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아침, 오랜만에 작가 오소희와 문자를 주고 받았다. 간만에 성사된 안부의 동기는 그의 신간이 출간된다는 반가운 소식에 기인한 것이었다. 항시 그의 새로운 책이 출간될 때마다 가장 먼저 구독해서 후기를 남기곤 했다. '가장 먼저'라는 속도 권력은 한 작가를 사랑하는 내 나름의 독특한 방식이었던 것이다.

 

   고백컨대, 오소희는 내 이십대의 마지막을 '서른'이라는 엄연히 다른 세계로 아름답게 연결해준 작가이다. 내 스무시절의 말미는 사랑의 '결핍'과 '과잉'이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둥개고 허우적거린 시기였다. 그때 오소희는 나에게 사랑의 본질과 결혼의 의미를 토닥거렸다. 나는 그의 텍스트 속에서 '괴테'와 '톨스토이'와 '하루키'를 보았다. 그의 에세이는 과거에 사랑을 논했던 모든 고전과 인문학이 현대적 감성으로 합일되는 것을 이루어냈다. 작가의 혼잣말 수준을 넘어 자신과 타자와 우주에 노크하며 그에 적확한 반응을 얻어내는 힘이 그의 에세이 속에는 오롯하게 담겨있는 것이다.

 

   나는 그와 여러번 사석에서 만났다. 그때마다 일관되게 나에게 주문했던 그의 조언은 당시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내 사랑의 원형'을 뚜렷하게 각인하는 데 일조했다. 그 각인의 반복적 반추는 곧 내 첫사랑을 부활시켰고 그 사랑은 결국 결혼이라는 의식을 통해 '가족'으로 완성되었다.

 

   작가가 가진 힘은 실로 강력하다. 텍스트의 힘은 시대를 뚫고 의식을 전환시킨다. 평론가 하스미 시게이코는 동시대 비평가의 임무를 "시대를 선도해가는 작가를 죽이는 것"으로 규정한다. 개소리와 같은 시게이코의 말을 인용하는 게 웃기지만 그의 말을 독자를 주어로 패러디하면 의외로 멋진 문장이 완성된다. "동시대 독자의 임무는 시대를 선도해가는 작가를 살리는 것이다". 그렇다. 결국 작품은 독자의 머리와 가슴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나면 내 딸은 세 살이 된다. 오소희의 처녀작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는 세 살배기 아들과 터키를 여행하며 기록한 여행수기다. 당시 결혼 전에 읽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벌벌 떨면서 몇 시간만에 읽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렇다면 그 책이 가진 본래성과 나의 시간적 현재성이 일치하는 며칠 후, 나는 그 책을 다시 읽어야만 하는 행복한 의무감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그렇다. 나는 작가 오소희를 사랑해도 너무 사랑했던 것이다.

 

   흐뭇한 마음으로 서점으로 향한다.

 

 

Written By David

http://gilsamo.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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