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보면, 어찌 글을 이리 잘 쓸까, 하는 탄성이 나올 때가 있다. 소설이든 비소설이든 세계의 역량있는 작가들은 발군의 필력으로 독자를 압도한다. 특히 몇몇 작가는 글에 신성을 불어넣은 듯 마법적인 힘으로 읽는이의 심장을 뒤흔든다.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는 멋지고 아름다운 글로 인해, 그리고 그것이 주는 삶의 교훈으로 인해 우리는 오늘도 책 속에 파묻혀 산다.

  책 관련 블로그를 오픈한 지 어느덧 사 년 차가 되었다. 책을 읽고 후기를 남기는 것은 내 부족한 책읽기를 보완하고 정리하기 위함이요, 타인의 사유와 견해를 참고하기 위함이다. 글쓰기는 깊고 풍성한 책읽기를 견인한다. 한 권의 책이 주는 총체적 의미와 부분적인 가치에 대해 글을 쓰며 정리하게 된다. 더 나아가 블로그라는 공간에 오픈함으로써 내 생각이 정답이 아님을 인정하고 타자를 통한 다양성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된다. 독서에 왕도는 없기에 고집을 꺾고 보다 겸허한 자세로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블로그 이웃님들로부터 글쓰기와 관련된 문의를 종종 받는다. 서평의 왕도나 글 잘쓰는 비법에 대해 물어올 때면 나는 한없이 민망해진다. 내 자신조차 미천한 글쓰기를 하고 있는데 어찌 타인에게 조언할 수 있단 말인가. 이웃님들의 질문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면서도 한 가지 드는 생각은 "좋은 글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의문이다. 왜 많은 사람들이 글을 잘 쓰고 싶어할까. 그렇다면 과연 좋은 글이란 무엇일까.

  온라인상의 글을 읽다 보면 문득 불편해진 내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글은 필자의 창조물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하나의 창조적 행위이다. 필자의 생각과 경험과 철학을 필자만의 필체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글에는 필자의 사상과 개성이 묻어있을 수밖에 없다. 글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 '누군가'의 개성이 글의 존재성을 결정한다. 최소한 '논설'의 규격을 갖추고 있는 모든 글은 철저히 필자의 주관에 의해 창조된다. 필자의 주관은 논설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좋은 글이 될 수는 없다.

  서평을 포함한 모든 리뷰는 하나의 논설문이다. 논설문이라 함은 어떤 문제에 대하여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을 조리있게 풀어 밝히는 글을 의미한다. 이 정의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두 가지다. 먼저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이 목적이 되어야 하고, 그 다음 그것을 '조리있게 풀어 밝히는' 글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주관적 견해를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피력하는 것이 논설문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뼈대가 되는 것이다. 즉 글은 '주관'의 목적을 '객관'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글은 타자에게 읽힘을 전제로 한다. 더욱이 온라인에서 씌여지는 모든 글은 불특정다수가 읽는다는 것을 염두한다. 그것은 필자 자신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글이란 것은 내 생각의 갈무리를 넘어 타자를 향한 메시지이자 소통이다. 태동적으로 글은 '사회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필자로서 갖추어야 할 예의와 태도를 이끌어낸다. 동일한 소재라 하더라도 필자에 따라 글의 논지와 색깔은 분명 다르다. 다른 만큼 빛나고 개성이 있을수록 멋지다. 다양성은 선善이 된다. 하지만 그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글에 대한 최소한의 규격과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기본이고 명확한 주관 피력, 조리있고 논리적인 서술, 합리적인 논거, 풍부한 어휘력, 매끄러운 문장력 등은 글과 읽는 이에 대한 예의다. 그리고 그것은 필자의 주관적 개성과 함께 좋은 글을 완성하는 전제조건이 된다.

