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년 그러했듯이 올해 읽은 책 중에서 '베스트 5'를 선정해 이웃님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2010년은 이런저런 이유로 책을 읽은 만큼 서평을 남기지 못한 해였다. 개인사도 많았고 게으르기도 했다. 형편없는 리뷰어의 아마추어리즘을 가감없이 보여준 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한 해를 마무리하며 책 읽은 리스트를 반추하게 된 것은 다행스럽다 하겠다.



1.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김영사, 2010

 


  2010년 '올해의 책'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로 선택했다. 현재 거의 모든 온라인서점에서 압도적으로 금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고 있다. 이
현실성에 부담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문서가 장기간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기현상에 무턱대고 경도된 것만은 아니다. 내가 이 책을 선정한 이유는 간명하다. 책 자체가 훌륭하기 때문이다. 모든 평가의 기준은 본질이다. 

  2010년은 각계각층에서 말로써 정의를 수없이 논한 해였다. 갑작스레 대통령께서 어울리지 않게 '공정한 사회' 운운하며 한국사회에 정의론을 부르짖었다. 또한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치러졌다. 이런 배경에서 이 책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하루키의 종합예술문학 완결판도, 대한민국 자본주의사의 역동성을 그려낸 황석영의 장편도, 신경숙의 매력적인 청춘소설도 이 한 권의 인문서를 압도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책은 과연 무슨 마력을 가졌을까.

  '정의(justice)'는 우리사회의 지속된 당위當爲이다. 정치 발전과 함께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아직도 한국사회는 정의에 대한 '당위'가 '존재'로까지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어느 사회든 공정성의 집행이 완벽할 수는 없다.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는 완전하지 못하다. 인간 속에 내재된 한계와 실수의 유전자는 사회의 오류와 굴곡을 발생시킨다. 이는 유한적이고 비논리적인 인간성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인간의 '방향성'만큼은 항상 올곧음을 지향해왔다. 역사를 깊고 넓게 보면 인간은 옳은 방향으로 가고자 노력했다. 에드워드 카의 주장대로 역사는 언제나 발전해왔고 그 바탕에 인간 삶의 긍정적 진보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샌델 교수는 다양한 사례와 흥미로운 토론거리를 철학적 사유의 공간 속으로 밀어넣는다. 상당수 미국적 예시에 기댄 부분과 기존의 철학 이론 위주로 풀이한 부분은 '한국인의 정의론'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저자가 안내하는 아리스토텔레스, 밀, 벤담, 칸트, 롤스의 세계를 관통해가다 보면 어느덧 가까워지는 정의의 본질에 대해 자못 진지하게 사유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막장까지 정의란 무엇인지 명쾌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에게 끊임없이 질문한다. 정의는 진정 무엇인지, 정의에 대해 어떤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지, 정의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명제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즉 독자에게 저자 자신의 정의론을 강요하기보다는 정의에 대한 올곧고 열정적인 태도를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정의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과 질문이이야말로 마이클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의 핵심이었을지 모른다.

  정의가 꼭 필요한 사회를 살고 있는 독자들에게 그에 대한 바른 이해와 겸허한 태도를 견인했다는 점, 그리고 정의의 붐을 만들어내며 공정한 사회 건설을 위한 진지한 사유를 추동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올해의 책이 되기에 한 치의 부족함도 없다.



2. 김대중 자서전, 김대중, 삼인출판사, 2010



  <김대중 자서전>은 한 사람의 일대기로 갈무리하기에는 너무 방대한 텍스트다. 한 인물의 전기를 넘어서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독자를 밀어넣는 힘이 있다. <김대중 자서전>이 담은 시공간의 크기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1920년대의 일제식민통치부터 좌우 이념대립이 극심했던 해방공간을 거쳐 민족 최대의 비극인 한국전쟁, 군부독재와 민주화투쟁, 5·18광주민주화운동과 6월항쟁, 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주요 고비를 온몸으로 건너왔던 김 전 대통령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그렸다.

  이 책을 평하는 데 있어 정치적 견해차이는 배제되어야 한다. 진보든 보수든, 김대중을 지지했든 비판했든, 그 어떤 입장에 서있든지간에 인간 김대중의 족적을 훑어보는 일은 한국 민주주의의 오욕의 현대사를 살피는 일과 동일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좁게는 김대중이라는 한 위인의 자전이자, 넓게는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의 관통이라는 측면에서 <김대중 자서전>은 반드시 읽어야 할 텍스트다. 실로 깊고 풍성하며 방대하다.


