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아침, 오랜만에 작가 오소희와 문자를 주고 받았다. 간만에 성사된 안부의 동기는 그의 신간이 출간된다는 반가운 소식에 기인한 것이었다. 항시 그의 새로운 책이 출간될 때마다 가장 먼저 구독해서 후기를 남기곤 했다. '가장 먼저'라는 속도 권력은 한 작가를 사랑하는 내 나름의 독특한 방식이었던 것이다.

 

   고백컨대, 오소희는 내 이십대의 마지막을 '서른'이라는 엄연히 다른 세계로 아름답게 연결해준 작가이다. 내 스무시절의 말미는 사랑의 '결핍'과 '과잉'이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둥개고 허우적거린 시기였다. 그때 오소희는 나에게 사랑의 본질과 결혼의 의미를 토닥거렸다. 나는 그의 텍스트 속에서 '괴테'와 '톨스토이'와 '하루키'를 보았다. 그의 에세이는 과거에 사랑을 논했던 모든 고전과 인문학이 현대적 감성으로 합일되는 것을 이루어냈다. 작가의 혼잣말 수준을 넘어 자신과 타자와 우주에 노크하며 그에 적확한 반응을 얻어내는 힘이 그의 에세이 속에는 오롯하게 담겨있는 것이다.

 

   나는 그와 여러번 사석에서 만났다. 그때마다 일관되게 나에게 주문했던 그의 조언은 당시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내 사랑의 원형'을 뚜렷하게 각인하는 데 일조했다. 그 각인의 반복적 반추는 곧 내 첫사랑을 부활시켰고 그 사랑은 결국 결혼이라는 의식을 통해 '가족'으로 완성되었다.

 

   작가가 가진 힘은 실로 강력하다. 텍스트의 힘은 시대를 뚫고 의식을 전환시킨다. 평론가 하스미 시게이코는 동시대 비평가의 임무를 "시대를 선도해가는 작가를 죽이는 것"으로 규정한다. 개소리와 같은 시게이코의 말을 인용하는 게 웃기지만 그의 말을 독자를 주어로 패러디하면 의외로 멋진 문장이 완성된다. "동시대 독자의 임무는 시대를 선도해가는 작가를 살리는 것이다". 그렇다. 결국 작품은 독자의 머리와 가슴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나면 내 딸은 세 살이 된다. 오소희의 처녀작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는 세 살배기 아들과 터키를 여행하며 기록한 여행수기다. 당시 결혼 전에 읽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벌벌 떨면서 몇 시간만에 읽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렇다면 그 책이 가진 본래성과 나의 시간적 현재성이 일치하는 며칠 후, 나는 그 책을 다시 읽어야만 하는 행복한 의무감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그렇다. 나는 작가 오소희를 사랑해도 너무 사랑했던 것이다.

 

   흐뭇한 마음으로 서점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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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적들 - 전원책의 좌파 비판
전원책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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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변호사 전원책이 처음 내 눈에 띈 건 텔레비전 토론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군가산점제를 주제로 한 토론에서 상대 여성패널을 높은 식견과 탄탄한 논리로 꾸짖는 모습은 참으로 볼만했다. 당시 그는 대한민국 젊은 남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이후 그는 정치·사회를 주제로 한 텔레비전 토론에 자주 등장하며 건강한 보수의 입장을 대변했다. 말빨있고 순발력 넘치는 진보논객들이 활기를 띨 때 전원책의 존재는 보수의 입장에서는 오랜 갈증을 푸는 한 모금의 물과 같은 것이었다. 진중권과 유시민을 상대할 수 있는 보수논객이 있다는 것은 즐겁고 흥미로운 일이었다.

전원책의 프로필을 훑으면서 놀란 게 하나 있다. 그가 시인(詩人)이라는 사실이다. 자기 자신조차 '본업은 시인, 생업은 변호사'라 일컬을 정도로 시인에 대한 자존감이 확실한 사람이다. 실제로 그는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고 신춘문예로 재등단했다. 이미 두 권의 시집을 내기도 했다. 텔레비전에서 봐왔던 그의 이미지는 보수논객으로서의 냉철하면서도 비타협적인 신념주의자로 각인되어 왔다. 그런 그가 언어의 정점이자 언어를 넘어선 세계를 창조해내는 시인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놀랄 만했다. 그 외 집필한 몇몇 저서의 존재는, 그가 마냥 대중적 인기에 함몰된 '말만 하는 지식인'은 아니겠다, 하는 기대감을 갖게 했다.

