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4일 거리
요시다 슈이치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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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이라 할 수 있는 아쿠타가와상 수상경력의 요시다 슈이치의 『7월 24일 거리』를 읽었다. 본래 이 소설의 존재도 모르고 있던 터에 『한밤중에 행진』을 구입하면서 함께 동봉된 이벤트도서로 만나게 된 것이다. 200페이지가 채 안되는 자그만 양장본의 이 연애소설은 꽤 섬세한 여인상의 묘사를 읽는 즐거움에 한달음의 속도로 읽을 수 있었다. 

  소설의 도입부터 주인공 혼다의 감상적 성격은 여실히 드러난다. 가본 적도 없는 포르투칼의 리스본이란 도시의 지형을 자신이 살고 있는 자그만 지방도시에 대입한다. 예컨데 버스를 타는 '마루야마 신사 앞'이란 정거장 이름을 '제로니모스 수도원 앞'으로 부르며, 재개발 덕분에 항구에 조성된 '물가 공원'은 '코메르시오 광장'으로 부르는 식으로 말이다. 일본의 소박한 지방 도시를 리스본 시가지와 완벽하게 겹쳐서 생각하는 혼다의 공상이 소설 전체의 연애의 맥을 암시하는 것처럼 인상적이다. 

  주인공 혼다는 남동생 코지의 여자친구인 메구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렸을 적부터 학교와 동네에서 최고의 얼짱이며 인기가 높은 남동생의 비쥬얼과 비교하여 메구미의 별볼일 없는 평범함에 경제적 손해가 계산되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코지의 아이를 갖게된 메구미 앞에서 냉담하기 그지 없는 혼다는 메구미의 솔직한 연애관을 듣게된다. 인기 많은 남자가 좋다는 것부터 <실수>하고 싶지 않은 의지에 이르기까지 메구미의 연애관은 혼다에게 웃음과 냉담함을 동시에 안겨준다. 

  정작 흥미있는 것은 메구미의 처지와 연애관이 혼다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혼다 자신도 고등학교 시절에서부터 동경해왔던 사토시와 여러가지면에서 어울리지 않는 관계가 아닌가? 혼다 자신이 메구미를 싫어했던 그 이유 그대로의 기준에서 사토시와 자신은 어울리지 않는 힘겨운 관계인 것이다. 메구미의 존재는 마치 혼다 자신의 거울임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혼다는 메구미를 싫어하며 거부한다. 그것이 자기 자신의 모습인지도 모른채.. 

  그토록 사토시를 동경하며 갈망해왔던 혼다.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사토시의 작은 마음을 얻은 혼다는 행복하다. 하지만 사토시의 마음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서지 않는다. 메구미에게 코지를 좋아하는 것은 힘겹고 버거운 일이며 <실수>로 단정하고 훗날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얘기하는 혼다. 비슷한 처지인 자신의 상황을 인지하면서 소설의 마지막, 사토시를 향해 도쿄로 향하는 혼다의 방향성은 역설적이지만 강렬하다. 
  "그러니까 나도, 한 번쯤은 실수를 해보겠다고."
  나는 열차에 올라타면서 그렇게 말했다. 실수하지 않기 내내 웅크리고 있는 것보다, 실수를 저지르고 우는 한이 있어도 움직여보려 한다.   <책 마지막, p188>

  한 사람의 존재를 색깔로 표현할 수 있을까? 예컨데 조용하고 침묵적인 사람에게 검정, 튀기 좋아하고 독특한 이미지를 풍기는 사람에게는 빨강, 여성스럽고 현모양처의 느낌을 준다면 분홍 등으로 말이다. 사실 색깔이라는 것은 다분히 시각적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시각적인 관점에서 보고 그 느낌 안에서 시각적으로 색깔화하는 것은 무리가 없는 흥미있는 것일게다. 하지만 외연적 비쥬얼뿐만 아니라 말과 행동, 습관, 가치관을 모두 포함하여 상징적으로 색깔화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다. 인간은 <시각적>인 것으로 단정될 수 없는 훨씬 고차원적 존재감을 지닌 영장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소설 속에서의 주인공 혼다와 사색적인 경비원 남자와의 인간 색깔론은 매우 흥미롭다.  

