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림길 - 누구나 생애 한 번은 그 길에 선다
윌리엄 폴 영 지음, 이진 옮김 / 세계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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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소설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삼위일체三位一體의 하나님, 즉 기독교의 교리가 밑바탕된 분명한 기독소설입니다. 동시에 비기독교인이 읽어도 무방할 정도의 공간성을 확보한 판타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설이 주는 근본적인(종교적인) 메시지가 선명하기 때문에 기독교적 관점과 교리적 입장에서 서평을 쓸 수밖에 없었음을 밝혀둡니다.


   홉스는 말했다. 인생은 짧고 가난하고 추악하고 고단하다는 것을. 인간이 살아있는 목적은 분명 행복하기 위함일텐데 그러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이 절대다수인 것 같다. 행복은 만인의 목적이다.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그러나 원하는 만큼 얻지 못한다. 이는 대부분의 인간이 행복을 추동하는 근원적인 에너지가 어디서 발현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이 인간을 불행하게 한다.

   신神에게 행복이라는 용어는 통용되지 않는다. 신은 스스로 존재한다. 인간의 지성과 과학으로는 신의 실체를 가늠할 수 없다. 신은 신만의 세계가 있다.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물론 두 존재 사이의 교차점은 있다. 그러나 그 지점은 매우 작고 부분적이며 일시적이다. 인간은 신이 보여주는 만큼만 볼 수 있고 허락하는 만큼만 느낄 수 있는 지극히 미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행복의 획득은 신의 차원에서 이뤄질 수 있다는 기대를 가능케 한다. 신이 세상을 창조하고 섭리해가는 초월자라는 점이 믿어지면 행복을 이루는 궁극의 요소들이 신성에서 발현돼 인간에게 전도된다는 초고차원적 진리에 다가설 수 있게 된다. 인간의 행복은 언제나 이 기준에서 왔다 갔다 해왔다.

   윌리엄 폴 영의 신작소설 『갈림길』은 신비한 기적의 이야기를 통해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탐구한다. 이 소설은 전편 『오두막』과 마찬가지로 큰 고난을 당한 주인공이 특별한 계기를 통해 삶을 되돌아보면서, 상처와 오해로 인해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스스로 쌓아놓은 벽을 허물고 관계를 회복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인공 앤서니 스펜서는 외로운 인물이다. '토니'라 불리는 스펜서는 부유하고 오만하기 그지없는 이기적인 삶을 영위한다. 그는 자신밖에 모르고 자신이 전부인 세계를 살아간다. 그러던 중, 갑자기 길에서 넘어져 뇌사상태에 빠진다.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자신의 내면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곳은 아무런 지도나 안내판도 없는 황폐화된 곳이다. 아일랜드인 남자 잭과 농장에 살고 있는 남성 '예수', '오두막'에 살고 있는 인디언 할머니 등을 만나면서 토니는 내면을 회복시키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신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토니는 그 여정을 통해 신의 숨결에 깊이 다가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고독과 상처를 치유받는다.

   작가는 전세계적인 사랑을 받은 전편 『오두막』과 마찬가지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면에 내세운다. 주인공은 삶에서 받은 고난과 상처들을 온전한 삼위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치유한다. 작가는 기독교라는 하나의 종교적 카테고리에 함몰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전적으로 주목한다. 분명한 신앙적 메시지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와 무관하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판타지적 요소가 적확하게 가미됐다. 이 소설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다.

   작가는 끊임없이 '성부聖父·성자聖子·성령聖'이라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三位一體的 속성을 주목해왔다. 하나님의 본성은 '관계'에 있는 것이며 이는 신성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는 기독교적 신관神의 전제에서 소설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삼위일체관은 세련되고 현대적이며 파격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초대교회 때 아타나시우스가 확립했던 기독교의 정통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되, 삼위로 존재하며, 세 위격은 하나로 통일된다, 는 기독교 교리에 완벽하게 일치되어 있다.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에 대한 지독한 강조는 기독교의 핵심교리와 근본정신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근거가 되며, 그의 소설이 가진 가장 주요한 특징이 된다.

   삼위일체는 '관계'이다. 동시에 '희생'이다. 그리고 결국, '사랑'이다. 모든 것은 여기서 출발한다. 만약 신이 삼위일체로 존재하지 않았다면, 신은 인간이 되지 않았을 것이며, 그로써 신과 인간은 관계적으로 차원이 이동되는 일체적인 찬탄을 이뤄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신의 본성은 더욱 구체화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고, 인간 삶의 세세한 부분까지 관여하며, 인간의 슬픔과 어둠 속을 파고들어 선함과 상냥함과 진실함을 키우며 고취시킨다. 이는 바로 하나님의 삼위일체성 속에 내재된 인간을 향한 절대적 사랑의 디테일인 것이다.

