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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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말 모시상식에서 은희경 작가를 처음으로 만났다. 평소 옷 잘 입고 개성있는 스타일을 가진 소설가라는 인식이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첫인상이 좋았다. 무엇보다 당찬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심사위원으로 단상에 오른 그는 자신을 '편견이 많은 소설가'라고 밝혔다. 편견이 많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상식적으로 편견은 좋지 못한 태도다. 사전에서는 편견을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으로 정의한다. 그의 고백을 들으며 난 의심했다.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는 생각이 많은 소설가를 내가 과연 좋아할 수 있을까.

  작가를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핵심은 바로 '텍스트'다. 말이나 사생활, 외모나 도덕성은 비본질적인 부분에 속한다. 일차적으로 작가는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야 한다. 물론 삶과 문학은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 별개의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글은 글쓴이의 인격과 특징을 반영한다. 작가의 삶과 세계관, 정신과 태도가 글 속에는 오롯이 담겨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데미안>을 통해 헤세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괴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글은 곧 작가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말처럼 텍스트 바깥은 없다. 텍스트가 곧 작가(저자)이다.

  은희경의 최신 장편소설 『소년을 위로해줘』는 나에게 은희경 문학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지점에 서 있는 텍스트다. 그간 각각 한 권의 단편과 장편만을 만났던, 무엇보다 그의 소설에 별다른 매력을 갖지 못했던 나로서는 이 흥미있는 제목의 장편소설을 맞이하는 반가움이 작지 않았던 것이다. 소설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쓰게 되는 청춘의 이야기. 한국문단의 3대 여성작가이자 냉소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은희경이 말하는 청춘의 형태와 의미는 어떨지 자못 궁금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게 된다.

  작가는 열입곱 살의 소년 강연우를 소설 전면에 배치한다. 이혼한 엄마와 사는 연우는 매사에 심드렁하고 삶에 질문이 많은 전형적인 사춘기 소년이다. 같은 고등학교에 배치된 독고태수와 이사온 집 주변을 맴도는 이채영이 연우와 관계를 형성하는 주요인물이다. 태수의 여동생 마루도 소설 속에서 매우 개성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혼녀인 연우의 엄마 신민아와 엄마 애인 조재욱도 세 인물과 함께 이야기를 추동하는 중심인물로 자리한다.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은 간단하다. 주인공 연우가 엄마, 엄마 애인, 친구들과 관계를 형성하면서 갖게 되는 다양한 경험을 그렸다. 또한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해가는 모습을 그렸다 . 문체는 딱딱하지 않은 대화체를 사용하여 사춘기 시절의 익살스러움과 설익음을 잘 표현했다. 작가는 온전한 산문체가 아닌 대화와 묘사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형식을 파괴하는 혁신적인 문체를 구사했다. 그럼으로써 청소년 시절의 역동을 살려냈다. 또한 소설에서 중요한 매개로 반복 재생되는 'G-그리핀'의 음악과 이를 실제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동봉된 음악CD는 소설의 전달력을 배가하려는 작가의 열정으로 기분좋게 수용된다.

  하지만 소설 초반의 흡입력을 견인하지 못하는 중후반의 진부한 이야기 전개와 기존 청춘소설의 틀을 깨지 못한 통속성은 아쉽다. 날개를 단 듯한 자유로운 문체의 매력을 제외하고는 등단 17년차의 소설가의 내공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소설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흐름 및 분배가 안정적이지 못하고 등장인물의 개성 또한 획일적이다. 특히 주인공 연우의 절친인 태수의 죽음과 연우와 채영의 재회로 급마무리되는 소설의 말미는 매끄럽지 못한 산만한 종결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소설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 할 수 있는 '위로'의 감동이 크게 와 닿지 않는다는데 있다.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위로의 본질은 무엇일까. 가정의 불안정성, 현실에 대한 설익은 질문, 사랑한 대상의 상실과 재회는 이미 수없이 많은 청춘소설의 테마로 사용되었던 것들이다. 한 소년의 사춘기 시절을 수놓는 일련의 성장과정을 제삼자가 어떻게 어루만지고 위로할 수 있을까. 본질적으로 위로가 가능하기는 한 걸까. 혹 은희경이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해理解'를 '위로慰勞'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독자에게 그것을 권유하는 작가의 오해가 불편하다. 누군가의 청춘시절의 요동을 오롯하게 받아들일 수 있음은 위로가 아닌 이해의 선상에서만 가능하다. 어찌 위로할 수 있으랴. 그 시절의 부자연不自然과 비합리非合理를.