  온라인상의 적지 않은 블로거들이 바로 이 부분을 망각한 채 리뷰라는 카테고리를 마치 자신의 일기나 낙서 정도로 오해하고 있는 듯하다. 더 나아가 솔직한 글이 좋은 글이라며 읽는 이에게 가져야 할 신성하고 묵직한 최소한의 책임감조차 결여된 모습도 눈에 띈다. 물론 솔직한 건 좋은 것이다. 글에서 정직은 매우 중요하다. 솔직함이 언어를 힘있게 한다. 하지만 솔직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다. 어휘와 문장을 넘어 하나의 완성된 글까지 텍스트는 다듬어져야 한다. 잘 써야 하는 것이다. 잘 쓴 글이 좋은 글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좋은 글은 언제나 잘 쓴 글이었다. 앞서 언급했지만 글은 타자에게 읽히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조악한 문장을 솔직함이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로 가리면서 큰소리 치는 이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많다. 그들의 오해가 너무 불편하다. 노력과 예의가 결락된 자신의 혼잣말 수준의 낱말 조합을 좋은 글이라고 호도하며 착각에 빠진 이들에게 나는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을 조언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는 것만큼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건 없는 듯하다. 글쓰기는 철저히 훈련으로 발전될 수 있다. 언어에서 말하기는 선천의 영역에 기대지만 글쓰기는 후천의 영역에서 다듬어진다. 자신의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틀린 채 비논리적인 방식으로 형편없는 문장에 담아내면서 자신이 괴테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나는 일갈한다. '솔직'과 '충격'이라는 요행보다 깊이있고 논리적인 글쓰기를 통해 책과 벗하고 인간과 소통하기를.

  솔직함으로만 작가가 된 이는 없다. 아직도 세계의 수많은 작가들은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자신의 필력을 손보고 다듬으며 고군분투하고 있다. 각고의 노력을 통해 언어의 정수를 걸러낸다. 어떨 때는 하루 내내 한 문장도 쓰기 어려워 고통스러워 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집필한 글을 수 년 동안 탈고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거듭된 탈고도 맘에 들지 않아 세상에 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글쓰기는 그런 것이다. 고통이다. 신성한 것이다. 나를 보는 동시에 타인과 소통하고 의식하는 행위이다. 글을 향한 이러한 경외한 마음이 없다면 좋은 글은 절대로 만들어질 수 없다.

  니체는 피로써 쓴 글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는 글쓰기의 '집중中'과 '성의意'를 의미한다. 언어의 정점인 동시에 언어를 넘어선 세계는 피 없이는 불가능하다. 좋은 글에는 반드시 필자의 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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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사랑해도 괜찮아
김별아 지음, 오환 사진 / 좋은생각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소설가가 쓴 에세이를 즐겨 읽는다. 작가를 소설을 통해 만나는 것과 에세이를 통해 만나는 것은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소설은 소설가의 강점과 장점이 특별하게 발현되는 텍스트다. 허구 세계의 창조자로서의 기술과 역량이 한 편의 소설 속에는 온전히 담겨져 있다. 반면 에세이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 작가가 살고 있는 현실 그대로의 이야기가 솔직하고 담백하게 고백되기 때문이다. 작가적 신비주의는 허물어지고 한 사람의 평범한 삶의 모습과 철학이 진솔하게 펼쳐진다. 작가의 '쌩얼'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의 세계를 픽션과 논픽션으로 함께 만나는 일은 긴요하다. 예컨대 내가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하면서도 그의 에세이를 동시에 탐독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저런 다양한 에세이를 만나다 보면 유쾌하게 읽어지는 게 있는 반면 불편하고 지루하게 읽어지는 게 있다. 그것을 가르는 지점은 작품의 소재나 작가의 필력이 결코 아니다. 작가가 보고 있는 '관점'의 깊이다. 어떤 글은 작가가 오랜 사색으로 정제해낸 생각을 주옥같은 언어에 담는 독백적 글쓰기의 정수를 보여준다. 반면 어떤 글은 본인의 사유와 신념이 아닌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세계의 잠언을 끌어다 놓는다. 전자가 창조라면 후자는 스크랩이다. 에세이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다. 자신의 삶과 일상, 인간과 사랑, 철학과 신념 등에 대해 현실의 문체로 쓰여지는 글이다. 그렇기에 에세이마다 고유한 개성이 묻어있을 수밖에 없다. 그 '개성'을 포착하는 일은 에세이를 읽는 가장 큰 묘미이기도 하다.