전원책 변호사의 『자유의 적들』은 보수주의자로서 좌파를 비판한 책이다. 4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분량은 탄탄한 펙트와 흥미로운 소재를 풍성하게 담아냈다. 저자는 다양한 소재와 개성있는 논리로 좌파를 꾸짖는다. 일방적이고 비논리적인 비난에 함몰되지 않고 풍성하고 깊이있는 역사적·철학적 재료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다듬고 논리를 펼치는 저자의 내공은 인상적이다. 저자가 비판하는 대상은 꽤 폭넓다. 좌파의 원류인 마르크스를 위시하여 기독교와 20세기의 과학사(科學史)까지 건드릴 정도로 광범위하다.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강점은 저자의 폭넓은 인문학적 식견에 있다. 책 곳곳을 채우고 있는 다양한 철학자의 사상과 그에 대한 저자의 주관은 책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또한 문학사를 풍성하게 수놓았던 대작가의 이름도 수시로 거론된다. 그야말로 지식의 잡동사니라 할 만하다. 즉 저자는 '좌파 비판'이라는 책의 본질을 증명하기 위해 정치와 사회를 넘어서는 다양한 좌파적 카테고리를 향해 밀도있고 입체적인 파상공세를 퍼붓고 있는 것이다.

비판의 칼날이 닿는 범위는 폭넓고 수위는 가차없다. 좌파를 비판한 책이기 때문에 좌파의 본령이자 원류인 마르크스는 저자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진다. 또한 실존주의의 거장 사르트르를 강도높게 비난한다. 인류가 낳은 가장 위대한 소설가 톨스토이도 혼쭐이 난다. 한미(韓美) 전직 대통령들도 예외는 아니다. 수많은 지식인, 철학자, 작가, 정치인, 언론인 등에 이르기까지 저자의 공격대상은 다양하다. 공세수위 또한 상당히 높아서 '씹는 맛'의 희열만으로 책장은 쉽게 넘어간다. 저자는 특히 마르크스와 사르트르에 대해 한맺힌 분노를 뿜어내는데, 그들을 인류의 절대악으로 규정한다.

마르크스를 신랄하게 짓밟는 저자의 논거는 대부분 어렵지 않게 수용될 수 있는 것들이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중 하나는 '기존질서에 대한 폭력적 전복'이다. 마르크스의 의도와는 별개로 그의 사상을 추종하고 영향받은 독재자들에 의해 인류의 고통과 질곡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피할 길이 없다. 그 어떤 면죄부를 끌어다 놓더라도 '집단화의 폐착'으로 귀결된 '혁명을 위한 불가피한 폭력'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카를 마르크스에게 있다. 지식인에게 '해석'의 의무보다 '변혁'의 역할을 강조했던 마르크스의 전언은 결국 자신을 꾸짖고 굴절시키는 '자기부정'이 되고 있다. 저자가 마르크스와 사르트르에게 퍼붓는 강도높은 질타의 당위성은 보혁(保革)의 이념을 초월하는 보다 궁극적인 가치의 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간 한국의 지식사회에서 보수에 대한 진보의 비판은 양질(良質)의 콘덴츠가 나름 잘 생산되어 왔다. 하지만 그 반대의 입장은 빈약했던 게 사실이다. 양적으로 적었을 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싸구려가 많았다. 대형서점의 정치·사회 코너를 한바퀴 돌면 이를 확연히 체감할 수 있다. 우리사회에서 논리가 전제된 보수지식인의 폭과 영향력이 얼마나 초라해왔는지를 인식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이런 배경에서 이 책은 단연 눈에 띈다.

물론 이 책의 한계가 없는 건 아니다. 저자의 역사적·철학적 식견이 잘 버무러져 좌파를 해부해고 재단한 점은 충분한 설득력을 띤다. 일방적인 비난이 아니라 오랜 기간 연구하고 입장을 정리한 저자의 준비성 또한 돋보인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소재를 건드리면서 책 전체를 응집하는 구심력은 다소 부족하다. 책의 구성뼈대가 되는 26개의 소재가 산만하게 흩어져 있어 초반에는 흥미있게 책장이 넘어가다가도 중반을 넘기면서는 주제성을 잃은 엉성한 곁가지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다소 난삽한 것이다. 구심력을 잃게 되면 자연스럽게 원심력이 작동하는 법이다. 충분히 흥미로우면서도 전체적인 힘은 떨어지는 완료성의 미흡이 이 책의 한계다.