  주인공 연우가 겪는 어린 시절의 다양한 파노라마는 그 시기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법한 것들이다. 인간은 누구나 경험하며 어른이 되어간다. 생물학적 나이보다 경험의 연륜이 어른의 의미에 더욱 적확히 닿아 있다. 기쁜 것이든 아픈 것이든 슬픈 것이든 그 어떤 형태의 경험이든 인간은 겪고 겪는 동안 깨닫고 성장해간다. 타자와의 다양한 관계맺기를 통해 기뻐하고 아파하며 슬퍼하는 연우의 고독을 나는 굳이 위로하고 싶지 않다. 그저 이해하고 침묵할 뿐이다. 적어도 인간의 성장만큼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흐름이 매우 인과적因果的으로 작동되는 영역이다. 사랑하고 아파하며 상실했던 만큼 미래는 더 자라있지 않을까. 그것을 기대하며 무언無言의 이해로 지켜보는 것. 그것이 청소년 혹은 청춘에 대한 진정한 위로가 아닐까.

  서평을 정리하자. 소설 『소년을 위로해줘』는 작가의 연차와 매력적인 책 제목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 못한 작품이다. 그렇다고 해서 매우 실망스럽게 읽었다는 뜻은 아니다. 작가는 충분히 진지했고 소설은 적절히 유쾌했다. 단 감동을 주지 못했다는데 아쉬움이 있다. 물론 모든 소설이 감동을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성장소설만큼은 감동이 필요하다. 그간 읽어왔던 대부분의 성장소설에서 꾸준한 감동을 받아왔던 내가 왜 은희경의 소설에는 반응하지 못하는 걸까. 나를 감동시키지 못한 작가 은희경. 이쯤해서 말하고 싶다. 은희경을 위로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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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울한 세상에 힘겨운 사람들에게 빛이 될 한 줄 글을 쓰라는 격려로 받겠다.


  제 35회 이상문학상李箱文學賞 수상자 공지영의 수상소감이다.

  소설가 공지영을 좋아하는 편이다. 평소 그녀의 소설을 꾸준히 탐독해왔다. 소설가로서 자신만의 확고한 아우라를 갖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1988년 등단 이후 그녀가 한국문단에 쌓아올린 공을 나는 낮게 평가하지 않는다. 다수를 포용할 수 있는 이야기, 진지한 척 하지 않는 솔직함, 타자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설득력, 난해하지 않은 단문장 등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의 책을 손에 들게 하는 매력적인 이유가 된다. 물론 한편에서는 가볍고 대중적이라는 이유로 돌을 던지기도 한다. 다수 평론가와 책 좀 읽는다는 독자들 사이에서 그녀는 가장 과대포장된 소설가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상복 없다는 그녀의 문학사도 새로 쓰여지게 됐다.

  인터넷 곳곳에서 공지영의 수상에 대해 조롱하는 글들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이상문학상의 권위가 실추 혹은 변질되었다느니, 실력에 의한 수상이 아닌 공로상에 불과하다느니, 하는 이죽거림이 심심치 않게 목도된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자신이 알고 느끼는 바를 주장하는 행위에 대해 뭐라 할 수는 없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논리의 수준이다. 논거가 빈곤하고 논설이 불성실하다. 이유와 논리가 결락된 채 공지영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포퓰리즘은 불관용의 극치다. 그 어떤 문학적 견해와 입장도 없이 성실한 소설가를 '그냥' 조롱하는 일은 곤란하다.