3. 마음짐승, 헤르타 뮐러, 문학동네, 2010




  노벨문학상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정신적 압박은 책을 평가하는 내 기준의 자장 밖에 있다. 세기의 대작가 헤르만 헤세를 비웃었고, 헤럴드 블룸이 극찬한 코맥 메카시의 <로드>를 잘근잘근 씹었다. 외부, 즉 타자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내 독서기호와는 무관한 것이다. 사르트르가 역설한 '소설적 자유(Romanesque liberte)'는 분명한 진리다. 책의 주체는 작가도 아니고 타인도 아니며 책을 집고 있는 현재의 당사자, 바로 자기자신이다.

  1994년 오에 겐자부로의 수상 이후 노벨문학상 수상작품에 대한 관심이 녹록지 않았다. 본래 한국문학을 즐겨 읽기에 그리 많은 수상작을 만나보진 못해왔다. 그중 몇몇 눈에 띄는 작가에 호감을 가져왔는데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헤르타 뮐러의 소설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음짐승>을 읽고 응축된 시적 언어가 어떻게 산문화될 수 있는지 놀랐다. 소설은 독재 시절의 루마니아의 현실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남의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비슷했던 고통의 시대를 살아가는 네 청춘남녀의 이야기가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작가 자신의 자전적 내용의 투영과 독특한 전개구조, 응축된 시정詩情과 세밀한 문체는 독자로 하여금 고통과 공포의 시대의 아픔을 읽어내게 하는 가슴 쓰라린 '완성도'가 된다.



4.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문학동네, 2010




  문학평론가 조영일은 이 소설에 대해 하루키 소설의 전형적인 아류라며 혹평했다. 특히 <상실의 시대>를 신경숙적으로 재구성하여 표절한 텍스트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대로 따온 1차원적 표절은 아니더라도 작품 전체를 뒷받침하는 다양한 유사성이 하루키 아류의 증거라고 외치는 조영일의 지적에 나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다른 장르도 아니고 문학에서 상징, 등장인물, 서사구조의 지엽적 유사성을 이유로 표절 운운하는 그의 오류가 심히 불편하다. 조영일의 주장대로라면 이 세계의 책들 3할 이상이 표절로 증발해버리게 된다.

  신경숙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와 본질적으로 다른 텍스트다. 소설의 주제가 다르고 작가의 태도가 다르며 독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이 다르다. 신경숙과 하루키는 전혀 다른 소설가다. 신경숙은 하루키 소설에서 흔하게 등장하는 섹스씬 하나 없이 청춘시절의 혼란과 아름다움을 세련되게 그려냈다. 더욱이 발군의 세밀한 문체는 신경숙 문학의 보석이다. <엄마를 부탁해>의 폭풍이 워낙 강렬해서 신간이 내뿜는 불빛이 상대적으로 밝지 않아 보였을 뿐이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충분히 강렬하고 유려하며 매력적인 소설이다.


5. 불편해도 괜찮아, 김두식, 창비, 2010



  최근 몇 년간 인권이 후퇴되었다고들 한다. 일견 공감한다. 미네르바가 구속되었을 때 같은 글쓰는 블로거로서 겁났던 게 사실이다. 이 정권 들어서 국가가 무서워 어디 맘 편히 글 쓸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아직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새삼 자유와 인권을 생각하게 된 지난 몇 년이었다. 이는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김두식의 <불편해도 괜찮아>는 동성애자, 여성, 장애인, 노동자, 청소년 등 사회 약자들의 인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권이라는 묵직하고 딱딱한 주제를 영화나 드라마의 이야기를 통해 풀어냄으로써 독자에게 흥미를 유발시킨다. 저자 특유의 재치와 맛깔스러운 문장은 독자에게 흡입력을 더한다. 다양한 예시를 통해 인권의 소중함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소개함으로써 다양성을 배가했다. 요컨대 <불편해도 괜찮아>는 숭고한 인권의 가치를 흥미롭지만 가볍지 않게 풀어낸 책이다. 책 자체도 훌륭하지만 시의성이라는 측면에서 응당 2010년 올해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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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권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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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코엘료와 만났다. 그의 소설을 즐겨 읽는 편이다. 전작이라 할 만큼 나는 그의 모든 소설들을 탐독해왔다. 『연금술사』는 삶과 꿈에 대한 내 자아의 현재상을 궁구하게 했다. 『베로니카 죽도록 결심하다』는 삶과 죽음을 탐색하면서 현존에서의 사랑이 얼마나 값비싼 것임을 교훈했다. 『순례자』는 비범한 삶은 언제나 평범한 사람들의 길 위에 있음을 일깨웠다. 『포르토벨로의 마녀』는 신의 여성성을 탐구함으로써 모성이라는 아가페의 인간적 현현을 그렸다. 그리고 그 위대함 앞에 고개를 숙이게 했다.

