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창의력을 깨우는 일곱가지 법칙
켄 로빈슨 지음, 유소영 옮김, 백령 감수 / 한길아트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책의 제목과 표지 비쥬얼에서 언뜻 강한 도전을 주는 자기계발서나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책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착각은 자유였다. 이 책은 철저한 인문학 도서다. 굉장히 지루하고 건조하며 재미없는 책이다. 다루고자 하는 본질인 '창의력을 깨우는 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교육체계의 문제점과 역사적 원인에 대해서만 거의 논문 수준으로 다루고 있다. 인문학을 위시하여 심리학, 사회학, 미학, 철학, 뇌의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두루 다루고 있지만 난해한 학문적 외침과 비본질적인 정보의 부각으로 굉장히 힘 없는 책이 되었다. 17,000원이라는 책 값도 어리둥절하다. 양장본도 아니고 300페이지가 채 안되는 분량에 17,000원의 책 값은 비합리적인 가격이다. 이벤트 당첨 도서로 받은 것이기에 개인적 출혈은 없다손치더라도 너무한 것은 너무한 것이다. 여튼 책에 대한 전체적 평가는 여기서 각설하고 내용을 얘기해보자.
 

 저자는 공교육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저자의 모국인 영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이 특정한 학문적 능력을 지능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면서 개인의 창의력을 계발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아카데미시즘(academicism)은 특정한 학문적 능력(academic ability)을 전반적인 지능과 혼동하여 다른 능력을 무시하고 오직 그것만 개발하는 편견일 뿐이라고 질타한다.
 

  사실 그렇다. 거의 대부분의 국가의 교육체계는 '경제적' 모델과 '지적' 모델 두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현재 세계 많은 나라에서 채택하고 있는 서구 교육체계의 기반이 되는 경제적 모델은 '산업주의'의 산물이며 지적 모델은 '아카데미시즘'의 연장이다. 그런데 경제적 모델은 작금의 시대상황에 낡았을 뿐만 아니라 지적 모델은 전혀 부적절하며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산업경제에서 노동력을 공급하는 데 적합하도록 디자인 된 교육체계가 아직까지 대부분의 국가에 보편적 공교육의 형태로 남아있는 것이다. 더욱이 산업화와 민주화의 과정이 초유의 짧은 시간으로 점철된 한국의 경우 공교육의 심각한 문제점은 거의 비교 거부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교육체계의 오류와 비합리성을 지적하면서 명제적 지식과 논리-연역적 추론 능력만을 강조하고 있는 보편적 교육방식을 질타하고 있다. 대부분 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이들은 학문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창의력과 표현력, 리더쉽과 의사소통 등의 능력은 그들의 '우수함'의 영역에는 반영되지 않고 있다. 그렇기때문에 기업과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상과 공교육과 대학에서 길러낸 인재상의 차이는 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점을 지적하면서 산업사회와 아카데미시즘의 잔재라 할 수 있는 작금의 교육체계에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뤄줘야 한다고 역설한다.
 

  몇 년 전 미국 타임즈지 기사에서 한국인의 지능지수(IQ)가 세계 1위임을 발표했었다. 대만이 2위, 일본이 6위, 유태인이 9위, 미국인이 16위였다. 한 민족이 지능지수의 보편적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대략 천년이 걸린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두뇌와 교육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는 한국인이 아직도 노벨상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노벨평화상의 경우 비학문분야이며 상징적이라는 점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상 수상은 제외하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철저하게 대한민국의 교육의 문제점에서 연유한다. '국영수'로 대변되는 대한민국 공교육은 천성적으로 훌륭한 두뇌구조를 갖고 있는 한국인들의 잠재능력을 사장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세계 역사상 초유의 빠른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쳤다는 점과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뜨거운 교육열의 방향이 '대학입학'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점은  한국의 교육체계가 오로지 '대학입시제도'의 관문으로만 디자인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개인마다의 다면적 지능이 빛을 보지도 못하고 완전 차단 당하고 있는 현실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세상을 단 한 번 살아간다. 초기에 꺾여버린 싹처럼 처절한 비극도 없으며, 외부에서 주어진 한계를 스스로의 한계로 잘못 인식하여 노력할 기회, 희망을 가질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것만큼 부당한 일도 없다."   <스티븐 제이 굴드, p77>
 

  암기식이고 주입식인 대한민국의 교육제도는 많은 부작용을 생산하고 있다. 명제적 지식과, 논리-연역적 추론 능력만을 지극히 강조하고 있어 인간이 아닌 기계나 계산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생각이 들 정도다. 작금의 젊은 세대들의 말하는 능력과 글쓰기 수준은 민망할 정도다. 더욱이 토론수준은 저급함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참여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실시된 '대통령과 검사와의 대화'를 상기해보자.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라 할 수 있는 현직 검사들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대통령과의 십대 일의 토론에서 무참하게 무너졌다. 사안을 바라보는 통찰력은 물론이요, 주장하는 논리와 인과성의 전 부분에서 토론의 최저수준을 보여주었다. 우리나라의 획일적이고 비합리적인 교육환경이 어떤 수준의 엘리트들을 생산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회를 짊어질 동량을 길러내는 데 있다. 거기에는 뛰어난 학문적 능력도 중요하지만 창의력과 리더쉽, 예절과 도덕성 등의 가치도 매우 중요하다. 특정 부분의 논리적, 수학적 능력만 계발하다보니 감성능력을 개발할 기회가 적다. 이는 바로 감정과 이성의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고 자신의 감정을 자제하며 조절하지 못하는 냄비근성의 국민성에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특히 감정의 주체가 되지 못한 성인의 경우 비사회적인 인간으로 살아갈 가능성도 적잖다. 도덕적이고 정직함은 물론, 날카로운 이성과 풍성한 감성, 그리고 뛰어난 소통능력을 길러내는 전인교육이 필요함이 여기에 있다. 
 

  1,900만명이 안되는 유태민족이 66억 인류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의학의 전 분야를 대부분 지배하고 있다고 한다. 2억 3천의 미국 인구 중 유태인은 900만이 채 되지 않는다. 900만이 채 안되는 유태민족이 미국 부의 51.7%를 차지하고 있다. 사실 전쟁을 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는 미국 국가 정부의 문제가 아니라 유태인의 문제이다. 유태인의 뛰어남에 대해 유태인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일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것은 바로 독특하고 철저한 가정교육이다. 아이들 앞에서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을 유지하면서 성경과 삶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바로 그 가르침이 유태인 자녀들 마음 속에 큰 그릇이 만들어지는 원인이 되면서, 그 마음의 그릇에 나와 너와 우리와 자연과 우주를 품는 위대한 대인으로 서나가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교육의 힘은 바로 그런 것이다. 
 
 
[인상 깊은 구절]
창의적인 조직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근본 특징이 있다.
첫째, 사람들에게 위험을 무릅쓸 자유를 주는 곳이다.
둘째, 사람들이 자신이 타고난 지성을 발견하고 발전시키게 해주는 곳이다.
셋째, '어리석은' 질문, '옳은' 대답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넷째, 불손함, 생기발랄함, 역동성, 놀라운 것, 장난기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곳이다.
<책 내용중, p243>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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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8-28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들이 하나하나 참 좋습니다. 다양하게 읽고 쓰시네요. 대문에 걸어둔 서재인사말,
독서에 대한 정의도 과장없이 본질적입니다. 그냥 가려다 인사드리고 가는 게 옳겠다
싶어서 몇자 남깁니다. 종종 들러야겠습니다.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