  주변에서 공지영을 싫어하는 이들을 수없이 봐왔다. 그런데 싫어하는 수준이 대부분 일차원적이고 조악한 편이다.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주장에 대한 자신만의 콘덴츠를 갖고 있어야 한다. 물론 개성있고 확고한 문학적 주관으로 공지영 문학을 비판하는 이들이 간혹 있기는 하다. 그러나 대부분이 평론가의 입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거나 논리가 빈약한 불관용의 카르텔에 편승하는 꼴에 불과한 수준이다. 이상문학상 수상과 관련된 적지 않은 조롱성 글들도 그 태도와 방법에서 예외는 아닌 것이다. 

  물론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해서 소설가 공지영의 문학적 성취가 절대적으로 증명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이상문학상이라고 해서 신이 세운 기준이 아니며 심사위원의 권위가 곧 문학적 가치판단의 절대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견해와 식견이 공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세계의 수많은 이슈들이 결코 다양성의 문제로만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국내 최고 권위의 문학상을 거머쥔 그녀의 성취는 일부분 납득될 수 있다.

  문학은 무슨 '척' 하는 예술이 아니다. 문학이 세계를 구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세계 변혁의 동기를 부여한다. 조정래의 말대로 문학은 꼭 말해야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말해야 하는 것을 용기있게 말할 때에야 비로소 문학은 문학으로서의 기본적 존재가치를 입증시킬 수 있다. 그것을 풀어내는 방법론에 있어 비본질이 본질보다 우선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불필요한 에두름과 쓸데없는 점잖음으로 문학을 난해하고 도저한 예술로 외식화外飾化하는 행위는 지양되어야 한다. 쉬움과 가벼움은 동의어가 아니고 난해한 것과 깊이있는 것은 연관적이지 않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를 호도하여 세계의 실력있는 글쟁이들을 죽였던가. 문학을 '척' 하고 '체' 하는 사람의 기호에서 평범하고 일반적인 사람의 영역으로 확대 유도했다는 점은 소설가 공지영의 분명한 실력임을 인정하자.

  제작년 이맘때쯤 그녀와 나는 사석에서 소주 한 잔을 기울였었다. 심사위원과 수상자의 인연으로 회를 안주 삼아 밤새도록 삶과 인간과 문학을 논했던 당시의 술자리를 아직도 선연하게 기억하고 있다. 당시 그녀는 인간 존엄성의 각별한 인식과 소외된 계층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역설했다. 암울한 세상에 힘겨운 사람들에게 빛이 될 한 줄 글을 쓰겠다는 그녀의 포부를 나는 믿는다. 지구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폭력과 거짓의 <도가니>를 '발견'하고 '차단'하며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그녀의 글은 꼭 필요하다. 

  공지영 작가의 이상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등단시기를 감안하면 늦은 감이 있다. 작가는 태생적으로 보수保守가 될 수 없다. 작가는 무언가를 만드는 직업이다. 무엇을 만든다는 것은 세계에 없던 것을 삽입한다는 것이다. 추가와 수정은 변화를 의미하며 이는 바로 변혁으로 연결된다. 소설이라는 영역은 전개展開를 통해 의미와 가치를 추출해내는 문학이다. 소설가는 자신만의 고유 픽션세계를 창조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인간 삶의 다양한 형태를 성찰하게 하고 현실을 보다 냉정하게 천착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이 세계 변혁의 동기를 부여하는 문학의 순기능인 것이다.