  평소 소설가 김별아에 대해 녹록지 않은 관심을 피력해왔다. 꾸준한 장편 집필과 역사에 대한 진중함, 흥미있고 신선한 소재 선택과 이쁘고 다듬어진 문체 등은 소설가 김별아의 문학적 역량을 가늠하는 긍정적 요소들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 작품의 퀄리티가 작가의 존재론적 크기를 결정한다. 그간 김별아 문학에 대해 긍정적인 코멘트를 일관되게 표현해왔던 나로서는 그의 신간을 꾸준히 주목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내 기호의 연장선상에서 그의 매력적인 에세이 한 권이 놓여 있다.

  『죽도록 사랑해도 괜찮아』는 소설가 김별아의 삶과 사람과 문학에 대한 단상을 담은 수필집이다. 작가가 '좋은생각' 웹진에 연재한 북 에세이와 2005년부터 3년간 캐나다에 체류하며 쓴 시 감상문을 합쳐 신간으로 출간했다. 책과 시를 읽으며 곱씹은 삶과 사람에 대한 단상이 작가 특유의 이쁜 문체로 오롯하게 실려 있다.

  책의 구성은 간명하다. 작가는 자신이 인상깊게 읽은 시와 소설을 소개하면서 작품의 감상에 젖기도 하고 삶의 지혜를 추출하기도 한다. 중간 중간 수록된 사진들은 자동차 잡지 사진기자 오환의 '낙산 연작' 중 일부이다. 오환의 사진은 김별아의 텍스트를 보완하고 수식한다. 김별아의 진솔한 단상들은 오환의 사진을 견인하고 추동한다. 글과 사진의 균형있는 배치와 적절한 호흡으로 인해 생명력 있는 에세이집 한 권이 완성되었다.

  책 속에는 소설가 김별아의 문학관이 잘 반영되어 있다. 특히 시詩에 대한 강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작가는 역설한다. 시는 언어의 정점인 동시에 그 언어를 넘어선 세계라는 것을. 시인에 대한 콤플렉스는 다수 소설가들의 가슴속에 내밀한 형태로 숨겨져 있는 듯하다. 많은 소설가들이 시인이 되지 못한 자신의 처연한 한계에 한탄하며 시인의 천재성에 대해 찬탄스러운 언어로 헌사하기 때문이다. 이는 김별아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어느 누구보다 시를 선망하고 사랑했지만 결국 시인이 되지 못한 한 소설가의 존재적 감상이 에세이 속에 잘 젖어 있다.

  김별아의 작가적 번민 또한 책 곳곳에서 확인된다. 제 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미실』의 성공 이후 작가로서의 본질보다 외연에 유혹된 자신의 모습을 자각한다. 그리고 끝내 캐나다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외유가 고백된다. 먼 곳에서 바라보는 '있던' 곳의 풍경은 어떨까. 있던 자리를 떠나야만이 자신의 진본을 보는 시각이 굴곡되지 않는 법이다. 김별아는 소설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보다 겸허하고 객관적으로 천착하고 싶었던 것이다. 잠시의 들뜸을 경계하며 소설가로서의 존재론적 고민을 꾀하는 김별아의 기백이 멋지게 와 닿는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작가'라는 존재가 갖는 디테일에 적잖이 놀라게 된다. 소소한 것에서 특별함을 보고 일상의 단상에서 명언을 추출한다. 그들의 세밀한 관찰과 다상량이 언어의 정수를 만들어 내고 수많은 독자의 가슴을 일렁이게 한다. 역량있는 작가가 역동하는 지점에서 언어는 곧 예술이 된다. 가볍고 유쾌하지만 동시에 진솔하고 진지하게 삶과 사람에 대해 사색하는 김별아의 에세이 『죽도록 사랑해도 괜찮아』를 희망의 메시지를 원하는 이들에게 살포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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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의 정원
다치바나 다카시.사토 마사루 지음, 박연정 옮김 / 예문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고전을 읽을 필요는 없다. 최신 잡지나 학술서를 읽으면 된다."