  하늘의 별은 아름답다. 맑은 날 시골하늘에서 보는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은 아름다움을 넘어 경이롭기까지하다. 그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대한 특질을 사유해 보자. 하늘의 별은 우리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며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갈급함과 그에 따른 최소한의 신비감. 그것이 <별>이라는 존재가 갖는 <아름다움>의 성격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어느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몸부림치며 갈망한다. 하지만 정작 내 것이 되었을 경우, 즉 원하는 것을 성취했을 경우, 신비감은 줄어들고 초심은 반감된다. 이런 측면에서 어쩌면 인간의 <사랑놀이>는 <신비감놀이>와 동의어로 견주어도 무리가 아닐 듯 싶다. 신비한 것에 대한 열망과 갈증, 그리고 그것을 성취한 뒤의 변화는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유한적이며 경제적인가를 보여준다 하겠다.
  "저, 댁에게는 무슨 색깔로 보이는데요?"
  나는 그를 마주 쳐다보며 그렇게 물었다. 그의 시선이 내 머리끝에서 발끝으로 내려간다. 그러고는 그만 입을 다물어버리고 만다.
  "안 보여요?"
  나는 슬쩍 장난을 치듯 물었다. 그는 안타깝다는 듯이 "네."하고 대답한다.
  "아마, 말을 해서 그럴 거예요. 말을 나눈 사람은 색깔이 안보이는 것 같더라고요."   <책 내용중, p153>

  과연 혼다는 사토시와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소설은 사토시에 대한 혼다의 방향성만을 확인한 채 함구한다. 어쩌면 혼다의 사랑은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이미 그녀도 그것을 알고 있을터. <실수>하지 않기 위해 웅크리고 있기보다는, <실수>를 저지르고 우는 한이 있어도 한번 해보려 한다!, 라고 다짐하는 혼다의 강렬한 의지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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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흙이 가르쳐주네 - 네이버 인기 블로그 '풀각시 뜨락' 박효신의 녹색 일기장
박효신 지음 / 여성신문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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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금요일 철야기도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어머니를 승용차로 교회까지 마중나간 적이 있었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우산을 챙기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배려였다. 차를 타고 오는 길에 어머니는 포도가 드시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야밤에 무슨 포도거니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평소 포도에 대해 심히 경도된 어머니를 인식할 수 있었다. 엄마는 왜그리 포도를 좋아해?, 라고 질문했다. 어머니의 답변은 내가 얼마나 도시생활 속에서 과거의 추억을 잊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깨닫게 해주었다. "니 어미가 포도 과수원집 딸이라는 것을 몰랐더냐?" 

  그랬다. 어머니는 대전시(그 당시 대전은 광역시가 아니었음) 유성구 반석동의 과수원집 딸이었다. 외갓집은 내가 어렸을 적에 동네에서 가장 큰 과수원을 운영하는 부호였다. 여름방학이 되면 외갓집에 가서 과수원을 구경하고 포도도 먹고 시냇가에서 수영도 하고 올챙이도 잡으면서 삼촌들과 자연을 만끽하는 것이 낙이었다. 하지만 내가 중학교가 되기 전, 외가집 근처에 군사기밀건물이 들어서면서 과수원은 사라지고 마을 전체가 아랫동네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러면서 과수원과 시냇가의 추억은 내 기억 속에서 차츰 사라졌고 성인이 된 작금에 이르러서는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졌던 것이다. 정말 아름다운 추억인데 말이다.  

  『바람이 흙이 가르쳐주네』를 읽었다. 한 여성의 농사꾼일기라고 할 수 있는데, 억 대 연봉을 받는 능력있는 중년여성이 대도시 서울을 탈피하여 순수 자연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용기와 결단에 심히 놀랐다. 충청도 예산에 내려와 직접 농사를 짓고 인간냄새를 맡으며 살아가는 저자의 모습이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으며 살아야지, 라는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정작 지긋한 연세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단하는 이들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자신의 머리 속에 그리는 미래의 꿈과 현실 속에서 부딪히는 환경, 그리고 자신의 열정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대도시 서울을 한 번 쯤 떠나고픈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서울>이라는 곳은 한강의 기적을 이뤄내며 세계적인 대도시로 발돋움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수도이기도 하지만, 앞만 보고 달려온 부작용도 적잖은 공간이기도 하다. 도시인들의 시각, 청각, 미각, 촉각, 후각 등의 모든 감각은 서울이라는 경직되고 인공적인 대도시의 환경에 맞춰져 있다. 시간 또한 철저하게 비지니스 아워에 맞춰져 있어 경제적 극대화만이 추구된다. <삶>이 아닌 <비지니스 아워>를 살 때에 자연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경제적 시계만이 우리를 지배한다. 이러한 곳을 탈피하여 순수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마음, 누구나 한 번 쯤 사유했을 만한 주제리라. 