  코엘료의 모든 작품들은 특유의 신비스러운 문체로 신과 자아를 동시에 천착하는 묘한 마력을 가졌다. 그것은 일부 기자들이 비판하는 '통속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며 우주의 원류를 찾고자 하는 신과 사랑에 대한 코엘료의 진지한 성찰로 볼 수 있다. 코엘료는 항상 진지했다. 신의 여성적 면모를 조명함으로써 삶과 우주에 대한 입체적 본질을 탐구했다. 무엇보다 꾸준한 자아찾기 과정 속에서 자신의 진본을 찾아 헤매는 주인공의 모습은 언제나 인상적이었고 빛났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기나긴 내적 여행을 떠나는 주인공의 모습에 어느덧 내 자신의 현재성을 투영시키며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요컨대 코엘료의 텍스트를 읽는 것은 신비로운 여행을 떠나는 것과 동일한 의미였던 것이다.

  이러한 독특한 코엘료식 허구는 전세계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코엘료 문학은 하나의 '브랜드'다. 독특하고 아름다운 문체, 신비스러운 네러티브, 신을 향한 끊임없는 탐구, 여성성에 대한 집요한 관심, 자아를 찾는 지속적 열정 등은 코엘료 소설이 가진 일관적인 특징이다. 소설가로서 자신만의 오롯한 개성을 확립한 것만으로도 코엘료가 이룬 문학적 성취는 가늠된다.

  그의 최신 장편소설 『브리다』는 기존의 코엘료 소설의 특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집필시기로 본다면 『연금술사』 다음에 놓이게 되지만 출간이 늦어져 2008년에서야 독자의 손에 잡히게 되는 작품이다. 그런 만큼 그의 대표작 『연금술사』의 주제의식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 다음 작품들을 이어주는 교량의 역할을 담당한다. 코엘료 문학의 키워드인 자아의 신화, 신성 차원의 사랑, 인간 본질의 탐구를 소설 『브리다』는 오롯하게 담아내고 있다. 보다 집약된 코엘료 소설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브리다』는 코엘료가 순례중에 만난 브리다 오페른이라는 여성이 실제로 겪은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다. 마법을 배우기 위해 숲속의 마법사를 찾아나선 주인공 브리다의 강렬한 열정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코엘료표 서사의 전형을 보여준다. 소설 속에서 브리다가 얻고자 하는 마법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로 정의된다. 마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주술적이고 종교적인 행위들이 수없이 반복된다. '태양'과 '달'은 브리다가 이해해야만 하는 마법 전통의 두 가지 원류로 소개된다. 브리다의 첫 마스터인 숲속의 현자와 두 번째 마스터인 위카는 이야기를 추동하는 중심인물로 소설 속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태양전승과 달전승으로 구분된 마법의 학습과정은 브리다의 숨겨진 재능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소울메이트'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며 더욱 역동성을 발한다.

  브리다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두 마스터는 마법을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 건너가게 하는 다리"로 풀이한다. 브리다는 마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자신의 소울메이트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브리다가 깨닫고자 하는 마법의 신비한 본질과 끝내 알게 되는 소울메이트의 존재는 코엘료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연장선상에서 상호유사성을 가진다. 그것은 바로 '사랑'으로 명명되는 우주상의 최상위 가치로 연결되는데, 이를 코엘료는 매우 단순한 서사를 통해 유치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려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 그것은 표면적으로 마법을 정의하지만 본질적으로 사랑을 의미한다. 서로 다른 차원을 연결하는 힘이자, 자기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는 근원적인 깨달음이며, 세계를 올바르고 직선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지혜의 광휘가 바로 사랑인 것이다.