저자는 많은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많은 얘기를 하기 위해 배치된 많은 소재와 그에 따른 불필요한 논거가 너무 많이 사용됐다. 그것이 저자의 주장이 응집력을 잃고 난삽하게 흩어지며 '좌파 비판'이라는 책의 본질을 흐려지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본질에 이탈한 여러 소재를 난잡한 병렬식 구도로 풀이하기보다 큰 틀의 몇몇 주제를 세우고 그 안에서 논지를 전개하며 유기성을 갖췄다면 보다 힘있는 책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대통령 선거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 지지율 1%도 안되는 모후보의 사퇴로 본격적인 보수와 진보의 양자대결이 되었다. 그들이 진짜 보수인지 진짜 진보인지는 차후의 문제로 넘기자.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기 이전에 '정직'과 '정의'와 '상식'의 전제가 필요하다. 그 전제는 절대조건이다. 보수도 좋고 진보도 좋다. 궁극적으로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 자체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전원책의 좌파 비판 『자유의 적들』은 한국사회의 굴곡된 이념주의의 자화상을 '동전의 앞뒷면적' 차원에서 응시하게 하는, 흥미롭지만 힘은 부족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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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연기를 훔쳐라 - 배우지망생에게 전하는 신현준의 연기노트
신현준 지음 / 한국슈타이너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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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연예인의 책 출간을 즐겁게 보지 않는 편이다. 연예인이라는 네임벨류에 편승해 책 한 권 팔아보고자 하는 교묘한 상술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물론 텍스트의 질이 우선이다. 연예인이냐 아니냐는 비본질에 속한다. 얼마나 훌륭한 책이냐가 본질인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간 읽어왔던 대부분의 연예인 책들을 곱씹어보면 씁쓸함 그 자체이다.

한 권의 책은 오직 책으로서 존재한다. 작가의 이력과 평판은 중요하지 않다. 책은 책이다. 유명한 사람이 썼다고 해서 텍스트의 권위가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며 유명작가의 신작이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지금 내가 잡고 있는 텍스트의 현재상. 그것이 한 권의 책에 대한 유일한 평가기준이다.

이토록 나는 책 평가에 있어 단호한 편이다. 리뷰어로서 양심과 주관을 팔 순 없다. 하지만 이러한 책에 대한 내 신념도 가끔 굴곡될 때가 있다. 이는 철저히 내 개인적 성향에 기인하는데, 나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관대한 편이다. 대인관계는 물론 책읽기에서도 이러한 성향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신경숙의 소설은 다 좋고 오소희의 여행수기는 다 좋다. 책 평가에서 작가의 외연은 중요하지 않지만 작가를 향한 내 호감도는 여전히 종속적이다. 어찌할꼬. 이 궤변을.

배우 신현준을 좋아한다. 그렇기에 연예인의 책 출간을 곱지 않게 바라보면서도 그가 책을 출간한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찾아 읽곤 했다. 신현준의 신간 <배우, 연기를 훔쳐라>는 배우 지망생에게 전하는 신현준의 연기노트다. 책의 구성은 간명하다. 연기경력 20년이 넘는 중견배우로서 저자가 후배에게 들려주는 애정어린 조언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책 곳곳에서 배우로 살아가는 것의 고통과 자부심, 후배들을 향한 진실어린 애틋함이 잘 녹아 있다. 무엇보다 현재 방송연예과 교수로 재직중인 그의 이력을 증명하듯 연기와 배우에 대한 실재적이고 기술적인 조언들이 틈틈하게 잘 기록되어 있다.

저자는 '오디션', '감독과의 관계', '촬영기법', '인터뷰 스킬', '매니지먼트' 등 배우로서 숙지해야 할 여러요소들에 대해 설명한다. 곳곳에 자신의 경험담과 동료배우의 예를 언급하며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다. 저자가 2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작품에 출연했는지 책 곳곳에서 확인된다. 또한 여러 배우들과 절친하게 지내는 저자의 인맥도 눈에 띈다. 배우로서의 프로의식을 확인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저자 신현준의 확고한 배우관, 연기관이 책 속에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이 책의 한계 또한 곳곳에서 발견된다. 엄밀히 말해서 '한 권의 책'으로 평가하기에 함량미달인 부분이 많다. 메시지의 타겟을 배우 지망생에 한정하였기 때문에 독자층의 보편적 공감을 담아내기에는 한계가 있다. 군데군데 설명해놓은 배우가 가져야 할 전문적인 기술 관련 내용은 좋다. 하지만 대부분의 글이 서점에 범람해 있는 자기계발서의 반복 정리된 수준에 머물러 있어 아쉽다. 저자의 진정성과 열정만으로 좋은 책이 될 수는 없다. 그가 배우로서 흘렸던 땀과 고통만큼이나 글쓰기도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 앞으로 꾸준히 책을 집필할 의사가 있다면 글쓰는 자로서의 역량과 밀도도 고민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책의 막장을 덮은 후 배우라는 직업의 존재성에 대해 잠시 사유했다. 저자가 배우 지망생 후배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결코 새로운 것들이 아니다. '뚜렷한 목표의식'과 '예리하고 섬세한 감각', '철저한 자기관리'와 '변하지 않는 초심'은 비단 배우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직종과는 상관없이 일에 승리하고 사람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들이다. 어쩌면 배우라는 직업만큼 가장 '인간적인' 직업은 없을 것이다. 인간의 표정과 몸짓을 연구하고 내면과 행태를 천착하며 남이 직접 되어보는 게 바로 배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배우는 가장 적극적인 타인이며 가장 실재적인 인간학도다.