  공지영의 비블리오그래피(bibliography)를 살펴 보면 꽤 많은 지점을 거쳐왔음을 알 수 있다. 작금의 지점까지 다다른 그녀에게 나는 작가로서의 가치있는 진보를 기대한다. 낮고 연약한 사람들에게 빛이 될 한 줄 글의 희망을 지지한다. 공지영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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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버리기 연습 생각 버리기 연습 1
코이케 류노스케 지음, 유윤한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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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고를 때 속지 말아야 할 두 가지 항목이 있다. 하나는 '책 제목'이고 다른 하나는 '베스트셀러'이다. 매력적인 책 제목에 속아 책값을 낭비했던 경험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또한 베스트셀러라고 무작정 구입했다가 끝까지 읽지 못하고 책장을 덮었던 기억도 있을 것이다. 모든 선택과 결정은 언제나 신중해야 한다. 책 선택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장하준의 신간과 코엘료의 장편과 함께 베스트셀러권에 안착해 있는『생각 버리기 연습』은 매력적인 책 제목이 이유가 되어 내 손에 들어온 책이다. 생각하지 않고 오감으로 느끼면 어지러운 마음이 서서히 사라진다는 솔깃한 문장을 책표지 전면에 배치한 이 책은 일본 동경대 스님의 휴뇌법을 담았다. 지나치게 많은 생각은 인간을 힘들게 하기 때문에 쓸데없는 생각을 버리고 집중력을 고양시킴으로써 번뇌를 극복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일견 타당하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다 보면 책제목의 매력을 풀어내지 못하는 초라한 텍스트를 확인하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생각 버리기 연습』은 시중에 범람해 있는 자기계발서와의 차이를 찾아보기 힘든 책이다. 책의 구성은 간명하다. 1장은 생각이 왜 병이 되는지를 개괄한다. 2장은 말하기, 듣기 등을 위시한 여덟가지 영역에서 몸과 마음을 어떻게 조종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마지막 3장에서는 "뇌와 마음의 신비로운 관계"를 주제로 인터뷰를 했던 저자의 대담을 실었다. 전체적으로 잘 짜여진 듯 보이지만 실상 내용은 깊이가 없고 풍성하지 못하다. 

  탐욕과 이기를 버리고 타인과 적극적으로 소통함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은 지겹게 들어온 조언이다. 심신心身이 건강하여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누가 모르는가. 여덟가지 영역에서 풀이한 삶의 교훈들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왕왕 소개되는 불교의 가르침도 깊이 없이 인용의 형태로만 가볍게 다뤄질 뿐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 어디서나 읽을 수 있는 내용을 '휴뇌법'이라는 명명으로 포장한 작가와 출판사의 트릭이 놀랍다. 제목만 그럴듯하다. 속빈 강정이 따로 없다.

  책을 좀 읽는다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계발서를 멀리 하는 편이다. 독서를 깊고 넓게 하다 보면 계발서와 멀어져 있는 자기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엇비슷한 내용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눈과 머리는 피로하다. 인간 삶의 원리는 간단하다. 알지 못해서 안하는 게 아니라 하지 않아서 못하는 것이다. 사람의 고유특성과 외부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채 천편일률적으로 교훈하듯이 씌어진 자기계발서의 일차원성은 책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서평을 정리하자. 베스트셀러 『생각 버리기 연습』은 여러모로 밋밋한 책이다. 하지만 얻은 게 아주 없지는 않다. 이 책을 통해 얻은 것은 진정으로 '연습'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이다. 내가 정작 연습해야 할 것은 '생각 버리기'가 아니라 '책 고르기'이다. 건설적인 생각은 다다익선이다. 양서를 고르기 위한 내공을 위해서라도 생각은 지금보다 더 많이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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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그러했듯이 올해 읽은 책 중에서 '베스트 5'를 선정해 이웃님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2010년은 이런저런 이유로 책을 읽은 만큼 서평을 남기지 못한 해였다. 개인사도 많았고 게으르기도 했다. 형편없는 리뷰어의 아마추어리즘을 가감없이 보여준 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한 해를 마무리하며 책 읽은 리스트를 반추하게 된 것은 다행스럽다 하겠다.



1.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김영사, 2010

 


  2010년 '올해의 책'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로 선택했다. 현재 거의 모든 온라인서점에서 압도적으로 금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고 있다. 이
현실성에 부담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문서가 장기간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기현상에 무턱대고 경도된 것만은 아니다. 내가 이 책을 선정한 이유는 간명하다. 책 자체가 훌륭하기 때문이다. 모든 평가의 기준은 본질이다. 