  사계절 모두 각기의 맛이 있지만 저자는 가을이라는 계절에서 많은 풍성함을 얻고 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을>이라는 책의 소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농사꾼으로서 매년 풍성한 소출을 안겨주는 가을이 좋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리라. 봄, 여름에 농사지은 것들을 대부분 가을에 거둬들이니 땀흘린 대가를 확인하는 성취감과 기쁨은 두말할 나위 없으리라.  

  나 또한 개인적으로 가을을 가장 좋아한다. 봄은 미지근해서 싫고, 여름은 더워서 싫고, 겨울은 추어서 싫다. 하지만 가을은 시원하고 아름다워서 좋다. 단풍의 계절이자, 천고마비의 계절이자, 남자의 계절이자, 고독의 계절이자, 무엇보다 독서의 계절인 가을. 사계절이 뚜렷한 대한민국에 태어나 1년의 정확한 사등분을 차지하고 있는 가을을 완벽하게 누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과 조상들께 어찌 감사할 수 없으리요! 

  저자가 서울 생활을 접고 내려올 때 다짐한 세 가지 항목이 흥미롭다. 
  더 이상 인연은 만들지 말자.
  더 이상 미워하지 말자.
  더 이상 가지려 하지 말자.
사랑, 미움, 욕심.. 인간을 인간되게, 혹은 비인간되게 하는 인간사의 가장 큰 이슈가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오랜 기간의 대도시 생활을 통해 위의 세 가지가 얼마나 자신을 번뇌케했는지 고백하고 있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수많은 인연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상처가 발생하며, 사람을 미워하면서 마음의 그릇이 작아지기 일쑤며, 채우고 채워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욕심들로 인해 정신이 얼마나 피폐해지는가? 하지만 저자는 자신이 다짐을 하게 된 원인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사랑과 미움과 욕심은 어디에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즉 공간의 문제가 아닌, 철저한 자신의 문제였음을 깨달은 것이다. <어느 곳>의 문제가 아닌, <어떤 생각>의 문제. 인간을 번뇌케 하는 것들의 상당한 분량은 바로 자기 자신에서 연유한다는 깊은 통찰을 저자는 자연 속에서 깨닫고 있다.

  우리가 대도시의 생활에 지루하고 지쳐있음을 느끼는 이유를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 너무 많은 까닭이 아닐까? <결핍>의 문제가 아닌, <지나침>의 문제가 아닐까? 필요치 않은 것의 범람과 소소한 것에까지 경제적 대가가 필수불가결한 대도시와는 달리, 꼭 필요한 것과 있어서 나쁘지 않을 것에만 노출되는 <시골>의 매력이 저자의 시공간을 그리로 옮겼을지도 모른다.

  대도시 서울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세계적인 경제도시로서 분명 살기 좋은 곳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필요치 않은 것들이 너무 많다. 그것이 사람을 지치게 한다. 또한 <경제적 극대화>가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고 있다는 점도 삶을 번뇌케 한다. 왠지 모를 원초적이고 인간적인 냄새가 그립다. 순수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땅에서 느낄 수 있는, 바람과 흙이 가르쳐주는 웅숭깊은 맛과 향기. 그것이 그립다! 
 

[인상깊은 구절]
우주의 시간표는 약속된 시간을 어기지 않는다.
예정되어 있는 시간에 싹이 나오고, 예정된 시간에 정확하게 열매를 맺는다.
요즘 나는 자연의 시간에 내맡기는 법을 배운다. 뿌리고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배운다.
아무 말이 없는 땅, 그러나 참 많은 것을 가르쳐 주는 땅...
<책 내용중,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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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네스터를 죽이고 싶어한다
카르멘 포사다스 지음, 권도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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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경향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분명 고무적인 일이리라. 사실 고백하자면, 본래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었다. 최소한 작년까지는 인문학이나 경제&경영도서, 자기계발서, 기독도서 등의 부류들로 독서경향이 한정되어왔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내 머리와 가슴을 크게 두들기기 시작한 것은 금년부터가 아닌 듯 싶다. 그 어떤 자기계발서보다 깊이 있는 소설 한 권이 더욱 웅숭깊은 삶과 지혜에 대한 통찰을 비춰줄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시점부터다. 