이런 면에서 책과 배우는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인간학이라는 측면에서 배우는 책과 가까울 수밖에 없다. 책과 배우의 공통분모는 인간탐구이다. 끊임없이 인간을 탐구하고 성찰하는 과정 속에서 책과 배우의 실존이 놓여 있다. 저자가 책 곳곳에서 독서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 책읽기가 인간을 성찰하는데 가장 건강하고 객관적인 방법이라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배우로서 책이 가진 힘을 인정하고 그것을 사랑하며 후배들에게 장려하는 배우 신현준의 모습. 막장의 저자의 책 추천리스에 미소를 짓는다. 순전히 그것 때문에 별점 반 개를 더 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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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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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먹는 걸 마냥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시간이 흘러갔다는 것이고 그만큼 잃어버릴 것이 많다는 것이며 삶의 끝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선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보편적인 상식에서 사람들은 나이먹는 걸 꺼려하고 젊음을 갈망한다. 하지만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인간 또한 하나의 생명체로서 시간이 흐르면 늙는다. 그것이 우주의 이치이다.

나도 그랬다. 나이 스물아홉의 시절을 나는 선연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는 서른이 되는 게 너무 싫었다. 젊음을 표상하는 스물을 졸업하기 싫었고 어감부터 부담스러웠던 서른의 입학에 소름을 돋았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결혼을 했고 아이까지 낳은 삼십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지만 당시 서른을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내면에서 샘솟는 현실 부정을 주체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이 얼마나 미련하고 부질없는 고민이었는지 모른다. 내 힘으로 어쩔수 없는 명확한 우주의 섭리에 대해 시위하고 반발한 것이 공허하고 부끄럽기만 하다. 본질은 '늙어가는 것'에 있지 않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늙는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늙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품위있고 매력있게 늙어갈 수 있는 것. 그것은 분명 신의 축복이다.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노인을 만들어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었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는 전형적인 헤밍웨이표 주인공으로서 강렬한 문체만큼이나 힘있는 인물이다. 망망대해에서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고 상어와 혈투를 벌이는 산티아고의 집념이야말로 늙음의 본질적인 기준은 나이가 아닌 정신의 문제임을 일깨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의 포인트를 한 노인(인간)의 불굴의 의지와 열정으로 잡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러한 일면적 감상은 헤밍웨이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 뿐이다. 주인공 산티아고가 지닌 근본적인 매력은 며칠동안 청새치와 씨름하고 그 청새치를 지키기 위해 상어떼와 사투를 벌이는 데 있지 않다. 산티아고의 진정한 위대함은 물고기와의 죽음을 건 혈투가 끝난 후 별일 없다는 듯 집에 가서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여유있게 커피를 마시는 데 있다. 강렬하고 지독한 삶의 순간순간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는 힘. 그것이 노인 산티아고가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인생 여정 가운데 특별한 것에 경도되는 경우가 많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삶을 동경하며 자기체면에 걸림으로써 비현실적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젊은이들에게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삶의 몇몇 순간이 기적이 되고 이벤트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삶 전체를 기적으로 채우고자 하는 건 환상이자 탐욕이다. 그것은 기적의 본질에 무지한 이들의 일탈이다. 삶 전체를 송두리째 기적으로 인식하고 싶은 사람들의 망상이 결국 건강한 인생궤도를 이탈하게 만든다. 삶이란 그저 살아가는 것이다. 전적으로 평범한 것이다. 삶의 기적은 시간의 도도한 흐름 가운데 작동되는 일상성의 재발견이다. 결국 보편과 일관一貫이 진정한 삶의 기적을 완성시킨다. 산티아고가 가진 강인함은 바로 이러한 삶의 진리에 맞닿아 있다.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라는 소설 속 명문장은 헤밍웨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잘 말해준다. 인생의 무대 위에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과정과 결과를 만난다. 삶의 과정과 결과는 종속적으로 얽혀있기도 하지만 때로는 독립적인 영역으로 분리되기도 한다. 인과관계로 풀이될 수 없는 삶의 다양한 역동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요동친다. "파괴는 있되 패배는 없다"는 말은 결국 정신적 가치의 승리를 웅변하는 것이다. 인간의 참된 승리는 정신의 세계에서 실현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설령 파괴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패배가 아닌 승리의 영역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나는 『노인과 바다』를 유독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사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포기하는가. 그리고 결과만을 중시하는가. 학업이든 일이든 사랑이든 그 어떤 것이든 젊음의 가장 큰 힘은 도전과 모험으로 대변되는 과정의 영역에서 나오는 법이다. 최소한의 개척정신마저 결락된 젊음은 이미 죽은 젊음이다. 만약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가 젊은 사람이었다면 소설의 감동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노인이었기 때문에 헤밍웨이의 메시지가 독자에게 보다 강렬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젊음의 본질을 가장 명확하고 적확하게 그리고 생동감 있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이 소설을 탐독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양한 자아 가운데 자신의 진본을 찾아헤매는 이땅의 젊은이들에게 고전 『노인과 바다』를 아낌없이 추천한다.