  2010년은 각계각층에서 말로써 정의를 수없이 논한 해였다. 갑작스레 대통령께서 어울리지 않게 '공정한 사회' 운운하며 한국사회에 정의론을 부르짖었다. 또한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치러졌다. 이런 배경에서 이 책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하루키의 종합예술문학 완결판도, 대한민국 자본주의사의 역동성을 그려낸 황석영의 장편도, 신경숙의 매력적인 청춘소설도 이 한 권의 인문서를 압도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책은 과연 무슨 마력을 가졌을까.

  '정의(justice)'는 우리사회의 지속된 당위當爲이다. 정치 발전과 함께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아직도 한국사회는 정의에 대한 '당위'가 '존재'로까지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어느 사회든 공정성의 집행이 완벽할 수는 없다.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는 완전하지 못하다. 인간 속에 내재된 한계와 실수의 유전자는 사회의 오류와 굴곡을 발생시킨다. 이는 유한적이고 비논리적인 인간성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인간의 '방향성'만큼은 항상 올곧음을 지향해왔다. 역사를 깊고 넓게 보면 인간은 옳은 방향으로 가고자 노력했다. 에드워드 카의 주장대로 역사는 언제나 발전해왔고 그 바탕에 인간 삶의 긍정적 진보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샌델 교수는 다양한 사례와 흥미로운 토론거리를 철학적 사유의 공간 속으로 밀어넣는다. 상당수 미국적 예시에 기댄 부분과 기존의 철학 이론 위주로 풀이한 부분은 '한국인의 정의론'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저자가 안내하는 아리스토텔레스, 밀, 벤담, 칸트, 롤스의 세계를 관통해가다 보면 어느덧 가까워지는 정의의 본질에 대해 자못 진지하게 사유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막장까지 정의란 무엇인지 명쾌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에게 끊임없이 질문한다. 정의는 진정 무엇인지, 정의에 대해 어떤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지, 정의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명제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즉 독자에게 저자 자신의 정의론을 강요하기보다는 정의에 대한 올곧고 열정적인 태도를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정의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과 질문이이야말로 마이클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의 핵심이었을지 모른다.

  정의가 꼭 필요한 사회를 살고 있는 독자들에게 그에 대한 바른 이해와 겸허한 태도를 견인했다는 점, 그리고 정의의 붐을 만들어내며 공정한 사회 건설을 위한 진지한 사유를 추동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올해의 책이 되기에 한 치의 부족함도 없다.



2. 김대중 자서전, 김대중, 삼인출판사, 2010



  <김대중 자서전>은 한 사람의 일대기로 갈무리하기에는 너무 방대한 텍스트다. 한 인물의 전기를 넘어서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독자를 밀어넣는 힘이 있다. <김대중 자서전>이 담은 시공간의 크기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1920년대의 일제식민통치부터 좌우 이념대립이 극심했던 해방공간을 거쳐 민족 최대의 비극인 한국전쟁, 군부독재와 민주화투쟁, 5·18광주민주화운동과 6월항쟁, 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주요 고비를 온몸으로 건너왔던 김 전 대통령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그렸다.

  이 책을 평하는 데 있어 정치적 견해차이는 배제되어야 한다. 진보든 보수든, 김대중을 지지했든 비판했든, 그 어떤 입장에 서있든지간에 인간 김대중의 족적을 훑어보는 일은 한국 민주주의의 오욕의 현대사를 살피는 일과 동일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좁게는 김대중이라는 한 위인의 자전이자, 넓게는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의 관통이라는 측면에서 <김대중 자서전>은 반드시 읽어야 할 텍스트다. 실로 깊고 풍성하며 방대하다.


3. 마음짐승, 헤르타 뮐러, 문학동네, 2010




  노벨문학상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정신적 압박은 책을 평가하는 내 기준의 자장 밖에 있다. 세기의 대작가 헤르만 헤세를 비웃었고, 헤럴드 블룸이 극찬한 코맥 메카시의 <로드>를 잘근잘근 씹었다. 외부, 즉 타자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내 독서기호와는 무관한 것이다. 사르트르가 역설한 '소설적 자유(Romanesque liberte)'는 분명한 진리다. 책의 주체는 작가도 아니고 타인도 아니며 책을 집고 있는 현재의 당사자, 바로 자기자신이다.