  코엘료는 언제나 그랬다. 그는 그의 문학사에서 사랑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표명해왔다. 전통적 신성을 거부하고 신의 양성적 면모를 묘사함으로써 사랑의 해석이 지엽적인 부분에서 호도되는 것을 차단했다. 또한 끊임없는 수련의 과정을 통해 자아의 진실된 본질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성찰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의 기초가 자아애自我愛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일깨웠다. 더 나아가 죽음이 갖는 찬란한 속성을 파헤침으로써 죽음에 대한 자각을 치열한 삶의 생명력으로 환원시키기도 했다. 코엘료식으로 따진다면 삶과 죽음, 행복과 열정은 모두 아가페의 또 다른 현현이다. 요는, 그 모든 것이 사랑에서 통합되고 사랑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네 인물의 사랑의 방향성은 인물 사이의 독특한 긴장의 간극을 만들어내며 사랑의 의미를 점차적으로 완성시킨다. 브리다, 로렌스, 마법사, 위카는 각각 서로의 소울메이트로서 얽혀 있다. 자신의 소울메이트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과정에 놀라움을 갖게 되고 자신이 상대의 소울메이트가 되지 못하는 엄연한 현실에 고개를 떨구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울메이트는 매우 오래전, 어쩌면 시간이 존재하기도 전에 이미 운명적으로 계획되어졌을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예정되었다는 것은 신의 개입을 의미한다. 인간에게는 지극히 상식적인 인과관계로 생성되지만 우주의 이치상으로 미리 계획될 수밖에 없는, 철저히 신의 디테일로 발현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코엘료가 풀이한 사랑의 메시지는 하루키의 세계와도 닿아 있다. 하루키는 그의 최신 베스트셀러 <1Q84>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인생에는 구원이 있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매우 독특한 전제를 단다. 그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라고 말이다. 이는 사랑의 중요한 속성을 함의한다. 그것은 '정신'의 문제이자 '본질'의 문제이며 '차원'의 문제이다. 사랑은 서로 다른 은하계를 관통하는 힘이다. 사랑은 공간을 무력화하고 시간을 굴절시킨다. 하루키가 소설 <1Q84>에서 그린 세계가 그랬다. <1Q84>의 여주인공은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의 죽음은 슬프지만 비극적이지는 않다. 이유는 사랑의 결과이기 때문에, 더 나아가 진정한 사랑이 내포하고 있는 영원성으로 물리적 시간의 유한성을 상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소설 『브리다』에서 그려진 마법 세계의 진본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 그것은 종내 브리다가 알고자 했던 마법의 본질이었고 사랑의 정의였다. 인간은 분명 사랑을 통해서만이 차원의 간극을 넘어서는 초월을 경험할 수 있다. 물질이든 정신이든 우주의 그 어떤 것도 사랑을 대체하지 못한다. 사랑은 회귀하지 않고 환원될 수 없으며 치환되지도 않는다. 사랑은 사랑이다. 코엘료의 비블리오그래피(bibliography)는 항상 사랑에 관대했다. 그것이 삶과 죽음, 자아와 세계, 신과 열정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소설 『브리다』의 문학적 감동이 바로 여기에 있다.

  끊임없이 자신만의 색채로 사랑을 탐구하는 소설가 코엘료가 나는 좋다. 그가 사랑에 관대한 것처럼 나도 사랑에는 한없이 관대하다. 사랑을 그린 텍스트에 나도 모르게 관용의 수치는 무한대를 가리킨다. 어쩔 수 없다. 코엘료의 최신작 『브리다』에 대해 나는 아낌없이 별 다섯 개을 선사한다.

 
  창조의 정수髓는 오직 하나야. 그리고 그 정수를 사랑이라 부르지. 사랑은 세상 곳곳에 여러 개로 흩어져 있는 삶의 경험을 응축시키기 위해, 우리를 다시 하나로 모으려는 힘이야.   - p.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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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다 보면, 어찌 글을 이리 잘 쓸까, 하는 탄성이 나올 때가 있다. 소설이든 비소설이든 세계의 역량있는 작가들은 발군의 필력으로 독자를 압도한다. 특히 몇몇 작가는 글에 신성을 불어넣은 듯 마법적인 힘으로 읽는이의 심장을 뒤흔든다.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는 멋지고 아름다운 글로 인해, 그리고 그것이 주는 삶의 교훈으로 인해 우리는 오늘도 책 속에 파묻혀 산다.