  일본을 대표하는 지식인 다치바나 다카시의 말이다. 물론 최소한의 교양이 갖추어져 있다는 전제하에서 한 말이다. 평소 소설 읽기의 대척점에 서 있는 그의 독서론을 익히 잘 알고 있다. 픽션보다 현실을 탐색해야 한다며 소설을 최소한도로 읽어야 한다는 그의 독서론에 나는 쉽게 동의하기가 어렵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단독자로 만나는 일이다. 책읽기에 수동태는 있을 수 없다. 어떤 한 세계에 자신이 적극적으로 개입을 해서 거기에 참여하고 그 세계와 정면으로 만나는 일이 바로 독서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인지 저자가 반영해놓은 현실의 세계인지는 비본질이다. 그것은 접근방법의 차이일 뿐이다. 현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현실세계를 비틀고 꼬아서 보다 입체적으로 세계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현실의 '변혁'이 가능하다. 허구는 현실을 반영하고 해석한다. 그렇기에 문학은 긴요하다. 반드시 읽어야 한다. 모든 책읽기의 귀결은 '문학'이다.

  물론 다치바나 다카시의 의도된 과장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평소 그의 효율적이고 기계적인 독서론과는 거리를 두어왔다. 그는 책은 최대한 빨리 최대한 많이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속독과 다독은 내가 가장 경계하는 독서방식이다. 이러한 현격한 독서관의 차이를 가진 그와 나 사이에는 책읽기에 대한 본질적인 괴리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그를 사랑하고 경외한다. 매우 흠모하는 편이다. 그 이유는 그가 책을 많이 읽는 독서의 거인이라서가 아니라 바른 역사의식과 순전한 양심을 지닌 깨어있는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지知의 거인'이라는 그의 별명은 바로 그 지점에서 오롯하게 성립된다. 

  "이제 일본인 가운데 절반이 전쟁 이후 태생이며 그때의 전쟁이 가져다 준 책임을 거의 느끼지 않는 세대이다. (중략) 그런 세대야말로 바이츠제커의 연설을 다시 읽어야만 할 것이다. 중국에도 한국에도 당시의 전쟁을 절대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들과의 화해는 과거를 잊어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죽은 중국, 한국 사람들의 수는 천만 명이 훨씬 넘으며 이는 홀로코스트에서 죽은 유대인보다도 훨씬 많은 수다."   - 다치바나 다카시

  멋있지 않은가. 깨어있는 지식인은 응당 이래야 한다. 그가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책을 통해 무엇을 알고 느끼며 행동하는지가 중요하다. 앎과 느낌과 행동의 일치는 지식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자격요건이다. 행동하는 지성이야말로 시대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존경받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지의 정원』은 '지知의 거인' 다치바나 다카시와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 내 인기논객 사토 마사루의 대담을 엮은 책이다. 낯선 이름의 사토 마사루라는 인물이 과연 다치바나의 상대가 될 수 있을지 의문했다. 사토는 정치적 견해, 지식의 방향, 역사의식 등에서 다치바나와 상당히 다른 시각을 가진 인물이다. 이러한 두 인물의 차이는 이 대담집을 더욱 흥미롭게 한다. 책 속에서 두 인물의 시각차이가 적잖이 목도되는데 그것을 확인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두 지식인 모두 수만 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독서의 대가이다. 이 책에서는 각기 200권, 총 400권의 책을 추천한다. 상대의 추천 리스트에 대해 코멘트하고 공감을 표하며 토론을 하기도 한다. 고전과 문학, 정치와 경제, 예술과 철학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양한 분야에서 꼭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들을 선정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지식인이기에 일본 저서들이 많이 눈에 띈다. 더욱이 추천한 책들의 상당수가 낯선 책들이다. 국내에는 출간조차 되지 않은 책들이 즐비하다. 생소한 책 리스트로 인해, 무엇보다 상당수가 국내에 출간 번역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에 추천 책 절반 이상이 내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하지만 각자의 추천 책을 소개하고 그 의미와 배경을 전하며 지知의 장을 펼치는 그들의 대담만큼은 달콤하고 흥미롭다.