   서두에 언급한 '인간의 행복'은 바로 이 디테일을 알고 느끼며 체감하는 여정 위에 놓여 있다. 소설 속 토니의 변화 과정이 그랬다. 그의 변화는 '관계' 안에서 발생했다. 하나님과 자기자신 사이의 관계, 동시에 나와 또 다른 인간, 즉 타자 사이의 관계를 통해 아픈 상처를 치유하고 본질적인 행복을 맛보게 된 것이다. 또한 토니가 선택한 종국적인 결정, 즉 '달리다굼(Talitha cumi, "소녀여 일어나라")'의 기적은 자기자신은 물론 인간이라는 가치와 소중함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결국 신성의 발현이 작동시킨 신비스러운 '관계맺기'였다.

   소설 『갈림길』의 메시지는 명징하다. 우리 자신이 회복되면 달리다굼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로하고 안내하며 실행하는 이는 바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헤가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키는지를 신비로운 판타지로 그려내면서, 동시에 독자에게 어떤 길로 걸어가야 할 지를 질문하고 있다. '갈림길'은 우리의 상처투성이 내면을 정화하고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선택의 여로인 것이다.

   어느 누구나 갈림길을 만난다. 소설의 제목 '갈림길'은 인간의 선택을 질문하는 작가의 상징적 메시지다. 삶은 끊임없이 선택을 요구한다. 인생은 결국 선택의 역사다. 나 자신을 깨닫고, 신의 사랑에 이르며, 행복에 다다르는 길은 신의 섭리 안에서 인간의 의지가 작동된 매커니즘의 아웃풋이다. 즉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행과정 위에서 인간의 상대적인 선택이 만들어내는 초우주적 시공간의 화학현상인 것이다. 이 비밀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만 신적인 평온이 부여된다. 갈림길은, 바로 '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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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지방출장을 다녀왔다. 2박 3일의 짧지 않은 일정이었다. 둘째 날에 숙박으로 고생을 했는데 평소와 달리 방이 좀처럼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주차장에 주차된 차도 많지 않았고 야심한 시각도 아니어서 의아한 면이 있었다. 매달 정기적으로 지방출장을 가져왔지만 저녁 8시 이전에 방이 없어 모텔을 잡지 못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모텔 주인은 솔직히 고백했다. 화이트데이 대목이라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날이 날인 만큼 젊은 연인들의 대실을 꽉 차서 받아야 하기 때문에 숙박은 10시 이후에나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그랬다. 화이트데이였다. 모텔촌 인근에 대학교가 있다는 것도 함께 떠올랐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새삼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이 시대 젊은이들의 성관념이 얼마나 쿨하고 개방적인지를 말이다.

   젊은이들의 개방된 성의식을 뭐라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고결한 단어가 싸구려처럼 남발되는 세태가 짜증나서 못견디겠다. 사실 작금의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낙태와 성병, 미혼모와 해외입양은 거의 대부분 책임지지 못하는 사랑, 다시 말해 사랑이라고 할 수 없는 무책임한 성행위의 발동에서 비롯됐다. 그들은 모른다. 그리고 관심조차 없다. 사랑의 가장 오묘한 특질이 절제와 책임이라는 것을.

   전세계적으로 범람하고 있는 성도덕의 붕괴와 가정의 파괴는 철저히 현대사회의 산물이다. 마르크스, 아인슈타인, 프로이트에 의해 발현된 현대적 사고의 틀은 경험적인 지각을 통한 인간의 인식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더욱이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함께 어우러져 개인적인 책임감과 19세기 문명의 중심이었던 객관적인 도덕규범에 대한 의무감의 토대를 붕괴시켰다. 우주에서는 모든 가치 척도가 상대적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이론 때문에 사람들은 당혹감과 환희를 동시에 느꼈고 쉽게 도덕적 무정부주의에 빠졌다. 도덕적 상대주의는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굴곡되고 변형되어 서구사회를 더욱 들끓게 했다. 이는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데,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사조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자본주의를 일군 이 나라의 젊은이들에게까지 급속도로 전파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성도덕의 붕괴를 일부 지식인들이 부추겨왔다는 사실이다. 유럽의 많은 좌파 철학자들이 '성의 해방'을 이유로 난잡한 성 철학을 가르쳤고 실제의 삶으로 몸소 보여줬다. 하버드 대학에서는 매년 100권의 청소년 추천도서를 선정하여 발표한다. 사회과학 교수들이 엄정하게 선정한 것인데
세계 최고의 명문대학이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책 선정의 자료로 삼는 것같다. 그러나 문화 탓인지, 기호 탓인지, 수준(?) 탓인지, 나는 그들네의 책 추천에 공감하기 힘들 때가 많다. 특히 몇 년 전에 발표된 추천리스트를 보며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하버드 대학 교수들의 자질을 의심할 정도로 실망적이었다.

   장 폴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100권의 리스트에 포함되었다는 게 어이없었지만 그보다 더욱 놀란 것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이 버젓하게 추천리스트에 올라있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쓰레기'로 보는 책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경종'을 울린 책이라는 평가는 우습다. 순수 페미니즘의 정신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책이 가진 폭넓은 위험성에 있다. 이 책은 청소년의 성의식을 왜곡된 방향으로 견인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뿜어내고 있다. 소설가 프랑수아 모리악의 말처럼 "천박함의 한계에 이른 구역질 나는 책"이 바로 <제2의 성>인 것이다. 무엇보다 사랑에 대한 저자만의 꼴불견식 해석은 부아가 치밀 정도로 짜증이 난다.

