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국영이 죽었다고?
김경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김경욱과의 두 번째 만남이 이뤄졌다. 신작 장편역사소설 『천년의 왕국』을 읽은지 얼마되지 않아 2년 전 출간된 그의 단편소설집 『장국영이 죽었다고?』를 읽은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밋밋하기 그지 없는 소설집이다. 그의 현재에서 과거로의 시간적 순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2년이라는 시간의 역행에서 2년만큼 퇴보했고, 시간의 순행에서 2년만큼 진보했다. 즉, 김경욱은 『천년의 왕국』으로 굉장한 진화와 발전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만큼 『장국영이 죽었다고?』는 재미없는 소설집이다.

  소설의 창조목적은 결국 인간에 대한 탐구로 귀결된다. 소설 속에서 소개되는 다양한 인간상들의 모습에서 독자는 나와 너를 보고 우리를 보며 우주를 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삶을 깊이 있게 통찰하는 동시에 자신의 삶을 거울에 비추기도 한다. 나의 독서경향도 이러한 보편적 문학의 특질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작가가 만들어 놓은 길을 걸어가면서 다양한 인간상들과의 호흡과 만남, 그것이야말로 내가 문학을 사랑하는 절대불변의 이유이자 목적이다. 

  이번 소설집에서의 김경욱표 인간탐구는 2%가 부족한 것이 아닌 2%만 만족했을 정도로 초라하다. 읽기 진도를 더딜게 하는 다듬어지지 않은 스토리 텔링, 화려한 외연적 수사를 뒷받침하지 못하는 밋밋한 플롯, 더이상 새로울 것 없는 설정과 인물에 대한 미지근한 천착, 등장인물과 주제선정의 획일화 등은 답답하기만 하다. 그나마 건질 단편이 있다면 표제작이자 최전선에 비치한 「장국영이 죽었다고?」와 신선한 구성과 사랑에 관한 주옥같은 표현이 돋보이는 「낭만적 서사와 그 적들」 뿐이다. 그 외의 단편들은 대부분 비슷한 수준에서의 미지근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말미작 「나가사키여 안녕」은 허무하기만 하다. 

  「장국영이 죽었다고?」에서 저자는 인터넷 채팅으로 대변되는 가상공간의 세계를 비웃고 있다. '장국영'이나 '아비정전'은 그저 극적 소재로 사용될 뿐이다. 만나기로 했던 약속장소에서 동일한 복장을 하며 매표소에 줄을 서는 수십 명의 사람들을 목도하는 주인공의 마지막 모습은 사이버 세계의 모순과 허구를 비아냥거리고 있는 듯 애처롭고 가련하기만 하다. 

  「낭만적 서사와 그 적들」은 꽤 훌륭한 단편이다. 주인공의 세 번에 걸친 우연이 서사의 맥을 이루고 있으며 틈틈히 주옥같은 사랑에 대한 명언들이 채워진다. 극장에서의 첫 번째 우연으로 연애를 시작하고, 은행에서의 두 번째 우연으로 결혼을 한다. 결국 이혼하지만 미술관에서의 세 번째 우연이 일어난다. 일식집에서의 네 번째 필연을 다짐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지금까지의 우연을 필연으로 미화하고자 하는 낭만적 상상의 의지를 엿본다. 이런 서사의 흐름에서 작가는 사랑과 관련된 주옥같고 정제된 표현들을 교차해서 들려주며 낭만적 서사를 완성하고 있다.
  사랑에 대한 낭만적 상상은 우연이 필연으로 비약하는 데 필요한 정족수를 터무니없이 줄여준다. 그리하여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단 한 번의 우연조차도 필연으로 미화하는 논리적 비약을 서슴지 않는다.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본디 사랑이라는 감정은 비약에 근거하므로.   <p98>
  사랑은 그녀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사랑이어서 연인과 헤어질 때 우리를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은 그녀를 잃었다는 슬픔이 아니라 사랑을 잃었다는 슬픔이다. 내가 사랑(욕망)한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를 향한 그녀의 사랑(욕망)이었다.   <p110>


  그 외의 단편들은 가벼움과 무거움, 냉정함과 강렬함이 부족하고 전복적이지도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지도 않는, 그저 미지근하기만 하다. 단편소설집이 갖는 다양성이라는 명확한 물리적 무기가 있음에도 다채롭지 못한 획일성에 다분히 재미없는 소설집이 되어 버렸다. 남는 것은 작가 자신의 개인기인 화려한 수사 정도다. 하지만 그 어떤 외연적인 힘도 내포적인 힘을 압도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것이 우주의 법칙이자, 문학도 예외가 될 수 없는 자명한 공식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의 마지막 '작가의 말'을 통해 고백한 김경욱의 언급은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지나간 문장의 안쓰러움이 다가갈 문장의 아득함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가갈 문장의 아득함이 지나간 문장의 안쓰러움에 대한 보상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연민은 지나간 문장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지나간 문장의 안쓰러움에 대한 연민이고 사랑은 다가갈 문장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다가갈 문장의 아득함에 대한 사랑입니다. 다가갈 문장의 아득함에 대한 사랑으로 지나간 문장의 안쓰러움에 대한 연민을 베어낼 것입니다. 베어내면서 조금씩 나아 가겠습니다.   <p304, 작가의 말>

  다가갈 문장의 아득함에 대한 사랑으로 지나간 문장의 안쓰러움에 대한 연민을 베어낼 것이라는 그의 고백이 철저하게 반영되어 2년 후 『천년의 왕국』이 완성된 것이 아니겠는가? 가난한 상상력의 창조물인 『천년의 왕국』에서 보여줬던 그의 내포적인 힘을 나는 지지한다. 더 나아가 다가갈 문장의 아득함에 대한 사랑으로 지나간 문장의 안쓰러움에 대한 연민을 베어내는 작업이 지속됨으로 말미암아 그의 문학의 미래가 진보와 진화로 점철되기를 기대한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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