작년까지 헤밍웨이의 작품은 검증되지 않은 번역본들로 적지 않이 쏟아져 왔다. 올해부터는 사후 50년 저작권법이 풀리면서 역량있는 번역가와 권위있는 출판사에서 본격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그간 영미문학을 많이 번역해온 김욱동 교수의 번역은 여전히 깔끔하다. 번역자로서 김욱동 교수의 장점은 자신의 번역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인정하는 데 있다. 평소 빠른 개역이 이를 증명한다. 그가 3년을 준비했다는 민음사판 『노인과 바다』 번역은 부족함이 없을 만큼 깔끔했다. 헤밍웨이 특유의 강건체를 무난하게 번역한 느낌이다. 문장의 호흡을 짧게 처리하고 문체의 건조함을 잘 살렸다. 성실한 각주와 해설작업 또한 훌륭한 부분이다. 문제없는 번역이다.

서평을 정리하자. 『노인과 바다』는 강력한 소설이다. 주인공의 매력과 특유의 강건한 문체는 독자의 눈을 떼지 못하게 하고 명확한 주제의식과 강인한 흡입력은 독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고전은 역시 고전이다. 또한 헤밍웨이는 역시 헤밍웨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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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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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인류 문학사 가운데 가장 뛰어난 소설가로 톨스토이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적어도 '소설'이라는 카테고리에서 톨스토이의 포스를 넘어서는 이는 없을 듯하다. 물론 동시대의 천재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자주 비견되곤 한다. 하지만 두 인물의 삶과 철학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석은 별도의 논설이 필요하다. 톨스토이가 그려내는 건강한 세계와 아름다운 사랑론, 인간의 섬세한 묘사와 신을 향한 진지한 성찰은 그의 문학적 깊이와 밀도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세계 문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가. 그는 바로 톨스토이다.

  레프 톨스토이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 할 세 편의 텍스트가 있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은 톨스토이 문학을 관통하기 위한 필독서다. 세 작품 모두 어마어마한 분량으로 독자를 압도시키는데 각기 고유의 작품성으로 서로 독립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톨스토이 인생의 총체적 관점에서 조망하면 어떤 특별한 힘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

  <전쟁과 평화>는 톨스토이 초기작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로 꼽힌다.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가 인생의 전환점에서 쓴 가장 예술적인 소설로서 <전쟁과 평화>와 함께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훌륭한 장편소설로 우뚝 서 있다. 인생의 노년기에 쓴 <부활>은 문학성과 예술성에서 앞선 두 작품에 비해 힘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지만 신에 대한 톨스토이의 진지한 천착이 엿보이는 수작이다. 세 장편을 읽지 않고 톨스토이를 논한다는 것은 '거짓' 혹은 '교만'이다.


  생각이 다듬어지지 않았던 이십대 때 나는 톨스토이의 세 편의 명작을 힘들게 읽어냈었다. 역자가 누구이고 출판사가 어디이며 완역본인지 여부도 몰랐던 때였다. 심히 힘들고 고통스럽게 <전쟁과 평화>를 읽었다. 1,000페이지가 넘는 어마어마한 분량과 빈번하게 출몰하는 톨스토이의 장광설(?)에 내 전두엽은 혹사되었고 작품이 지닌 본래성을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세월은 흘렀다. 톨스토이의 필요성이 다시 한 번 내 안에서 역동했다. 이에 제대로 된 번역본으로 진중하게 읽어보고자 했다. 문장 하나 쉼표 하나까지 톨스토이의 숨결을 느껴보길 원했다. 그래서 다시 손에 잡은 것이 톨스토이의 불멸의 저서 <안나 카레니나>다.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의 사상과 예술이 집대성된 걸작으로서 소설이 갖추어야 할 모든 형태의 보편들이 오롯하게 녹아 있다. 나는 여태까지 읽었던 문학작품 중 이 소설을 가장 완벽한 텍스트라고 주장하는데 망설이지 않는다. 한치의 흠도없는 완전무결한 작품, 이라고 평가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분명 '완벽한' 작품이다.