   <제2의 성>에서 저자는 사랑을 '필로스(Philos)'와 '에로스(Eros)'로 분리한다. 지적인(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을 독립적이고 의도적으로 떼어놓는 저자의 논지는 사랑의 본질적 해석에 한참 벗어나 있는 무지몽매無知蒙昧의 극치이자 찬탄스런 사랑의 원형에 대한 모독이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남편(혹은 아내)에게 정신적인 사랑만 지켜주면 되고 몸은 아무 곳에나 굴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연인과 부부 사이에 섹스는 1차원적 놀이에 불과하다. 서로에게 전적인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사랑의 구속성을 타파할 수 있게 되고 이로써 보다 높은 차원의 사랑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소리가 따로 없지만 사실 놀랄 일은 아니다. 저자 드 보부아르의 삶 자체가 그런 쓰레기 같은 삶을 전도자적으로 실천했기 때문이다.

   제자와 동성애적 관계를 맺고, 사르트르와 멀티관계로 계약 결혼했으며, 전세계 수많은 남자들과 잠자리를 하면서 언론과 대중에게 자랑하듯이 흔적을 남겨왔던 드 보부아르에게 사랑은 그렇고 그런 것이었을게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계약결혼이라는 것도 그 실상을 알게 되면 추하기 그지없는 이벤트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많은 전기와 다양한 책들을 종합해보건대 둘의 계약결혼은 그들이 말했던 만큼 쿨하지 않았고 깔끔하지 않았으며 진실되지 않았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은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보장하고 영혼의 깨끗함을 공유한다는 취지로 전세계적인 이슈가 됐다. 이들은 1929년 사르트르의 제안으로 영혼의 정절과 관계의 투명성을 지키며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허용한다는 조건 하에 계약 결혼을 하게 된다. 이후 자유로운 연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각자 많은 다른 애인을 사귀었다. 처음에는 2년 기간을 약정한 계약이었지만 2년 뒤에 30세까지로 연장하고 이후로는 종신계약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우리는 한사람입니다. 너와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는 두 사람의 교감 섞인 표현은 그들의 철학이 그랬던 것처럼 '말(言語) 수식'의 하나였다. 사르트르는 어디를 가나 시끄럽게 떠들었던 철학계의 수다쟁이였다. 세상을 떠난 후 그가 내세운 주장 중 어느 것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의 삶과 철학이 철저히 말에 포장된 겉치레의 것임을 일깨운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에게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듯하다.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에게 성적 관심에는 '필수적 사랑'과 '우발적 사랑'의 두 종류가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사르트르는 오직 전자의 개념만을 추출했다. 후자는 전자를 강조하기 위한 개념상의 상대적 제시어에 불과했다. 보부아르를 소유하면서 동시에 다른 여자와 자유롭게 섹스를 즐길 수 있는 정당성의 확보가 필요했다. 즉 보부아르를 필수적 사랑의 중심인물로 계약해놓고 주변의 수많은 여자들을 탐닉하는 근거로 활용했던 것이다. 이는 역으로 사르트르에 대한 보부아르의 입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투명성의 원칙에 따라 서로의 섹스 파트너를 공개하고 피드백하는 그들의 쿨한 성관계도 큰 이슈가 되었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보면 기가 찰 정도로 거짓되고 추잡스럽다.

   여기서 그들의 난잡한 에피소드와 진실되지 않은 계약관계를 구구절절하게 기술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젊은이들의 무너진 성도덕을 한탄하며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를 까는 이유는 그들이 당시 서구사회에 끼쳤던 거대한 영향력에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럽의 젊은이들은 심각한 고독과 방향성의 결여에 직면했다. 그때 사르트르는 자유를 강조하며 철학적 행동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사르트르의 새롭고 실존적인 자유는 현실에 환멸을 느낀 세대에게는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 세대는 외롭고 금욕적이고 고결했으며, 약간은 공격적이었고, 반엘리트주의였으며 대중적이었다. 그렇기에 누구나, 그중에서도 특히 젊은이는 실존주의자가 될 수 있었다. 그 시대의 많은 청춘이 사르트르의 포로가 됐다. 그의 보잘 것 없는 철학과 쓰레기 같은 성관념은 전염병처럼 빠르고 강력하게 당시의 유럽 젊은이들을 파괴시켜나갔던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일갈한다. 우리의 몸은 고결한 것이다. 성과 사랑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두 가치는 공히 지독한 희생과 철저한 책임의 카테고리 내에서 작동되고 발현되어야 한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절제하는 것이고 지켜주는 것이며 기다리는 것이다. 인간의 성행위가 동물과 다른 점은 자명하다. 인간의 그것은 영혼의 행위이다. 종족 번성의 차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차원에 놓여 있다. 고밀한 영혼의 궤적을 담아낸 절대 고차원의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두 인간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엄연한 신적神的 근거이자 영혼과 육체가 동일선상에서 서로를 대등하게 피드백할 수 있는 유일한 에너지이다. 그것은 서로의 최저점이 만나서 쓰다듬는 최상급의 호흡이자 인간의 실재적 한계를 어루만지고 겸손화시키는 결정적인 자기발견이다. 그것은 근본 사랑의 본체를 인간 차원에서 가장 적확하게 체감화하는 오묘한 약동躍動의 결정체이자 가시화되지 않은 우주의 시공간을 잠시나마 굴곡화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물리력이다. 그것은 나를 내어주고 상대를 중심으로 불러들이는 신적인 사랑, 즉 아가페(agape)의 한 색깔이자 원료이다. 결국, 그것은, 신이 인간에게 선사한 큰 선물인 동시에 인간이 신의 숨결을 체화할 수 있는 용서되어진 신성모독인 것이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잘못된 성의식과 그에 따른 무분별한 성행위로 고결한 청춘을 짓밟는가. 섹스를 목적으로 사랑을 수단화하지 말라. 그것은 비겁한 짓이다. 섹스와 사랑의 시공간상 전복은 무조건적으로 거짓이다. 사랑 없는 섹스는 거짓이고 책임 없는 사랑은 교만이다. 그 '거짓'과 '교만'은 분명한 창조적 질서의 일탈이다.