  책 관련 블로그를 오픈한 지 어느덧 사 년 차가 되었다. 책을 읽고 후기를 남기는 것은 내 부족한 책읽기를 보완하고 정리하기 위함이요, 타인의 사유와 견해를 참고하기 위함이다. 글쓰기는 깊고 풍성한 책읽기를 견인한다. 한 권의 책이 주는 총체적 의미와 부분적인 가치에 대해 글을 쓰며 정리하게 된다. 더 나아가 블로그라는 공간에 오픈함으로써 내 생각이 정답이 아님을 인정하고 타자를 통한 다양성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된다. 독서에 왕도는 없기에 고집을 꺾고 보다 겸허한 자세로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블로그 이웃님들로부터 글쓰기와 관련된 문의를 종종 받는다. 서평의 왕도나 글 잘쓰는 비법에 대해 물어올 때면 나는 한없이 민망해진다. 내 자신조차 미천한 글쓰기를 하고 있는데 어찌 타인에게 조언할 수 있단 말인가. 이웃님들의 질문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면서도 한 가지 드는 생각은 "좋은 글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의문이다. 왜 많은 사람들이 글을 잘 쓰고 싶어할까. 그렇다면 과연 좋은 글이란 무엇일까.

  온라인상의 글을 읽다 보면 문득 불편해진 내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글은 필자의 창조물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하나의 창조적 행위이다. 필자의 생각과 경험과 철학을 필자만의 필체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글에는 필자의 사상과 개성이 묻어있을 수밖에 없다. 글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 '누군가'의 개성이 글의 존재성을 결정한다. 최소한 '논설'의 규격을 갖추고 있는 모든 글은 철저히 필자의 주관에 의해 창조된다. 필자의 주관은 논설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좋은 글이 될 수는 없다.

  서평을 포함한 모든 리뷰는 하나의 논설문이다. 논설문이라 함은 어떤 문제에 대하여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을 조리있게 풀어 밝히는 글을 의미한다. 이 정의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두 가지다. 먼저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이 목적이 되어야 하고, 그 다음 그것을 '조리있게 풀어 밝히는' 글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주관적 견해를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피력하는 것이 논설문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뼈대가 되는 것이다. 즉 글은 '주관'의 목적을 '객관'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글은 타자에게 읽힘을 전제로 한다. 더욱이 온라인에서 씌여지는 모든 글은 불특정다수가 읽는다는 것을 염두한다. 그것은 필자 자신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글이란 것은 내 생각의 갈무리를 넘어 타자를 향한 메시지이자 소통이다. 태동적으로 글은 '사회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필자로서 갖추어야 할 예의와 태도를 이끌어낸다. 동일한 소재라 하더라도 필자에 따라 글의 논지와 색깔은 분명 다르다. 다른 만큼 빛나고 개성이 있을수록 멋지다. 다양성은 선善이 된다. 하지만 그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글에 대한 최소한의 규격과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기본이고 명확한 주관 피력, 조리있고 논리적인 서술, 합리적인 논거, 풍부한 어휘력, 매끄러운 문장력 등은 글과 읽는 이에 대한 예의다. 그리고 그것은 필자의 주관적 개성과 함께 좋은 글을 완성하는 전제조건이 된다.

  온라인상의 적지 않은 블로거들이 바로 이 부분을 망각한 채 리뷰라는 카테고리를 마치 자신의 일기나 낙서 정도로 오해하고 있는 듯하다. 더 나아가 솔직한 글이 좋은 글이라며 읽는 이에게 가져야 할 신성하고 묵직한 최소한의 책임감조차 결여된 모습도 눈에 띈다. 물론 솔직한 건 좋은 것이다. 글에서 정직은 매우 중요하다. 솔직함이 언어를 힘있게 한다. 하지만 솔직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다. 어휘와 문장을 넘어 하나의 완성된 글까지 텍스트는 다듬어져야 한다. 잘 써야 하는 것이다. 잘 쓴 글이 좋은 글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좋은 글은 언제나 잘 쓴 글이었다. 앞서 언급했지만 글은 타자에게 읽히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조악한 문장을 솔직함이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로 가리면서 큰소리 치는 이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많다. 그들의 오해가 너무 불편하다. 노력과 예의가 결락된 자신의 혼잣말 수준의 낱말 조합을 좋은 글이라고 호도하며 착각에 빠진 이들에게 나는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을 조언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는 것만큼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건 없는 듯하다. 글쓰기는 철저히 훈련으로 발전될 수 있다. 언어에서 말하기는 선천의 영역에 기대지만 글쓰기는 후천의 영역에서 다듬어진다. 자신의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틀린 채 비논리적인 방식으로 형편없는 문장에 담아내면서 자신이 괴테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나는 일갈한다. '솔직'과 '충격'이라는 요행보다 깊이있고 논리적인 글쓰기를 통해 책과 벗하고 인간과 소통하기를.