  이 책의 강점은 두 지식인들의 거대한 독서량을 온전히 담아낸 데에 있다. 그들은 책이 도달할 수 있는 전 분야를 두루 망라한다. 소크라테스에서 마르크스를 넘어 톨스토이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모든 영역을 책을 통해 관통한다. 둘의 지성이 만나는 곳에 거대한 담론의 장이 펼쳐지며 지知 축제가 이루어진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지의 물줄기는 굵고 쎄기만 하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지의 향연은 읽는이를 놀래키고 자극하며 북돋운다.

  부록도 든든하다. 다치바나는 부록의 형태로 섹스의 신비를 탐구하는데 도움을 주는 10권의 책을 추천한다. 또한 그 유명한 '다치바나의 독서 기술 14개조'를 정리하여 부록으로 실었다. 독자의 입체적인 책읽기를 돕는 다치바나의 배려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사토 마사루의 책 추천 또한 깊고 풍성하다. 자신이 추천한 200권의 추천도서에 적잖은 분량의 소개 코멘트를 달았다. 일반인이 읽기에 난해할 뿐더러 흥미가 떨어질 수 있는 점을 의식한 배려로 보인다. 독자는 다치바나와 사토의 자상하고 통찰력있는 책 소개 코멘트를 통해 선정된 책의 특징과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수 있다.

  쉴 새 없이 쏟아내는 두 사람의 지적 열정을 보면서 지식인으로서의 올곧은 정체성에 대해 새삼 사유하게 된다. 사르트르는 지식인은 시대의 모든 갈등과 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르크스는 시대를 변혁하는 것이 지식인의 의무라고 역설했다. 시대를 선도해가는 지식인은 바로 '행동'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책을 읽고 지성을 주고받는 일은 물론 소중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일본이 현재 누리고 있는 국제적인 힘과 지위를 감안했을 때 두 지식인의 영향력은 결코 녹록지 않다. 이 세계가 더욱 아름답게 변혁될 수 있도록 두 지식인이 힘을 모아주길 기대한다. 그렇게 될 때야만이 비로소 진정한 '지知의 정원'이 건설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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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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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문단에서 소설에 가장 가까운 작가를 선택하라면 나는 주저없이 신경숙을 꼽을 것이다. 신경숙은 자신 스스로 문체에 집중하는 작가라고 고백한다. 소설 각각의 문장들이 갖는 함축적 속성, 비유적 울림 등이 시적 문체의 효과를 거둘 정도로 세밀하기에 읽는이의 가슴 구석구석을 매우 섬세한 울림으로 일렁이게 한다. 문단과 문장마다 빼곡히 박혀있는 그의 완벽한 단어조합은 시와 소설의 경계에서 정교하고 감동적인 서사를 창조한다. 독자는 그의 조사에 되새김하고 그의 동사에 희비하며 그의 쉼표에 멈칫한다. 그랬다. 신경숙의 모든 소설들은, 항상 '온전'했다.

  통속적 소재지만 철저히 문학적인 방식으로 밀리언을 울렸던 『엄마를 부탁해』의 소름돋는 감동이 채 가시지 않았다. 한국 문학사를 새로 쓴 이 한 권의 소설로 인해 내 가슴은 흥건하게 젖어 한동안을 정지했다. 이제 그는 새로운 장편으로 다시 한 번 내 가슴을 적신다. 고백한다. 나는 항상 신경숙의 문장을 통해 실존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아의 현재상을 궁구해왔다는 것을.

  '성장'과 '청춘'이라는 코드는 작가라면 한 번쯤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과 같은 영역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작가의 손길 속에 인간의 자라남에 대한 탐색이 결핍된 적은 드물다. 대상을 잃어버린 아픔과 그것을 치유해가는 과정, 한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과 자아의 진본을 찾는 여정 등은 청춘이라는 명명 속에 언제나 살아 숨셨던 유전자들이다. 문학은 항상 그것에 관심을 기울였고 세계의 글쟁이들은 그 관심의 원심력 안에서 역동했다. 그리고, 썼다.