  1994년 오에 겐자부로의 수상 이후 노벨문학상 수상작품에 대한 관심이 녹록지 않았다. 본래 한국문학을 즐겨 읽기에 그리 많은 수상작을 만나보진 못해왔다. 그중 몇몇 눈에 띄는 작가에 호감을 가져왔는데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헤르타 뮐러의 소설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음짐승>을 읽고 응축된 시적 언어가 어떻게 산문화될 수 있는지 놀랐다. 소설은 독재 시절의 루마니아의 현실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남의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비슷했던 고통의 시대를 살아가는 네 청춘남녀의 이야기가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작가 자신의 자전적 내용의 투영과 독특한 전개구조, 응축된 시정詩情과 세밀한 문체는 독자로 하여금 고통과 공포의 시대의 아픔을 읽어내게 하는 가슴 쓰라린 '완성도'가 된다.



4.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문학동네, 2010




  문학평론가 조영일은 이 소설에 대해 하루키 소설의 전형적인 아류라며 혹평했다. 특히 <상실의 시대>를 신경숙적으로 재구성하여 표절한 텍스트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대로 따온 1차원적 표절은 아니더라도 작품 전체를 뒷받침하는 다양한 유사성이 하루키 아류의 증거라고 외치는 조영일의 지적에 나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다른 장르도 아니고 문학에서 상징, 등장인물, 서사구조의 지엽적 유사성을 이유로 표절 운운하는 그의 오류가 심히 불편하다. 조영일의 주장대로라면 이 세계의 책들 3할 이상이 표절로 증발해버리게 된다.

  신경숙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와 본질적으로 다른 텍스트다. 소설의 주제가 다르고 작가의 태도가 다르며 독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이 다르다. 신경숙과 하루키는 전혀 다른 소설가다. 신경숙은 하루키 소설에서 흔하게 등장하는 섹스씬 하나 없이 청춘시절의 혼란과 아름다움을 세련되게 그려냈다. 더욱이 발군의 세밀한 문체는 신경숙 문학의 보석이다. <엄마를 부탁해>의 폭풍이 워낙 강렬해서 신간이 내뿜는 불빛이 상대적으로 밝지 않아 보였을 뿐이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충분히 강렬하고 유려하며 매력적인 소설이다.


5. 불편해도 괜찮아, 김두식, 창비, 2010



  최근 몇 년간 인권이 후퇴되었다고들 한다. 일견 공감한다. 미네르바가 구속되었을 때 같은 글쓰는 블로거로서 겁났던 게 사실이다. 이 정권 들어서 국가가 무서워 어디 맘 편히 글 쓸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아직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새삼 자유와 인권을 생각하게 된 지난 몇 년이었다. 이는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김두식의 <불편해도 괜찮아>는 동성애자, 여성, 장애인, 노동자, 청소년 등 사회 약자들의 인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권이라는 묵직하고 딱딱한 주제를 영화나 드라마의 이야기를 통해 풀어냄으로써 독자에게 흥미를 유발시킨다. 저자 특유의 재치와 맛깔스러운 문장은 독자에게 흡입력을 더한다. 다양한 예시를 통해 인권의 소중함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소개함으로써 다양성을 배가했다. 요컨대 <불편해도 괜찮아>는 숭고한 인권의 가치를 흥미롭지만 가볍지 않게 풀어낸 책이다. 책 자체도 훌륭하지만 시의성이라는 측면에서 응당 2010년 올해의 책이다.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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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권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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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코엘료와 만났다. 그의 소설을 즐겨 읽는 편이다. 전작이라 할 만큼 나는 그의 모든 소설들을 탐독해왔다. 『연금술사』는 삶과 꿈에 대한 내 자아의 현재상을 궁구하게 했다. 『베로니카 죽도록 결심하다』는 삶과 죽음을 탐색하면서 현존에서의 사랑이 얼마나 값비싼 것임을 교훈했다. 『순례자』는 비범한 삶은 언제나 평범한 사람들의 길 위에 있음을 일깨웠다. 『포르토벨로의 마녀』는 신의 여성성을 탐구함으로써 모성이라는 아가페의 인간적 현현을 그렸다. 그리고 그 위대함 앞에 고개를 숙이게 했다.