   물론 젊었을 때는 누구나 실수를 한다. 청춘시절의 도전과 패기, 혈기와 열정은 그것이 비록 잘못된 것일지라도 죄를 면할 수 있는 특권에 속해 있다. 그것은 젊음만의 특질이며 특권이다. 청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허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으레 즐기지 말며 자랑하지 말라. 그리고 되늦게 후회하지 말라. 청춘은 실수가 포용되는 시기인 동시에 완전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의 숭고하고 순전한 통로라는 것을 잊지 말라. 단언컨대, 훗날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진정한 어른의 위치에 서게 되면, 젊은 시절의 그러한 특권과 특질이 그리 선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반드시 깨닫게 될 것이다.

   부디 이 땅의 젊은이들이 고귀하고 건강한 성의식을 갖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동시에 순결한 사랑관을 갖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잊지 말라. 세계의 모든 질서와 권위는 바로 거기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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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 힐링에서 스탠딩으로!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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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시민을 좋아한다. 아마 진보좌파에서 내가 호감을 표하는 몇 안 되는 지식인(정치인) 중 한 명일 것이다.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그중 첫째는 바로 그의 '합리성'이다.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언행와 결단은 그 표현방식이 경박했을지는 몰라도 내용에 있어서는 대부분 합리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지나친 이성주의理性主義에 함몰되지는 않았다. 논리적 궤도 안에서 자기만의 개성으로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정치인으로서는 분명한 매력이다.

   그를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대중적 글쓰기'에 있다
. 유시민은 어렵지 않게 쓴다. <거꾸로 세계사>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출간된 그의 여덟 권의 저작들은 한결같이 쉽다.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수준과 범위를 담고 있다. 우리사회에서 역사와 철학을 위시한 인문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끊임없이 외면되어 왔다. 인문학의 위기라고까지 한다. 이런 배경에서 저자의 쉽고 간결한 글쓰기는 현실정치에 관심있는 평범한 대중을 인문학적 책읽기로 유도하는데 나름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요컨대 '쉽게 쓰는 것'은 글쟁이로서의 유시민의 분명한 강점이다.

   정치인 유시민이 자유인으로 돌아왔다. 정치인 딱지를 떼자마자 신간이 출간됐다. 그 시기가 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으로 보아 미리 적기適期를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평소 자유주의자(自由主義者, liberalist)를 자처해온 그였기에 정치를 그만두고 자유인으로 돌아온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유시민의 신간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자유인으로 돌아온 한 지식소매상의 깊은 고민와 사유의 조각을 담아낸 인문학 책이다.

   제목이 무겁다. 저자가 제시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먹고 사는 문제, 즉 개인과 국가의 경제적 부분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자못 진지한 테마들을 관통하며 삶의 유한성과 죽음의 엄연성을 철학적인 사유로 탐색한다. 이전 저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고뇌와 숙연한 태도는 다시 자유인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저자의 복잡다단한 내면을 잘 반영한다.

   책의 구성은 정돈적이며 체계적이다. 저자는 1장에서 먼저 '삶'을 말한다. 그 뒤 2장에서 '죽음'을 해석한다. 그러면서 행복한 삶을 위한 네 가지 키워드를 제시한다. '일'과 '사랑'과 '놀이'와 '연대連帶'가 그것들인데, 이는 임상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이 수많은 관찰과 상담사례에서 얻은 '위대한 세 영역'에 기반한 것이다. 여기에 저자는 '연대'를 추가시켜 셀리그만의 견해를 보완하고 있다. 각 키워드별로 그 긴요성을 설명하는 저자의 논리는 공감적이다. 3장에서는 이에 대한 저자의 견해가 구체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마지막 장에서는 '삶을 망치는 헛된 생각들'을 다루고 있는데 저자가 서술하는 많은 일화와 다양한 논증은 책 읽기의 속도를 배가시킨다.