  이런 추세에 기름을 붓는 심정으로 최근들어 편식하지 않고 다양한 독서를 즐기려 노력하고 있다. 주로 온라인서점 예스24에서 책을 구매하는 편인데 베스트셀러 중에서 반감이 생기지 않는 책과 오늘의 책 메뉴 중에서 구미가 당기는 책들이 대부분 내 지갑의 문을 열고 있는 형편이다. 더욱이 최근 한국과 일본을 넘어 동유럽소설까지 내 독서성향이 침투하고 있다. 얼마 전에 읽은 『차가운 피부』는 기대 이상의 강한 인상을 심어줬으며 최근 일간지에 대대적인 마케팅을 펼치고 있는 『바다의 성당』은 이미 구매하여 책장 속에서 읽히기를 기다리고 있는 책 중 하나이다. 또한 제목에서부터 강한 호감을 불러 일으켰던 『모두가 네스터를 죽이고 싶어한다』는 내 의지와 결정이 아닌, 블로그 이웃인 린드그렌님으로부터 책여행을 통해 소개받은 경우이기도 하다.

  『모두가 네스터를 죽이고 싶어한다』는 철저한 추리소설이다. 하지만 여느 추리소설과는 달리 사건을 해결해가는 형사나 탐정의 존재는 없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네스터를 비롯하여 사건과 관계된 몇몇 중심인물들의 이야기로만 추리의 서사가 완성된다. 복잡한 플롯이나 반전의 연속도 그리 크지 않다. 추리소설이되, 나름대로 차분하게 이야기가 진행되며 각 등장인물들의 독특한 인간상 묘사를 재치있고 흥미롭게 그린 것이 이 소설의 매력이라면 매력일 것이다.

  뜻하지 않게 냉동고 안에 갇혀 죽게되는 네스터의 현재의 시간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사건이 벌어진 동일한 시간과 장소에 있던 6명의 인물들. 소설의 시간은 과거로 회귀하면서 각 인물들과 네스터와의 인과관계가 마치 퍼즐을 조합하듯이 정리된다. 소설의 서사는 <네스터의 죽음>이라는 현재의 사건 결과가 과거의 사건의 원인으로 이동하면서 뒤엉켰던 실타래가 풀어지듯 인과성의 순서로 재정리된다. 하지만 결코 복잡하지는 않다. 

  <네 개의 T> -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이에 대한 설명은 논하지 않기로 함 - 의 존재와 네스터와의 상관관계가 이 소설의 핵심 키워드라 할 수 있다. 작가는 각 인물들을 다양하고도 섬서하게 묘사하고 있다. 호모와 동성애, 부정부패, 욕망과 불륜 등 지우고 싶은 과거와 현재의 비밀에 압박을 받고 있는 인간상들의 묘사는 흥미롭다. 각 인물들은 '사실이 알려지면 어떻하지?', '누군가가 이 비밀을 알고 있다면?' 이라 생각하며 자기 자신의 방어에 대해 사유한다. 이러한 사유는 보다 더 진전된 사악한 마음과 오해와 선입견이 결합되어 어두운 인간상을 형성한다.

  과연 그들의 생각은 옳았던 것일까? 비밀에 대한 발설 염려와 그것을 알고 있는 자의 발설 의지가 일치했던 것일까? 잘못된 인식과 지나친 이기심과 자기방어, 그리고 인생에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오해와 편견이라는 단어들.. 인간이라는 존재를 부정적으로 수식하는 단어들을 음미하며 소설을 마지막 장을 덮는다.

  <아가사 크리스티>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는 이 소설은 추리소설로서 크게 전복적이거나 크게 두근거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극도의 이기적 자기방어를 비교적 섬세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흥미있다. 추리소설이라는 기계적인 구성에만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닌, 보다 철학적이고 인간의 내면적인 심리묘사가 돋보이는 꽤 흥미있는 소설이라 할 만하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모든 <비밀>에 대해 알 필요는 없다. 비밀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호기심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을 알려고 할 때에 인생사는 꼬이고 문제가 발생한다. 이 소설이 주는 교훈을 <모르는 게 약이다!>라고 주장한다면 너무 쌩뚱맞을까? 하지만 우리네 인생에서 모르는 게 약이되는 경우가 매우 많다는 것은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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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피부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1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지음, 유혜경 옮김 / 들녘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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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일체 없음. 안심하고 읽어도 되는 서평임.