  코엘료의 모든 작품들은 특유의 신비스러운 문체로 신과 자아를 동시에 천착하는 묘한 마력을 가졌다. 그것은 일부 기자들이 비판하는 '통속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며 우주의 원류를 찾고자 하는 신과 사랑에 대한 코엘료의 진지한 성찰로 볼 수 있다. 코엘료는 항상 진지했다. 신의 여성적 면모를 조명함으로써 삶과 우주에 대한 입체적 본질을 탐구했다. 무엇보다 꾸준한 자아찾기 과정 속에서 자신의 진본을 찾아 헤매는 주인공의 모습은 언제나 인상적이었고 빛났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기나긴 내적 여행을 떠나는 주인공의 모습에 어느덧 내 자신의 현재성을 투영시키며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요컨대 코엘료의 텍스트를 읽는 것은 신비로운 여행을 떠나는 것과 동일한 의미였던 것이다.

  이러한 독특한 코엘료식 허구는 전세계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코엘료 문학은 하나의 '브랜드'다. 독특하고 아름다운 문체, 신비스러운 네러티브, 신을 향한 끊임없는 탐구, 여성성에 대한 집요한 관심, 자아를 찾는 지속적 열정 등은 코엘료 소설이 가진 일관적인 특징이다. 소설가로서 자신만의 오롯한 개성을 확립한 것만으로도 코엘료가 이룬 문학적 성취는 가늠된다.

  그의 최신 장편소설 『브리다』는 기존의 코엘료 소설의 특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집필시기로 본다면 『연금술사』 다음에 놓이게 되지만 출간이 늦어져 2008년에서야 독자의 손에 잡히게 되는 작품이다. 그런 만큼 그의 대표작 『연금술사』의 주제의식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 다음 작품들을 이어주는 교량의 역할을 담당한다. 코엘료 문학의 키워드인 자아의 신화, 신성 차원의 사랑, 인간 본질의 탐구를 소설 『브리다』는 오롯하게 담아내고 있다. 보다 집약된 코엘료 소설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브리다』는 코엘료가 순례중에 만난 브리다 오페른이라는 여성이 실제로 겪은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다. 마법을 배우기 위해 숲속의 마법사를 찾아나선 주인공 브리다의 강렬한 열정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코엘료표 서사의 전형을 보여준다. 소설 속에서 브리다가 얻고자 하는 마법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로 정의된다. 마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주술적이고 종교적인 행위들이 수없이 반복된다. '태양'과 '달'은 브리다가 이해해야만 하는 마법 전통의 두 가지 원류로 소개된다. 브리다의 첫 마스터인 숲속의 현자와 두 번째 마스터인 위카는 이야기를 추동하는 중심인물로 소설 속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태양전승과 달전승으로 구분된 마법의 학습과정은 브리다의 숨겨진 재능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소울메이트'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며 더욱 역동성을 발한다.

  브리다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두 마스터는 마법을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 건너가게 하는 다리"로 풀이한다. 브리다는 마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자신의 소울메이트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브리다가 깨닫고자 하는 마법의 신비한 본질과 끝내 알게 되는 소울메이트의 존재는 코엘료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연장선상에서 상호유사성을 가진다. 그것은 바로 '사랑'으로 명명되는 우주상의 최상위 가치로 연결되는데, 이를 코엘료는 매우 단순한 서사를 통해 유치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려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 그것은 표면적으로 마법을 정의하지만 본질적으로 사랑을 의미한다. 서로 다른 차원을 연결하는 힘이자, 자기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는 근원적인 깨달음이며, 세계를 올바르고 직선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지혜의 광휘가 바로 사랑인 것이다.