  솔직함으로만 작가가 된 이는 없다. 아직도 세계의 수많은 작가들은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자신의 필력을 손보고 다듬으며 고군분투하고 있다. 각고의 노력을 통해 언어의 정수를 걸러낸다. 어떨 때는 하루 내내 한 문장도 쓰기 어려워 고통스러워 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집필한 글을 수 년 동안 탈고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거듭된 탈고도 맘에 들지 않아 세상에 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글쓰기는 그런 것이다. 고통이다. 신성한 것이다. 나를 보는 동시에 타인과 소통하고 의식하는 행위이다. 글을 향한 이러한 경외한 마음이 없다면 좋은 글은 절대로 만들어질 수 없다.

  니체는 피로써 쓴 글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는 글쓰기의 '집중中'과 '성의意'를 의미한다. 언어의 정점인 동시에 언어를 넘어선 세계는 피 없이는 불가능하다. 좋은 글에는 반드시 필자의 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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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사랑해도 괜찮아
김별아 지음, 오환 사진 / 좋은생각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소설가가 쓴 에세이를 즐겨 읽는다. 작가를 소설을 통해 만나는 것과 에세이를 통해 만나는 것은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소설은 소설가의 강점과 장점이 특별하게 발현되는 텍스트다. 허구 세계의 창조자로서의 기술과 역량이 한 편의 소설 속에는 온전히 담겨져 있다. 반면 에세이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 작가가 살고 있는 현실 그대로의 이야기가 솔직하고 담백하게 고백되기 때문이다. 작가적 신비주의는 허물어지고 한 사람의 평범한 삶의 모습과 철학이 진솔하게 펼쳐진다. 작가의 '쌩얼'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의 세계를 픽션과 논픽션으로 함께 만나는 일은 긴요하다. 예컨대 내가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하면서도 그의 에세이를 동시에 탐독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저런 다양한 에세이를 만나다 보면 유쾌하게 읽어지는 게 있는 반면 불편하고 지루하게 읽어지는 게 있다. 그것을 가르는 지점은 작품의 소재나 작가의 필력이 결코 아니다. 작가가 보고 있는 '관점'의 깊이다. 어떤 글은 작가가 오랜 사색으로 정제해낸 생각을 주옥같은 언어에 담는 독백적 글쓰기의 정수를 보여준다. 반면 어떤 글은 본인의 사유와 신념이 아닌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세계의 잠언을 끌어다 놓는다. 전자가 창조라면 후자는 스크랩이다. 에세이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다. 자신의 삶과 일상, 인간과 사랑, 철학과 신념 등에 대해 현실의 문체로 쓰여지는 글이다. 그렇기에 에세이마다 고유한 개성이 묻어있을 수밖에 없다. 그 '개성'을 포착하는 일은 에세이를 읽는 가장 큰 묘미이기도 하다.

  평소 소설가 김별아에 대해 녹록지 않은 관심을 피력해왔다. 꾸준한 장편 집필과 역사에 대한 진중함, 흥미있고 신선한 소재 선택과 이쁘고 다듬어진 문체 등은 소설가 김별아의 문학적 역량을 가늠하는 긍정적 요소들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 작품의 퀄리티가 작가의 존재론적 크기를 결정한다. 그간 김별아 문학에 대해 긍정적인 코멘트를 일관되게 표현해왔던 나로서는 그의 신간을 꾸준히 주목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내 기호의 연장선상에서 그의 매력적인 에세이 한 권이 놓여 있다.

  『죽도록 사랑해도 괜찮아』는 소설가 김별아의 삶과 사람과 문학에 대한 단상을 담은 수필집이다. 작가가 '좋은생각' 웹진에 연재한 북 에세이와 2005년부터 3년간 캐나다에 체류하며 쓴 시 감상문을 합쳐 신간으로 출간했다. 책과 시를 읽으며 곱씹은 삶과 사람에 대한 단상이 작가 특유의 이쁜 문체로 오롯하게 실려 있다.