인간은 어떤 종족인가? 쉬운 질문일 수 있지만 질문의 의도를 파악한 채 반추하면 쉽지 않은 질문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연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오랜 시간동안 진행되어 왔다. 심리학, 미학, 철학, 의학 등의 다양한 학문이 인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수많은 종교들도 인간을 천착한다. 불교는 인간이 깊은 수련의 과정을 거쳐 신이 되는 종교이며, 기독교는 신이 인간을 찾아나선 종교이기도 하다. 그만큼 인간이란 종족은 만물의 영장인 동시에 이 우주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일 수 밖에 없는 고귀한 존재인 것이다. 

  인간이 지향하는 정신적 가치 중에서 가장 찬연하게 빛나는 것이 무엇일까? 사람마다 이에 대한 답변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지만, 인류의 교육과 종교 등에서 드러난 보편적 이상을 정리하면 <사랑>이라는 위대한 가치가 아닐까 싶다. 인간을 제외한 지구상의 그 어떤 동물도 <사랑>에 민감하며, 갈구하며, 구속된 종족은 없다. 모든 교육과 이상과 종교는 <사랑>이라는 거대한 카테고리 안에서 귀결된다. <사랑>은 동기에 질문하지 않으며, 인과관계로 설명될 수 없는 절대선이다.  

  그렇다면 사랑과 철저하게 배치되는 개념은 무엇일까? 미움이나 분노? 아니면 질투? 사실 미움이나 분노, 질투 등의 개념은 사랑의 정의를 외연적인 의미로만 해석했을 때 가능한 반의어들이다. 사랑의 웅숭깊은 내면적 정의에 대한 명확한 반의어는 <두려움>이다. 인간은 사랑이 결핍되었을 때 두려워하며, 두려움이 극대화되었을 때에 사랑이 결락된다. 사랑이 충만한 인간은 두려울 수 없고, 두려움이 충만한 인간은 사랑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이다. 즉, 인간은 자기 앞에 주어진 우주의 시공간에서 사랑과 두려움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기도 하다. <두려움>의 친구격인 <외로움>은 인간을 고독하게 하는 원인이다. 고독한 인간은 사회성 결핍에 빠지며 극도의 감정 불조절 인간으로 추락하기도 한다. 극도의 고독은 종국에는 폭력성과 잔인함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적잖이 충격적이고 폐륜적인 사건들이 여기서 연유하기도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심한 고독으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지구상에 66억의 인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만 있고 너와 우리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이는 인류의 불행이기도 하며 <불관용>이라는 또다른 성질의 절대악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절대선인 사랑을 지향하며 갈구하는 인간이 과연 선한 존재라 정의될 수 있을까? 답변을 함에 있어 꽤나 머뭇거림을 제공하는 질문이다. 나 또한 인간종족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내가 몸담고 있는 종족이 선하다고 말할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부의 개념이 정립되어가면서 경쟁논리가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되었고 인간은 점차 인간 본연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물질만능주의의 만연은 인간성을 상실케 했고 극도의 이기심과 거짓을 양산하였다. 전쟁과 테러, 성적 타락과 가정의 파괴, 양심의 실종 등 인류는 온갖 부패함으로 가득차 있다. 인간이 아닌 비인간, 또는 비인간이 아닌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은 지금도 냉혹하게 진행되고 있다. 

  알베르트 산채스 피뇰의 『차가운 피부』는 이러한 인간의 사랑과 고독, 미움과 두려움, 잔인함과 폭력성을 깊이 있고 수준 높게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저자는 그의 처녀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능숙한 전개로 원초적 인간의 내면상을 통찰하고 있다. 세상에 절망하고 소통을 거부한 채 남극의 외딴 섬에 도착한 한 남성화자를 통해 절대 고독과 소통 불가함이 설정된다. 원초적인 공포에 앞선 두려움과 그로테스크한 상황에서 뜻하지 않게 벌어지는 사랑과 미움,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내재된 잔인함과 폭력성 등 인간의 악한 내포적 성향들이 다채롭게 출현하고 있다. 

  <차가운 피부>는 징그럽다 못해 섬뜩하다 . 소설을 읽은 후 차가운 피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면 닭살이 돋을 정도로 섬뜩하다. 한 남자의 1년여의 섬에서의 생활을 통해 한 인간의 고독이 외로움을 만들고, 그 외로움의 잘못된 전이가 기괴한 사랑의 감정을 만들며, 이에 소통의 불가능이 합쳐지면서 미움과 비인간성의 극대화로 실현되는 것을 특이한 소재와 공포스러운 분위기의 연출로 그려낸 수작이라 할 만하다.  

