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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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말 모시상식에서 은희경 작가를 처음으로 만났다. 평소 옷 잘 입고 개성있는 스타일을 가진 소설가라는 인식이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첫인상이 좋았다. 무엇보다 당찬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심사위원으로 단상에 오른 그는 자신을 '편견이 많은 소설가'라고 밝혔다. 편견이 많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상식적으로 편견은 좋지 못한 태도다. 사전에서는 편견을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으로 정의한다. 그의 고백을 들으며 난 의심했다.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는 생각이 많은 소설가를 내가 과연 좋아할 수 있을까.

  작가를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핵심은 바로 '텍스트'다. 말이나 사생활, 외모나 도덕성은 비본질적인 부분에 속한다. 일차적으로 작가는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야 한다. 물론 삶과 문학은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 별개의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글은 글쓴이의 인격과 특징을 반영한다. 작가의 삶과 세계관, 정신과 태도가 글 속에는 오롯이 담겨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데미안>을 통해 헤세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괴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글은 곧 작가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말처럼 텍스트 바깥은 없다. 텍스트가 곧 작가(저자)이다.

  은희경의 최신 장편소설 『소년을 위로해줘』는 나에게 은희경 문학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지점에 서 있는 텍스트다. 그간 각각 한 권의 단편과 장편만을 만났던, 무엇보다 그의 소설에 별다른 매력을 갖지 못했던 나로서는 이 흥미있는 제목의 장편소설을 맞이하는 반가움이 작지 않았던 것이다. 소설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쓰게 되는 청춘의 이야기. 한국문단의 3대 여성작가이자 냉소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은희경이 말하는 청춘의 형태와 의미는 어떨지 자못 궁금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게 된다.

  작가는 열입곱 살의 소년 강연우를 소설 전면에 배치한다. 이혼한 엄마와 사는 연우는 매사에 심드렁하고 삶에 질문이 많은 전형적인 사춘기 소년이다. 같은 고등학교에 배치된 독고태수와 이사온 집 주변을 맴도는 이채영이 연우와 관계를 형성하는 주요인물이다. 태수의 여동생 마루도 소설 속에서 매우 개성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혼녀인 연우의 엄마 신민아와 엄마 애인 조재욱도 세 인물과 함께 이야기를 추동하는 중심인물로 자리한다.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은 간단하다. 주인공 연우가 엄마, 엄마 애인, 친구들과 관계를 형성하면서 갖게 되는 다양한 경험을 그렸다. 또한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해가는 모습을 그렸다 . 문체는 딱딱하지 않은 대화체를 사용하여 사춘기 시절의 익살스러움과 설익음을 잘 표현했다. 작가는 온전한 산문체가 아닌 대화와 묘사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형식을 파괴하는 혁신적인 문체를 구사했다. 그럼으로써 청소년 시절의 역동을 살려냈다. 또한 소설에서 중요한 매개로 반복 재생되는 'G-그리핀'의 음악과 이를 실제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동봉된 음악CD는 소설의 전달력을 배가하려는 작가의 열정으로 기분좋게 수용된다.

  하지만 소설 초반의 흡입력을 견인하지 못하는 중후반의 진부한 이야기 전개와 기존 청춘소설의 틀을 깨지 못한 통속성은 아쉽다. 날개를 단 듯한 자유로운 문체의 매력을 제외하고는 등단 17년차의 소설가의 내공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소설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흐름 및 분배가 안정적이지 못하고 등장인물의 개성 또한 획일적이다. 특히 주인공 연우의 절친인 태수의 죽음과 연우와 채영의 재회로 급마무리되는 소설의 말미는 매끄럽지 못한 산만한 종결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소설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 할 수 있는 '위로'의 감동이 크게 와 닿지 않는다는데 있다.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위로의 본질은 무엇일까. 가정의 불안정성, 현실에 대한 설익은 질문, 사랑한 대상의 상실과 재회는 이미 수없이 많은 청춘소설의 테마로 사용되었던 것들이다. 한 소년의 사춘기 시절을 수놓는 일련의 성장과정을 제삼자가 어떻게 어루만지고 위로할 수 있을까. 본질적으로 위로가 가능하기는 한 걸까. 혹 은희경이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해理解'를 '위로慰勞'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독자에게 그것을 권유하는 작가의 오해가 불편하다. 누군가의 청춘시절의 요동을 오롯하게 받아들일 수 있음은 위로가 아닌 이해의 선상에서만 가능하다. 어찌 위로할 수 있으랴. 그 시절의 부자연不自然과 비합리非合理를.

  주인공 연우가 겪는 어린 시절의 다양한 파노라마는 그 시기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법한 것들이다. 인간은 누구나 경험하며 어른이 되어간다. 생물학적 나이보다 경험의 연륜이 어른의 의미에 더욱 적확히 닿아 있다. 기쁜 것이든 아픈 것이든 슬픈 것이든 그 어떤 형태의 경험이든 인간은 겪고 겪는 동안 깨닫고 성장해간다. 타자와의 다양한 관계맺기를 통해 기뻐하고 아파하며 슬퍼하는 연우의 고독을 나는 굳이 위로하고 싶지 않다. 그저 이해하고 침묵할 뿐이다. 적어도 인간의 성장만큼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흐름이 매우 인과적因果的으로 작동되는 영역이다. 사랑하고 아파하며 상실했던 만큼 미래는 더 자라있지 않을까. 그것을 기대하며 무언無言의 이해로 지켜보는 것. 그것이 청소년 혹은 청춘에 대한 진정한 위로가 아닐까.

  서평을 정리하자. 소설 『소년을 위로해줘』는 작가의 연차와 매력적인 책 제목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 못한 작품이다. 그렇다고 해서 매우 실망스럽게 읽었다는 뜻은 아니다. 작가는 충분히 진지했고 소설은 적절히 유쾌했다. 단 감동을 주지 못했다는데 아쉬움이 있다. 물론 모든 소설이 감동을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성장소설만큼은 감동이 필요하다. 그간 읽어왔던 대부분의 성장소설에서 꾸준한 감동을 받아왔던 내가 왜 은희경의 소설에는 반응하지 못하는 걸까. 나를 감동시키지 못한 작가 은희경. 이쯤해서 말하고 싶다. 은희경을 위로해줘.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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