  신경숙의 일곱번째 장편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거쳐가는 '청춘'이라는 불멸의 풍경을 이야기한다. 작가는 암울한 시대 상황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네 청춘남녀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 우정, 꿈까지도 조금의 망설임 없이 투사하는 젊은 날의 원형을 아름답게 그려냈다. 작가 특유의 섬세한 위로가 찬란한 열병을 지나는 청춘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소설의 주인공이라 할 만한 '윤'과 '단', '명서'와 '미루'는 개인적 상처를 짊어진 채 비극적인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젊은이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잃어버림'이다. 윤은 병으로 엄마를 일찍 여의었다. 미루는 언니의 자살을 눈앞에서 목도했다. 단은 자신의 영원한 사랑 윤을 저 도시로 떠나보내야 했다. 그리고 윤과 명서는 단과 미루의 죽음을 통해 큰 상처를 다시 한 번 겪는다. 예상치 못한 시기에 불현듯 찾아오는 상실의 아픔은 그들이 서로 마주보고 교감하게 되는 원초적 동기가 된다. 그들은 서로의 상처에서 공통했고 치유의 과정에서 농밀했다. 

  구성이 독특한데 소설의 각 장이 두 인물의 교차식 서술로 흘러간다. 윤과 명서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된다. 윤의 1인칭 서술은 소설 전체의 이야기를 추동한다. '갈색노트'로 명명된 명서의 메모는 분량은 짧지만 윤이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담아냄으로써 서사를 보다 입체적이고 풍성하게 보완한다. 두 시점 모두 차분하고 독백적이다. 대상을 보고 느끼는 관점 속에 설익은 젊은 날의 진지함이 잘 배어있다. 작가는 이십대 젊은 남녀의 시각에서 문장을 만들어냈고 사유를 이끌어냈다.

  소설 속에서 유독 '걷기'와 '죽음'이 많이 보인다. 윤이가 도시에 올라와 가장 많이 했던 것은 걷는 일이었다. 그녀는 걷는 것을 통해 스쳐간 생각을 불러오고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바라봤다. 걷는 동안 지나간 것과 잃어버린 것을 되돌아봤다. 하지만 아프지만은 않았다. 걷는 일은 현존을 탐색하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윤은 묵묵히 걸음으로써 이미 지나가버린 정지된 과거와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현재의 시간대를 통합하며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걷는 시간은 '지금'을 읽는 시간이었고 '마음'을 쓰는 시간이었다. 윤에게 걷기는 존재의 내외면을 들여다보는 방법인 동시에 현존의 무게를 지탱하는 초월론적 자기의식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어떤 의미인가. 작가는 작정한듯이 죽음의 장면을 소설 곳곳에 배치했다. 아주 친밀한 누군가를 당장 볼 수 없게 됐을 때 그 사실에 가장 영혼이 훼손되고 가장 강렬하게 자문할 시간은 바로 이십대의 청춘의 시기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현존을 이탈한 것은 다르다. 지각을 벗어난 상실은 대상이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가능케 한다. 하지만 현존이 부정되는 현실은 상실의 최전선이다. 사랑했던 대상의 소멸은 내 자신이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버림받는 것이다. 청춘의 시기는 존재한 대상이 갑자기 소멸되어 실존에 이탈된 현실의 엄연함을 조금씩 받아들이면서 자라나고 단단해지는 시간이다.

  소설의 막장을 덮은 후 청춘의 의미를 사유했다. 그 시절은 왜 그토록 아름다운 걸까. 그 시기에 우리는 가장 크게 웃고, 울고, 기뻐하고, 슬퍼하며, 좌절하고, 사랑하고, 헤어진다. 또한 누구보다 비극적인 시간을 만나고, 오래, 깊이 고민하고, 질문하고, 답을 찾는다. 과연 이것만으로 청춘의 아름다움은 설명되는 걸까. 아니다. 청춘의 아름다움의 본질은 다른 데 있다. 청춘이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자.신.의.전.부.를.걸.기.때.문.이.다. 우리는 그 시기에, 행하는 모든 의지적 발산에 대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투사한다. 비록 그것이 원치 않는 귀결을 만들어 낼지라도 자신의 모든 유한성을 단 하나의 시공간에 투사할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청춘의 아름다움의 진본인 것이다. 