  제목 <차가운 피부>를 다시 한번 생각했다. 사실 인간의 피부는 전혀 차갑지 않다. 오히려 따뜻한 피부다. 인간은 위대한 온혈동물의 포유류로서 가장 발달된 두뇌구조를 갖고 있는 직립종족이다. 하지만 때와 상황에 따라 가장 차가운 마음을 지닌, 냉혈한 종족이기도 하다. 아마도 알베르트 산채스 피뇰은 현세에 존재하지 않는 비현실적인 가상의 <차가운 피부>를 통해 현실 속에서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냉혈한 <차가운 인간>종족의 본성을 그림으로써 인류에게 얼마나 <사랑>이 결락되었는지를 말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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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 유쾌한 발견
성석제 지음 / 하늘연못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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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는 섬세한 관찰력을 가진 작가다. 그 관찰력이라는 것이 제법 흥미롭다. 옆집 강아지부터 여행중의 맛집 간판의 문구, 방문한 치과의사의 외모, 과거 명시의 어느 한 구절에 이르기까지 그의 관찰력은 다양함의 다양함의 다양함의 쌩뚱함이다. 일상에서 놓치기 쉬운 것을 끄집어 내서 글의 재료로 삼을 뿐만 아니라 적잖은 지식의 내공을 풀어놓기도 한다. 그의 글은 엉뚱하기도 하고 유쾌한 면도 있으며 신선하면서 쌩뚱맞다. 순간적으로 발견한 것들과 세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상식 이상의 지식들을 수다스럽게 이야기한다.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 유쾌한 발견』도 이러한 성석제표 브랜드를 여과없이 보여주는 책이다. 

  이미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을 통하여 성석제가 굉장히 뛰어난 관찰력을 가진 작가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소소한 일상에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잊지 않고 메모하면서 활자로 풀어놓는다. 문체 또한 유쾌하고 유머러스하기 그지 없어 독자는 그의 글에서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이 <재미>있어 한다. 그의 최근 출간작인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는 바로 이러한 그의 특질에 더하여 범박한 지식을 총망라한, 그야말로 책속의 책이라 할 만하다.  

  「이야기의 힘」, 「관점에 따라 다르다」, 「오후의 국수 한 그릇」, 「문자의 예술」, 총 4개의 큰 카테고리를 구분하여 수없이 많은 내용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마치 코믹한 백과사전이라 정의할 만큼 그의 경험담과 지식이 특유의 유머러스한 필치에 양념되어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특히 「오후의 국수 한 그릇」편에서는 음식의 기원 및 맛나는 음식에 대한 소개 등의 풍성한 음식에 대한 경험과 정보를 얘기하고 있어 읽는 내내 입 안에서 침샘의 활성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더불어 「문자의 예술」편에서는 재미있는 <문자>이야기를 다양하게 들려주고 있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문자의 예술」편을 꽤 흥미있게 읽었다. 성석제가 언급한대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은 세계 최고수준의 문자라 할 만하다. 한글의 과학성과 예술성은 이미 국내외의 저명한 전문가들로부터 공감되고 있다. 세계의 공용어인 영어가 동사가 발달한 언어라면, 한국어는 형용사가 발달한 언어이다.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으나,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데에는 적잖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 번역계의 정설이다. 한국어의 깊이있고 다채로운 형용문구를 영어의 어휘로는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뛰어난 문자를 지녔음에도 노벨문학상을 단 한 번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점은 씁쓸함을 넘어서서 억울하기까지 하다. 번역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국력의 신장과 자국문학의 사랑을 고양시킬 수 밖에 없는 노릇이리라. 

   문학은 다양한 기능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비단 문학의 교화적 기능이니 쾌락적 기능이니 하는 전문적 문구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문학은 오롯하게 인간을 자극한다. 성석제의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그의 글이 독자들에게 부담 없고 걸죽하게 <재미>와 <지식>을 제공한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의 글은 가벼움과 무거움의 높낮이가 교차되지 않으며, 냉정함이나 강렬한 느낌도 추구하지 않는다. 전복적이며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재미>가 있다. 그것이 성석제표 활자의 매력이자 강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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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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