  <안나 카레니나>가 완벽한 장편소설이라는 데에는 소설을 이루는 여러요소들이 하나같이 모두 완벽하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대담한 주제, 등장인물의 생명력, 인간과 배경 사이의 균형 잡힌 입체성, 담담하지만 세밀한 묘사, 당대를 훑고 있는 역사성, 문장·문단의 유려함, 작품 자체의 문학성과 예술성 등. <안나 카레니나>는 소설이 갖추어야 할 모든 요소를 신적인 안정감으로 갖춘 흠결없는 작품이다. 소설가로서의 웅대하고 탁월한 기본기. 그것이 톨스토이 문학의 주춧돌이다.

  이 소설은 네 명의 중심인물이 이야기를 추동한다. 주인공인 안나와 그녀의 정부 브론스키가 한 편의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다른 한 편에서는 톨스토이의 모습이 투영된 레빈과 그의 아내 키티의 이야기가 흘러간다. 네 인물들이 각기 두 명씩 독립적인 서사를 펼치는 듯 보이지만 각자는 관심과 애증의 관계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외연적으로는 안나가 가정을 버리고 브론스키와 바람을 피운다는 내용으로 볼 수 있지만 내포적으로는 당시 사회가 가진 다양한 문제점들에 대한 톨스토이식 관찰과 항변이라 할 수 있다. 즉 톨스토이는 가정소설이라는 형태 속에서 당시 러시아가 고민했던 여러 부분들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담음으로써 엄연한 사회소설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워낙 유명하기에 다루지 않기로 하자. 나는 이번 서평에서 작품의 주제와 톨스토이 소설의 특징, 그리고 등장인물의 매력만을 다루고자 한다. 사실 등장인물의 분석만으로도 서평의 분량을 채우고도 남는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톨스토이가 창조한 인물들은 모두 완전하게 살아있다. 대부분의 소설은 현실성 없는 인물이 등장하고 플롯에 맞추어 인물을 유형화시킨다. 하지만 톨스토이의 인물들은 그렇지 않다. 인물이 플롯에 맞춰져가는 게 아니라 플롯이 인물을 뒤따라간다. 완전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기실 '생명력'은 톨스토이 소설의 명징한 특징이다. 대부분의 소설은 플롯에 따라 사건의 전개를 알 수 있는데 톨스토이 소설은 예상이 많이 빗나간다. 우리는 소설 속 인물과 현실 속 인물의 성격이 다르다는 생각을 하고 소설을 읽는다. 톨스토이 소설은 인물의 성격이 완전히 살기 때문에 소설은 이렇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려버린다. 실제라면 그렇게 진행되겠구나, 가 아니라 완전히 현실적이다. 그런데 그 현실적인 성격을 아주 탄탄하게 전개시키면서 작가 자신이 의도한 결말 쪽으로 몰아간다. 요컨대 톨스토이 소설의 매력은 너무나 현실적인 인물성격을 가지고 너무나 완벽하게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것이다.

  평론가들은 한결같이 톨스토이를 리얼리즘의 거장이라고 치켜세운다. 그것은 생명력과 동류성을 띠는 톨스토이의 또 다른 마력에 기인하는데 그가 우리 자신도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인간심리를 끄집어내서 표현하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스토리에 따라 작위적으로 인물의 개성을 죽이고 꼭두각시처럼 만들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인물의 개성을 살리면서 스토리를 물 흐르듯이 이끌어 나간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모든 것을 범상한 인간상을 통해 드러낸다는 점이다. 톨스토이의 인물들은 대부분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상식적인 사람들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이 병적이거나 급진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범상성 안에서 개성을 살리고 생명력을 부여한다. 인간의 미묘한 심리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 개성을 살리는 작가는 별로 없다.