  코엘료는 언제나 그랬다. 그는 그의 문학사에서 사랑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표명해왔다. 전통적 신성을 거부하고 신의 양성적 면모를 묘사함으로써 사랑의 해석이 지엽적인 부분에서 호도되는 것을 차단했다. 또한 끊임없는 수련의 과정을 통해 자아의 진실된 본질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성찰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의 기초가 자아애自我愛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일깨웠다. 더 나아가 죽음이 갖는 찬란한 속성을 파헤침으로써 죽음에 대한 자각을 치열한 삶의 생명력으로 환원시키기도 했다. 코엘료식으로 따진다면 삶과 죽음, 행복과 열정은 모두 아가페의 또 다른 현현이다. 요는, 그 모든 것이 사랑에서 통합되고 사랑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네 인물의 사랑의 방향성은 인물 사이의 독특한 긴장의 간극을 만들어내며 사랑의 의미를 점차적으로 완성시킨다. 브리다, 로렌스, 마법사, 위카는 각각 서로의 소울메이트로서 얽혀 있다. 자신의 소울메이트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과정에 놀라움을 갖게 되고 자신이 상대의 소울메이트가 되지 못하는 엄연한 현실에 고개를 떨구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울메이트는 매우 오래전, 어쩌면 시간이 존재하기도 전에 이미 운명적으로 계획되어졌을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예정되었다는 것은 신의 개입을 의미한다. 인간에게는 지극히 상식적인 인과관계로 생성되지만 우주의 이치상으로 미리 계획될 수밖에 없는, 철저히 신의 디테일로 발현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코엘료가 풀이한 사랑의 메시지는 하루키의 세계와도 닿아 있다. 하루키는 그의 최신 베스트셀러 <1Q84>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인생에는 구원이 있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매우 독특한 전제를 단다. 그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라고 말이다. 이는 사랑의 중요한 속성을 함의한다. 그것은 '정신'의 문제이자 '본질'의 문제이며 '차원'의 문제이다. 사랑은 서로 다른 은하계를 관통하는 힘이다. 사랑은 공간을 무력화하고 시간을 굴절시킨다. 하루키가 소설 <1Q84>에서 그린 세계가 그랬다. <1Q84>의 여주인공은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의 죽음은 슬프지만 비극적이지는 않다. 이유는 사랑의 결과이기 때문에, 더 나아가 진정한 사랑이 내포하고 있는 영원성으로 물리적 시간의 유한성을 상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소설 『브리다』에서 그려진 마법 세계의 진본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 그것은 종내 브리다가 알고자 했던 마법의 본질이었고 사랑의 정의였다. 인간은 분명 사랑을 통해서만이 차원의 간극을 넘어서는 초월을 경험할 수 있다. 물질이든 정신이든 우주의 그 어떤 것도 사랑을 대체하지 못한다. 사랑은 회귀하지 않고 환원될 수 없으며 치환되지도 않는다. 사랑은 사랑이다. 코엘료의 비블리오그래피(bibliography)는 항상 사랑에 관대했다. 그것이 삶과 죽음, 자아와 세계, 신과 열정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소설 『브리다』의 문학적 감동이 바로 여기에 있다.

  끊임없이 자신만의 색채로 사랑을 탐구하는 소설가 코엘료가 나는 좋다. 그가 사랑에 관대한 것처럼 나도 사랑에는 한없이 관대하다. 사랑을 그린 텍스트에 나도 모르게 관용의 수치는 무한대를 가리킨다. 어쩔 수 없다. 코엘료의 최신작 『브리다』에 대해 나는 아낌없이 별 다섯 개을 선사한다.

 
  창조의 정수髓는 오직 하나야. 그리고 그 정수를 사랑이라 부르지. 사랑은 세상 곳곳에 여러 개로 흩어져 있는 삶의 경험을 응축시키기 위해, 우리를 다시 하나로 모으려는 힘이야.   - p.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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