  책의 구성은 간명하다. 작가는 자신이 인상깊게 읽은 시와 소설을 소개하면서 작품의 감상에 젖기도 하고 삶의 지혜를 추출하기도 한다. 중간 중간 수록된 사진들은 자동차 잡지 사진기자 오환의 '낙산 연작' 중 일부이다. 오환의 사진은 김별아의 텍스트를 보완하고 수식한다. 김별아의 진솔한 단상들은 오환의 사진을 견인하고 추동한다. 글과 사진의 균형있는 배치와 적절한 호흡으로 인해 생명력 있는 에세이집 한 권이 완성되었다.

  책 속에는 소설가 김별아의 문학관이 잘 반영되어 있다. 특히 시詩에 대한 강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작가는 역설한다. 시는 언어의 정점인 동시에 그 언어를 넘어선 세계라는 것을. 시인에 대한 콤플렉스는 다수 소설가들의 가슴속에 내밀한 형태로 숨겨져 있는 듯하다. 많은 소설가들이 시인이 되지 못한 자신의 처연한 한계에 한탄하며 시인의 천재성에 대해 찬탄스러운 언어로 헌사하기 때문이다. 이는 김별아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어느 누구보다 시를 선망하고 사랑했지만 결국 시인이 되지 못한 한 소설가의 존재적 감상이 에세이 속에 잘 젖어 있다.

  김별아의 작가적 번민 또한 책 곳곳에서 확인된다. 제 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미실』의 성공 이후 작가로서의 본질보다 외연에 유혹된 자신의 모습을 자각한다. 그리고 끝내 캐나다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외유가 고백된다. 먼 곳에서 바라보는 '있던' 곳의 풍경은 어떨까. 있던 자리를 떠나야만이 자신의 진본을 보는 시각이 굴곡되지 않는 법이다. 김별아는 소설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보다 겸허하고 객관적으로 천착하고 싶었던 것이다. 잠시의 들뜸을 경계하며 소설가로서의 존재론적 고민을 꾀하는 김별아의 기백이 멋지게 와 닿는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작가'라는 존재가 갖는 디테일에 적잖이 놀라게 된다. 소소한 것에서 특별함을 보고 일상의 단상에서 명언을 추출한다. 그들의 세밀한 관찰과 다상량이 언어의 정수를 만들어 내고 수많은 독자의 가슴을 일렁이게 한다. 역량있는 작가가 역동하는 지점에서 언어는 곧 예술이 된다. 가볍고 유쾌하지만 동시에 진솔하고 진지하게 삶과 사람에 대해 사색하는 김별아의 에세이 『죽도록 사랑해도 괜찮아』를 희망의 메시지를 원하는 이들에게 살포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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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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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의 정원
다치바나 다카시.사토 마사루 지음, 박연정 옮김 / 예문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고전을 읽을 필요는 없다. 최신 잡지나 학술서를 읽으면 된다."

  일본을 대표하는 지식인 다치바나 다카시의 말이다. 물론 최소한의 교양이 갖추어져 있다는 전제하에서 한 말이다. 평소 소설 읽기의 대척점에 서 있는 그의 독서론을 익히 잘 알고 있다. 픽션보다 현실을 탐색해야 한다며 소설을 최소한도로 읽어야 한다는 그의 독서론에 나는 쉽게 동의하기가 어렵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단독자로 만나는 일이다. 책읽기에 수동태는 있을 수 없다. 어떤 한 세계에 자신이 적극적으로 개입을 해서 거기에 참여하고 그 세계와 정면으로 만나는 일이 바로 독서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인지 저자가 반영해놓은 현실의 세계인지는 비본질이다. 그것은 접근방법의 차이일 뿐이다. 현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현실세계를 비틀고 꼬아서 보다 입체적으로 세계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현실의 '변혁'이 가능하다. 허구는 현실을 반영하고 해석한다. 그렇기에 문학은 긴요하다. 반드시 읽어야 한다. 모든 책읽기의 귀결은 '문학'이다.

  물론 다치바나 다카시의 의도된 과장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평소 그의 효율적이고 기계적인 독서론과는 거리를 두어왔다. 그는 책은 최대한 빨리 최대한 많이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속독과 다독은 내가 가장 경계하는 독서방식이다. 이러한 현격한 독서관의 차이를 가진 그와 나 사이에는 책읽기에 대한 본질적인 괴리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그를 사랑하고 경외한다. 매우 흠모하는 편이다. 그 이유는 그가 책을 많이 읽는 독서의 거인이라서가 아니라 바른 역사의식과 순전한 양심을 지닌 깨어있는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지知의 거인'이라는 그의 별명은 바로 그 지점에서 오롯하게 성립된다. 