  신경숙의 힘을 실감한다. 나는 이 소설을 두 번 읽었다. 한 번 읽어도 충분한 텍스트가 있는 반면 두 번 이상 읽어도 부족한 텍스트가 있다. 난이도나 수준을 말하는 게 아니다. 감동의 밀도를 말하는 것이다. 감동적인 소설은 많이 읽어야 그 밀도를 포착할 수 있다. 완성된 작품이 본래 지니고 있는 감동의 질량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을 읽어내고 받아들이는 독자의 부피가 변할 뿐이다. 사실 신경숙의 질량과 독자의 부피를 계산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신경숙이 가진 질량이 워낙 크기에 부피와 무관하게 감동의 밀도는 언제나 무한대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감동의 무한대. 바로 신경숙 문학의 감동 밀도 함수값이다.

  어느 인터뷰에선가 신경숙은 자신과 소설과의 관계를 언급했다. 소설과의 이별에 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고백한다.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소진한 뒤 떠나고 싶다는 것을. 소설 속으로 완벽히 소멸하고 말 것임을. 그리고 다시 태어나면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을 것임을. 천상 소설가다. 소설은 신경숙을 사랑했고 신경숙은 소설로 존재했다. 이 세계에서 신경숙과 소설은 '하나'였다. 이 일체성의 현발은 우리에게 존재론적 암유喩를 유도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곧 신경숙의 세계라는 것을. 그렇다. 우리는 신경숙의 세계에 살고 있다. 

 


[사진출처:NEW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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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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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 책을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많이 받는다. 장르와 목적이 결락된 채 밀려들어오는 수많은 책 추천 문의를 감당할 재간이 없다. 하지만 이웃님들이 간절하게 부탁하는 진정성을 무시할 명분 또한 없다. 이에 나름 합리적인 방안을 모색했다. 몇 차례로 나눠서 카테고리별로 선정하여 책을 추천해보는 것이다. 본래 미천한 리뷰어이기에 수준있고 깊이있는 책 추천은 힘들다. 그저 읽은대로 아는대로 느낀대로 정리할 뿐.

  일전에 '책좋사(네이버 독서카페)'에서 한 가지 테마를 정해서 책을 추천해달라는 문의를 받은 적이 있다. 어떤 테마를 선정할 지 고민의 고민을 거듭했던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당시는 이명박 정부의 공권력 운영행태가 가관도 아닐 때였다.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냉철하게 들여다보는 작업이 필요했다. 더 나아가 선배세대가 피와 땀으로 쟁취해왔던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작업에까지 자연스럽게 유도되었다. 이런 되돌아봄의 연장선상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이해와 통찰'이라는 테마를 생각하게 되었고 이와 관련된 책들을 소개하게 되었다.

  최근 황석영 작가의 『강남몽』을 통해 오욕과 굴곡으로 점철된 한국 근현대사의 상처들을 훑어봤다. 다시 한 번 분노했다. 화가 나고 쓰라렸다. 그 책을 읽던 시기에 한국은 미국과 동해안에서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연합군사훈련을 실시했고 중국은 뿔이 났다. 천안함 사태 이후 북한의 도발적 발언과 위협은 꾸준했다. 간 나오토 일본총리의 식민지배 공식사과 담화문이 연일 계속해서 핫뉴스로 방송을 타고 있었다. 불과 얼마전의 일들이다. 나는 깊이 생각했다. 우리는 역사를 왜 알아야 하는가. 과거의 역사를 있는 사실 그대로 알 수 있는 혜안과 용기는 어디서 공급되는가. 그리고 책은 왜 읽어야 하는가. 내적 깊은 곳에서 치고 올라오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하는 순간, 한 시대에 한 획을 그었던 주옥같은 명저들이 있음을 생각해냈다.

   -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 『태백산맥』, 조정래 
   -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최장집
   - 『해방전후사의 인식』, 송건호 外 
   -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
   - 오리엔탈리즘, 에드워드 사이드
   - 감시와 처벌, 미셸 푸코
   - 『제 3의 길』, 엔서니 기든스


  위의 책들은 한국사회에 가장 영향을 준 책들로 손꼽히는 명저들이다. 반드시 읽어야 할 책들이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에는 금서 목록으로 올랐던 책들도 있다.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는 베트남 전쟁으로 세계를 시끄럽게 했던 미국의 추악함을 드러냈다. 동시에 중국 사회주의 속에 내재된 인간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리영희 교수의 『우상과 이성』도 읽어볼 만하다. 기존 지식에 고착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도전하게 하는 힘있는 책이다.

