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의 정원
다치바나 다카시.사토 마사루 지음, 박연정 옮김 / 예문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고전을 읽을 필요는 없다. 최신 잡지나 학술서를 읽으면 된다."

  일본을 대표하는 지식인 다치바나 다카시의 말이다. 물론 최소한의 교양이 갖추어져 있다는 전제하에서 한 말이다. 평소 소설 읽기의 대척점에 서 있는 그의 독서론을 익히 잘 알고 있다. 픽션보다 현실을 탐색해야 한다며 소설을 최소한도로 읽어야 한다는 그의 독서론에 나는 쉽게 동의하기가 어렵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단독자로 만나는 일이다. 책읽기에 수동태는 있을 수 없다. 어떤 한 세계에 자신이 적극적으로 개입을 해서 거기에 참여하고 그 세계와 정면으로 만나는 일이 바로 독서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인지 저자가 반영해놓은 현실의 세계인지는 비본질이다. 그것은 접근방법의 차이일 뿐이다. 현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현실세계를 비틀고 꼬아서 보다 입체적으로 세계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현실의 '변혁'이 가능하다. 허구는 현실을 반영하고 해석한다. 그렇기에 문학은 긴요하다. 반드시 읽어야 한다. 모든 책읽기의 귀결은 '문학'이다.

  물론 다치바나 다카시의 의도된 과장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평소 그의 효율적이고 기계적인 독서론과는 거리를 두어왔다. 그는 책은 최대한 빨리 최대한 많이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속독과 다독은 내가 가장 경계하는 독서방식이다. 이러한 현격한 독서관의 차이를 가진 그와 나 사이에는 책읽기에 대한 본질적인 괴리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그를 사랑하고 경외한다. 매우 흠모하는 편이다. 그 이유는 그가 책을 많이 읽는 독서의 거인이라서가 아니라 바른 역사의식과 순전한 양심을 지닌 깨어있는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지知의 거인'이라는 그의 별명은 바로 그 지점에서 오롯하게 성립된다. 

  "이제 일본인 가운데 절반이 전쟁 이후 태생이며 그때의 전쟁이 가져다 준 책임을 거의 느끼지 않는 세대이다. (중략) 그런 세대야말로 바이츠제커의 연설을 다시 읽어야만 할 것이다. 중국에도 한국에도 당시의 전쟁을 절대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들과의 화해는 과거를 잊어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죽은 중국, 한국 사람들의 수는 천만 명이 훨씬 넘으며 이는 홀로코스트에서 죽은 유대인보다도 훨씬 많은 수다."   - 다치바나 다카시

  멋있지 않은가. 깨어있는 지식인은 응당 이래야 한다. 그가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책을 통해 무엇을 알고 느끼며 행동하는지가 중요하다. 앎과 느낌과 행동의 일치는 지식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자격요건이다. 행동하는 지성이야말로 시대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존경받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지의 정원』은 '지知의 거인' 다치바나 다카시와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 내 인기논객 사토 마사루의 대담을 엮은 책이다. 낯선 이름의 사토 마사루라는 인물이 과연 다치바나의 상대가 될 수 있을지 의문했다. 사토는 정치적 견해, 지식의 방향, 역사의식 등에서 다치바나와 상당히 다른 시각을 가진 인물이다. 이러한 두 인물의 차이는 이 대담집을 더욱 흥미롭게 한다. 책 속에서 두 인물의 시각차이가 적잖이 목도되는데 그것을 확인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두 지식인 모두 수만 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독서의 대가이다. 이 책에서는 각기 200권, 총 400권의 책을 추천한다. 상대의 추천 리스트에 대해 코멘트하고 공감을 표하며 토론을 하기도 한다. 고전과 문학, 정치와 경제, 예술과 철학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양한 분야에서 꼭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들을 선정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지식인이기에 일본 저서들이 많이 눈에 띈다. 더욱이 추천한 책들의 상당수가 낯선 책들이다. 국내에는 출간조차 되지 않은 책들이 즐비하다. 생소한 책 리스트로 인해, 무엇보다 상당수가 국내에 출간 번역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에 추천 책 절반 이상이 내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하지만 각자의 추천 책을 소개하고 그 의미와 배경을 전하며 지知의 장을 펼치는 그들의 대담만큼은 달콤하고 흥미롭다.

  이 책의 강점은 두 지식인들의 거대한 독서량을 온전히 담아낸 데에 있다. 그들은 책이 도달할 수 있는 전 분야를 두루 망라한다. 소크라테스에서 마르크스를 넘어 톨스토이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모든 영역을 책을 통해 관통한다. 둘의 지성이 만나는 곳에 거대한 담론의 장이 펼쳐지며 지知 축제가 이루어진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지의 물줄기는 굵고 쎄기만 하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지의 향연은 읽는이를 놀래키고 자극하며 북돋운다.

  부록도 든든하다. 다치바나는 부록의 형태로 섹스의 신비를 탐구하는데 도움을 주는 10권의 책을 추천한다. 또한 그 유명한 '다치바나의 독서 기술 14개조'를 정리하여 부록으로 실었다. 독자의 입체적인 책읽기를 돕는 다치바나의 배려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사토 마사루의 책 추천 또한 깊고 풍성하다. 자신이 추천한 200권의 추천도서에 적잖은 분량의 소개 코멘트를 달았다. 일반인이 읽기에 난해할 뿐더러 흥미가 떨어질 수 있는 점을 의식한 배려로 보인다. 독자는 다치바나와 사토의 자상하고 통찰력있는 책 소개 코멘트를 통해 선정된 책의 특징과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수 있다.

  쉴 새 없이 쏟아내는 두 사람의 지적 열정을 보면서 지식인으로서의 올곧은 정체성에 대해 새삼 사유하게 된다. 사르트르는 지식인은 시대의 모든 갈등과 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르크스는 시대를 변혁하는 것이 지식인의 의무라고 역설했다. 시대를 선도해가는 지식인은 바로 '행동'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책을 읽고 지성을 주고받는 일은 물론 소중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일본이 현재 누리고 있는 국제적인 힘과 지위를 감안했을 때 두 지식인의 영향력은 결코 녹록지 않다. 이 세계가 더욱 아름답게 변혁될 수 있도록 두 지식인이 힘을 모아주길 기대한다. 그렇게 될 때야만이 비로소 진정한 '지知의 정원'이 건설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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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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