  주인공 안나를 살펴보자. 안나는 세계 문학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여인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톨스토이는 소설이라는 방식으로 그려낼 수 있는 최고의 매혹적인 여성을 창조했다. 안나는 남편과 아들을 두고 불륜을 저지르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인 삶을 산 여성이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그녀가 뿜어내는 여성성만큼은 가히 고혹적이다. 그 매력은 카레닌(안나의 남편)과 브론스키를 넘어, 시대와 지역을 넘어, 문화와 인종을 넘어, 현재 책장을 넘기고 있는 독자의 심장에까지 도달하여 빛을 발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안나 카레니나>를 읽은 후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브론스키가 안나를 보고 한 눈에 반했던 바로 그 '무도회'와 그때 안나가 입었던 '검은색 드레스'를 생동감 있게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안나보다 키티의 매력에 더 매혹되었다. 사실 안나는 책임감 없는 사랑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불륜의 늪에 빠져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도망갔으며 종국엔 그마저도 지켜내지 못하고 자살로써 삶을 마감한다. 대책없는 무책임성의 극치다. 반면 소설의 초반부터 종결까지 레빈의 사랑을 독차지한 키티는 비록 자신이 처음 사랑했던 남자의 사랑을 얻지는 못했지만 자신을 뜨겁게 사랑한 남자와 결혼하여 가정을 성공적으로 이룬 행복한 여성의 전범이 된다.

  가정의 행복은 절대로 대가없이 이뤄지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논함에 있어 '희생'이 근본 사랑의 본체가 된다는 점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 가정의 성공은 수많은 요소들 가운데 사랑의 완성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희생이야말로 행복한 가정의 전제조건이 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대로 불행하다, 는 소설의 첫 문장은 가정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필요한지를 역설하는 명문장이다.

  부부로서 많은 것이 다르고 부딪혔지만 결국 레빈의 사랑을 사로잡아 행복한 가정의 원형을 건설한 키티의 매력이야말로 '미모'와 '열정'의 일차원적인 매력보다 우위에 있는 '지혜'와 '연합'이라는 여성성 최고의 아름다움이었던 것이다. 레빈의 형 니콜라이의 임종 전에 찾아간 병문안에서의 키티의 행동은 사랑스러움 그 자체이다.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해 고집을 부리는 듯하지만 행위의 목적과 결과는 결국 남편 레빈의 행복과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 키티의 현명함이 있다. 실로 사랑스러운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톨스토이는 의도적으로 안나의 매력을 독자에게 강요하는 듯하다. 안나의 활력을 지나치게 흘러넘치도록 그려냈다. 그것이 내게는 불편했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매력을 발산하는 키티의 아름다움이 내게는 보다 편안하게 와 닿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레빈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톨스토이 자신의 소설 속 투영이다. 톨스토이는 전지적작가시점의 완벽한 실현을 보여주고 있는데 소설 속에서 레빈이 갖는 위치는 매우 독특하다. 톨스토이는 레빈을 통해 자신의 입장과 사상을 독자에게 일직선으로 전달한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 속에는 인간이 만들어낸 거의 모든 것들이 들어가 있다. 그 시대 러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 예술, 건축, 음악, 공연 등 거의 모든 영역을 두루 다루고 있는데 이에 대한 톨스토이의 견해와 입장은 철저히 레빈의 입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된다. 어쩌면 <안나 카레니나>가 소설이라는 장르를 뛰어넘는 종합예술작품으로서의 위대한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레빈이라는 인물의 존재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은 안나보다 레빈에 가깝다.

  사실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레빈으로 시작해 레빈으로 끝이 난다. 특히 소설의 종결은 안나의 죽음 이후에도 꽤 많이 흘러가는데 그 분량은 철저히 레빈의 독백이 점철하고 있다. 형 니콜라이의 죽음과 아내 키티의 출산과정을 목도하면서 레빈은 삶과 죽음에 대해 전회轉回에 가까운 충격적 깨달음에 휩싸인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 삶에서의 선善의 이해, 행복을 위해 필요한 요소들, 삶의 우선순위로서의 신앙 등을 깊이있게 사유하며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을 느끼고 기대하는 레빈의 변화는 소설의 말미를 매우 웅숭깊게 독점한다.

  레빈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소설의 주제로 연결된다. 나는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를 "삶이란 무엇이며,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갈무리했다. 톨스토이는 지속적으로 귀족사회에 대해 농도 높은 조소를 던지고 있는데 이는 레빈을 통해 드러냈던 농촌사회에 대한 애착과는 대조되는 부분이다. 사교계 모임을 통해 서로 만나고 교감하는 귀족들의 모습은 돈과 명성에만 매달렸던 당시 러시아 귀족의 겉치레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그 외에도 톨스토이는 당시 상류층의 사고방식과 생활태도, 사랑과 결혼, 정치와 예술, 더 나아가 습관과 음식까지 비웃는다. 외적인 것을 버리고 본질적인 것에 침잠하여 소박한 삶을 살아야 함을 넌지시 교훈한다. 요컨대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어떻게 사는가'는 결국 삶에 대한 인간의 책임있는 태도를 유도한다. 초기작 <전쟁과 평화>는 끊임없이 '삶'을 말했다. 반면 <안나 카레니나>는 니콜라이의 죽음에 번민하는 레빈의 모습을 통해서도 알수 있듯이 '죽음'에 대한 자못 진지한 고뇌를 드러낸다. 전작과의 이러한 차이점을 발견하는 일은 톨스토이 문학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바로 이 대목이 톨스토이가 소설가에서 성자로 변화하는 동기점이자 그의 만년작 <부활>과 연결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인생관은 명징하다. 인간은 죽음을 통제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이며 초월적이고 신성한 존재를 통해 인간은 보다 '인간'다워진다는 사상이다. 삶과 죽음은 동일한 것이며 본질에 벗어난 모든 요소들을 버림으로써 삶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톨스토이의 역설은 깊이있게 천착할 만하다.