   이 책이 저자의 기존 저작들과 구별되는 지점은 '무거움'이다. 저자는 삶을 다룬 1장보다 죽음을 말한 2장에 훨씬 더 많은 분량을 할당했다. 또한 죽음을 말할 때는 다양한 인문학적 콘텐츠들을 여과없이 불러들인다. 카뮈의 부조리不條理와 실존주의實存主義, 마르크스주의와 유물론唯物論, 프로이트 심리학과 칸트의 정언명령定言命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열거된 풍성한 인문학적 사유의 향연은 인간 죽음의 본질을 깊이 천착하고자 하는 저자의 진지한 접근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군데군데에서 발견되는 저자의 적극적인 정치적 견해도 눈에 띈다. 정치인 신분을 떠났기에 정치적 발언을 하는 저자의 마음은 한결 편해보인다. 이명박 정부 5년, 박근혜 대통령 당선, 전직 대통령 평가, 박원순 시장의 역량, 안철수를 바라보는 시선, 통합진보당 사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 등 저자의 정치적 견해는 책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연속된 선거 패배와 정치 비전의 실패로 마무리된 그의 정치인생을 감안한다면 다시 자유인으로 돌아와 마음 편히 내뱉는 정치적 발언들은 나름의 의미와 재미를 선사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 책은 나와 견해를 달리 하는 부분이 꽤 존재한다. 그중 보수주의(conservatism , 保守主義)와 진보주의(progressivism , 進步主義)를 정의하는 저자의 논리는 내 견해와 많은 부분에서 상치된다. 저자는 보수와 진보를 '생물학적 접근법'으로 정의한다. 보수주의는 인간 여러 본성 가운데 '진화적으로 익숙하고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을 지향하는 이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 때문에 보수와 보수정당을 싫어한다고 얘기한다. 즉 진화에 대한 순응과 생물학적 흐름에 대한 순종을 지향해나가는 보수주의가 싫다는 것이다. 이념에 대한 저자 개인의 호오好惡를 뭐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저자의 개념화는 극히 좁고 편향적인 시각에 함몰되어 있기 때문에 동의하기 힘들다.

   저자는 편견에 함몰된 전제적前提的인 개념화를 하고 있다. 그것은 생물학적 접근법이 보수보다 진보를 진화적인 관점에서 보다 우월한 선상에 올려놓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진보주의를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타인의 복지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의 많은 부분을 내놓는 자발성"으로 정의하면서 보수주의는 이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상대적으로 보수를 차갑고 냉정한 것으로 인식해버리는 전제가 깔려 있다. 더욱이 '자유'와 '정의'를 진화적으로 새롭고 생물학적으로 덜 자연스러운 행동의 영역으로 규정하며 진보의 카테고리 속으로 은밀하게 편입시키는 저자의 인식은 몹시 불편하다. 자유와 정의는 명징한 보수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을 지나면서 보수와 진보의 개념은 끊임없이 '진화'되어 왔다. 보수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현대적 보수주의는 자유주의(liberalism , 自由主義)를 자연스럽게 포함한다. 두 이념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인간 공동체의 전 영역에서 포괄적이고 지배적으로 침투되어 있다. 또한 나라마다, 세대마다, 민족마다 이를 정의하는 기준은 상대적이고 유동적이다. 이러한 복잡다단한 매커니즘을 단지 '생물학적' 차원에서 풀이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단면적이고 비좁은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일부분에서는 성립될 수 있겠지만 보혁保革의 보편적 요소들을 매끄럽게 포함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저자의 해석은 설득력을 잃는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유시민을 진보주의자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가 현실정치에서 보여준 언행과 정책적 결단은 진보와 대립되는 것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 당시 '이라크 파병'과 '한미FTA 법안'에 찬성표를 행사한 것은 이유야 어떻든 진보주의자로서는 부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또한 대학강연에서 끊임없이 공동체에 대한 희생과 국가에 대한 책임을 요구해왔다. 그간 저작들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허구를 지적하고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정의를 강조했다. 그의 이러한 발언과 행동은 정통 보수주의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가 분명한 진보주의자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킨다. 실존주의와 유물사관에 대한 견해, 보편적 복지와 국가 부문의 증대를 바라보는 시각, 보수와 보수정당을 규정하는 인식, 휴머니즘과 진보적 연대의식의 강조 등은 그가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진보주의자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들이다.

   물론 이러한 저자의 이념적 주관주의와 논증의 굴곡된 논리가 이 책이 가진 총체적인 가치를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삶과 죽음을 철학적 논증의 방식으로 관통하여 독자에게 녹록지 않은 질문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2장은 독립적으로 죽음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카테고리의 독립성과는 별도로 저자는 책 내용 전반에 걸쳐서 일관되게 죽음을 탐구한다. 일정 기간의 안정된 직업 없이 본업의 변화를 끊임없이 꾀해오면서 그는 정치의 영역에까지 발을 디뎠다. 어쩌면 현실의 정치는 그에게 인간 삶의 비루함을 가장 잔인하게 보여준 공간이었을지 모른다. 이를 카뮈 식으로 말하자면 '부조리不條理'다. 저자가 실제의 삶과 일상 속에서 기묘한 괴리나 위화감과 함께 직접 느껴본 인생의 배리背理인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저자의 나이가 55세를 넘어선, 즉 인생의 반환점을 오래전에 돌아섰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는 남은 인생의 아름다운 비전을 긍정하고자 하는 저자 자신의 열정적인 고백이며 도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삶과 죽음을 모두 '자연의 한 조각'으로 규정했던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얼굴이 왠지 모르게 저자의 문장과 오버랩된다.

