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떠남은 언제나 옳다 소희와 JB, 사람을 만나다 남미편 2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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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은 자서전에서 자신의 일생을 지배했던 '세 가지 열정'에 대해 말했다. '지식에 대한 탐구욕', '사랑에 대한 갈망', '인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그것이다. 러셀의 자전적 고백은 곧바로 내 책 읽기의 목적과 부합한다. 러셀의 인생이 다독多讀과 다작多作으로 점철된 책 속의 삶이었다는 점을 주지한다면 그와 나는 책을 통해 얻고자 하는 세 가지 목적에서 일치하게 된다. 즉 나는 책을 통해 지식을 얻고 사랑을 탐구하며 박애를 반추하는, 고독하지만 행복한 독자인 것이다.

   이러한 내 독서철학은 작가 오소희의 문필철학과 보기 좋게 일치한다. 러셀의 세 가지 열정에서 뒤의 두 가지는 오소희의 텍스트와 자연스럽게 양립한다. 오소희는 떠나야 할 때 비로소 떠날 수 있었고 그 가운데 항시 사랑을 말해왔다. 또한 인류를 향한 깊은 연민을 표출해왔다. 터키에서 남미로 이어지는 그의 비블리오그래피 속에는 '사랑-연민' 코드로 엮인 오소희표 휴머니즘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내가 그를 사랑할 수밖에 세 번째 이유다.

   <그러므로 떠남은 언제나 옳다>는 여행작가 오소희의 남미시리즈 두 번째 책이다. 1권 <안아라 내일은 없는 것처럼>에 연속된 텍스트로서 '콜롬비아-에콰도르-칠레-볼리비아'로 이어지는 여행후기를 담았다. 2권은 1권에서 다루지 않은 여러 나라를 관통한다. 각 나라의 특징과 그곳의 독특하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는 여전히 백미다. 저자의 글감을 포착하는 능력과 그것을 아름다운 언어로 풀어내는 문필력 또한 연속적이다. 무엇보다 장장 세 달에 걸친 지독한 여행의 말미가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갈무리되었다.

   남미의 각 나라가 갖는 개별성은 남미국가 전체가 갖는 보편성 만큼이나 흥미롭다. 저자는 크고 웅장한 것보다 소소하고 보잘 것 없는 데서 여행의 가치를 발견하는 습관이 있다. 그 습관은 남미여행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남미의 부국 브라질은 핵심만 짚고 아르헨티나는 이구아수 폭포 때문에 잠시 들릴 뿐이다. 저자가 가장 매료된 나라는 최빈국 볼리비아로 보인다. 라파스에서 살림을 차렸을 정도로 오래 체류했을 뿐만 아니라 돌고 돌아 다시 와서 결국 볼리비아에서 남미여행을 실질적으로 마무리하기 때문이다. 비록 국력은 왜소한 나라였지만 항시 활기와 온정이 넘쳤던 볼리비아만의 매력이 저자가 그곳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남미에서도 중빈의 존재는 작지 않다. 중빈은 첫 여행지 터키에서 세 살이었다. 그런데 어느덧 열 살이 됐다. 지난 7년간 아이가 얼마나 자랐는지 인식하기도 전에 나는 두 권의 여행기 곳곳을 차지하고 있는 중빈의 존재적 크기를 무의식적으로 가늠할 수 있었다. 남미에서 중빈은 '힐링'이었다. 중빈이 가져간 바이올린은 여행지 곳곳에서 사람을 감싸고 공간을 채우는 힐링의 아이콘이었다. 라파스에서는 거리의 악사로서, 오타발로에서는 음악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사막의 지프차 안에서는 지친 자들을 위로하는 격려자로서 중빈의 바이올린은 쉼없이 연주됐다. 그때마다 그곳의 사람들은 평온해졌고 그곳의 온도는 따뜻해졌다. 연주실력과는 무관하게 음악이 선사하는 전우주적 공감대가 중빈의 바이올린을 통해 곳곳으로 마음마음으로 오롯하게 전파된 것이다. 중빈의 연주는 장소와 상황에 따라 변질되거나 훼손될 수 없는, 예술이 본래적으로 지닌 궁극적인 순수성을 진솔하게 발현해냄으로써 사람과 공간을 빛나게 했다.

   지난한 여행의 끝은 사막이다. 원래 사막여행이 마지막 코스는 아니었다. 볼리비아 여행 당시 버스파업으로 인해 남부로 가는 길이 전면 차단된 것이다. 저자는 라파스에서 파업 소식을 듣고 볼리비아의 아타카마 사막과 남부의 소금사막 우유니를 여행코스의 마지막으로 변경한다. 돌고 돌아 볼리비아로 다시 가는 비효율적인 코스였지만 소금사막 우유니를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는 분명한 우연이었다. 하지만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멋진 결말로 이어졌다. 경로를 수정하면서까지 꼭 가야만 했던 볼리비아의 기묘한 사막은 저자의 '긴 이완'을 완벽하게 갈무리한 아름다운 '필연'으로 치환되었기 때문이다.

   사막은 객관이 최대를 넘어 과잉으로 피드백되는 공간이다. 모든 외연이 허물을 벗고 자기 자신을 가장 객관적으로 응시할 수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구조와 계급이 파괴되고 형용사와 부사가 삭제된다. 오직 명사만 남는다. 지구라는 작은 행성을 가꾸고 책임지는 평등한 존재로서의 '인간' 말이다. 그 보통명사만이 아무런 수식 없이 담백하게 놓여질 뿐이다. 그렇기에 사막은 고독하다. 인간의 동일성과 평등성을 묵묵히 받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막이 선사한 실존적 고독을 깊이 음미하면서 기나긴 여행의 대미를 아름답게 장식한다.

   책을 덮고 오랫동안 상념에 빠졌다. 인간에 대해 새삼 궁구했다. 항시 개인주의를 경도했던 내게 오소희의 일갈은 '내'가 아닌 '우리'를 들여다보게 했다. 그는 항시 인간을 탐구했고 조명했다. 공간은 비본질이었다. 오직 본질은 인간뿐이었다. 그가 극도의 집중력으로 인간을 관찰할 때면 여행지는 어느덧 배경으로 멀리 물러나 그 목적가치를 철저히 휘발시켰다. 그의 여행패턴은 언제나 사람이 시종始終을 지배하게 했다. 이러한 오소희식 인간학人間學은 러셀의 세 번째 열정에 그대로 침잠한다. '인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야말로 작가 오소희가 세계여행에서 그토록 갈급해왔던 유별난 사랑의 원류源流였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인간이다. 우리는 이 작은 행성에 공존하고 같은 공기를 마시며 똑같이 2세들의 미래를 소중해하는 기본적 공통점으로 묶여 있는 동일종족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나'를 뛰어넘는 '우리'의 평화를 지향할 의무가 부여된다. 그것은 진실된 평화이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생명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평화, 단지 우리 시대만이 아닌 영원한 평화인 것이다. 작가 오소희의 에세이는 바로 그 선상에까지 닿아 있다.

   오소희가 옳았다. 그러므로, 떠남은, 언제나 옳다.

 

 

 

 

Written By David

http://blog.naver.com/gilsa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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