  톨스토이가 제기한 삶과 죽음의 동일성에는 사랑과의 동류적인 관계를 포함한다. 즉 삶과 죽음과 사랑은 매한가지인 것이다. 톨스토이는 사랑 예찬론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말년이 되면 될수록 그 정도는 더욱 심해진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이 실패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둘은 분명 사랑했지만 결국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랑의 '도입'에는 성공했지만 사랑의 '완성'에는 실패했다. 그래서 비극적이었다. 사랑은 본래적으로 시공간성의 무의미함을 담보한다. 부재하지는 않지만 분명 무의미하다. 시간이 흐르고 공간이 바뀌어도 사랑의 본질은 변질되지 않으며 시작점에서 발현된 에너지는 몇 개의 우주를 통과한다 하더라도 질량에는 변화가 없다. 불변성과 고유성이야말로 사랑이 아름다울 수 있는 가장 긴요한 원리인 것이다.

  사랑이 좋은 것이긴 하지만 엄연한 하루하루를 살아감에 있어 사랑타령만 주구장창 늘어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인생이라는 기나긴 도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일과 사람을 만난다. 삶의 복잡다단한 관계망 가운데 울고 웃고를 반복하는 게 바로 인간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한 삶을 원할 것이다. 삶과 행복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사고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일까. 선善하게 산다면 그것이 가능할까. 만약 그렇다면 선한 삶이란 무엇인가. 그 기준은 무엇이며 인간은 그것을 판가름할 수 있을까. 삶에 대한 다양한 물음들이 소설의 막장을 확인함과 동시에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결국 톨스토이는 삶과 선의 함수성과 그것에 대한 농밀한 이해를 통해 진정으로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들춰보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만들어낸 인물들만큼이나 생명력 있는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책을 느리게 읽는 편이지만 <안나 카레니나>는 나에게 더욱 느린 속도를 요구했다. 톨스토이가 글을 어렵게 쓰는 작가가 아님에도 한 문장 한 문장을 정독하다시피 했다. 톨스토이 번역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박형규 교수의 깔끔하고 유려한 번역이 가독의 집중력을 배가시켰다. 중간에 다른 책을 읽어야 했던 이유가 있었지만, 장장 한 달에 걸친 <안나 카레니나>의 여정은 내 안에 무한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느꼈다. 생명력에도 '수준'과 '밀도'가 있다는 것을. 대범한 주제의 생동감과 흘러넘쳤던 안나의 활력, 발군의 은유와 묘사로 대변되는 톨스토이 문장의 맛깔남과 길지만 격렬했던 호흡은 걸작 <안나 카레니나>가 나에게 선사한 찬탄스러운 생명력의 본질이었다. 대문호 톨스토이가 가졌던 신적인 생명력은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100년의 시간차를 넘어 나에게까지 흘러넘쳤던 것이다. 고백컨대, 난 지금 톨스토이로 인하여 무한한 생명력 가운데 놓여 있다. 미치도록 뜨겁고 강렬한. 아. 톨스토이여.

  세계적인 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천재를 가늠할 잣대를 제시한다. 먼저 "창조적 자아를 위한 자유와 정신적 의식의 확장을 위한 자유"를 얼마나 성취했나 따져야 한다. 이 기준을 통과한 작가들에게 재차 서열을 매기는 또 다른 지표가 있다. 생명력이다. 블룸은 최고의 천재 셰익스피어와 단테를 가르는 지점을 단호하게 설명한다. 단테는 <신곡>을 넘어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로 건너오지는 못하는 반면 셰익스피어는 문학을 삶에 적용한, 즉 문학을 통해 인식의 수준을 높이려 한 최고의 사례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라며 찬탄해 마지 않는다. 하지만, 블룸의 말은 틀렸다. 셰익스피어와 우리 사이에는 바로 톨스토이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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