   서평을 정리하자. 정치적으로 입장이 다르고 많은 부분에서 견해를 달리하지만 나는 이 책을 젊은이들에게 추천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인문학적 콘텐츠의 배치와 유시민 특유의 쉬운 서술이 청춘이라면 꼭 한 번 사유해볼 만한 삶과 죽음과 행복에 대한 경험적이고 철학적인 논증을 매우 힘있게 추동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신념과 학문적 견해가 다르다 할지라도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는 한 권의 진지한 인문학 책으로서 충분히 읽어볼 만한 가치를 갖고 있다. 젊은이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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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두 얼굴 - 위대한 명성 뒤에 가려진 지식인의 이중성
폴 존슨 지음, 윤철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폴 존슨의 <지식인의 두 얼굴>은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대표적인 우파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이 선정한 지식인들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저자의 비판 수준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는 근거없는 험담이 아닌 사실을 갖춘 공격이라는 데 있다. 저자는 사실적 논거와 탄탄한 논리를 특유의 힘있고 맛있는 문체로 잘 버무려냈다.

   저자가 공격하는 지식인의 범위는 폭넓다. 철학자와 사상가, 작가와 평론가에 이르기까지 꽤 다양하다. 저자의 칼날이 닿는 대상은 가장 유명한 교육론 <에밀>의 저자이자 '사회계약론'의 창시자 장 자크 루소를 시작으로 다양한 좌파 철학자와 작가들을 관통하면서 '언어학 혁신의 아버지' 노엄 촘스키까지 도달한다. 거론된 지식인들은 그들이 제기했던 사상과 이론, 저서와 삶의 태도 등 내·외면적 존재성을 저자에 의해 처참하게 난자 당한다.

   내가 이 책에 주목한 이유는 저자의 논증이 내 입장과 대부분 일치한다는 데 있다. 특히 카를 마르크스, 버트런드 러셀, 장 폴 사르트르에 대한 저자의 비판논리는 내 견해와 완벽하게 부합한다. 개인적으로 변형되고 변질된 '좌파적 사고'를 싫어했고 멀리해왔다. 본래 좌파적 사고의 뿌리는 인간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휴머니즘이다. 19세기 원류 좌파들은 휴머니스트가 많았다. 그러나 20세기에 쉬지 않고 분출하던 좌파 운동은 폭력적인 집단 광기에 불과했다. 그것은 나치즘과 똑같이 통제되지 않은 야수성을 드러내면서도 또 다른 전체주의全體主義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된 지식인과 독재자들에 의해 20세기는 철저히 유린당했다.

   고백하자면, 일례로 사르트르를 보자. 그에 대한 나의 강한 분노는 오래된 경험에서 비롯됐다. 이십 대 초, 종교적(기독교적) 교리에 구속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나에게 실존주의實存主義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철학이었다. '신神의 예정'이라는 기독교의 핵심교리는 사르트르의 행위의 철학이 안내한 매혹적인 '자유의지(free will)'에 의해 멀리 떠나갔다. 시간이 지나 사르트르식 실존철학은 허울뿐인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까지 나는 많은 것을 잃었고 적지 않은 대가를 지불했다. 지금 생각하면 쓰레기와 같은 <존재와 무>를 여러 해설서와 함께 오기로 읽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
참으로 안타깝다. 불과 십수 년 만에 발생한 내 변화의 본질은 '진실의 깨달음'에 있다. '마르크스'와 '휴머니즘'을 절대적인 선善이자 정의正義라 여겼던 내 청춘시절의 조악한 지성과 경박한 정신력이 사르트르를 우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지금의 시점에서, 무엇보다 인문학적 사고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나에게 사르트르는 행동없는 양심의 전형이자 사이비 지식인의 대표가 됐다. 그 사람의 책을 읽은 시간이 아까워 한탄하고, 그로 인해 야기된 내 신앙의 상흔에 치를 떨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사르트르를 위시하여 20세기의 유럽 젊은이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좌파사상가들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지면이 필요하다. 이들에 대한 내 견해를 피력하는 일은 언젠가는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 나름의 정리를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그 열정이 소원해질 즈음 <지식인의 두 얼굴>은 적기에 내게 찾아와 나의 의지를 부추겼다. 이들 지식인이 가진 추악함의 본질은 좌·우파의 이념 대립이 아니라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궁극의 정직함 속에 있다. 자신의 이론과 사상을 이율배반하는 양면적 태도, 지식인으로서 양심을 저버린 거짓과 부도덕성, 인류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어두운 역사의 인과관계, 내·외면을 지독한 방식으로 호도시킨 기만성 등은 이들의 공통된 오류이자 암연暗然한 한계이다. 바로 이점을 증명해내는 저자의 식견과 논리 전개에 나는 깊은 공감을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 폴 존슨은 지식인들이 가진 오류와 허구를 검증된 팩트와 탄탄한 논리로 꾸짖는다. 저자가 그들을 비판하는 방식은 대부분 비슷한 경향을 띤다. 우선 작품과 사상의 오류를 지적한다. 그 다음 삶과 태도를 꾸짖는 방식이다. 말미에는 감춰진 사생활을 신랄하게 파헤치기도 한다. 저자의 이러한 비판방식은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삶과 사상의 일치로 대변되는 도덕성의 안정감'이라는 점을 주지했을 때 충분한 설득력을 띠며 어렵지 않게 수용된다.