  읽든 안 읽든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최소한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 거대서사 또한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매우 큰 영향을 준 소설이다. 조정래의 강한 저력과 불굴의 의지가 담겨 있는 이 소설은 또 다른 대하소설 『아리랑』, 『한강』과 궤를 같이 한다. 역사의 주인이고 원동력인 민중의 발견, 민족의 비극인 분단과 민족의 비원인 통일의 자각, 민족의 현실을 망치고 미래를 어둡게 한 친일파 문제. 조정래는 세 작품을 관통하는 세 가지 주제를 통해 한민족의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여러 지식인들이 함께 공저한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1980년대 대학생들에게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선물해준 교과서다. 송건호, 진덕규, 오익환, 백기완, 유인호 등이 참여해 '해방의 민족사적 의미', '분단의 배경과 과정, '친일파 문제'를 다뤘다. 지금까지 대략 50만 권 정도 팔려나간 베스트셀러이기도 하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으로 손꼽는 불후의 저작이다.

  현상을 이해하고 학습하는데 내부보다 외부의 시각이 더 객관적일 때가 많다. 그런 차원에서 해외 저술을 살피는 것은 응당 필요하다. 그 유명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놓쳐서는 안 될 책이다. 현대사에 관심있는 사람 중 이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공개되지 않았던 미국정부의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한국전쟁의 원인과 배경을 분석했다. '침략 야욕으로 가득찬 북한의 남침' 일변도의 기존 6.25 해석에 '수정주의'라는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내용이 내용인 만큼 당시 사회를 뒤흔들기도 했다. 냉전적 사고방식에 함몰되어 있던 한국 학계에 전회에 가까운 쇼크를 준 의미와 가치가 있는 책이다.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
 또한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기든스는 이 책에서 사회주의의 처절한 실패와 자본주의의 불평등이라는 모순을 극복하는 새로운 모델을 제안한다. 한국 사회에 '실용주의', '중도론', '사회적 민주주의'의 이론적 근거로 활용되었으며 1990년대 후반부터 제기된 대안적 진보이념의 목마름을 상당 부분 해갈해주며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외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등도 한국 사회에 영향을 준 저서들이다.

  상기 추천했던 것들 외에도 눈여겨볼 만한 책들은 많다. 강준만 교수의 『인물과 사상』,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 경향신문 특별취재팀에서 엮은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한홍구 교수의 『특강』 등 한국 사회를 이해하고 고찰하는데 필요한 책들은 두루두루 추천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통찰력 있는 명저들을 통해 보다 명확한 사고와 지성있는 행동을 실행할 수 있다. 인간 삶의 기준을 물질에서 정신으로, 결과에서 과정으로, 감각에서 의미로 전환시키는 일은 비단 지식인만의 의무는 아니다. 바로 '내'가 알고 '내'가 느끼며 '내'가 행동해야 한다. 그럴 때야만이 비로소 우리 사회는 변혁될 수 있다.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인간은 아는 만큼 행동한다. 앎의 크기가 곧 존재의 크기를 결정한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속담은 종언을 고해야 한다. 과거 사실을 직시하자. 우리 국민은 아는 만큼 행복했고 모르는 만큼 불행했다. 제대로 알아야 비판할 수 있다. 올바른 앎이 정의를 만든다. 지성있는 국민이 살기 좋은 국가를 만들 수 있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가 어떻게 흘러왔고, 무엇이 진실이었으며, 어떤 통찰을 가져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자유를 맛본 사람들은 다시는 그 자유를 뺏기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는 그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다시 빼앗길 수 없는 소중한 가치다. 대한민국은 국민의 것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자유의 주체자로서 우리는 과거를 알고 현재를 분석하며 미래를 엿봐야 한다. 추천한 책들이 그것을 위한 앎과 용기의 전도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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