 백제 근초고왕과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왕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는 전무후무한 자존심의 상처를 회복키 위해 4만대군을 이끌고 남으로 향해 할아버지의 원수이며 오랜 숙적이었던 백제를 쳐서 석현 등 10여 성을 빼았었다. 위축된 국민들의 사기는 한껏 진작되었고 고구려 사회를 자신감으로 불질렀다. 또한 거란을 정벌했고 요동을 되찾았으며 신라를 속국으로 두기도 했다. '다물' 정신의 승리이자, 국민적 자신감의 만연함이었다.

  최근 고구려 향수의 열풍 속에서 광개토 태왕의 강력한 힘이나 정복정신, 카리스마에만 초점을 맞추는 이들이 의외로 많은 듯하다. 이는 태왕의 리더쉽을 잘못 이해했거나 지엽적으로 일반화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작금의 시대에는 박정희식 리더쉽이 필요하지도 않으며 통하지도 않는다. 어설픈 영웅주의나 마키아벨리즘적인 생각이 한국민들에게 만연해 있는 이상 더이상 발전이 없다고 하겠다. 새로운 리더쉽이 필요하다. 더 이상 영웅이나 군주, 혹은 총수 같은 특별한 사람이 군림하면서 전체를 끌어가는 시대가 아니다. 허브코헨의 협상의 법칙에 따르면 세상의 8할은 협상이다. 협상을 통해 파국을 막고 서로에게 이익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온갖 자유의 만개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조화와 설득의 리더쉽, 더 나아가 깊은 통찰력과 공동체를 향한 희생의 리더쉽이 필요한 시대다. 1,600년 전의 광개토 태왕의 리더쉽은 바로 이러한 리더쉽의 가치와 필요성을 말해주고 있는 무게감이자 존재감이다.


[인상깊은 구절]
현재는 미래라는 희망과 무한한 가능성의 대평원에서 빌려온 목표이며, 과거는 미래가 찾아가 본받고 가르침을 청해야 할 스승이다.   <p42>
위기란 성공과 실패라는 이란성 쌍둥이다.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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