   그러나 저자의 모든 비판에 고개가 주억거리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톨스토이와 헤밍웨이에 대한 비판은 수긍하기 힘든 면이 있다. 그들의 작품이 가진 문학적 성취와 특별한 삶이 만들어낸 예술의 본래적 가치를 감안한다면 다소 지나친 부분이 있다. 작가를 지식인의 범주에 넣어야 할 지 의문이지만, 사상가(철학자)와 동일한 잣대로 작가의 내·외면적 존재성을 재단하는 건 동의하기 힘든 기준이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작가에게 '진실'은 지나친 요구다. 허구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추출해내는 작가에게 진실은 비본질의 영역이다. 작가적 생명력의 원천은 허구의 세계를 발군의 창조력으로 그려내 독자로 하여금 의미와 감동을 전달하는 데 있다. 바로 이 점이
철학자의 정직성과 구별되는 지점이다.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Feuerbach, 1804.7.28 ~ 1872.9.13)의 말대로 "철학에 있어서는 신성한 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이 책의 후기를 짧은 리뷰로 갈음하는 것이 마뜩치 않았다. 보다 많은 글과 논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용단했다. 책에 수록된 지식인 중 내 나름의 견해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다섯 명을 추려서 리뷰를 세분화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이 디테일한 작업의 동기는 언젠가는 실천해야 할 정리의 한 방식이자, 이 책을 입체적으로 갈무리하는 방법의 한 형태 속에 놓여 있다.

   서설이 길었다. 카를 마르크스, 레프 톨스토이, 어니스트 헤밍웨이, 버트런드 러셀, 장 폴 사르트르. 이렇게 다섯 인물을 택했다. 지금까지 이들에 대해 견지해왔던 내 입장을 이 책의 리뷰를 다는 형식으로, 각기 독립적인 글로써, 나름의 주관으로 밀도있게 소화해보기로 했다. 이런 취지에서 이 글은 그 고된 작업을 예고하는 간략한 인트로에 불과하다.

 

 

 

① Intro : 본격 리뷰에 앞서
② 카를 마르크스 : 저주받은 혁명가
③ 레프 톨스토이 : 하느님의 큰형
④ 어니스트 헤밍웨이 : 위선과 허위의 바다
⑤ 버트런드 러셀 : 시시한 논쟁
⑥ 장 폴 사르트르 : 행동하지 않는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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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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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중편소설 <설국>은 읽는데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분량 자체가 짧을 뿐더러 극도의 매력적인 문체가 읽는 동안의 '일시정지'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어의 운율과 일본인의 혼을 모르고서는 오롯하게 받아들이기 힘든 소설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설국>의 번역자는 고통스럽다. 일본어 원문이 아닌 번역본으로는 본래의 가치를 절반 가까이 잃어버리는 태동적 한계를 지닌 소설인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설국>의 첫 문장은 매우 유려하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가니 설국雪國이었다.' 소설의 첫 문장으로는 가장 유명한 명문장으로 꼽힌다. <설국>은 국내에서 다양한 출판사로 번역됐다. 이 소설은 자못 독특한 신비함을 갖고 있는데, 첫 문장을 어떻게 번역했는지에 따라 소설 전체의 분위기는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즉 <설국>의 첫 문장은 소설 전체의 문체적 조망성을 규정하는 신비한 마력을 지닌 것이다.

   이러한 문체상의 독특함은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유가 됐다. 1968년 일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는 감각적이고 서정적인 문체가 아니었다면 결코 문학적인 명성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유명작은 의외로 짧은 소설들인데 <설국> 외에도 단편 <이즈의 무희>가 대표작이다. 두 소설 모두 비슷한 소재와 비슷한 문체를 가졌다. 플롯은 없고 이야기 전개도 단순하다. 인물 사이의 소소하고 일상적인 대화와 행동이 작가 특유의 세밀한 문체로 묘사되고 있을 뿐이다.

   <설국>의 내용은 간단하다. 부모가 물려준 재산으로 무위도식하는 주인공 시마무라가 나가타현의 온천 마을의 기녀妓女 고마코를 만나는 이야기다. 사건도 없고 갈등도 없다. 소설이라면 으레 갖추고 있을 만한 이렇다 할 이야기의 전개展開나 절정絶頂이 존재하지 않는다. 연애소설이 분명한데도 전혀 연애소설 같지 않다. 가와바타는 단 한번도 소설에서 사랑이 어떠니 이별이 어떠니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소설은 그저 지루할 정도로 사소한 변화들, 그리고 여행지에서 일어나는 그저그런 일상적 행위들을 묘사한다.