  "이제 일본인 가운데 절반이 전쟁 이후 태생이며 그때의 전쟁이 가져다 준 책임을 거의 느끼지 않는 세대이다. (중략) 그런 세대야말로 바이츠제커의 연설을 다시 읽어야만 할 것이다. 중국에도 한국에도 당시의 전쟁을 절대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들과의 화해는 과거를 잊어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죽은 중국, 한국 사람들의 수는 천만 명이 훨씬 넘으며 이는 홀로코스트에서 죽은 유대인보다도 훨씬 많은 수다."   - 다치바나 다카시

  멋있지 않은가. 깨어있는 지식인은 응당 이래야 한다. 그가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책을 통해 무엇을 알고 느끼며 행동하는지가 중요하다. 앎과 느낌과 행동의 일치는 지식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자격요건이다. 행동하는 지성이야말로 시대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존경받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지의 정원』은 '지知의 거인' 다치바나 다카시와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 내 인기논객 사토 마사루의 대담을 엮은 책이다. 낯선 이름의 사토 마사루라는 인물이 과연 다치바나의 상대가 될 수 있을지 의문했다. 사토는 정치적 견해, 지식의 방향, 역사의식 등에서 다치바나와 상당히 다른 시각을 가진 인물이다. 이러한 두 인물의 차이는 이 대담집을 더욱 흥미롭게 한다. 책 속에서 두 인물의 시각차이가 적잖이 목도되는데 그것을 확인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두 지식인 모두 수만 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독서의 대가이다. 이 책에서는 각기 200권, 총 400권의 책을 추천한다. 상대의 추천 리스트에 대해 코멘트하고 공감을 표하며 토론을 하기도 한다. 고전과 문학, 정치와 경제, 예술과 철학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양한 분야에서 꼭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들을 선정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지식인이기에 일본 저서들이 많이 눈에 띈다. 더욱이 추천한 책들의 상당수가 낯선 책들이다. 국내에는 출간조차 되지 않은 책들이 즐비하다. 생소한 책 리스트로 인해, 무엇보다 상당수가 국내에 출간 번역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에 추천 책 절반 이상이 내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하지만 각자의 추천 책을 소개하고 그 의미와 배경을 전하며 지知의 장을 펼치는 그들의 대담만큼은 달콤하고 흥미롭다.

  이 책의 강점은 두 지식인들의 거대한 독서량을 온전히 담아낸 데에 있다. 그들은 책이 도달할 수 있는 전 분야를 두루 망라한다. 소크라테스에서 마르크스를 넘어 톨스토이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모든 영역을 책을 통해 관통한다. 둘의 지성이 만나는 곳에 거대한 담론의 장이 펼쳐지며 지知 축제가 이루어진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지의 물줄기는 굵고 쎄기만 하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지의 향연은 읽는이를 놀래키고 자극하며 북돋운다.

  부록도 든든하다. 다치바나는 부록의 형태로 섹스의 신비를 탐구하는데 도움을 주는 10권의 책을 추천한다. 또한 그 유명한 '다치바나의 독서 기술 14개조'를 정리하여 부록으로 실었다. 독자의 입체적인 책읽기를 돕는 다치바나의 배려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사토 마사루의 책 추천 또한 깊고 풍성하다. 자신이 추천한 200권의 추천도서에 적잖은 분량의 소개 코멘트를 달았다. 일반인이 읽기에 난해할 뿐더러 흥미가 떨어질 수 있는 점을 의식한 배려로 보인다. 독자는 다치바나와 사토의 자상하고 통찰력있는 책 소개 코멘트를 통해 선정된 책의 특징과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수 있다.

  쉴 새 없이 쏟아내는 두 사람의 지적 열정을 보면서 지식인으로서의 올곧은 정체성에 대해 새삼 사유하게 된다. 사르트르는 지식인은 시대의 모든 갈등과 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르크스는 시대를 변혁하는 것이 지식인의 의무라고 역설했다. 시대를 선도해가는 지식인은 바로 '행동'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책을 읽고 지성을 주고받는 일은 물론 소중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일본이 현재 누리고 있는 국제적인 힘과 지위를 감안했을 때 두 지식인의 영향력은 결코 녹록지 않다. 이 세계가 더욱 아름답게 변혁될 수 있도록 두 지식인이 힘을 모아주길 기대한다. 그렇게 될 때야만이 비로소 진정한 '지知의 정원'이 건설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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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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