   나는 <설국>의 주제를 '아름다움'으로 갈무리했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니카타 현의 눈 덮인 묘사는 과히 압권이다. 작가는 발군의 감성적 묘사로 눈의 고장을 아름답게 그려냈다. 독자는 각 문장이 빚어내는 하얀 세계의 아름다운 풍경을
자기 머리속에서 재해석하여 가슴속으로 밀어넣게 된다. 이는 배경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행위를 표현하는 데에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시마무라의 시점인데, 그가 살피는 시선과 내면의 심리는 이야기를 추동하는 근력이 된다. 시마무라가 목도하며 관심을 갖는 두 여인(고마코, 요코)의 모습은 '생기'와 '절제'로 대변되는 여성성의 아름다움에 닿아 있다.

   가와바타가 그려낸 여성성의 아름다움은 중첩된 미美로서의 아름다움이다. 즉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인 것이다. 시마무라가 열차를 타고 가며 잠긴 상념과, 이야기 전개상으로 그 어떤 적절성도 가진다고 볼 수 없는 엔딩 장면, 혹은 기모노를 입은 여인의 들어오는 장면에서 풍기는 분위기 등은 문장을 읽어내는 자체만으로 미의식의 절정을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이다. 이미지적인 장면이 아니라, 그야말로 소설로서만 구사할 수 있는 그런 장면의 아름다움인 것이다.

   결국, <설국>은 여성에 대한 찬사다. 눈 덮힌 풍경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여성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는 순간을 두고 타오르는 여자의 마음을 매우 감각적으로 포착했다. 특히 고마코가 내뿜는 활력이야말로 여성성의 원형적原形的 정열情熱에 닿아 있는데 이는 작가의 절묘한 여성심리 묘사가 추동한다. 순간에 끊어오르는 여자의 열정이란 그런 것일까. 작가가 그려낸 여성 내면의 아름다운 형용은 '과감'이고 '생동'이며 '진실'이고 '절제'였다. 소설을 깊이 읽어 내려가다 보면
, <설국>은 결국 고마코의 스토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설국>의 본질적인 주인공은 시마무라가 아닌 고마코다. 물론 소설의 시점은 분명 시마무라의 시선에 있다. 그러나 소설 전체를 흔드는 생명력에서는 '모든 미美의 흡수'를 발현한 고마코에 보다 높은 밀도가 부여된다. 사실 두 남녀는 서양과 동양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아름다운 일본'을 주창한 가와바타의 작품세계를 집약한 인물구도가 된다. 시마무라가 서양적인 교양을 익힌 지식인이라면, 고마코는 산천초목, 삼라만상, 사계절의 미를 나타내는 일본의 자연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 겨울, 고마코를 다시 찾아온 시마무라의 마음은 한없이 얼어붙어 텅 빈 동굴과 같이 되었다. 바로 그때, 고마코의 애정이 시마무라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동굴을 메워가게 된다. 맨 처음 고마코는 시마무라의 눈에 비치는 환상이었지만, 이윽고 시마무라의 시선을 초월하여 일본의 자연 그 자체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가와바타의 이러한 미의식은 일본 정신의 정수를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일본의 아름다움 속에서 독자적인 문학의 세계를 창조해 근대 일본문학사상 부동의 지위를 구축했다. 그것이 동력이 되어 노벨상까지 도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가와바타의 노벨상 수상을 공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동아시아권에 노벨문학상을 주어야 하는 기류가 흐르는 와중에 그나마 제대로 영문으로 번역된 소설이 <설국>밖에 없었기 때문에 수상했다는 소문이 팽배했었다. 그러나 소문의 진위여부와는 별도로 <설국>은 인상적이고 훌륭하며 매력적인, 지극히 문학적인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가와바타와 노벨상을 두고 어쩔 수 없는 경쟁을 펼쳤던 미시마 유키오의 평은 이를 잘 압축한다. '여인의 단정한 의상을 연상케 하는 문체에 의해 묘사된 대낮의 신비세계는 가와바타씨의 절묘한 동화이며, 동화란 또한 가장 순수한 고백인 것이다.'

   애석하게도 미시마 유키오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공히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두 사제의 자살은 많은 풍문을 낳았다. 당시 일본문단은 노벨문학상이 두 사람의 일본작가를 죽였다고 떠들어댔는데, 한 사람은 받지 못해 죽었고 다른 한 사람은 받았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다. 미시마의 자살동기를 좌절된 노벨상의 꿈에서 찾거나 가와바타의 자살을 노벨상의 중압에 기인된 것으로 해석하는 상상력은 그럴 듯해 보인다. 하지만 흥미로운 소문과는 무관하게, <설국>은 노벨상에 값하는 문학세계를 충분히 구축한, 과히 아름다운 소설이다. 누가 뭐래도 그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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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페딘1T 2017-08-29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좋은 서평 감사합니다.

혹시... 어떤 번역본으로 읽으면 좋을런지 여쭤봐도 될까요?